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19
19화. 재앙의 이유
“으라라라라라!”
한 남자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온몸에서 칠채색의 오러를 뿜어내고 있었다.
“끼야아아아압!”
전신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의복까지 축축이 적시는데, 남자는 남은 힘을 모두 짜내려는 듯 이상한 기합까지 지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 남자가 바로 9대 기사 중 최강급에 속하는 마도 기사 아르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마도 ‘기사’라 불리지만 실제로 후방 지원이 주특기였던 그는 마계 대전에서도 이렇게까지 악을 쓸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를 바라보고 있는 현자의 마탑 마법사들의 시선에는 경외심이 아닌 동정심만이 가득했다.
“왜 이 공사를 모르스 대공 혼자서 다 하는 건데?”
“듣자 하니, 사신이 자기 남편이 혼자서 할 수 있다면서, 인력이랑 자금 아낄 겸 다 철수하라고 했다던데.”
“나, 그때 저분 안색 똥빛으로 변하는 거 봤어. 어버버하면서…….”
“하긴, 지금 보면…….”
“그래도 9대 기사 한 명이 이렇게 대단한 거였구나.”
안쓰럽게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감탄하는 이중적인 시선.
그도 그럴 것이.
우르르르르릉.
“으라차차! 난 할 수 있다!”
쿠웅.
그렇게 끌어 올린 힘을 이용해, 현자의 마탑을 중심으로 대도시 규모의 땅을 마법진 형태로 깊게 파고, 흙 구조물을 일으키고, 룬을 새기는 작업까지.
아르곤은 수많은 인부와 마법사들이 나눠서 해야 할 일을 혼자서 다 하고 있는 것이다.
허공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오러 마법은 사방에 빛과 굉음을 뿌리며 지형을 바꾸어 갔고.
우르르르릉.
결국 남쪽 지역의 마법진을 통제할 7층의 거대 구조물, ‘룬 타워(Rune Tower)’가 완공되는 순간.
“우오오오.”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에 아르곤은 창백한 안색으로 헥헥거리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하며 허리를 펴려 했지만.
“이 구역도 끝났다. 역시 나는……. 억!?”
우드득.
“허, 허리가, 허리…….”
허으으.
곧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린 채로 끙끙 앓는 신음 소리를 내야 했다.
무려 한 달 하고도 일주일.
하루 종일 전력을 토해 내는 공사는 오러익시더이자 대마법사인 그의 육체에도 심각한 무리를 준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당장 몸이 굳은 듯 움직이지 못하는 쪽팔림보다도, 이 사태를 유발한 누군가에 대한 원망을 더 크게 느꼈다.
“아흐흐흑, 망할 여편네. 내가 무슨 바람을 핀 것도 아니고, 대승적인 차원으로 열심히 돌아다닌 걸 가지고…….”
“아~ 그래? 억울했겠다.”
“그럼! 억울하지! 억울하고 말…….”
귀에 익은 목소리의 호응에 열렬히 분노를 토해 내다가.
“어…….”
순간 섬뜩한 기운을 느낀 아르곤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보았다.
살기 어린 눈의 사신이 뒤에 서 있는 것을.
“하……. 하. 하. 억울……하다고 말하면 내가 쓰레기지. 그럼. 근데 여보, 언제 왔어?”
“방금.”
“그, 그래? 그런데 자꾸 그렇게 그림자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면 내 여린 심장이 너무 놀라지 않을까?”
“언제는 신선해서 좋다더니.”
“내, 내가? 아. 하. 하. 그랬었지. 아, 너무 반가워서 말이야, 여보. 아직도 당신 보면 심장이 두근거리거든.”
……조금 다른 의미로다가.차마 토해 낼 수 없는 진심을 억지로 얼버무리며 웃는데.
망할 여편네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등허리를 툭 쳤다.
“억!?”
“다친 거 같으니, 봐준다. 봐 봐.”
푹. 푸푹.
이내 뭔가 가느다란 바늘 같은 기운이 허리 즈음에 꽂힌다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삐끗한 허리의 통증이 빠르게 가시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 마누라…….’
