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106
106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가씨.”
“예,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황제궁 뒤에 있는 화원에 준비된 오찬 자리를 발견한 오즈번은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미 도착해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카를시아의 모습을 보자마자 비릿한 웃음을 급하게 숨긴 채 우아한 몸짓으로 그에게 예를 다했다.
“모르크 제국의 찬란한 빛이자 영원한 주군 되시는 카를시아 세닐 모르크 황제 폐하를 뵙니다.”
“앉지.”
차갑게 내려앉은 카를시아의 말투에도 오즈번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갖은 음식들이 즐비해 있는 것을 보아하니 자신의 이야기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정석대로 자신을 맞이할 그가 아니었으니까. 더더욱이나 14년 전의 사건을 안다면 말이다.
오즈번은 생각했다. 저들이 엘리자벳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엘리자벳이 자신의 기억이 돌아왔음에도 저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자신이 저 사내의 마음을 얻고 황후라는 자리에 앉을 방법은 엘리자벳을 지키기 위한 저들의 마음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사랑이 없는 황후 자리여도 상관없다. 세상을 제 발아래 두고 모든 이들이 자신을 선망하고 바라본다면 그때 저 고고하고 고귀한 황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도 되는 일이니까. 게다가 자신에겐 아스칼이 준 마력이 있으니까.
“본론부터 이야기하도록 하지.”
“이런, 너무 성급하시군요. 한때, 같이 춤을 췄던 파트너였는데 말이죠.”
“…….”
카를시아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었음에도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는 의도적으로 카를시아가 그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음이 한몫했을 터. 굳이 그 이야기를 한다는 이유는 뻔했다.
“바보는 아닌가 보군. 짐이 그댈 이용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야.”
분명 첫 춤을 췄을 때만 해도 이 정도의 독기는 없었다. 호구라고 보일 정도의 착함을 가진 제국의 성녀였다. 그래서 엘리자벳보다 오즈번을 황후로 두려던 것이었다만 결론적으로 그녀의 너무 착함이 과연 황후의 자질에 어울릴까에 대한 고민으로 보류해 두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의 오즈번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그녀의 모습에 짧게 혀를 찬 카를시아였다. 저 변한 모습이 아르켈미스의 말대로 아스칼의 영향이라면. 그렇다면.
‘뭐가 되었든 보류하길 잘했군.’
이미 아스칼에 물들어 버린 영혼이라면 욕망과 욕심의 덩어리일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욕망과 욕심의 끝이 모르크 제국이라면. 기꺼이 검을 들고 저년의 목을 베리라.
그리 생각하던 카를시아가 어느새 차갑게 식어 버린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마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범인은 누구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카를시아를 응시하던 오즈번이 고개를 떨구고 잔잔하게 잔을 채우고 있던 홍차의 물을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임에도 불구하고 일그러진 저 자신의 욕망을 대변하듯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고고한 금발. 녹음이 담긴 채 미소를 짓는 자신이.
“아스칼.”
카를시아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즈번이 만든 판에 끼어들기 위해선 적절한 연기가 필요했다. 해서 되지도 않는 가면을 고쳐 쓴 채 놀란 척 연기를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 영애. 그 단어가 제국에선 금기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 게다가, 성녀인 영애가 말하기엔-.”
“죄악의 단어라는 말씀을 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그리고 아스칼이라면 보이지 않는 신일 테니까.”
적당히 장단을 맞추자 자신의 연기를 의심하지 못한 것인지 술술 이야기하는 오즈번의 모습에 카를시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지도 못하는 자가 판을 만들었다니…. 참 웃기군.’
“잘 알고 있군.”
“저는 보았답니다. 14년 전, 아스칼이 빈센트 공녀님에게 말하는 모습을.”
적당한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오즈번의 모습에 카를시아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르켈미스가, 아니 아르텐이 말을 했으면 몰라도 아스칼이 말을 했다니. 아스칼과 하나 된 것은 자신이면서 진짜 성녀인 엘리자벳에게 욕망과 욕심의 신을 가져다 붙인다는 사실이 카를시아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아스칼과 빈센트 공녀가 하나가 되어 모든 일을 자작극으로 꾸몄다? 뭣 하러? 자신의 기억을 지우면서까지. 짐의 기억을 지우면서까지 그런 자작극을 벌인 이유가 무엇이지.”
“이런, 제 말을 오해하신 듯합니다.”
이미 기억이 돌아온 카를시아에게 거짓은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억이 돌아온 엘리자벳과 그것을 아직 모르는 카를시아의 관계도 알고 있던 오즈번이었다. 엘리자벳이 기억을 되찾은 걸 숨겼다면 그 이유는 하나였다. 서로가 서로의 기억이 돌아왔음 모른다는 것. 그래서 섣불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다는 것.
