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rd of another world is well fed RAW novel - Chapter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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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을 얻다 (4)
여전히 바쁘게 선지를 씹으며 돌아본 곳에는 라키와 그의 부모, 이웃으로 보이는 서너 명의 사람이 어정쩡한 포즈로 서 있었다.
너덜너덜한 밀짚모자를 벗어 들고 나름대로 예의를 차린 모습이었지만,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도미닉과 이안이 아닌 보글보글 끓고 있는 솥단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인사를 드려야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라키도 멋쩍은 얼굴을 하고 뒷 말을 흐렸다.
“아! 같이 드세요. 많이 했습니다.”
숙취에 뻗어 있던 자신 때문에 라키 역시 오는 길에 빵 몇 조각을 씹은 게 다였다. 한창 먹을 나이이니 배가 고플 것이다.
‘먹는 걸로 치사하게 굴면 안 돼.’
도미닉의 몇 안되는 신념이었다.
눈칫밥이라는 거, 생각보다 오래오래 마음에 남는 거거든.
“아, 아닙니다. 촌장님! 저희를 구해주신 것만 해도 어떻게 감사인사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대접을 해도 저희가 해야죠! 감, 감자라도 좋아하신다면…”
“감자 좋지요. 물론 좋은데 일단은 이거 같이 드세요.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습니다.”
손사레를 치는 이들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예비 그릇을 꺼내 냄비밥과 해장국을 건네주는 도미닉이었다.
‘대충 쌀밥에 고깃국이네.’
속으로 낄낄거리며 그릇을 나눠주었다.
양이 많다고는 해도 이미 이안과 도미닉이 잔뜩 덜어 먹은 후였기에 남은 양으로 라키를 비롯한 일곱 사람이 먹기엔 부족했다.
후룩-. 후룩-.
“아…!”
“후아, 후아!”
하지만 적은 양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말 그대로의 전투 식사가 따로 없었다.
매운 음식과 낯선 식재료 때문에 거부감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부족하겠는데…’
사람들의 모습을 본 도미닉이 어느새 숟가락을 내려놓고 다시 솥 앞에 섰다.
배낭을 뒤져 양념 몇 가지를 꺼내는가 싶더니 근처에서 자라고 있는 햇감자를 툭툭 뽑아내어 껍질을 벗기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내가 뭘 도우면 될까?”
이안도 숟가락을 내려놓고 도미닉의 옆으로 와서 조수 역할을 자처했다.
“껍질 벗긴 감자, 채 좀 써세요.”
“알겠다.”
“얇게 썰어야 돼요. 균일하게!”
“…알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일을 시켜먹는 도미닉은 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몇 번이고 잔소리를 해댔다. 어느새 이안도 도미닉의 구박에 익숙해진 탓인지 별 소리 없이 감자를 자르기 시작했다.
탁탁탁탁!
능숙하게 식칼을 움직이는 이안의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던 라키는, ‘기사님들은 식칼도 원래 잘 다루시는구나!’ 하고 오해를 하고 말았다.
이안의 칼질 솜씨가 도미닉의 꾸준한 부려먹음의 산물임을 모른 채.
치이이익-!
도미닉이 달궈진 냄비에 넉넉히 기름을 두르고 얇게 채 썬 감자와 밀가루, 소금을 섞은 반죽을 얇게 펴서 부쳐냈다.
가장자리가 노랗게 익으며 고소한 기름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라키, 거기 검은색 소스 보이지?”
“이, 이거요?”
“그래. 그거 조금 덜어서 찍어 먹으면 돼.”
“네!”
어느새 해장국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사람들이 신들린 손길로 감자전을 부쳐내는 도미닉을 바라보고 있었다.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간절한 눈빛이었다.
‘은인에게 염치 없지만, 저건 너무 맛있어 보이잖아!’
‘이렇게 기름진 것을 먹어 본 것이 얼마만인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먹고 싶은데…’
뼈 빠지게 농장을 꾸려가는 세 가족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손톱 밑에 흙이 끼지 않는 날이 없었다.