최고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오려는데.
이어진 한마디가 빈정이 확 상하게 만들었다.
“허리는 안 다치게 조심했어야지!”
……허리는?
는?!
“여, 여보? 그럼 다른 데는 다쳐도 괜찮다는 말……?”
당신, 나한테 원하는 게 대체 뭐야! 나는 당신한테 그런 의미였어!?
막 서운해서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데.
“뭐 얼추 공사 다 된 거 같으니, 마무리는 마탑에 맡겨.”
다시 이어진 한마디가 그 서운한 마음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진짜!?”
“그럼, 진짜지.”
강요받았던 두 달의 노동 중 3주가 단축됐다는 행복한 결말.
“으아아아싸!!!! 해방이다!”
언제 아팠냐는 듯, 온몸에 활기가 돌아오는데.
자신을 한심한 듯 바라보는 마누라의 눈치를 살피다 보니 살짝 의문이 들었다.
“근데, 자기야.”
“응?”
“마법진이 얼추 완성된 건 맞는데, 그걸 자기가 어떻게 알았어?”
“그냥. 보면 알겠는데?”
음? 이 여편네가 나랑 10년 살더니 마법 상식이 생겼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대답이었지만.
“어쨌건, 이제 ‘준비’는 다 된 거지?”
조금은 굳은 표정의 루나의 말을 듣는 순간, 사소한 의문은 날려 버렸다.
“응, 그래. 시간은 예상보다 단축했어. 이제 앞으로 60일 정도 남았으니까. 조율에는 문제없을 거야. 아, 근데 다른 재료들은……?”
“다 준비됐대. 영감님이.”
“그래, 그럼 그런 거겠지. 진짜 준비를 시작해 보자고.”
어리광부리던 남편에서 다시 마도 기사로 돌아온 아르곤이, 멀리 동쪽을 바라보며 그 눈을 빛냈다.
* * *
“이제 여기 계신 모든 분께, 통칭 ‘그을음’이라 불리는 재앙이 나타나게 된 원인에 관한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크롬벨의 말에 방 안에 모인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물론 모든 이라고 해 봤자 두 명의 마도사와 검제와 마도 기사, 사신, 그리고 성녀 에리나뿐이었지만 말이다.
“아, 물론 지금 말씀드리는 이야기는 마지막 고비를 넘기기 전까지 대외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뭐, 말한다고 믿는 이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용사께서는 어찌 홀로 알고 계셨습니까? 그리고 여태 말하지 않으셨던 이유는 무엇인지요?”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의 말에 크롬벨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것도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볍게 얘기를 하자면, 이 사태에 저도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2천 년의 세월을 건너뛴 그의 얼굴은 여전히 스무 살 때와 똑같았지만, 때로는 자연의 순리대로 늙어 가는 보통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다.
지금처럼 오래된 과거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려 할 때면 이 젊은 얼굴이 더욱 미안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할 일.
“연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차차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우리 세계가 아직은 미완성된 세계라는 것부터 짚고 넘어가죠.”
“예?”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보며 크롬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쪽의 끝으로 가면 끝없는 산이, 동쪽의 끝으로 가면 끝없는 바다가 존재한다는 것은 작금의 상식입니다. 그 사실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요.”
“끝없는 산과 끝없는 바다가, 우리 세상이 미완성되었다는 증거라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검제의 물음에 아주 단호한 답변이 돌아왔고, 그에 모두의 안색이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표정은.
“실제로 이 세상은 둥글기 때문에, 결국 서쪽과 동쪽은 이어져야 정상인 것이니까요.”
이어진 크롬벨의 설명에 더욱 혼란스럽게 변해 갔다.
하지만.
“티네스 경과 록펠러 님은 아실 겁니다. 먼 거리를 내다보면 그 끝에 지평선과 수평선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요.”
그 말에는 지진의 마도사 록펠러와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이 땅은 아주 넓은 범위에서 보면 완만하게 굴곡지어 있지요.”
“바다 역시 마찬가지지.”
두 마도사가 덧붙인 말에도 크롬벨의 설명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듯했지만.
