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241)
241 화 선택
선택.
사랑한다.
이런 얄팍한 한마디로 내 위에 올라탄 펄리를 속여넘길 수 있을 거라 믿진 않았다.
대신, 나는 펄리를 믿었다.
평소 그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전혀 하지 않던 내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는다?
그래, 내가 아는 펄리의 성격상 내가 하는 말이 거짓말임을 알고 있음에도 이 상황을 안 즐기고는 못 배길 게 분명했다.
내 고백과 함께 아래로 거침없이 나아가던 펄리가 멈췄다.
“흐응.”
장난기가 한가득 실린 콧소리. 보랏빛 두 눈이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듯이 짓궂음을 한가득 담고 휘어졌다.
걸려들었다!
첫 단추가 끼워진 이상, 지금부턴 내 임기응변에 모든 것이 달려있었다.
펄리는 가만히 내 위에 걸터앉아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 마르낙 사제님은 내 어디에 반했던 걸까?”
“그게…”
내 머리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갔다.
어디에 반했다고 하지? 아니, 애초에 반할 만한 구석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펄리와의 첫 만남은 그냥 내가 그녀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 전부였는데.
생각하자. 생각하자.
“우리 마르낙 사제님께선 조금 대답이 느리시네…? 뭐, 그럼 하던 거나 마저 해야지. 별수 있나.”
그녀의 손이 다시금 내 가슴팍에 닿자마자 나는 발작하듯 소리쳤다.
“어, 얼굴입니다! 펄리의 얼굴이 딱 제 취향이었습니다!”
“얼굴?”
펄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얼굴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으면 그때 내 목은 왜 벤 건데? 뭐, 남몰래 마음에 드는 여자 머리를 잘라서 수집하는 취미라도 있는 거야?”
“당연히 그런 취미는 없습니다!”
꿈틀.
손가락 끝이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진짜 이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는 건 시간문제라고 봐도 무방했다.
펄리와 대화를 하며 곁눈질로 주변을 훑었다.
아까 뽑아 들었던 절망은 손에 닿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다만, 펄리가 내게 용병 연기를 하라며 준 검이 불과 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있었다.
“…그럼 뭔가 말이 모순되지 않아? 첫눈에 반한 데다 얼굴이 마음에 들었는데 내 목을 베었다?”
펄리는 나를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이거 마치 네가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하려고 즉석에서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아?”
새하얀 손가락이 천천히 내 가슴을 타고 올라와 턱을 간질였다. 그녀는 내 얼굴을 매만지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조금 더 성의를 안 보이면 나 진짜 하던 거 마저 한다?”
역시 펄리는 이미 다 알고서 날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나는 피부 위로 닭살이 돋는 걸 느끼며 잽싸게 입을 열었다.
“모, 몸매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진짜 곧 죽어도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곤 감히 말을 못 하겠다.
펄리는 내 귓불을 장난감처럼 만지작대며 히죽 웃었다.
“이야. 우리 마르낙 사제님은 알고 보니 호색한이었구나? 첫 만남 때 보자마자 내 몸매를 감상했던 거야?”
“맞습니다. 전 사실 굉장한 호색한입니다. 아주아주 엄청난 호색한입니다!”
“그럼 얼굴하고 몸매. 이거 두 개가 끝이야?”
“어, 음…”
펄리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럼 우리 귀여운 호색한한테 이 얼굴이랑 몸매를 마음껏 즐기게 해줘야겠네? 이거 사실 멈추지 말고 얼른 더 해달란 뜻 맞지?”
“어?!”
그게 그렇게 되나?
“내가 실수를 했네. 우리 마르낙 사제님은 사실 얼른 더 해달란 뜻이었는데 그걸 내가 눈치 못 채고 이렇게 가만히 앉아만…”
“그, 그 둘뿐만이 아닙니다!!! 다, 당연히 더 있죠! 여러 번 만나면서 새삼 반하게 만드는 부분들이요!”
손가락이 접힌다. 풀려난 움직임은 이제 곧 주먹까지 쥘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펄리의 그 계획력과 실행력도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일단 무엇을 얻고자 하는데 급함이 없고 언제나 몇 수 뒤까지 고려한 계획을 짜는 능력! 거기다 계획을 실행할 때의 단호함까지! 그 무엇하나 멋지지 않은 부분이 없었죠!”
주먹이 쥐어진다.
“흐응.”
기분 좋은 콧소리. 내가 연신 칭찬을 하자 펄리는 어디 한 번 마음껏 재롱을 부려보라는 듯이 가만히 내 위에 걸터앉아 내 말을 경청했다.
