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13
113화
피의 날로부터 몇 년 전.
위즈덤은 석면의 왕 데르말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능하고 잔혹하다. 하지만 금세 자만심에 빠진다. 나한테 필요한 건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 전쟁 기계다.’
하지만 데르말딘 비알 오서는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데르말딘은 24년 전 왕이 되던 당시부터 유별났다.
첫째 왕자로 이미 왕이 될 가능성이 제일 높았지만 다른 형제들을 견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암살과 독살 기회를 노렸고 대부분 성공했다.
지나친 잔혹함을 지적하는 이들은 궁 밖으로 내쫓기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왕이 된 데르말딘은 백성들에겐 딱히 암군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른 귀족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견제할 만한 힘을 잃은 귀족들은 데르말딘에게 바짝 엎드리고 있었고, 중앙 귀족들이 손을 뻗기 어려운, 다른 나라의 국경이 닿는 외곽 영주들은 힘이 약했다.
데르말딘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제 사촌 동생을 왕비로 삼았고, 최근에는 첫째 아들과 셋째 아들을 반역의 혐의를 몰아서 산 채로 불태웠다.
재임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신의 아들들을 경쟁자로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위즈덤으로서도 큰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위즈덤이 만들어 낸 이 트롤 국가는 효율적인 선택을 위해서 잔인해졌다.
독재자는 언제든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선택을 할 수는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선택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시간보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빠르게 선택하는 것이 낫기도 했다.
물론, 위즈덤은 그러한 독재를 좋아하진 않았다.
위즈덤은 지구에 있을 때 단 한 번도 독재를 용인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건 게임이었다.
로스트 월드에서 비롯된 실제 세계라지만, 이제 위즈덤은 자신이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니라 신이라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신은 무한한 권리가 있었고, 책임은 없었다.
때문에 위즈덤은 단지 트롤들이 더 효율적으로 움직였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들에게 잔인하게 굴었다.
트롤들은 속선이라는 얽힌 실뜨기를 상징하는 자신들의 신에 굴복했고, 그 잔인함을 배웠다.
트롤들은 그 잔인함을 자신이 지배하는 땅의 다른 종족들에게 마찬가지로 행했다.
공포에 질린 수많은 종족들이 트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덕분에 트롤들은 제3 대륙에서 가장 넓은 땅을 지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넓은 땅에도 불구하고 그 잔인함이 강국을 담보하지는 못했다.
제3 대륙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는 석면이 아닌 흑린이었다.
단순히 차이가 나는 것을 넘어, 흑린은 나머지 국가들과도 한 번 겨루어 볼 만큼의 능력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차이가 났는지는 차근차근, 부분 부분을 떼어서 보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150년이 넘는 시간 전체로 보았을 때는 납득이 잘되지 않았다.
위즈덤은 네뷸라가 그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기록을 세웠고, 플레이 또한 훌륭하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차이를 낸다는 걸 납득하기 힘들었다.
위즈덤은 자신 또한 모범적인 플레이를 해냈기 때문이었다.
위즈덤은 생각했다.
‘뭐가 문제일까?’
흑린과의 전쟁을 앞둔 위즈덤은 낙관론을 펼쳤고, 그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음을 믿었다.
다섯 동맹이 더 유리한 건 사실이었다.
설사, 누군가 한 명이 배신을 하더라도 말이다.
위즈덤은 자신의 방법론에서 답을 찾아냈다.
‘부족했던 건가? 효율이?’
위즈덤의 회전하는 케플러-푸앵소 다면체 중 큰 십이면체가 정지했다.
‘아니, 잔인함이.’
게임 플레이는 괜찮았다.
위즈덤 자신이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탁월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어도, 준수한 편이었다.
어째서인지 중간 성장이 늦었던 룬다나 절우비에게 대패한 AR1026과 같은 플레이어랑 비교하면 준수한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다만 더 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까닭은, 트롤들이 위즈덤의 뜻을 정확히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잘해 주고 있지만 부족했다.
흑린이라는 나라를 마치 제 손발을 다루듯 하는 네뷸라를 생각하면 차이가 있었다.
