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ary youngest son of the marquis RAW - Chapter (486)
제 487화
땅이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땅이 물결치듯 흔들린다. 샬롯이 자리를 박찼다. 흔들리는 땅을 밟고 자리를 박찬다. 한 번 더 박찬다.
셀과 마주했을 때 셀의 왼손에는 불로 된 장검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송곳이 주변을 덮고 있었고 셀의 오른손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방패가 만들어져 있었다.
지켜보던 유설하는 매 순간 놀랐다. 하지만 놀람도 거기까지였다. 수법이 기괴하고 신기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자신이 사용하는 무공보다는 못하다. 그게 결론이었다.
고개를 돌려 다시 발렌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제게 하셨던 그 말씀, 그게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까 했던 말씀이라면 하나밖에 없다. 너는 아직 준비가 덜 됐구나. 발렌타인의 그 말이 지금도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다.
[그 말 그대로다.]“그대로라 하시면…….”
[너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이해가 가지 않겠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요.”
발렌타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해 줄 말은 딱 하나였다.
[다 버리거라.]“버리라는 말씀은……?”
[상식을 버리고, 진리라 믿고 있던 것을 버리거라. 네가 쓰는 그 ‘빙술’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는 소리다.]“하지만 이 ‘빙술’은 지금의 저를 만들어 준 무공이에요.”
유설하는 분명 오빠인 유제하와 달랐다. 그저 그 차이였을 뿐이다.
발렌타인은 말 그대로 조언을 건넸다. 뼈를 때리는 조언.
[그걸 버리지 못하면, 주체와 객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너는 평생 초월자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그러다 깜빡했다는 듯 다시 말을 덧붙인다.
[초월자에 들어서는 이들을 이곳에서는 생사경이라 부른다지? 생사경에 진입하고 싶거든 마음가짐을 조금 더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것이다.]동대륙의 무인들은 보통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강자와 대화할 때 그의 말에서 얻어 갈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특성.
이건 강자존 사상에 기반한 동대륙만의 특성이었다.
유설하는 이 순간이 만족스러웠다. 발렌타인 밀로스.
이 여자는 분명 강자다. 그녀가 하는 사소한 말도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유설하에게 맞춘 조언까지 해 준다.
감 정도는 잡았다. 그래, 감.
그거면 충분했다. 유설하는 정말로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빙궁의 정예 무인이자 정문을 지키는 경비가 다가와 패력무제 진우가 왔다고, 그리고 그가 서쪽에서 온 여자를 내놓으라며 정문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웃을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유설하에게 발렌타인이 묻는다.
[내 손님인 거 같은데 어찌 네가 가려느냐.]유설하가 답했다.
“약속을 했으니까요.”
[약속?]“빙궁으로 모시면서 저는 이렇게 말했죠. 잔챙이들은 정리해 주겠다고.”
발렌타인이 묘한 눈으로 유설하를 바라본다.
“그저 잔챙이가 왔을 뿐입니다. 그러니 쉬고 계세요.”
[재미있구나.]“네?”
[올해 나이가 몇이라고?]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건지 궁금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바로 답했다.
“37이요. 만으로.”
[좋구나.]“……네?”
[좋은 여자에게는 좋은 남자가 필요한 법이지.]눈을 껌뻑였다. 그냥 그런 반응 말고는 뭘 보여 줄 수가 없었다.
[가 보거라.]유설하는 그렇게 자리를 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까지 하던 대화는 이미 머릿속에 없었다.
천천히 정문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었다. 거의 2m는 돼 보이는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그리고 그의 주먹에는 검은색 가죽이 장갑처럼 둘둘 말려져 있었는데 저게 그 유명한 ‘이무기’의 가죽이다.
그리고 이 무림에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남자는 딱 한 명밖에 없다.
패력무제 진우.
그는 놀랍게도 혼자 왔다. 호위 병력이나 친위대가 수천이 넘을 텐데 혼자 온 거다.
저건 자신감이었다. 진우는 저런 남자다.
“왜 네년이 나오지?”
듣기로는 그의 둘째 아들이 죽었다고 했다. 발렌타인의 손에.
그런데 부전자전이라고 말하는 꼬라지 보니까.
“뒤질 만도 하네.”
“……뭐?”
“네 아들 새끼, 뒤질 만도 하다고.”
진우의 눈가에 주름이 파인다.
“네년도 죽고 싶은 것이냐?”
상황만 보면 유설하가 약자처럼 보였을 거다. 유설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곳은 빙궁이다. 수십만이 넘는 이들이 거주하는 그 빙궁인데, 진우는 혼자 왔다.
저건 자신감이다. 대단한 반전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진우는 유설하보다 강하다. 놈은 자신이 있으니까 이곳에 홀로 온 거다.
“마지막 경고다. 데려와라.”
“누구를?”
“내 아들을 죽인 개잡년…… 허허, 이거 보니까 우습구나.”
말을 하다 말고 진우는 웃었다. 그 모습에 유설하가 고개를 갸웃한다. 뭐가 우습다는 거지.
“숨었구나.”
유설하의 눈매가 찌푸려진다.
“내 아들을 죽이고 고작 빙궁의 뒤에 숨었다? 황제라는 놈은 의궁에 숨더니 그 개X년은 빙궁에 숨는구나. 하하, 어찌 서쪽에서 온 연놈들이 이리도 똑같이 옹졸할 수가 있단 말이냐. 하하하하하-!”
쩌렁쩌렁, 사방에 울려 퍼진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이들이 귀를 틀어막았다. 자연스럽게 뻗어 나오는 그의 기세가 빙궁을 집어삼킨다.
그때였다.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유설하의 뒤쪽에서 대기하던 이들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패력무제 진우는 계속 웃고 있었거든.
