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92
192화
라민이 생각한 방법은 간단했다.
고르고타의 설명이 맞다면 루베일 노역장은 워낙 거대한 관리 체계 아래 있기 때문에 관리자와 경비대가 분리되어 있었다.
그 말은 서로가 가진 정보를 그때그때에 공유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확인을 하긴 하겠죠. 하지만 그건 노역장 안으로 들어간 다음 관리자들이 할 거고. 연합왕국은 많은 체계를 군대에서 따왔으니 노역장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장교가 병사 하나하나의 면면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흔하니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제 생각에도… 비슷할 거라고 봅니다.”
노역자들을 도망치게 만드는 일이 이 계획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지만, 노역장의 경비대를 침입하는 것 보단 쉬웠다.
벌목장은 주기적으로 장소를 옮겼고, 그 중에는 노역자들이 임시로 사용하는 산장들이 있었다.
고르고타는 소지하고 있던 무기들을 노역자들만이 사용하는 침구나 화장실에 숨겨두었다.
고르고타가 걱정한 것은 노역자들이 이러한 무기들을 경비대나 관리자에게 고발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기를 숨긴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이 들통나고 경비 지역을 넓힐테니 노역장으로 들어가긴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노역자들에게 무기가 발견되더라도 내부 계획을 세워 탈출을 할테니 며칠의 시간이 필요할 거란 것이 고르고타의 생각이었지만, 이들의 탈출은 바로 즉시 일어났다.
가까이 숨어 있었던 라민과 일행은 탈출을 시도한 인간 노역자 두 명에게 접근했다.
고르고타는 노역자 두 명에게 탈출을 보장하는 대신 라민과 주란에게 옷을 바꿔 입어달라 부탁했다.
그들은 당연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라민과 주란은 도망을 포기한 노역자처럼 경비대에 붙잡혔다.
노역장 중심부로 끌려가는 사이, 주란이 라민에게 말했다.
“오래 버티긴 힘들지도 모르겠는데요.”
“일단 노역장 내부까지만 들어가면 돼. 휘경이 있는지 확인만 하고 빠져나오는 거지.”
라민도 오랜시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신체부위 중 일부가 변형을 겪고 마성의 정령이 깃드는 ‘저주받은 자’의 체질은 연합왕국에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다보니 노역자들 중에서도 이런 저주받은 자를 찾아볼 수 있었다.
‘그것과 별개로 뿔은 눈에 띄지만 말이지.’
사실 라민은 주란을 걱정할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노역자들이 탈출한 것이 늦은 오후였고, 현재는 해가 진 이후였지만 해가 뜬 이후라면 얼굴을 드러내고 활동하면 당장 뱀파이어라는 것이 들통날 것이었다.
연합왕국에서 저주받은 자는 그저 노역자일 뿐이지만 뱀파이어는 즉시 사형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분노하는 자의 이빨이 날 뒤쫓고 있잖아? 딱히 겁먹을 건 아니지 않나?’
다만 휘경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경비대는 명확한 인원 정보를 알지 못하고 있고, 관리자들은 노역장의 중심에 있다지만, 바로 옆에 있는 뒤바뀐 노역자를 알아챌만한 집단은 가까이 있었다.
“이봐.”
라민의 어깨를 짚은 것은 비쩍마른 엘프 남자였다.
“너희 뭐야?”
그는 라민, 주란과 같은 노역자 복장을 하고 있었다.
─┼
엘프가 밝힌 이름은 아가닌 오르였다.
아가닌은 자신의 노역자 동료들을 시켜 다른 노역자들이 듣지 못하도록, 그리고 경비대가 시선이 닿지 않도록 주위를 둘러싸도록 지시했다.
아가닌이 라민에게 말했다.
“난 이 노역장에서 10년을 넘게 살아남았어. 오늘 벌목을 하러간 조에 내가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너희는 분명 처음 보는군.”
“음….”
“거짓말 할 생각 하지마.. 그럼 즉시 경비대에 고발할테니까.”
라민은 잠시 고민했지만 결정은 단순했다.
‘노역자들에게 총을 쥐어줬더니 바로 탈출을 시도했어. 노역장 상황은 좋지 않은 거야. 그런 경우에 노역자들은 반대로 관리자와 경비대에 협조적일 가능성이 커. 굴종하지 않으면 핍박 당할테니까. 하지만…’
라민은 거짓말을 통해 눈 앞의 엘프를 조종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노역장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제국에서 온 첩보부 요원이라고 둘러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부분적으로 진실이 섞여있긴 해도.’
