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64
064화
이 자동성 만찬실 모임이 만들어진 것은 몇 달 전.
최초의 모임이 만들어진 계기는 단순했다.
네 개의 수차를 만들기 위해 대륙 각지의 자원과 기술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도움을 주었던 상인들을 휘경이 만찬장에 초대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만찬장에서는 완성된 네 개의 수차가 내려다보였기에 완성을 축하하는 자리로는 자동성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그때 식사를 하던 누군가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상인들이 힘을 모아 이런 역사(役事)를 이루었으니, 또 대단한 일을 벌일 수도 있겠군요.”
지나가는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휘경의 마음속에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그래서 휘경은 그날 저녁 그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대륙 각지에서 나름 한가락 한다는 큰 손이었으니 휘경으로선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유 없이 불려 온 상인 중 하나가 휘경에게 말했다.
“자동성주, 우리를 무슨 일로 다시 불러 모은 거요?”
휘경이 자신의 구상을 이야기했다.
“모임을 하나 만들죠.”
“우리가? 우리 중엔 상단을 이끄는 이들도 있지만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도 많소. 친목을 도모하려는 건 좋지만 이후로 그렇게 자주 보기는 힘들 텐데…”
“친목 도모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자주 얼굴을 볼 이유도 없죠.”
“그럼?”
휘경이 말했다.
“저기 보이는 수차를 통해서 우리는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번과 같은 일을 여기서 끝내기는 아쉽지 않습니까?”
휘경이 말하는 것은 간단했다.
돈만이 돈을 버는 법이다.
이미 많은 부를 가진 사람이 더 큰 부를 얻을 수 있고, 그런 이들이 모이면 더 큰 이윤을 얻을 수 있다.
“꼭 저런 거대한 공사가 아니어도 남들보다 빠르고 정확한 소문을 전하고 듣는 걸로 이윤이 생겨요. 이를테면 북해안에서 내려오는 나무들이 병 때문에 벌목이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면 대륙 북쪽의 대산림의 나무들 가격이 덩달아 뛸 걸 알겠죠. 그 전에 미리 나무를 사둘 수도 있을 겁니다.”
나쁜 생각이 아니었기에 상인들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적어도 휘경이 저 혼자 이득을 취하기 위한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방법으로 이득을 낼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저희들끼리 거래를 할 때는 세금을 내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세금은 나라에서 떼어 가는 것인데…”
“속일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서로 이득을 취하려면 그 정도 위험은 부담해야 한다는 거죠.”
이제야 초보적인 장부가 작성되고 있었다.
상인들이 충성하는 것은 나라가 아니라 이윤이다.
상인들은 머릿속으로 자신의 지역에서 나는 상품들이 세금을 내지 않고 거래되면 얼마나 이득을 볼 수 있을지 계산했다.
상인들이 저마다 아이디어를 냈다.
“금지되는 품목들을 거래할 수도 있겠군.”
“그렇죠.”
암거래.
“귀한 물건을 우리가 모두 사모아서 가격이 오르면 되팔아도 되고.”
“맞아요.”
독과점.
“그럴 게 아니라, 특정 상품을 우리가 모두 매수해서 가격을 마음대로 정하면 어떻소?”
“저희가 가진 돈이면 가능하죠.”
담합.
“어때요? 괜찮아 보이죠?”
처음에는 의심하던 상인들도 점점 휘경의 이야기에 혹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법 제도나 상도덕이 세워지기 전이다.
반응이 빠른 나라들은 위와 같은 일들을 법적으로 금지시키겠지만, 흑린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법 조항도 없으며, 흑린조차도 거래에 대한 법은 라크락과 전사장에 의해 임의로 정해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서 있던 휘경이 생각했다.
‘정말 나쁜 일이면 신께서 내 정수리에 벼락이라도 내리치시겠지.’
휘경은 잠깐 불안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았고 벼락이 치는 일은 없었다.
상인 하나가 말했다.
“좋습니다, 휘경. 다들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눈치를 나누는 걸 보니 다들 그대 이야기에 혹한 것 같군.”
“그럼 다들 찬성입니까?”
“다만, 문제가 있소.”
“뭐죠?”
상인은 트롤이었다.
그는 과거 돌 가면 부족이라 불렸던 거대 트롤 부족 출신으로, 현재 트롤의 나라는 석면국(石面國)으로 불리고 있었다.
“만약 우리 중 배신을 한다면?”
“음…”
휘경은 트롤의 걱정을 이해했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한 가지 일을 위해서 모인 상인들일 뿐이다.
만약 거대한 한탕을 치기 위해서 서로에게 거짓 정보를 흘린다면 단순한 피해를 입는 게 아니라, 이 모임 자체에 대한 신뢰도 흔들린다.
하지만 휘경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생각해 두고 있었다.