“뭐, 아무래도 좋아. 크롬, 계속해.”
세상이 둥글건 평평하건 전혀 관심이 없는 루나가 뒷이야기를 재촉해 오니, 일단 그 문제는 차치할 수밖에 없다.
“크흠, 아무튼 동쪽과 서쪽을 막고 있는 그 무한의 장벽들은 다른 말로 차원 결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차원 결계?”
“신이나 그에 준하는 종족들이 세상을 완성해 가는 동안, 그 세상을 보호하는 결계라고 하지요.”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창세의 모든 관여자들이 이 세상을 완성하고 떠나면 자연히 사라지기로 되어 있는 결계라는 거지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그 차원 결계가 천천히 소멸되고 있다는 겁니다.”
“아, 아니. 차원 결계건 뭐건, 우리한테는 아직 타이니가 있잖아!”
아르곤이 목소리를 높여 반문해 보지만.
“타이니 경은 이레귤러……. 인세에서 기적적인 확률로 태어난 인중신입니다. 창세에 관여한 신은 아니지요.”
“그럼?”
“이 세상이 창세의 그늘에서 벗어나 다른 모든 세상과 연결될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작금에 일어난 사태의 원인 중 하나라는 거고요.”
그 말에 모두가 침묵할 때, 검제가 불쑥 물었다.
“자꾸 원인 중 하나라고 말씀하시는군요, 크롬벨 님. 다른 원인도 있다는 겁니까? 들어 보면 이 세상이 완성된다는 건 크게 나쁜 일도 아닌 것 같은데요.”
“예. 그렇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창세를 마친 우리 세계는 그즈음에 이미 다른 모든 세상, 우주와 연결되어야 했습니다. 행성이라는 형태로 말이죠.”
“행성?”
“움직이는 별?”
“예. 뭐, 그건 이 자리에 없는 타이니 경이 전해 준 말이라서, 저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으니 일단 넘어가도록 하죠.”
상당히 부실한 설명이었지만, 여기서 그걸 따지고 들 사람은 없었다.
행성이건 뭐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원래대로라면 그랬다는 건,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요?”
“천계와 중간계, 그리고 마계. 그 안의 생명체들이 소멸과 생성을 반복한 끝에 온전한 방향성을 갖게 되고, 마침내 하나의 세계로 합쳐지는 것. 그것이 원래 창세의 완성이라 본다고, 여신께서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아. 그럼……?”
“예. 여신께서는 그 과정에 끝없이 소멸을 맞이해야 할 이 세상의 생명체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그 창세의 인과율을 비틀어 버리셨지요. 그리고 거기서 일차적인 문제가 생겼다고, 타이니 경이 말하더군요.”
그 말을 하는 크롬벨의 얼굴은 조금 괴로워 보였다.
사라진 여신의 홀로 남은 사도로서 그가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덕분에 지금 우리가 있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나 우리 후손 모두 여신께는 대대로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고의 여신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모두가 그런 크롬벨을 위로하듯 한마디씩 보탰다.
그래도 그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그렇게 한번 비틀린 창세의 과정은 제 방향대로 흘러가지 못하다가, 몇 번의 큰 변화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변화가 바로 제 잘못과 관련이 있지요.”
“설마…….”
“예. 여신의 권한을 빌려 세상의 카르마를 멋대로 끌어다 쓰는 바람에, 차원 결계에 일시적으로 구멍을 뚫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여러분들이 익히 아시듯…….”
“동대륙.”
검제의 한마디에 크롬벨이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또 다른 차원의 대륙이 우리 세상으로 흘러들어 와 버린 것입니다. 타이니 경 말로는, 그쪽 또한 창세가 완성되지 않은 세상의 일부였다고 하더군요.”
너무나도 거창해진 이야기에 모두가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잠시간 침묵이 이어지다가.
“그런데 저기, 타이니가 저런 어려운 얘기를 설명했다는 거 자체가 이상하다는 생각……. 나만 해요?”
아르곤이 불쑥 토해 낸 한 마디가,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도 모두를 실소하게 만들었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