‘나는 네뷸라의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 행할 수밖에.’
위즈덤은 전쟁이 다가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소 늦어질지라도, 왕을 갈아 치워야겠다고 판단했다.
위즈덤은 충분한 자질을 갖춘 이를 찾아냈다.
데르말딘의 아들 레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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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의 피부는 대체로 회색에 가까운 녹색이다.
하지만 간혹 돌연변이로 붉은색 피부를 가진 이들이 태어나곤 했는데, 대체로 잠성을 띄고 태어나서 몸이 약하고 수명이 길지 못했다.
트롤들은 녹색 피부의 건강한 트롤들에 대비하여 붉은 피부의 트롤을 ‘시든 자’라고 불렀다.
데르말딘의 스물한 번째 자식인 레딘 비알 오서는 시든 자였다.
왕족이었지만 첩의 자식인 데다 피부가 붉었기에 궁 밖에서 자랐다.
사실상 레딘이 왕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기에, 그저 뒷바라지를 해 줄 하인 하나와 살았나 죽었나 소식이나 전해 줄 왕가의 심부름꾼 하나가 붙었다.
레딘의 어머니 또한 평민에 불과했기 때문에 레딘을 도와줄 그 어떤 바탕도 없었다.
이 시점에서 위즈덤은 레딘을 주목했다.
레딘은 각각의 능력치는 상위 1% 정도로, 유능하지만 특별하진 않았다.
상위 1%라는 말은 우수해 보이지만 플레이어의 어떤 선택을 받기에는 지나치게 숫자가 많았다.
하지만 힘과 지능, 사회성이 모두 1% 이내라는 것은 눈여겨볼 만했다.
‘데르말딘의 자식 중에선 가장 눈여겨볼 만하다. 그리고 궁 밖으로 내쫓겨져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어.’
출신이 비천할수록 신이 개입해 끌어올릴 여지가 많았다.
그리고 그 힘의 격차가 극적일수록, 개체의 믿음 또한 커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레딘이 현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왕 사이에서 태어났다지만 자신의 위로 형제가 열 댓 명이나 있고 처지만 돌아보아도 왕이 되라고 부추길 사람도 없었다.
차라리 왕족이 아니더라도 배경이 있는 남작이 역적을 모의하는 쪽이 왕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무지렁이라면 그런 꿈을 꿨을지도 모르지만, 레딘은 아니니까.’
그래서 위즈덤은 레딘에게 왕이 될 기회를 불어넣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창조물인 쉬트레히너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무엇을 바라십니까?
‘레딘의 어머니를 죽여라. 하지만 흔적을 남겨야 한다.’
-흔적이라 하시오면? 제가 죽인 것을 알립니까?
‘아니. 왕족 중 누군가가 저지른 것으로.’
쉬트레히너는 위즈덤의 뜻대로 했다.
여기에는 위즈덤의 신앙 자원이 소모되었다.
특정 캐릭터를 직접 죽이는 것은 플레이어의 ‘적극적인 개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할 만큼은 아니었다.
위즈덤이 인식하기에, 인과율은 거칠게 쥐어뜯지만 않는다면 많은 신앙을 요구하지 않았다.
‘왕이 될 가능성도 없는 버림받은 왕족의 어머니. 인과율은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크게 흔들리는 것도 있었다.
레딘이었다.
레딘은 낮 동안 마을 상인에게 장사를 배웠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레딘은 자신의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왕족의 단검이 자리에 남은 것을 발견한다.
그때까지 왕가와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살던 레딘은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지침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복수심이었다.
‘쉬트레히너.’
-부르셨습니까?
‘이제 가짜 범인을 만들어야 한다. 왕족 중 적당한 이를 물색해라.’
-그 다음은 어찌합니까?
‘레딘이 복수를 성립할 수 없도록, 가짜 범인을 죽여라.’
-…외람된 질문이지만,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위즈덤은 자신의 창조물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신선했다.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답했다.
‘복수가 성립되면 레딘의 이야기는 끝난다. 그 복수심이 충족되어선 안 된다.’
-하지만 그 갈 곳 없는 복수심은 어찌합니까?