라민은 허황된 이야기로 아가닌을 구슬리는 것보다 진실을 이야기하기로 말했다.
“우리는 사람을 찾으러 왔어.”
“사람을 찾는다고 루베일을 제 발로 걸어들어와? 미쳤군.”
“우리한테는 목숨을 걸만큼 아주 중요한 일이야.”
아가닌이 말했다.
“찾으면? 그걸로 만족하는건가? 이 노역장에서 빠져나갈 방도는 있고? 아니면 목숨을 걸었다는 건 돌아갈 생각이 없단 말인가?”
그 이야기라면 라민도 걱정이었다.
이 모든 일은, 그야말로 신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이었다.
라민은 자신이 종교에 목숨을 걸만큼 광신한다고 믿지 않았다..
고르고타에게 신앙이 강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스스로도 별로 그렇게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런데 탈출도 보장되지 않는 일에 뛰어들었잖아. 이게 무슨 일이지?’
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두려운 일이긴 했다.
제국과 연합왕국의 오랜 전쟁을 돌아본다면, 사람 하나의 목숨을 그리 중히 여기지도 않을테니 신은 그 자체로 두려운 존재다.
하지만 이 여정에 이르는 동안 쫓기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그 이전의 삶이 방황처럼 느껴졌지.’
라민은 이 여정 안에서 희미하지만 신의 의지를 느꼈다.
그리고 그 의지가 자신과 겹쳐져 움직였다는 것도 알았다.
‘조종당한다? …아냐. 그런 부정적인 감정은 아닌데.’
라민은 좀더 생각하려 했지만 아가닌이 계속 말을 걸어왔다.
“혹시 연합왕국에서 노역자들의 충성을 시험하기 위해 보낸 이빨인건가?”
“그렇게 보여?”
아가닌이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에 뿔이 난 인간 남자와 동행하는 인간 여자? …그럴리가.”
라민이 말했다.
“우린 정말로 사람을 찾으러 왔을 뿐이야. 바라는 것도 그뿐이고,”
“흠, 한 번 들어나 보지. 도대체 누굴 찾으러 온 거야?”
라민이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물었다.
“휘경이라는 이름이야.”
“…휘경? 잘 모르겠군.”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여기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난 노역장에서 오래 살아남았지만, 모든 사람을 다 아는 건 아니야. 노역장은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지. 노역자들끼리 사이가 가까워지는 일이 없도록 인원을 주기적으로 교체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모르는 사람들은 제법 많을 거야.”
“아, 눈에 띄는 외모야. 인간 여자고, 머리에 뿔이 달렸지.”
그 말에 아가닌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라민은 아가닌이 뭔가 알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가닌이 주란의 머리를 가리켰다.
“…뿔이라면, 혹시 저렇게 생긴 뿔 말인가?”
라민은 순간 탄성을 지를뻔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아가닌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희가 찾는 게 혹시, 성녀님인거냐?”
─┼
라민과 주란은 아가닌의 도움을 받았다.
아가닌은 노역장 안에서 노역자들뿐만 아니라 경비대와 일부 관리자들과도 알음알음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소개에 따르면 아가닌은 연합왕국 내에서 꽤 알려진 범죄 조직의 두목 중 하나였다.
과거 무미들의 도둑 조합으로 시작된 이 조직은 지금은 연합왕국의 마약 유통과 도박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데 그 규모가 제법 커서 사람들에게 그 악명이 알려진듯 했다.
덕분에 아가닌 또한 노역장 내부에서 공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노역자 인간 두 놈을 명단에서 열외시켜 주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노역장의 중심 지역은 라민에게도 어느 정도 익숙한 장소였다.
옛 가랑 왕국의 마을 하나를 통째로 채굴장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아가닌은 라민과 주란을 도망을 시도했던 노역자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다른 노역자들도 모두 똑같이 증언했다.
게다가 라민과 주란은 병에 걸린 것 같다는 핑계로 정기 집합에서도 열외되었다.
아가닌이 그렇게 조치한 덕분이었다.
“어지간한 관리자들은 노역자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해두지 않지만, 역시 그 뿔은 거슬려. 오래 있으려면 자르는 게 나을 거다. 열외를 시켜주는 것도 오래 해줄 수는 없어.”
라민이 말했다.
“길게 있진 않을 거야. 어차피 내일 해가 뜨면 들킬 수 밖에 없어.”
“들킬 수 밖에 없다고?”
“어찌됐든, 그 성녀에 대해서 더 이야기 해봐.”
