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507
◈ 508화. 그럼에도 꽃에는 죄가 없으니
피를 머금은 듯 붉은 꽃.
그 이름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꽃을 대하던 아젠트레스의 태도가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아젠트레스는 냉혹한 시선으로 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이는 즉시 짓밟아도 좋다.”
의아했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자라난 꽃이라고 해도.
꽃에는 죄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추악한 인간과는 다르게.
-“이 꽃은 인간의 피를 양분으로 자라난다.”
설령 인간의 피에서 자라났다고 할지라도.
작은 생명에는 죄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아젠트레스의 말에 엘시도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최후까지 분수를 알지 못한 인간의 피에서만.”
손에 쥔 붉은 꽃.
아젠트레스는 시슬리에 이런 쓰레기를 들고 왔다는 것조차 불쾌해했었다. 아젠트레스는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꽃을 노려보다가 손짓했다.
화르륵.
꽃을 흔적도 없이 불태우며 말했다.
-“그러니 명심해라, 엘시도어.”
자신을 향해 덧붙였다.
-“너는 이 꽃에 다가갈 생각도 향기를 맡을 생각도 하지 말거라. 이 붉은 꽃이야말로 추악함의 상징이자 버러지들의 마지막 발악에 불과하니까.”
마지막 발악에서 피어난 꽃이라.
그 뜻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이해하지 못한 채.
기나긴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그 뜻을 깨닫게 되었다.
‘지옥으로 향하는 꽃…….’
다시 중국.
엘시도어는 킨베르와 함께 거리를 거닐었다.
살풍경, 폐허가 된 거리에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킨베르가 엘시도어의 뒤를 쫓으면서 어울리지 않게 발을 굴렀다.
그러곤 속삭여왔다.
“미쳤냐, 엘프? 지옥으로 따라가겠다고?”
우리가 뭐 대단한 사이도 아니고.
기껏해야 비즈니스 파트너인데.
지옥에 가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 어떻게 설명할 생각이냐?”
힐끔.
킨베르는 뒤편으로 고개를 돌려 ‘그분’을 바라봤다. 그분만이 아니었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꼬맹이라고 생각했더니, 네임드 중 네임드 NPC였던 로렌츠크였다니.
‘진심으로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야.’
킨베르는 경악을 삼키고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눈에 들어오는 낯익은 건물.
“너 진짜……!”
폐쇄된 천하통일 지부 건물이었다.
이 으리으리한 건물이 폐쇄된 이유.
아니, 거리 자체가 유령도시처럼 변한 이유는 간단했다.
킨베르와 엘시도어.
그들이 재활용조차 불가능한 쓰레기들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린 흔적이었으니까.
킨베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귀쟁이 엘프가 우리의 비밀을 전부 고백할 생각이라는 걸.
“……내가 살다 살다 양심고백은 처음이다, 씹.”
킨베르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스스로 거창하게 포장하긴 했었다.
왜, 그분의 말을 빌려서 ‘쓰레기의 긍지’라고.
“젠장…….”
하지만 쓰레기가 긍지 타령을 하는 게 가당키나 한 걸까?
그분께서 보시기에 긍지가 아니면.
내가 아무리 긍지라고 우겨도 긍지가 아니게 될 터.
그 최악의 경우엔.
‘무의미한 살육이라 여기실 수도 있겠지.’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귀쟁이, 엘시도어에게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이 압도적인 무력(武力)이든, 화원을 가꾸는 능력이든. 그에 반해서 나는 무능하다. 엘시도어는 고사하고 플레이어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정도는 아니니까.
‘더 나아가서.’
유스라 왕국이 드러나기 이전.
나는 당신의 목숨을 노린 적이 있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과 눈을 마주치고는.
말 그대로, 바지에 지리기도 했단 말이다.
“…….”
그러니 킨베르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벅.
폐쇄됐던 천하통일 지부의 문이 열릴 때까지도.
“그 꽃에는 한 가지 진실이 있습니다.”
엘시도어가 그분에게 꽃의 비밀을 고할 때까지도.
“피에서 자라나는 상사화는 방대한 피를 양분으로 삼아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피의 양과는 무관하게 오직 짙은 원한이 담긴 피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오오, 짙은 원한이라!”
로렌츠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의문이군.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다는 건 죽은 자에게 그만한 이유나 사정이 있어서일 터. 그런 이들이 짙은 원한을 품어서 꽃을 피워냈다고? 뻔뻔하지 않은가?”
엘시도어가 답했다.
