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14
13. 단역 촬영
뿌르르릉.
핑.
뾰리링.
“큭큭. 아 진짜 소리 너무 재밌어.”
“태주, 슬라임을 너무 많이 합치면 안 돼.”
“괜찮아. 얼마 안 합쳤어.”
정원은 이제 꽤 볼만해졌다. 공터가 아직도 많이 남았지만, 야생화도 심어두고 과실수도 많이 심어서 제법 보기 좋았다. 물론 태주가 욕심을 부린 탓에 정원보다는 과수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여전히 낚시의 실적은 제로였다. 태주는 그 스트레스를 슬라임 합치기로 풀고 있었는데, 희의 주의를 몇 번 들었다. 슬라임을 너무 많이 합쳐서 몇 번이나 상점에서 새로 사다 채워야 했다.
“희 이제 트리하우스를 지을 수 있겠지?”
“응. 나무가 튼튼하게 다 자랐어.”
트리하우스를 지을 만큼 튼튼한 나무로 자라는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같이 산 다른 나무의 열매를 여러 번 수확했을 정도였다.
“빨간색 지붕에 줄사다리로 할까? 아니면 파란색 지붕에 나무 사다리로 할까?”
“희는 빨간 게 좋아. 태산이도 좋대.”
“태산이도? 그럼 그걸로 하자.”
곧바로 레시피와 재료를 사서 트리하우스를 지었다. 건물은 바로바로 지어지는 시스템이라 다행이었다. 쿵쿵쾅쾅 하는 소리를 며칠씩이나 들어야 한다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창고, 오두막, 야외 공연장, 트리하우스, 연못에 동굴까지 새삼 정원에 들어선 게 많다 싶었다.
*
“독립 영화로 데뷔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좀 많이 비네.”
예전에는 이런 빈 시간이 많지 않았다. 차기작 대본을 고르거나 광고 혹은 화보를 찍었었다. 미뤄뒀던 인터뷰를 하고 전에 같이 작품을 한 사람들과 만나거나, 여러 가지 수업을 받으러 다니곤 했다. 지금은 외국어 공부나 악기 연주 연습 같은 걸 전부 정원에서 하고 있어서 시간이 남았다.
「연우야 뭐해?」
「점심 먹으러 나갈래?」
연우는 태주와 같은 건물에 방을 얻었다. 태주네 같은 복층은 아니었고 평범한 원룸이었다. 태주에게 남은 돈이 많지 않아 월세로 얻어야 했다.
“여보세요? 내려오라고? 알았어.”
태산이를 챙겨서 연우 집으로 향하는 태주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연우는 요리 솜씨가 좋았다.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말에 요리학원도 등록해줬다. 덕분에 태주의 입이 호강하고 있었다. 실습한다고 가져오는 요리들도 맛있었고, 무엇보다 편했다.
*
– 태주 씨. 네, 의상은 전에 오디션 때 입으셨던 슈트도 괜찮고요. 이쪽에서 몇 벌 준비해서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알았어요. 10분 뒤에 오피스텔 앞으로 나갈게요.”
전화를 끊은 태주가 연우에게 태산이를 부탁했다. 연우와 점심을 먹고 놀던 중, 견우에게 전화가 왔다. 드라마 촬영 중에 단역이 다쳐서 당장 들어갈 사람을 구한다는 것. 촬영장소 섭외 시간이 짧아 현장에 바로 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남자 주인공인 소속사 선배 배우가 태주를 추천했다고 한다.
집에 들러 슈트로 갈아입고 몇 가지 장신구를 챙긴 후에 바로 집을 나섰다. 건물 앞에 서자, 견우의 차가 도착했다.
“카니발도 아니고 밴이라니. 저 혹시 단역이 아니라 주인공인가요?”
“하하. 태주 씨 차량이 맞습니다. 어제 출고되어서 찾아 놓았는데 타이밍이 좋았습니다. 가는 길에 스타일리스트를 태울 겁니다. 태주 씨랑은 처음 보겠군요. 이미나 씨라고 나이는 어리지만, 상당히 솜씨가 좋은 분입니다.”