‘다른 감정으로 승화시켜야지. …이제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레딘은 석면의 수도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알현하기 전날 밤, 왕궁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살해된 것은 레딘이 찾고 있던 단검의 주인이자 데르말딘의 여섯 번째 자식.
레딘은 자신이 복수를 할 기회를 놓친 것에 허망해하지만, 또 다른 증거를 찾아낸다.
죽은 레딘의 형제 또한 다른 형제의 손에 죽었다고 의심할 만한 것이다.
그러는 한편 레딘은 여섯 번째 자식을 살해한 용의자로 발각되고 그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위한 변론한다.
그 변론 과정에서 레딘의 출중한 능력이 드러나고 레딘의 혐의는 벗겨진다.
그리고 데르말딘의 눈에도 띄게 된다.
-이제 어찌합니까?
‘쉬어라.’
-아직 제 일이 끝나지 않은 것 아닌지?
‘끝났다.’
위즈덤이 덧붙였다.
‘남은 건 내 일이지.’
레딘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왕의 호의와 관심을 받으며 궁에서 지내게 된다.
호화스런 생활 사이로 레딘은 조사를 이어 나간다.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 있는 암투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음을 깨닫는다.
레딘은 이 모든 것이 대단히 부조리하고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
‘아직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계신데 이런 잔인한 싸움을 이어갈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찰나에 떠오른 생각을 낚아챈다.
이 모든 사건 뒤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아버지. 당신이 범인이었습니까?’
그때 위즈덤이 형이상학적이고 복잡한 꿈으로서 나타난다.
레딘은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우연이 아닌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위즈덤의 계시는 선명하고 단순하다.
‘저 유약한 사내는 왕좌에 적합하지 않다. 그럼에도 저 사내는 겁에 질려 왕좌에 관심도 없는 이들에게까지 칼을 휘두른다. 이제 그를 편안하게 쉬도록 만들어 줄 이가 필요하다.’
이제 레딘의 복수심은 다른 감정으로 치환된다.
레딘은 신의 뜻을 받들게 된다.
레딘은 우선 데르말딘의 밑에 들어가 잡다하고 더러운 일을 도맡는다.
그러며 천천히 신임을 얻어 데르말딘이 원하는 더 위험하고 중요한 일들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첩의 자식이자 가신들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스물한 번째 자식이자, 심지어 트롤 사이에서 천대받는 시든 자인 레딘은 그렇게 왕의 충복이 되었다.
레딘은 기회를 노리는 사이, 화약이 발명되었고 마법사들이 나타났으며 전쟁은 코앞까지 닥쳤다.
위즈덤은 적당한 때에 계시로서 신호를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연락을 취해 온 것이 플레이어 장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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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는 관계가 없었어야 할 터인데.’
위즈덤이 상태창을 확인하는 사이, 장완이 다시 다가왔다.
예의 사자탈은 여전히 벗어 던진 모습이었다.
다소 초조한 표정의 장완이 말했다.
“계산은… 정확했나?”
코볼트 사제들은 모두 죽었지만 신은 레벨 다운을 제외하면 죽지는 않는다.
장완 또한 레벨이 높았기에 봉신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레딘을 사도로 만들 수 있다.”
“그럼 됐네. 우리도 카드가 생긴 거야.”
그 말에 위즈덤이 말했다.
“일이 끝났으니, 이제 물어봐도 괜찮은가?”
장완은 어뷰징이 끝날 때까지 가능한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부탁했고, 위즈덤은 그 뜻을 따랐다.
이제 끝이 났으니 위즈덤은 자신에게 질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장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즈덤이 질문했다.
“왜 그렇게 네뷸라를 싫어하지? 플레이하는 동안 연결점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텐데. 다른 인연은커녕 악연이 쌓이기도 어렵다. 너의 감정은… 이해하기 어렵군.”
그 말에 침묵하던 장완이 또박또박 내뱉었다.
“난 네뷸라를 아니까.”
“안다고?”
“네뷸라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아. 본명은 최성운, 맨날 틀어박혀서 게임만 하는 폐인 새끼.”
장완이 이를 악물었다.
“네뷸라는 내 사촌 오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