The Count's Youngest Son Is a Player RAW novel - Chapter 228
제228화
“…….”
장벽과 도시 포르타가 손바닥만 한 크기로 보이는 까마득한 상공.
그곳에 그는 유유히 떠 있었다.
까만색 두건.
까만색 망토.
까만색 가죽 갑옷까지.
전신을 까만색으로 물들인 그의 모습은 일견 기사나 전사로 보였지만….
우우웅.
그의 손에서 진동하고 있는 검은색 지팡이는 분명 마법사의 그것이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라.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쩍쩍 갈라져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왕국 쪽에서 달려오는 만 단위 이상의 기마대와 그 뒤편에 행군하고 있는 수많은 병사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남자, 아니 대현자 블랙은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화이트. 이번에는 네가 틀린 것 같군. 아직은 우리 생각처럼 왕국이 타락하지 않은 모양이야.”
그러고는 왼손에 들고 있던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파란 보석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결국 이 녀석은 쓸 일이 없겠군.’
저 아래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이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을 한순간에 재로 만들어버릴 흉악한 병기가 방금 작동할 뻔했다는 사실을.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이 파란 보석은 일종의 스위치였다.
‘장벽과 콥스로드 일부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폭탄의 기폭장치란 말이지.’
처음 장벽을 세우는 그 순간부터 세 명의 대현자는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벽이 무너진다는 것.
그건 또다시 대전쟁이 시작된다는 효시나 다름없었으니.
제국과의 기나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대륙이 불타오르는 것을 몸소 경험한 그들.
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만약 막지 못한다면?
최소한 왕국들이 제국의 침입에 대비할 시간은 벌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리하여 장벽과 콥스로드 지하에 세 대현자의 안배가 마련되었으니.
만약 발동한다면 콥스로드 지하에 꿈틀거리는 사기(死氣)가 분출되어 적어도 3년간은 생명체가 도저히 진입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인공 금역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로 인해 장벽을 지키고 있던 수많은 병사와 뛰어난 초인들까지 희생되겠지만….
‘어차피 제국의 공격에 뚫릴 상황이라면, 아군을 희생양으로 삼더라도 결단을 내려야 했을 테지. 그로 인해 나중에 만인에게 지탄받는다 해도 말이야.’
어쨌든 그들이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장벽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울지도 몰랐던 고대 봉인의 문제도 전혀 의외의 인물 덕분에 해결이 될 듯했다.
“이번만큼은 네가 옳았군, 그레이.”
마법과 언론의 힘을 통해 제국을 견제하겠다는 화이트.
직접 전선에서 적을 분쇄하며 침공 의지를 꺾겠다던 그 자신, 블랙.
대륙의 뛰어난 인재들을 후원하고 양성하여 미래를 대비하자던 그레이.
그 누구도 틀리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그레이의 안배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꽈르르르릉!
지독한 마기와 악의로 가득 차 있던 마신전이 굉음과 함께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이미 활성화된 마신전의 내부에 진입해 백작급 이상의 마족을 잡아내다니!
블랙은 그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일으킨 이가 이제 겨우 열일곱의 소년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주 속이 다 시원하구나. 망할 마족 새끼들.”
아마 요새 위에서 전투 중이던 마족들은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그들의 본거지이자 근원이라 할 만한 마신전이 무너져 버렸으니.
이제 그들은 마기 공급을 받기는커녕, 자신들의 몸으로 암흑 게이트를 유지해야만 할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기운 이상, 자신이 참전할 이유는 없었다.
전략 병기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수록 더 무서운 법이었으니.
지원군들이 파도처럼 제국군 본진과 마수들을 쓸어버리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블랙이 장벽 상공을 떠나갔다.
‘라울 드 애쉬튼. 그 이름 내가 잘 기억해 놓으마.’
* * *
“감히 누구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냐!”
“커헉…!”
콰아앙!
요새 성벽 위 일부분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시커먼 인형 하나가 성벽에서 밀려나 바닥으로 추락했다.
바로 마족 퀘비에였다.
갑작스레 날아든 공격에 제대로 바람을 타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떨어져버린 것이다.
“어느 새끼가…!”
“나다!”
휘우웅, 콰아앙!!
퀘비에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기 무섭게 성벽 위에서 뛰어내린 사내가 금빛 대검을 내리쳤다.
그가 만들어낸 오러 블레이드는 너무나도 크고 사나웠다.
마치 곰이 발톱이라도 휘두른 것처럼 네 줄기의 거대한 고랑이 성벽 아래 대지를 헤집어 놓았다.
“제길….”
그리고 마족 퀘비에의 몸에도 네 줄기의 사선이 새겨져 마기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꿇어라!”