슈트에 주름이 가지 않게 조심해서 자리를 잡은 태주가 역할에 관해 물었다.
“지금 방영 중인 ‘사랑비가 내리다.’ 아십니까?”
“아아. 그 신데렐라 스토리요?”
“네, 평범한 여사원이 재벌 3세랑 이어지는 내용이죠.”
“결말이 뻔한데도 몰입도가 장난이 아니긴 하던데요. 캐릭터가 살아 있다고 할까.”
오늘 촬영할 장면은 여주가 질 나쁜 고객에게 추행에 가까운 갑질을 당하는 것을 지나가던 부잣집 도련님이 도와주는 신이었다. 남자 주인공이 뒤늦게 사실을 알고 위로해주지만, 여자주인공이 태생적으로 나뉜 신분을 실감하는 장면이다. 태주가 맡은 것은 도움을 주는 도련님 역이다.
단역이라 대사는 한 줄이고 화면에 나오는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신인에게는 이조차 과분한 일이 분명했다. 회사 선배 배우의 추천이 없었다면 주어지지 않았을 기회였다. 공중파 주말 드라마 단역. 작은 역이지만 이런 배역도 경쟁이 치열했다.
“김 실장님. 정리하세요.”
짧은 문장을 이런저런 말투로 바꿔보았다. 조금 가볍고 밝은 말투로 해보기도 하고, 짜증스러운 말투로 뱉어보기도 했다. 지나가다 흥미가 돋아 도와주라 가볍게 지시하는 상황을 가정해서 대사를 해보고, 눈에 거슬리는 것을 치우라 오만하게 명령하는 상황을 가정해서 대사를 해보기도 했다. 태주는 스타일리스트와 약속한 장소까지 가면서 여러 상황을 떠올리며 대사를 연습했다.
*
“음. 뭐 좋은 거 써? 메이크업할 게 없네.”
촬영장으로 가는 중간에 만나서 태운 스타일리스트 이미나가 태주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잡티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한 피부는 당장 민낯으로 CF를 찍어도 괜찮을 정도였다.
“가끔 미용에 좋은 크림 같은 것 발라요. 촉촉해지는 거랑 맑게 해주는 거요.”
“꼭, 꼭 어떤 건지 알려줘.”
“네. 그럴게요.”
‘용기를 바꿔서 선물하면 되겠지. 그 전에 잉어 좀 잡고. 에휴.’
이미나는 스물여섯 살에 이미 칠 년 경력을 쌓은 베테랑 스타일리스트였다. 고등학교를 관련 학교로 나와서 대학은 가지 않고, 학원에 다니면서 주로 현장에서 일을 배웠다고 한다. 스타일리스트가 보기엔 화려해 보이지만, 박봉에 고강도 노동으로, 고되고 힘든 일인 걸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슈트는 지금 입은 거로 하고, 이거 어디 거야? 굉장히 고급스럽네, 핏도 좋고. 시계는 이거로 바꿔 차자. 지금 찬 것도 좋은데 너무 가벼워 보이니까. 구두는 굽 있는 이걸로 갈아 신고. 머리는 뒤로 자연스럽게 넘기자.”
현장에 도착하는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태주를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바꿔주었다. 혹시 회사에서 선택한 대표 이미지와 잘 맞아서, 일부러 테스트 삼아 역할을 받아들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누나. 이 배역 갑자기 들어온 거잖아요. 그런데 준비가 너무 잘 되어 있네요. 게다가 다 명품.”
“호호호. 넌 진짜 운이 좋은 것 같아. 내일 오전에 잡힌 회의 알지? 거기서 입혀보려고 의상이랑 소품 찾고 있었거든. 팀장님이 실물 입혀보자고 하셔서. 덕분에 매니저님 연락받자마자 바로 챙겼지.”
“와! 저 무슨 우주가 도와주는 기분인데요. 이 역할을 해라! 이렇게.”
“킥. 그런가.”