하지만 수확한 것은 모조리 론도 상회가 가져갔고 이들에게 허락된 것은 간신히 연명할 수 있을 구황작물 몇 자루가 전부였다.
[나리, 저, 저, 밀을 조금만 나눠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뭐? 밀? 흥! 지금 이 순간도 이자가 늘어나고 있는 주제에 욕심도 많군! 채찍에 맞기 싫으면 당장 꺼져!]심지어 라키는 덩치가 좋다는 이유로 놈들의 일꾼으로 끌려가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며칠 전, 농장으로 서슬퍼런 영지의 병사들이 찾아왔고, 늘 세 가족을 감시하던 감시탑 위의 론도 상회 관리는 밧줄로 둘둘 묶여 끌려갔다.
[병사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아, 재판을 받아야 정확해지긴 할 테지만 사실 이미 결론이 난 거나 마찬가지요. 증거가 넘쳐나거든.] [재판이요?] [이 빌어먹을 놈들이 범법을 저지르고 있었단 것이 명명백백히 드러났소. 그대들도 곧 자유가 될 거요. 그 동안의 서러운 세월에 보답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아마 영주님께서 론도 상회 놈들의 재산을 처분해 위로금도 보내주실 거라오.]그 날, 세 가구는 밤새 목놓아 그렇게 울었더랜다.
빵 한 조각 제대로 먹지 못했던 날들이 서러워서.
뙤약볕 아래 늙어버린 서로의 얼굴이 억울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라도 벗어나게 되었단 생각에 행복해서.
“차린 건 없지만, 드세요.”
부모님과 이웃 어른들이 낯선 모양의 부침개를 앞에 두고 민망함 반, 어색함 반에 포크를 들지 못하자 얼른 라키가 나섰다.
그 역시 도미닉이 만든 음식을 먹어 본 경험은 극히 적었지만, 에버그린에 머무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틈만 나면 도미닉에게 밥을 해 달라고 조르는 모습을 봐 온 덕에 확고한 어떤 믿음이 존재했다.
아니, 요리 솜씨가 좋지 못해도 뭐 어떤가.
그는 이미 라키에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인데.
“후아, 후아! 와! 맛있네요, 이거!”
“그렇지? 급하게 만들었지만 이게 별 것 없어도 계속 손이 가는 맛이라고.”
개인적으론 강판에다 곱게 갈아서 전분가루 섞어 노릇하게 부쳐낸 걸 최고로 치지만, 채를 썰어 부쳐낸 것도 나름대로 식감이 좋았다.
‘그리고 원래 밖에서 먹으면 다 맛있는 거야.’
맨밥에 김만 싸 먹어도 바깥에서 먹으면 곱절은 맛있는 법이다.
“…너, 너무 맛있, 맛있어서… 흐흑…!”
감자전 몇 장이 순식간에 사라지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울음이 터져나왔다. 라키의 어머니였다.
“엄마!”
“흐윽, 흑! 죄, 죄송합니다, 나리! 어휴, 좋은 날에 이게… 흑흑!”
어떻게든 울음을 멈춰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울음은 전염성이 강했다.
남자들까지도 눈이 벌개져서 애꿎은 하늘만 쳐다보며 헛기침을 계속했다.
“저… 이 와중에 하는 말이 맞는진 모르겠지만…”
그 때, 도미닉이 난처해하며 말을 꺼냈다.
“조금 뒤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다들 모였으니까 그냥 지금 제안하려고요. 혹시 모두들 따로 계획하고 계신 일들이 있으신가요?”
감동적인 와중에 일 얘기를 하려니 영 멋쩍었지만 계획한대로 일을 처리하려면 하루 빨리 농장을 정상화시켜야 했다.
“저, 따로 계획한 일이라면…?”
“아!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신다거나 다른 일을 해 보려고 준비하신다거나 뭐 그런 것들이요.”