구오오오!
거친 사내의 음성과 동시에 커다란 금빛 오러 블레이드가 하늘을 덮었다.
직경 5m가 넘는 거대한 곰 발바닥 형상의 오러 블레이드가 퀘비에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렸고.
“크아아앗!”
발악하듯 힘을 모은 퀘비에의 양 팔에서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솟구쳐 올랐다.
쿠구구구구, 꽝!
그리고 곰 발바닥이 소용돌이를 잔인하게 짓뭉개 버렸다.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쾅! 쾅! 쾅!
어느새 허공에 하나 더 생겨난 금빛 곰 발바닥까지 합세해, 두 개의 발이 교대로 바닥을 두드려댔다.
푸스스.
가루가 되다시피 엉망진창 짓눌린 대지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넓게 흩어져 피어난 아지랑이가 이내 어느 방향을 향해 살랑살랑 날아가던 그때.
“지옥으로 꺼져라!”
챠쟈자작!
발톱으로 허공을 베어내듯 수십, 수백 갈래의 오러 블레이드가 번쩍이며 하늘 그 자체를 갈라버렸다.
– 끼아아악!
귀곡성과 함께 검은 아지랑이가 불타오르더니 이내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다음은 누구냐!”
애쉬튼 가문의 황금 곰.
마스터로 다시 태어난 가주 멜빈 드 애쉬튼 백작이 장벽 아래서 포효했다.
마신전이 무너진 후, 무한한 마기를 바탕으로 펼치던 마족들의 특성 기술들이 거의 봉인되었다.
마족들은 본래 힘의 반밖에 발휘하지 못했고,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멜빈 백작과 함께 장벽에 합류한 왕국 연합군의 초인들.
그리고 핸슬리 공을 비롯한 장벽의 초인급 기사들이 합공을 펼친 결과.
공포와 파괴의 상징이던 마족들이 제압되었다.
마신전의 막대한 마기와 마계 귀족들의 존재감으로 유지되던 암흑의 게이트 또한 장벽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뒤늦게 요새 성벽에 올랐던 제국 마스터들은.
“허, 고놈들 참 잽싸네.”
제이크가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지원군이 합류하자 당장 제국 마스터들을 찾아나섰지만, 이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과 상대하던 기사들의 말로는 품속에서 이상한 양피지를 꺼내 찢자, 이상한 마법진에 휩싸여 사라졌다고 했다.
“아마도 순간이동 계열 마법 스크롤이겠죠. 다만 이런 불안정한 대기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했을지는 의문입니다. 어쨌든 덕분에 아군의 피해도 줄었으니 그만 아쉬워하시죠.”
케인이 짐작가는 바를 설명했지만, 제이크가 살짝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기회가 될 때 한 놈이라도 머릿수를 줄여놓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자신은 있으시고요?”
“뭐라고? 시비 거냐?”
어차피 둘이서 초인 하나를 감당해내는 수준인데 뒤늦게 사라진 제국 마스터를 찾아 무엇하겠는가.
그렇게 제이크와 케인이 투닥거리는 사이, 라울과 용사 파티도 무사히 요새로 귀환했다.
“와우, 역시 마스터!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제이크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그를 반겼고, 케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굳이 전장 상황을 입으로 보고할 필요도 없이, 마신전이 무너진 순간 길드 통신으로 보고가 이뤄졌다.
“다들 고생 많았어. 무사해서 무엇보다 다행이네.”
“무사하다니요? 이거 안 보이십니까? 아주 다 타버렸다니까요?”
그러면서 잠시 투구를 부분 해제하자, 울그락불그락 변해버린 피부와 민둥산처럼 변해버린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바로 치료해 드릴게요.”
성녀 키에라가 하얀빛이 나는 손으로 제이크를 가리키자 화상으로 물집 잡혔던 그의 피부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타버린 눈썹과 머리칼은 없어진 그대로였다.
“저 혹시 이대로 영영 안 자라나는 건…?”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후아.”
제이크가 한숨을 내쉬는 순간, 조용히 있던 케인도 살짝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라울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려 성벽 아래를 바라봤다.
쾅! 꽈과광!
“와아아!”
“경험치다! 쓸어버리자!”
“단독행동 하지 마! 몹들 레벨이 장난 아니야!”
“여기 생존자다! 힐러 어딨어?”
어마어마한 신위를 보이며 적들을 쓸어버리고 있는 멜빈 백작과 초인들 사이로 낯익은 인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일우를 비롯한 퍼플 길드원들과 협력 길드의 랭커들.
그리고 어마어마한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장벽 아래를 누비며 마수와 적의 잔당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수준이 많이 높아졌네.”