내일 오전에는 코디네이터 팀과 홍보팀, 기획팀이 모이는 태주의 이미지 기획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아마 거기에서 실제 의상을 입혀보려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미나와 농담도 하면서 촬영장으로 향했다. 견우와 다르게 미주는 붙임성이 좋고, 쾌활했다. 능력도 좋아 보였고,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트리즈에서 신인배우팀 구성에 확실히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아직 만나지 못한 로드 매니저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
태주 일행이 촬영장 안에 들어서자 FD가 바로 감독에게 안내해줬다. 감독은 태주와도 예전에 일을 한번 같이 한 적 있는 사람이었다.
‘큭. 오동통 감독님 오랜만이네.’
오동돈 감독. 가족드라마를 주로 연출하지만, 사실 로코 연출을 제일 잘한다. 지금은 아직 자기 재능을 모르는 것 같았다. 태주가 데뷔 7년 차 즈음에 같이 로코를 찍어서 공중파 미니시리즈 시청률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지만, 성격이 모나지 않아서 배우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어린 배우 기용도 잘하고 아이돌 출신도 차별하지 않았었다.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 오동통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름도 그렇고 통통한 몸매도 그렇고, 굉장히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불리는지 궁금했다.
“오와. 비쥬얼이 장난 없네요.”
“안녕하세요. 이태주입니다.”
“잘 왔어요. 지금 급하니까 바로 설명할게요. 입구 쪽에서 걸어오다 엄지가 곤란한 상황을 발견하고, 비서한테 시켜서 상황을 정리하는 거예요. 별로 어려운 신 아니니까, 긴장하지 말고 해 봅시다.”
“네.”
태주는 곧 촬영할 장소와 동선을 눈에 담았다. 회귀 후 첫 촬영이었다. 대사 한 줄이 전부인 스쳐 가는 단역이지만 감회가 새로웠다.
탁탁.
대리석 바닥에 구두 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가볍게 났다. 몸을 감싸는 고급스러운 양복과 자연스럽게 뒤로 넘긴 헤어스타일의 태주가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며 카메라 안으로 들어섰다.
태주는 여자주인공 엄지가 서 있을 만한 위치에 시선을 두고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그리곤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김 실장님. 정리하세요.”
가볍게 내뱉은 한 문장이었지만 오만함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당연히 이뤄질 거라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오케이 컷. 좋아요.”
오케이 사인이 나오고 태주가 모니터를 확인하러 가까이 다가가자 오동돈 감독이 반색하며 맞아줬다.
오 감독님이 좋아하는 남자 주인공 스타일이었으니 마음에 드는 게 당연했다. 예전에 로코를 찍을 때도 살짝 오만한 남자 캐릭터를 좋아했었다. 오 감독님 취향에 맞춰서 일부러 보여준 캐릭터였다.
“진혁 씨가 추천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서 내가 좀 걱정을 했거든요. 근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지금은 내가 시간이 없어서 미안해요. 우리 AD한테 연락처 좀 주고 가요.”
“네, 그렇게 할게요.”
‘킥, 감독님 처음 보는 사람한테 무게 잡는 버릇은 여전하시네.’
예전에 드라마 촬영이 좀 진행된 뒤에, 오 감독님이 술자리에서 사과한 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입봉 해서 무시를 많이 당했었다며, 자기가 처음에 너무 분위기 잡고 무겁게 대했다고 사과했었다.
주연배우인 진혁 선배님이 마흔하나니, 감독님이 두 살 더 어렸다. 아마 일부러 저렇게 무게를 잡는 것일 거다. 이해는 가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문제였다. 지금 AD를 봐주는 누님하고 몇 년 뒤 결혼하는데, 이 누님이 오 감독님을 엄청 귀여워하셨던 게 기억난다. 배는 볼록 나와서 근엄한 척하는 게 귀여웠다고 말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태주 씨.”
“아유. 복잡해라.”
“아슬아슬했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벌써 정리에 들어갔네요.”
태주 일행은 번잡한 촬영장을 벗어나 주차장으로 향했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두 분 해산물 잘 드세요? 여기 근처에 연포탕 하는 곳 있거든요. 보양식으로 좋은데.”
“연포탕? 넌 어린애가 무슨 연포탕 같은 걸 다 아니.”