“…게다가 인형 몸, 그거 통각이 느껴지는 게 분명함에도 언제나 필요한 상황이 닥친다면 주저 없이 그 한 몸을 내던져서 제 동료를 지켜줬던 희생정신도 무척이나 멋졌습니다.”
펄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꼬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내가 좀 그런 면이 없잖아 있어. 알고 보면 워낙에 정이 많은 사람이거든 내가.”
“맞습니다. 오히려 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죠.”
“역시 날 사랑해서 그런가? 제법 잘 아네?”
“그럼요그럼요.”
나도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팔을 뒤덮던 마비는 이제 손목을 넘어 팔꿈치까지 풀려갔다. 날카로운 검은 당장에라도 손을 쭉 뻗기만 한다면 닿는 곳에 있었다.
그래, 펄리의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펄리는 이제 내 몸 위에 거의 반쯤 엎드려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또, 또 뭐 없어?”
“당연히 더 있습니다. 그…”
곧 어깨까지 움직일 수 있다.
펄리가 저렇게나 여유로운 걸 보니, 그녀는 내 몸이 이렇게나 빨리 이 독에 적응할 줄은 꿈에도 예상 못 한듯했다.
나는 말을 골랐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눈치가 빠른 것도 참 마음에 듭니다. 그, 펄리가 아까 말해줬던 다키아 건 있지 않습니까. 그거 전 따로 한 번 이야기를 한 덕에 완전히 풀린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긴, 다시 생각해봐도 오래 곪은 감정이 말 몇 마디에 완전히 탁하고 풀릴 리가 없었죠.”
“뭐, 그 순둥이는 사실 내가 안 풀어줬어도 나름 생산적으로 풀어냈을 수도 있어. 나도 조금 너한테 생색 내보려고 일을 벌인 거기도 하고 말이지.”
예상외로 솔직한 대답. 그 대답에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커다란 보랏빛 눈망울과 오똑한 코. 가까이 붙은 탓에 자연히 풍겨오는 달큰한 여인의 체취.
나는 깊게 숨을 내뱉었다.
“하아. 딱 하나만 제안해도 되겠습니까?”
보랏빛 두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여전한 장난기를 물씬 품고서.
“뭔데뭔데?”
“펄리가 직접 벗긴 단추들을 다 잠가 주고 멀찍이 물러나 주십시오.”
“흐응. 그렇게 해주면 내가 얻는 게 뭘까?”
“지금까지 벌어졌던 일은 전부 없던 거로 하겠습니다. 깔끔하게.”
펄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 그게 과연 깔끔하게 잊힐 수 있을까? 이런 방법에 네가 당해주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고, 거기다 이미 너는 네 믿음을 배신한 나한테 꽤 실망을 많이 했을 텐데. 그 많은 걸 감수하고 벌인 일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물러나라?”
그녀는 히죽 웃었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싫은데?”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이미 독은 다 풀렸다. 나는 그대로 손을 뻗어 옆에 놓인 검을 집어서 휘둘렀다.
내 몸이 벌써 독을 다 해독했을 줄은 진짜 전혀 예상 못 했던 건지 펄리의 동공이 여느 때와 다르게 확연히 커졌다. 이내 펄리의 눈이 감기고, 그녀는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무언가를 예상했단 듯이.
쨍그랑!
깨끗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힌 검이 바닥 위를 물수제비 하듯 통통 튀다 저 멀리 처박혔다.
“으음. 이건 꽤 많이 예상외인데…”
펄리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내 품에 안겨서 작게 중얼거렸다.
기껏 집어 들었던 검으로 평소처럼 펄리의 목을 베는 대신, 그냥 검을 내던지고는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고서 입을 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펄리를 제가 먼저 믿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긴 한 거 같더군요.”
내 말에 펄리는 답지 않게 가타부타 무어라 말하는 대신 품에 안긴 그대로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한 번 먼저 믿어보기로 한 겁니다. 검으로 베는 대신에.”
“…”
의외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펄리는 그렇게 한참이나 날 가만히 바라만 보더니 혀를 슬쩍 내밀었다.
할짝.
촉촉하면서 보드라운 혀가 내 가슴팍을 슬쩍 훑고 가자 나는 깜짝 놀라서 펄리를 밀어냈다. 벌떡 몸을 일으킨 나는 잽싸게 그녀가 벗긴 단추들을 채우고 소리쳤다.
“뭡니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서 대꾸했다.
“뭐긴, 이대로 끝내긴 조금 아쉬워서 한 번 핥아본 거지. 그거 핥는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
“닳습니다! 제 순정이 닳습니다!!!”
“쩨쩨하긴! 히히!”