“타당한 걱정입니다. 우리는 서로 종족도, 믿는 신도 다르지 않습니까? 서로 신뢰할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상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휘경이 계속 말했다.
“하지만 타고난 종족은 어쩔 수 없더라도, 신앙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상인들이 웅성거렸다.
“우리가 믿고 있는 신 중 하나를 결정합시다. 그리고 모두 가지고 있던 신앙을 버린 다음, 새로운 신을 믿는 겁니다. 그다음, 우리가 벌어들이는 수익 중 일부를 새로운 신과, 그 신을 떠받드는 왕에게 바치는 거죠.”
그렇게 되면 그 신을 믿는 나라의 보호를 받을 테고, 동시에 신의 관심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의 분노가 두려워서라도 배신자가 나오지 않을 터였다.
‘신앙을 한 번 버렸다가, 또 다시 신에게서 버림받는다면…’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신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의 눈에는 그저 NPC 종족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지만, 신의 보호는커녕 관심도 받지 못하는 그들은 제3 대륙의 최하 계급을 이루고 있다.
휘경이 말했다.
“어떻습니까?”
휘경의 제안에 상인들은 큰 불만이 없는 듯싶었다.
신앙을 버린다는 건 공포스럽지만, 만약 자신의 신에게 모두가 귀의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다.
다들 걸어 볼 만한 도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또 다른 상인이 말했다.
“다만 그 방법을 어떻게 정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건… 의논해 봐야죠.”
휘경은 그렇게 말하고 상인들이 이야기하도록 놔두었다.
모두 자신들의 신에 대해 자랑을 해대니 결론이 나지 않았다.
휘경은 상인들이 충분히 피곤해져서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생각한 시점에 말했다.
“모두가 훌륭한 신인 건 알겠습니다. 달리 말하면, 어느 누구의 신이라도 상관이 없는 것 아닙니까? 주사위를 던져 정하면 어떨까요?”
몇몇 상인이 불만을 터트렸지만 곧 설득되었다.
취미로 주사위 놀이를 즐기는 상인들 덕분에 각출한 세 개의 육면체 주사위가 탁자 위에 올라왔다.
“제일 높은 눈이 나온 사람의 말을 따르는 걸로 하죠. 누구부터 할까요?”
여섯 개의 눈을 가진 주사위 세 개라면 가장 낮은 수는 3, 가장 큰 수는 18.
하지만 확률 분포를 따지면 일반적으로 8에서 13 값이 나오게 된다.
열다섯의 상인 중 가장 높은 눈은 닉스 상인이 던진 16이었다.
휘경의 마지막 차례가 돌아왔다.
휘경은 주사위를 집어 들며 자신의 내면에 말했다.
‘뿔.’
-날 불렀나?
‘그래.’
-드디어 일할 시간이군.
‘부탁해.’
휘경이 주사위를 던졌다.
휘경의 뿔에 깃든, 확률을 조작하는 정령이 탁자 위를 구르던 주사위를 툭 건드렸다.
데굴데굴 구르던 뼈 주사위들이 하나 둘 멈춰서며 값을 드러냈다.
6. …6.
그리고,
6.
총합 18, 이와 같은 값이 나올 확률은 0.46퍼센트.
하지만 자동성주에게 신비한 힘이 있다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찬실 안의 그 누구도 이 조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때문에 휘경의 승리를 다들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운이 좋았네요.”
휘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것도 푸른 벌레신의 뜻인 듯싶습니다. …모두 기도를 위해 가지고 있는 과거의 징표를 불태우는 걸로 모임을 시작할까 하는데, 어때요?”
상인들은 주저하면서도, 앞으로의 이익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각자의 신을 상징하는 징표들을 꺼냈다.
다음 수순은 간단했다.
만찬실 한 구석에서 불타고 있는 모닥불에 그 징표를 내다 버리는 것이었다.
「알림: 개체 휘경의 주도로 상인 조합 ‘다섯 번째 수차’가 생성 되었습니다.」
자동성의 창 밖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성운이 생각했다.
‘뻔뻔하긴.’
밉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판단이었다.
성운은 휘경이 상인들을 재소집 했을 때부터 관찰했다. 내키지 않으면 언제든 만찬장을 벌레로 뒤엎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휘경의 내면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 조합이 생기는 건 당연한 수순이야.’
작게는 중세 마을의 길드, 크게는 한자 동맹 같이 자본주의가 성행하지 않던 과거에도 자본은 자신을 부풀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이런 조합을 주도하는 세력이 플레이어의 종족이라면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다만 시기가 좀 빠르고… 비밀스러운 집단인 건 특이하지.’
성운은 무엇보다 각자의 종교를 버리게 한 것은 아마 휘경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인 듯싶었다.