어리긴 하지만 돌아오기 전에는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이였다. 몸에 좋은 음식을 찾아 먹게 되는. 그때 버릇이 아직 남아서 외식이라고 하면 우선 보양식이 먼저 생각났다.
*
태주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옆자리에 있던 손님의 요란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BJ 막먹군’ 인사 올립니다. 오늘은 지난 추어탕 편에 이어서 보양식 특집을 진행할 건데요. 다들 낙지 아시죠? 불끈불끈하는 그것. 맞습니다. 오늘 막먹군은 낙지를 먹으러 왔습니다.”
먹방 BJ가 촬영을 온 것 같았다. BJ 건너편에는 카메라를 든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먹방 촬영하나 봐요.”
“와, 말 잘한다.”
태주 일행은 혼자서 카메라에 대고 쉴새 없이 말을 하는 BJ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숨은 쉬면서 말을 하는 건지 의심이 될 정도로 많은 말을 했다. 보고 있던 셋이 기가 질릴 정도였다.
‘BJ도 쉽지 않구나.’
‘아, 시끄러워.’
“흠미야미음. 맛있어요. 바다의 향기가 음~~. 지금 제 표정 보이시죠? 제가 원래 맛있는 것 먹으면 좀 못생겨지는데요.”
“우쿄쿄쿄옷, 낙지 다리 보이시죠? 이 낙지 빨판은···.”
“끄오오옷, 미나리도 좋죠. 근데 저는 청경채···.”
BJ막먹군은 음식을 먹으면서 이상한 감탄사를 남발했다. 일부러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려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버릇이 있는 건지, 옆자리에서 듣고 있던 태주는 너무 웃겨서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아야 했다.
“크크큭. 아이, 진짜. BJ분 소리 땜에 웃겨서 못 먹겠어요.”
“호호호. 솔직히 나도 아까부터 웃겨서 혼났어.”
“푸흐.”
태주 일행의 웃음소리가 컸는지 BJ의 목소리가 멎었다.
“헐. 여러분 막먹군이 지금 뭘 발견했는지 아세요? 남신! 핵 잘생김! 와아.”
카메라 촬영을 하던 스태프가 저도 모르게 BJ 막먹군의 시선을 쫓아 카메라 렌즈를 돌렸다. 일반인을 허락도 없이 촬영한 것이었지만, 웃음보가 터진 태주가 너무 잘 생긴 나머지 멈출 생각을 못 했다.
“어, 안녕하세요, 저는 BJ막먹군이라고 합니다.”
“큭큭, 안녕하세요. 배우 이태주입니다.”
“아! 역시 이 얼굴에 일반인은 아닌 게 당연한 거죠. 와, 역시 괜히 배우가 아니시네요. 그냥 막 빛이, 빛이 나는 것 같아요.”
얼떨결에 BJ와 인사를 나눈 태주는 갑작스러운 BJ의 제안을 받아들여 같이 연포탕을 먹는 촬영을 했다. 먹방 주제가 보양식이어서 그런지 방송은 어렵지 않았다. 태주는 흔한 삼계탕이랑 장어부터 온갖 보양식 정보를 풀어놓았다.
‘매니저님 태주 먹방에 나가도 되는 건가요?’
‘괜찮습니다. 우 팀장님께 물어보니, BJ막먹군 방송은 괜찮답니다.’
‘이미지랑 좀 안 맞을 텐데요.’
‘업로드 전에 영상 받아봐야죠. 괜찮을 겁니다.’
예능에 나간 적은 거의 없지만, 워낙 인터뷰를 많이 했던 태주라 방송이 어렵진 않았다. 힘든 점은 BJ막먹군의 웃긴 감탄사 때문에 자꾸 나오는 웃음을 참는 일이었다.
촬영이 끝난 후에 태주는 BJ막먹군 이찬성과 통성명을 하고 연락처를 교환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나오는 솔직한 반응이 나쁘지 않았고, 촬영 내내 요란한 멘트와 다르게 예의를 잃지 않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정원에서 가져온 과일을 먹은 후에 그가 보일 반응이 궁금해서 번호를 교환한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