여느 때의 모습으로 돌아온 펄리는 챙겨온 물자들을 혼자 짊어지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이건 내가 안에 갖다 주고 올 테니까, 넌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그녀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서 냉큼 리베라티오의 은신처로 쏙하고 들어가 버렸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펄리의 뒷모습은 항상 여유롭던 평소와 달리 어딘지 모르게 너무나 당혹스러운 상황을 마주친 탓에 일단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벌기 위해 도망치는 사람 같았다.
***
“많이 기다렸어?”
바닥에 나가떨어진 두 자루 검을 주운 다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앉아있자, 조금 시간이 지나고 펄리가 은신처에서 다시 튀어나왔다.
“별로 안 기다렸습니다.”
“그럼 따라와!”
그녀는 은신처로 다시 들어가는 대신 아예 집을 빠져나와 골목길로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펄리가 멈춰선 건 은신처에서 대충 여섯 채 정도 떨어진 다른 민가였다.
“들어와들어와.”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먼지를 잔뜩 머금은 퀴퀴한 공기가 내 코를 반겼다.
나는 급한 대로 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왜 여기로 온 겁니까?”
“공명 지점이 위치상으론 바로 이 건물 아래에 있거든! 그래서 이 집에 작업을 조금 해뒀지! 짜잔!”
펄리가 한 방문을 열자 그녀가 해두었던 작업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텅 빈 방바닥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달린 문.
“설마 공명 지점까지 수직으로 구멍을 뚫어놓은 겁니까?”
“맞아! 맞아! 이걸 딱 열면…”
바닥에 달린 문이 열리자 밑바닥이 보이질 않는 새카만 구멍이 우리를 반겼다. 펄리는 그 안을 힐끔 보더니 미련 없이 몸을 던졌다.
“따라와아아아아!”
동굴처럼 울리는 목소리를 따라 몸을 던지자 짧은 부유감 끝에 무언가 찰팍거리는 바닥 위로 착지했다.
정말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공간이라 펄리의 어렴풋한 형체가 꿈틀대는 것만 간신히 보였다.
“검! 검 좀 줘봐!”
“예.”
펄리는 내가 건넨 검을 받자마자 능숙한 손놀림으로 나와 자신의 발밑을 베어냈다. 고기 썰리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다시 한번 밑으로 떨어졌다.
찰팍!
바닥에 착지한 나는 그제야 벽에서 비치는 빛으로 찰팍거리던 바닥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새빨간 살덩이들.
불길한 살덩이들이 벽을 전부 뒤덮은 채 살아서 꿈틀대고 있었다.
우리가 내려온 위를 올려다보니 꿈틀대는 살점덩어리들이 게걸스럽게 자라나며 펄리가 만들어낸 구멍을 메꾸고 있었다.
펄리는 히죽 웃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손에든 검을 천장에 던져서 박아넣었다. 깔끔하게 일을 마친 그녀는 손을 탁탁 털고는 입을 열었다.
“들어온 곳으로 나가야 하니까 검을 꽂아둬서 표시해둔 거야! 그런데 머리는 괜찮아? 어디 아픈 덴 없고?”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벽이 조금 징그럽긴 하군요.”
“괜찮아서 다행이네. 원래 평범한 사람이 여길 들어오면 머리가 조금 아파지거든!”
“머리가 조금 아프다니요?”
펄리는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미소지었다.
“뭐, 환각 같은 걸 조금 보는 거지? 그러다 두통이 조금 심하면 죽이고 죽이기도 하고 말이야! 어…?”
크게 휘청인 펄리의 몸이 내 쪽으로 쓰러졌다.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가 넘어지기 받아들었다.
그렇게 내 품에 안긴 펄리가 나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이걸 받아주네?”
“머리가 아픈 겁니까?”
“아니아니! 그냥 받아주나 안 받아주나 갑자기 궁금해져ㅅ… 앗?!”
내가 갑자기 손을 놓아버리자 펄리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고 말았다.
“역시 괜히 걱정했군요.”
역시 공명 지점마다 수작을 부린 펄리인데 머리가 아플 리가 없지.
펄리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투덜댔다.
“갑자기! 갑자기! 놓는 게 어딨어!”
“아픈 거로 장난치지 마십시오. 진짜 속으니까요.”
내가 손을 뻗자 그녀는 언제 투덜거렸다는 듯이 내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나더니 살점으로 된 복도를 가리켰다.
“가자! 일단 가면서 이야기해줄게.”
“뭘요?”
“뭐긴 뭐야, 네가 아까 물어봤었잖아! 내가 그릇을 차지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거 가는 길에 설명해줄게!”
그녀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내 손을 덥석 잡더니 나를 잡아끌었다.
살아 움직이는 살점 덩어리 복도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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