아가닌이 이야기했다.
소위 루베일 노역장에서 ‘성녀’로 알려진 이는 노역장의 가장 깊숙한 곳인 석탄 광산에 있었다.
다만 인간형 종족에 여자라는 것 말고는 자세히 알려진 건 없었다.
성녀는 항상 특별한 경비대, 관리자들을 대동하고 나타나기 때문에 다른 노역자들이 접근하기 힘들었다.
“그럼 왜 성녀라는 거야?”
“노역자들을 신비한 힘으로 돕거든.”
노역자들이 접근하기는 힘들지만 성녀가 노역자들에게 접근할 때는 예외였다.
“어떻게 돕는데?”
“말 그대로야. 상처를 봐주거나, 매를 대신 맞기도 해. 다른 노역자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기도 하고.”
“신비한 것 같지는 않은데.”
아가닌은 가로저었다.
“이 노역장에서 매를 맞으면 셋 중 하나는 죽어. 그런데 매번 매를 맞으면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지.”
“음.”
“게다가 갱도 안에 가스가 가득 찼는데 혼자 안으로 걸어들어가 사람을 구해내거나, 갱도 안에 다른 사람들과 매몰 되었다가 혼자 빠져나온 적도 있고. 아무튼 설명하기 힘든 기적을 많이 보여줬다고 하더군.”
라민이 말했다.
“좋은 사람인건 알겠는데, 성스러운 것과는 별로 관계 없는 거 아닌가?”
“아니, 그렇지도 않아.”
아가닌이 말했다.
“사람을 구하고나면 그 기적이 ‘등 뒤에 선 사람’에게 받은 힘이니 종교를 가지라고 말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성녀를 따라 그 등 뒤에 선 사람을 믿는 사람이 노역장엔 제법 많아. 배후자 교단이라고 불리지.”
“…배후자 교단? 노역장에서 그걸 그냥 보고 있어?”
아가닌은 인상을 쓰고 말했다.
“솔직히 노역장 관리자들 입장에선 배후자 교단이 마음에 들거야. 배후자 교단의 교리 자체가, 이곳에서 받는 체벌이 우리가 지은 죄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말하거든. 이렇게 노역을 하다가 죽으면 사후세계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거야.”
“이상한 종교네.”
“나도 관심없어.”
아가닌은 코웃음을 쳤다가, 조용하게 덧붙였다.
“특식을 주니까 집회에 나가긴 하지만.”
“…어, 그래서 그 성녀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해?”
아가닌이 말했다.
“만나는 건 어렵진 않아. 방금 말한 정기 집회도 있는데다…”
아가닌이 더 말하려는 때에, 노역자 숙소 안으로 사람 하나가 걸어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가면을 쓴 이빨 요원이었다.
너무 갑작스런 등장이라 아가닌과 라민, 그리고 주란은 물론이고 문을 열고 들어선 요원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잠깐 동안 정지했다.
‘…요원들은 당연히 노역장 내부에서 진을 치고 있었겠지! 그리고 그 중엔 내 얼굴을 알고 있는 요원도 있을테고. 너무 방심했어.’
먼저 움직인 것은 라민이었지만, 요원도 결코 늦지 않았다.
그리고 늦었더라도 더 빠르다고 할 수 있었다.
요원의 품에서 꺼내진 것은 화약 리볼버였다.
‘제길, 다 왔는데!’
맨손으로 리볼버를 제압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총성이 들리면 지금까지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라민이 손을 뻗기 시작했지만, 신에게 받은 전격의 힘을 쏘아내기 위해선 잠깐의 집중이 필요했다. 그 집중만큼의 지연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라민이 요원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것을 본 순간, 주란이 라민과 요원 사이로 뛰어들었다.
라민은 주란이 분명 바보같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민이 걱정한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다.
-찰칵.
요원이 든 리볼버의 공이가 총탄을 때렸지만 탄알이 격발되지 않았다.
‘불발? 운이 좋긴 하지만…’
느닷없이 주란이 자신의 앞을 막아선 탓에, 저 이빨 요원이 다시 방아쇠를 당길 기회가 몇 번이고 있었다.
요원은 공이를 당기고 방아쇠를 당겼다.
-찰칵.
다시.
-찰칵, 찰칵, 찰칵.
이빨 요원은 황당한듯 자신의 총을 내려다봤다.
다섯 발 모두 불발탄이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라민은 주란이 살짝 미소 짓는 걸 봤지만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대신 요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푸른 전격 한 줄기가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