그런데 소리가 그냥 소리만 사라진 거다.
그제야 진우는 웃음 그 자체를 멈췄다. 진우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간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걸까.
존재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풍성한 나무 위에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한 여인.
그녀의 뒤에 있는 두 명의 어린 꼬마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 여자다.
저 여자가 지금 소리를 차단했다.
[숨었다? 내가?]진우의 표정이 굳어진다.
발렌타인의 목소리 그 자체에 들어 있는 힘을 느낀 거다.
[하나만 알아 두거라. 나는 그 어느 순간에도 숨지도 도망치지도 않는다.]진우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보아하니 이년이구나.
“네년이 내 아들을 죽였나?”
발렌타인은 자기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숨기지 않았다. 숨기기는커녕 이런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살면서 많은 버러지를 죽였다. 너의 아들이라는 그 녀석도 마찬가지였을 뿐이다.]상황과는 맞지 않게 발렌타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진다.
[마치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 같더구나. 죽을 때도 마찬가지였고.]그 이상 들을 생각이 없었다. 부전자전.
아들이 아무리 못나도 아버지다. 자식이 아무리 양아치여도 아버지다. 아버지는 항상 자식 편일 수밖에 없다.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 생각하는 패력무제 진우에게 있어서 그건 상식이었다.
그런 진우를 보고 자라 온 진성재다. 둘은 비슷하거나 같을 수밖에 없다. 진우의 어깨가, 다리가, 그리고 몸 전체의 근육이 꿈틀한다. 순간 자리를 박찼다. 서쪽에서 온 저 흑발의 여자.
주둥이를 찢고 사지를 찢어서 개새끼 먹이로 주리라.
그때까지도 발렌타인은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아무런 태세도 갖추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게.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발렌타인에게 날아가던 진우의 몸을 무언가 강타했으니까.
새하얀, 지금의 날씨와는 맞지 않게 평원에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한기도 몰아쳤다. 나무 세 그루 정도를 박살 내며 바닥에 처박힌 진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흐흐…….”
서늘한 웃음소리가 사방에 울린다.
진우의 시선이 옮겨진다.
한천빙제 유설하가 손을 내민 채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정 네년이 죽고 싶은 게로구나.”
피식, 유설하는 웃었다.
“나도 체면은 세워야지.”
“체면?”
“명색이 빙궁의 지존이고 오제 중 한 명인데 약속 하나 못 지키면 그게 사람이겠어.”
진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새겨진다.
그런 진우의 눈에 말을 잇는 유설하가 보인다.
“그리고 아까부터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착각?”
“왜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유설하는 진심이었다. 솔직히 이곳으로 오는 잔챙이들을 치워 주겠다고 발렌타인과 약속한 것도 있긴 하지만 지금 이 감정은 묘하게, 약속이랑은 조금 거리가 있었다.
무인이다.
여자의 몸으로 한 지역의 지존이 되었고 수십만의 주민들을 통치한다.
그 수십만을 통치하는 자들을 통솔하는 ‘왕’의 자리에는 앉지 못했을지언정 무림에서 유설하 정도면 충분한 강자이자 존중받을 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패력무제 진우는 한천빙제 유설하를 무시하고 있었다.
“서쪽의 황제나, 황제의 스승이나, 그런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고작 ‘너 따위’한테 무시받는다?”
유설하가 걸음을 옮긴다. 쩌저적, 주변이 얼어붙었다. 사방으로 냉기가 피어오르고 공기가 얼어붙는다.
“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다섯 걸음 걸어간 유설하가 자리에서 멈춰 섰다. 양손을 펼쳐 들었다. 허공에 수십 개, 수백 개, 수천 개가 넘는 얼음송곳이 생겨났다.
“한번 들어와 봐.”
유설하의 입가에 생겨났던 미소의 성질이 변했다. 비웃음. 그리고 모멸감이 잔뜩 들어 있는 그런 성질로.
천천히,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자식새끼처럼 죽여 줄게.”
빠직, 미간에 금이 간다.
“버러지 년이.”
진우가 자리를 박찬다.
그런 둘을 발렌타인은 지켜보았다.
샬롯이 물었다.
“구경만 하실 거예요?”
사실 말만 안 했다 뿐이지 발렌타인도 계속 웃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동안 말 안 하고 있었던 건데 말이다.]두 꼬마가 발렌타인을 바라본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무엇인지 아느냐?]“……먹는 거?”
-수련하는 거?
두 꼬마의 답에 발렌타인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단어를 잘못 선택했구나. 어디까지나 내 기준인데, 나는 세상에서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더구나.]-아…….
“아…….”
발렌타인은 그동안 잭의 곁에서 많은 것을 봐 왔다.
왜 잭이 인형 상태였던 발렌타인을 어깨에 올려놓고 다녔을까. 왜 툴칸 제국과의 마지막 싸움을 제외하고 항상 발렌타인을 데리고 싸웠을까.
발렌타인의 안전을 신경 쓴 것도 맞긴 하지만 정확히 그게 모든 것은 아니었다. 잭은 안다. 발렌타인이 싸움 구경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을.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이 괜히 있을까. 잭은 발렌타인과 닮았다. 그냥 그게 전부였다.
발렌타인은 턱을 괴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저들의 싸움은 발렌타인이 시작한 것과 같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약속을 지키려는 자에게는 그만한 존중을 해 줘야 하는 것이고 지금은 그 과정에 있다. 무엇보다 발렌타인은 바보가 아니다.
저 남자가 아무리 단순한 남자여도 이렇게 곧바로, 그것도 혼자서 달려온다? 지나치게 부자연스럽다.
누군가 뒤에서 부추긴 걸까. 자세한 내부 사정은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무언가가.
‘시작되려 하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