주사위 눈을 조작해 자신이 틀림없이 승리할 수 있으니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
‘신앙을 퍼트리는 것도 일종의 이윤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로스트 월드는 결국 어떤 종족이 어떤 나라를 세우느냐가 아니라,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가 소속감과 유대감을 결정하니까.
궁극적으로는 대륙 중앙의 플레이어들을 공격해야 하지만, 당장 그 넓은 땅을 얻어도 관리하기가 어렵다.
성운의 생각에 게임의 초반 동안 이 국경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될 터였다.
‘이른바 정체기가 다가오는 거지.’
플레이어들은 각자 왕국을 세웠지만 허울만 좋을 뿐, 인구 숫자도 턱없이 부족하며 내치도 형편없고 각국에 정리되지 않은 NPC 종족들을 흡수하고 랜덤하게 일어나는 천재지변 이벤트들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러니 공격은 더 복잡해질 거야.’
칼을 들어야만 전쟁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사제를 다른 나라에 보내 몰래 포교를 펼치는 건 평범한 플레이였다.
이런 상인 조합이 생기지 않더라도 성운이 다른 방법을 썼을 테지만 휘경 덕에 수 하나를 줄인 셈이었다.
‘이렇게 밑밥이 깔려 있으면, 더 편하지.’
성운은 다른 나라에 대한 공격과 역공에 대한 방비를 천천히 가늠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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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크락은 자신의 천막에서 희고 하늘하늘한 것을 집어 태양에 비추어 보았다.
이 널따랗고 찢어지기 쉬운 것은 햇빛을 투과할 정도로 얇았다.
라크락이 자올에게 질문했다.
“이게 뭐라고 했지?”
“‘종이’입니다.”
“종이.”
자올이 설명했다.
“얼마 전 르나르 패잔병 중 일부가 길을 잃고 저희에게 붙잡혔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종이 장인이라고 했지요. 덕분에 종이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냥 비단을 쓰면?”
“비단은 비싸고 무겁죠.”
“종이는? 일단 가벼운 것 같긴 해. 하지만 비싸진 않나?”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를 잘게 부수고 빻고 찢어 산산이 분해해 물에 녹여야 합니다. 완전히 죽으로 만들어야지요.”
라크락은 그 과정을 상상했다.
“쉽지 않겠는데.”
“예. 본래라면 종이도 만드는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자올은 꼬리 끝을 살짝살짝 흔들었다. 인간으로 치자면 기분이 좋아 가볍게 코를 흥얼거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저희에겐 수차가 있으니 말입니다.”
흑린의 수도 오라즌에는 큰 강이 있고, 이 강은 조금만 상류로 올라가도 폭은 좁지만 깊어서 수량이 많은 강이 된다.
리자드맨들은 여기에 자동성에서 만드는 법을 익힌 수차를 또 만들었다.
수차는 사람의 힘을 대신하므로, 종이를 생산하는 노동도 대신할 수 있었다.
르나르 종이 장인의 말에 따르면 르나르들에겐 수차 기술이 없어서 종이를 만들 수 있어도 상당히 고가라고 말했다.
“그 외에는 쉽습니다. 촘촘한 망으로 건져 올려서 바짝 말리는 것이지요. 그 외에 르나르 장인이 좀 더 종이를 빨리, 튼튼하게 만드는 법을 일러 주긴 했지만 전체적으론 그뿐입니다.”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차를 사용하는 데다 나무로 만든다면, 비단보다 값이 쌀 수밖에 없다.
종이를 더 보급할 수 있다면 문자의 사용도 흔해지고 사소한 기록도 잦아질 터였다.
라크락은 이미 기록되는 역사를 살고 있었다.
‘아무것도 잊혀지지 않으리.’
하지만 완벽한 기록이라 할 수는 없었다.
종이는 해지더라도 누군가 옮겨 적으면 그만이지만, 누군가 그것을 상하게 한다면 돌이킬 수 없다.
외적들에 맞서 나라의 방비를 우선 단단히 할 필요가 있었다.
“자올, 나도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
“뭡니까?”
라크락이 종이를 들고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자올이 뒤따랐다.
“…나는 걱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대같이 지혜로운 반려와, 내 전사들, 그리고 신께서 나를 내려다봐 주신다면 어느 적과도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하지만… 그대도, 나도, 내 전사도, 심지어 신께서도…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그 또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번 전쟁처럼 적이 둘로 나뉘어 온다면, 그래. 내가 더 빨리 달리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이 셋, 넷이라면? 자올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이지?”
“…음.”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라크락은 목탄을 찾아 종이 위에 슥슥 그림을 그려 나갔다.
자올이 금세 알아보았다.
“지도군요.”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국경이라고 할 만한 자리에다 선을 죽 그었다.
그 선은 황야는 물론 산과 강을 거침없이 갈랐다.
흑린의 왕인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자신감으로.
자올이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뭡니까?”
라크락이 답했다.
“내가 세울 방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