“그렇네요. 길드원들이 아니라 일반 플레이어도 최소 견습 기사 수준은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슬슬 제 몫을 해줘야지. 언제 이번처럼 제국과 부딪치게 될지 모르니 말이야.”
라울이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사가 뒤틀렸다.
예전엔 그저 작은 물줄기를 바꾼 정도였다면, 이번엔 강물의 흐름을 비틀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무너졌어야 할 장벽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플레이어들이 좀 더 빨리 메인 시나리오의 흐름에 빨려 들어왔다.
이 변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라울로선 짐작할 수 없었다.
제국이 아예 침공 의지를 꺾고 숨죽일지, 아니면 그가 알지 못하는 다른 루트를 통해 다시 전쟁을 일으킬지.
모든 것은 이제 안개 속으로 가려져 버렸다.
‘아니, 완전히 바뀌진 않겠지.’
제국과의 전쟁만이 시나리오의 전부가 아니었다.
당장 이 전투가 끝나고 나면 그가 예상하는 새로운 시나리오가 시작될 것이고, 그에 대한 준비는 착실히 해오고 있었다.
“걱정되십니까?”
라울의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는지, 케인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아니, 전혀. 오히려 이제는 기대가 되는걸?”
케인이 뭘 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성벽 아래서 싸우고 있는 퍼스트 자작령 지원 병력들의 얘긴지, 아니면 일우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을 지칭하는 건지.
하지만 라울은 이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기다리고 준비하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고.
눈앞을 보라.
불과 삼 일이었다.
미리 언급해 두긴 했지만, 장벽에 지원군이 필요하다는 길드 통신을 보낸 지 단 삼 일.
아버지가 애쉬튼 백작가의 기사단과 병사들을 이끌고 직접 달려왔다.
필립 경이 퍼스트 자작령의 퍼스트 기사단과 정예 병력들을 이끌고 합류했다.
그리어 후작가에선 피델 드 그리어 후작이 몸소 켄과 함께 전장에 나타났다.
달튼이 템플턴 공작가의 기사단장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퍼플 길드와 협력 길드 기타 퍼스트 자작령에 거주하는 플레이어들, 그 외에도 자유 도시에서 퍼스트 길드에 도움을 받았던 플레이어들이 전장에 합류했다.
그 수가 무려 수만.
다른 왕국들에서 보낸 지원군과 비교하더라도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저들과 함께라면!’
그 어떤 시나리오가 닥치더라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언젠가 커넥트라는 게임의 정체와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오게 된 이유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자, 이제 충분히 쉬었으니 우리도 움직이자.”
“네, 마스터!”
라울이 황금빛 오러를 끌어올리며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어느새 그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어진 무기의 군단이 뒤따르고 있었다.
* * *
쾅.
“그래서 어느 가문들이 참가했다고?”
“애쉬튼 백작가를 주축으로 그리어 후작가와 템플턴 공작가까지 합류했다고 합니다.”
와장창창!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집기들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이런 건방진 것들을 봤나! 감히 짐의 말을 무시해? 분명히 전언은 전달했겠지?”
“네, 왕세자 저하. 허락 없이 국경 너머로 병력을 움직이지 말라고 똑똑히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병력을 움직였다? 이건 반역 아닌가!”
“……!”
3왕자 헤르디안에게 보고를 올리던 전령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저하. 반역을 논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조금 진정하시고….”
“닥치시오! 경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소? 저 반역도들이 왕실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병력을 움직이는데, 어찌 진정하란 말인가!”
헤르디안은 화가 풀리지 않는지 곁에 있던 브레이든 자작에게 욕을 섞어가며 한동안 온 궁이 울리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잠시 후.
3왕자의 서재를 벗어난 전령이 고개를 숙여 브레이든 자작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자작님 덕분에 무사히 나올 수 있었습니다.”
분노에 차 검을 빼 들고 전령까지 베어 버리려던 왕자를 자작이 몸으로 막아선 것이었다.
“감사는 무슨. 고생 많았고,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가보게.”
“네, 자작님.”
전령이 모습을 감추자 무표정하던 브레이든 자작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뭔가 원하던 결과를 얻은 모양이었다.
그때 기사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맥닐 후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버님이…?”
“지금 수도의 저택에 와 계십니다.”
“알았다. 바로 가지.”
브레이든 자작.
3왕자 헤르디안의 최측근인 그는 바로 맥닐 후작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아, 그리고.”
잠시 걸음을 멈춘 그가 기사에게 말했다.
“방금 나간 전령. 깔끔하게 처리하도록.”
“네, 자작님.”
헤르디안의 명예는 지켜져야 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렇게 또 다른 전란의 불씨가 왕궁 내부에서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