도미닉의 말에 농부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론도 상회의 관리가 영주의 병사들에게 잡혀간 이후 매일 밤 모여서 이야기했던 일이기도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결정은 쉬웠지만 결론을 지은 것은 아니었다.
땅 주인은 여전히 그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농부들이 결정한다고 해도 농장을 새로 낙찰 받은 이가 나가라면 나가야 하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었다.
“나리, 저희들은 평생 한 것이라곤 농사를 짓는 일 뿐입니다. 저… 허락해주신다면 이 농장에서 계속 농사를 지으면 안되겠습니까?”
라키의 아버지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말했다.
이 짧은 말을 하는 동안 몇 번이고 손바닥에 난 땀을 옷에 비비는 것을 봐도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덥석!
하지만 걱정은 모두 기우였다는 듯, 도미닉이 반색하며 농사꾼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아휴, 저는 혹시라도 농장을 떠나신다고 할까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하하하! 그럼 여기 근로 계약서를 한 번 써 볼까요?”
“네, 네?”
“제가 거는 조건은 간단합니다. 농사를 잘 지어주시면 됩니다. 아! 근데 작물을 모두 받아갔으면 해요. 제가 쓰기에도 간당간당해서요. 대신 삯은 금화로 드릴게요. 일 년에 네 번에 나눠서. 어떠세요?”
“아, 그…”
“넉넉히 드릴 겁니다. 비료를 쓰지 않을 거라 평소보다 힘이 더 드실 수도 있거든요. 수확철 같이 일손이 부족할 때는 미리 말해주시면 일꾼을 고용해드리지요. 이 정도면 나쁜 조건은 아닐 겁니다.”
기다렸다는 듯 도미닉의 입에서 고용 조건이 줄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농부들은 멍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천천히 하는 것이 좋을 듯 하군.”
“네?”
“표정이 보이지 않는 거야?”
“아! 이런, 제가 너무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했나 보네요. 그럼 천천히 생각해보시고 얘기해주세요. 이틀 정도는 머무를 예정이니까요.”
보다 못한 이안이 말리자 그제야 말을 멈춘 도미닉이었다.
여전히 농부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넋이 나가서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 라키가 고생을 좀 할 게 분명해 보였다.
“저 감시탑, 저희가 좀 써도 되죠?”
“물론입니다. 관리들이 쓰던 곳이니 며칠 머무르시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거예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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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이 자들을 고용할 생각이었나?”
“당연하죠.”
“동정인가?”
“필요지요.”
감시탑에서 보는 노을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도미닉과 이안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노을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는 농사를 잘 모르지만 듣는 귀는 있으니까요. 땅마다 지역마다 씨앗을 심는 시기도, 수확 시기도, 강수량도 다 다르잖아요. 하다못해 땅을 얼마나 파고 씨앗을 묻을 것인지 물은 또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도 다르다는데, 이 농장을 이 사람들보다 더 잘 아는 이들을 당장 어디서 구하겠어요?”
“그렇군. 하지만 이 사람들이 떠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것 같던데. 어떻게 알았지?”
도미닉은 처음에 ‘어디로 떠날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이안은 도미닉이 농부들이 떠나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었다.
“나라면 이 농장이 지긋지긋했을 거다. 자유가 된 순간 떠나고 싶었을 거야.”
“그거야 기사님은 힘이 있으니까요.”
“…뭐?”
“기사님처럼 힘이 있는 사람들은 거처를 옮기거나 하늘을 바꾸는 게 어렵지 않을 겁니다. 원하는 대로 원하는 곳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요. 가족이 있고, 땅이 있으면 그 곳이 고향 아닙니까. 고향이 뭐 별 건가.”
대수롭지 않은 도미닉의 말에 이안은 번개라도 맞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옴짝댔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떠날 수 있었다는 것도 결국엔 특권이었나.’
고향을 등진 젊은 기사, 이안의 마음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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