그 사실을 간파하고 있던 오즈번이 ‘피식’ 웃으며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선 차게 식은 홍차를 ‘호로록’거리며 마시기 시작했다.
카를시아가 절대로 저 자신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못하게 만들 방법. 그 방법을 찾을 잠깐 동안만이라도 일시적으로 카를시아의 시선을 자신에게 머무를 수 있게만 한다면. 나머지는 아스칼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신마저 이용하는 자. 그것이 마몬, 오즈번. 저 자신이었다.
“아스칼이 빈센트 공녀님께 하신 말은 ‘저주’입니다.”
“…뭐라?”
카를시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주’. 아르켈미스가 이야기해 주지 않은 부분이었다. 해서 저 자신이 모르는 사실이었다. 이것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그때, 당시 아스칼의 말을 직접적으로 들었을 엘리자벳 외에는 아는 자가 없으리라. 애초에 아르텐이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스칼이 오즈번을 자신의 아이로 점지해 두었다고. 아르켈미스도 자리를 비운 그 시점에서. 아스칼의 저주라니.
미묘하게 표정이 변한 카를시아의 모습을 확인한 오즈번은 자신의 승리를 직감했다. 어쭙잖은 가면을 쓰고 거짓을 고하는 것으로 생각하겠지. 자신이 처음 ‘아스칼’이라는 단어를 말했을 때. 카를시아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기억을 찾은 자가 아스칼의 존재를 모를 일은 없을 테니까.
“그것이 빈센트 공녀가 아닌 제가 성녀가 된 이유입니다.”
“…….”
‘저주’. 아무리 아르켈미스가 사랑한 신의 힘을 가진 아이라 하여도 아스칼의 저주가 걸렸다면 성녀가 될 수 없음이었다.
‘하, 뭐가 진실인지 몰라도 멍청한 바보는 아니었군.’
한 방 먹었다. 적당한 거짓말로 둘러댈 줄 알았다. 물론 저 자신은 가면을 쓴 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오즈번의 판에 뛰어들 생각이었다. 꽤 영리해진 것일까, 아니면 영악해진 것일까.
“저주라…. 그 근거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대충 둘러댄 거짓말이라 치부하려 했다. 애초에 어떤 걸 제시하든 저 자신은 그 증거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가까운 예로 엘리자벳에 대해 모르는 것 없을 아나이스가 있으니까.
“빈센트 공녀님께서 저주를 받았다는 흔적은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
“대대로 신의 힘을 받은 자는 은발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대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니.”
저렇게 자신의 지식을 내밀수록 자기 꾀에 넘어가게 된다는 걸 모르는 걸까. 은발이 신의 힘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는 걸 아는 자는 없었다. 빈센트 가문의 사람 외에는.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오즈번이 자신의 지식을 뽐내면서까지 이야기를 해도 황제인 저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장단을 맞춰 줄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깨달은 카를시아였다.
“빈센트 공녀를 대신하여 성녀가 되었는데 원래 진짜 성녀이신 빈센트 공녀님에 대해 모르면 안 되겠지요.”
“그렇게 둘이 친하진 않아 보였는데 말이지.”
“후후, 무엇이 되었든 지금의 성녀는 저니까 말입니다. 폐하나 빈센트 공작님이 원하시는 대로 공녀께서 성녀가 되시려면 그 저주부터 풀어야 할 텐데요.”
“그 저주를 거래의 협상 도구로 쓰는 것인가. 참, 웃기군.”
오즈번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카를시아를 바라보았다. 우아하게 내려앉은 금빛 안광이 날카로운 검을 담은 채 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모습마저도 맘에 들었다. 고고하게 서 있는 황제가 비탄과 비통에 빠진 채 자신의 품에 안길 모습이.
‘아아, 기어코 마몬이 되어 버렸구나.’
착하디착한 성녀를 연기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은연중에 나오는 욕망과 욕심은 그저 신께서 내린 시련과 시험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 자신이 마몬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욕망과 욕심은 시련과 시험이 아니라 자신을 버티게 해 주는 힘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저 자신이 선택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마몬이 되는 것. 그리고 마몬이 되어 엘리자벳을 제물로 바치는 것.
“그래서, 결론은 뭐지. 빈센트 공녀가 저주를 받은 근거 말이다.”
“왜. 빈센트 공녀의 머리카락 색은 은발이 아니라 적은발인 걸까요. 모르아나 빈센트의 머리카락 색도 은발일 터. 일전의 모든 신의 힘을 가진 빈센트 가문의 사람은 은발일 텐데. 왜, 엘리자벳 아르엘시아 빈센트 공녀만이 적은발인 걸까요.”
“……!!”
카를시아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리며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넨 오즈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적은발. 악마의 색이라고만 여겼던 적은발을 아나이스는 신의 힘을 가진 자의 특징이라 하였다. 그리고 덧붙였지.
‘엘리처럼 적은발인 경우는 없었지만.’이란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