“그렇기에 아젠트레스께선 이 꽃을 증오하셨습니다. 자신들의 주제를 알지 못하고 끝까지 발버둥 치는 인간의 상징이라면서 말입니다.”
……저벅.
그러고는 결심한 듯 걸음을 옮겼다.
이 순간 엘시도어는 확인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행동이 옳았는지, 그릇되었었는지를.
엘시도어가 입을 열었다.
“만약, 꽃이 피지 않았다면 저를 처분하십시오.”
꿀꺽, 킨베르가 덩달아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상사화가 단 한 송이라도 피었다면.”
……철컥.
“말씀드렸던 기회를 제게 주십시오.”
이내, 문이 열리고 참상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천하통일의 위상만큼.
난장판이 된 천하통일 지부의 내부.
“……!!!”
하지만 그 난장판을 애써 샅샅이 둘러볼 필요는 없었다.
그래, 곧바로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아니, 시야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었다.
[피에서 자라난 상사화] [피에서 자라난 상사화]…….수십, 수백, 수천 송이.
그렇다, 피를 머금은 붉은 꽃들은 마치.
이 자리를 다시 찾은 킨베르와 엘시도어를 저주하듯.
그들을 지옥으로 현혹하듯.
아름다운 꽃잎을 살랑거리고 있었으니까.
킨베르가 빠득 이를 갈았다.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킨베르 병신아.’
역시, 재활용이 불가능한 새끼들이었잖아.
*
상사화에 그런 비밀이 있었군.
‘하긴 아젠트레스의 말이라면 확실하겠지.’
누구보다 많은 피를 봤을 거 아냐?
망나니 시절을 겪었던 아젠트레스라면 말이지.
나는 빼곡하게 피어난 상사화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천하통일의 잔당들.’
그들은 중국 각지에 생성되는 균열을 클리어하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AAU에 가입되지 않은 중국의 소식은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고?
‘어떻게 알긴 투표까지 했는데.’
AAU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인 나였으니까.
천하통일 붕괴 이후.
중국 측에선 정식으로 AAU 가입을 요청해 왔었다.
말하나 마나 나는 찬성표를 던졌었다.
‘중국을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는…….’
혹시라도 내가 짊어질 짐이 늘어나게 되는 건 아닌가, 하고는 찬성표를 던졌었지. 물론, 이호열의 치졸한 관점이 아닌 그랑펠의 관점으로 봐도 찬성표는 정당했다.
‘균열이 붕괴했다가 어떤 피해가 발생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의 AAU 가입은 아직까지 보류 중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과반의 찬성을 얻지 못했거든.
머리가 복잡해서 생각하기도 싫지만 뻔한 이야기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끊이질 않는 거겠지.’
세계 각 국가 간의 이권 다툼은.
‘크고 작든, 그동안 중국에게 당한 게 있으니까.’
어쨌든, 류오쥔춘이 사라지고 개과천선한 천하통일 잔당이 있다면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을 터. 사람 속을 모르듯 그 이유까지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악마에게 빙의 당해 휘둘렸을지도 모르고.’
그런 이들이 엘시도어의 손에 유명을 달리한 것이리라.
‘지옥에 떨어지면서도 원한을 놓지 못했다라.’
상사화에 관한 진실을 들어서 그런가?
살랑거리는 붉은 꽃들이 섬뜩하게 보인다.
어째서 로렌츠크가 지옥의 어귀에서 돌아왔는지도 알 것 같군.
로렌츠크도 깨달은 바가 있는 모양.
“그러니까 이 상사화가 바로 죽은 자의 초대장이었던 거구만! 자신들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 살아있는 자들을 지옥으로 불러들이던 거였어. 아이고, 난 그런 것도 모르고!”
확실히 탐험가는 탐험가다.
단순하게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고, 기뻐하는 걸 보면.
물론, 나는 기뻐하긴 개뿔 흠칫하기도 바빴다.
‘지옥으로의 초대.’
상사화에서 옮겨가는 시선.
[클래스 퀘스트 : 우리는 여전히 악마인가?]악크샨이여, 묻겠다.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악마가 되어 지옥에 떨어진 우리는, 지옥에 떨어져서도 악마를 사냥해온 우리는, 여전히 악마인가?
-지옥에 진입하라. (진행 중)
거,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우리 선배님들을 의심하고 싶진 않은데…….
선배님들, 저한테 원한 있으신 거 아니죠?
그러실 목적으로 절 지옥으로 초대하신 거 아니시죠……?
악크샨이 아무리 혈연, 지연, 학연과는 먼 집단이라고 해도.
‘그래도 정이……. 아니, 악크샨엔 정도 없었나?’
어쨌든 상사화가 어떤 꽃인지도.
지옥이 어떤 공간인지도.
어느 정도는 알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확인할 게 있었다.
나는 엘시도어에게 물었다.
“그대의 결심은 여전히 유효한가, 엘시도어.”
이곳 무너진 천하통일 지부의 피어난 상사화는 엘시도어에게 원한을 품고, 지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죽은 자들의 머릿수와 같겠지.
나는 묻고 있는 것이었다.
‘로렌츠크야 지은 죄가 많지 않을 테니까.’
탐험가가 원한을 사봤자 얼마나 샀겠냐.
덕분에 지옥에서도 겁낼 게 없을지 모르지만.
너는 아니잖아?
나의 물음에 엘시도어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상사화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어.’
사실 악크샨 선배님들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시점에서 내가 남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기도 하니까. 그나저나 고양이가 부뚜막을 그냥 지나칠 순 없는 모양이다.
스스스.
깨진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상사화.
설령 섬뜩한 원한으로 자라난 꽃이라고 한들.
그랑펠 님의 드높은 심미안께서는.
작가의 의도 따윈 무시한 채.
오직 자신의 기준만으로 평가를 내리셨으니.
나는 입을 열었다.
“때로는 처절하기에 아름다운 것도 있는 법.”
하여튼.
그냥 솔직하게.
[피에서 자라난 상사화]가 필요하다고 하면 될 걸.“그 노력이 가상하기에 초대에 응하겠다.”
말 하나는 뻔뻔하게 잘한다니까, 진짜?
*
주어진 기한은 고작 일주일.
일주일 뒤에는 지옥에 진입하게 된다.
킨베르는 붉은 꽃 한 송이를 바라봤다.
[피에서 자라난 상사화] [등급 : 알려지지 않음] [제한 : 알려지지 않음] [효과 : 알려지지 않음] [설명 : 이 세상의 꽃이 아니다.]“……빌어먹을 내 팔자야.”
벅벅 저절로 머리가 긁어진다.
어쩌다가 지옥에 끌려가게 된 거냐, 킨베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끌려가게 된 건 아니었다.
스스로 지원한 거니까.
-“저, 저도 엘시도어와 함께 책임을 지겠습니다!”
업보 청산과 더불어.
“무엇보다 그 새끼들 초대를 거절할 순 없지.”
재활용 가능한 쓰레기로서.
지옥에 떨어져서도 반성이 없는 쓰레기들의 초대를 외면한다?
체면이 상해도 제대로 상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정말…….”
이내, 킨베르의 시선이 무덤으로 옮겨갔다.
이 무덤 아래엔 용성락이 묻혀 있었다.
그분께서.
호열이 용성락의 시신을.
직접 그의 고향인 중국 땅에 안치한 것이었다.
“당신께선 그렇게 많은 짐을 짊어지고 계시면서…….”
어떻게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쓰실 수 있는 겁니까?
순수하게 감탄이 나왔다.
그런 의미에서 걱정하게 됐다.
“……씨발.”
내가 당신의 발목을 붙잡게 되는 건 아닌가, 하고는.
현실이나, 아르카나 대륙이라면 주제 파악을 했기에.
당신의 발목을 붙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추악한 과거가 후회스러운 건 처음인데.”
하지만 자신이 쌓아온 원한과 업보를 직면하게 된다는 지옥이었다. 자신 때문에 호열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갈까 봐, 킨베르는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너도 나랑 별반 다르지 않겠지, 귀쟁이?”
그래서겠지.
그 거만하고 도도한 엘프가 ‘준비’라는 걸 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도 이제부터 고민해야만 한다. 최약체인 내가 지옥에서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킨베르가 중얼거렸다.
“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나 킨베르는 목숨을 바칠 필요가 없었다.
만에 하나 발목을 붙잡는다고 한들.
조금도 티가 나지 않을 테니까.
그랬다.
일천(一千) 카르마의 소유자가 자신의 업보와 마주하게 될 지옥에서 어떠한 시련을 겪게 되는지는. 이 순간, 어느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
오직 한 사내를 제외하고는.
“지옥이라니. 그랑펠, 나의 아우야.”
프라이드가 읊조렸다.
“너는 가문의 원죄가 두렵지 않은 것이냐.”
그게 아니라면.
“진정 그 ‘한 줄기 빛’에 홀려 모든 걸 망각한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