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287)
287 화 독학.
독학.
“전부 뭐해? 당장 안 움직이고? 너희 영주 목 날아간다니까?”
웅성대는 소리. 몰려온 병사와 기사들은 저들끼리 무어라 말을 나누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방 바깥에서부터 수염을 지긋하게 기른 한 노인이 모인 병사와 기사들 사이로 나타났다.
한밤중에 벌어진 일임에도 당황한 기색 없이 제법 깔끔하게 챙겨입고 온 노인은 나와 인질로 잡힌 영주를 번갈아 보곤 입을 열었다.
“이 도시, 코렌틴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거든 이런 급진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기보단 절차를 따라 항의하는 게 더 나은 방식이지 않은가.”
나는 영주의 목에 댄 검을 까딱이며 대답했다.
“쓸데없는 헛소리 그만하고 경비대에서 빼돌린 내 검, 그거부터 가져오라고. 빨리.”
노인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잔잔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 검이 어떤 검인지, 언제 빼앗긴 검인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빼돌려진 것인지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없는가? 그 도움이 있으면 우리가 자네 검을 더욱 빨리 찾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제법 합리적인 말이었다. 또한 제법 멍청한 말이기도 했고.
나는 노인의 조곤조곤한 말에 미소로 답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아까도 말했듯이 너희 영주를 살리고 싶거든 너네가 알아서 잘 내 검을 찾아오라니까? 지금 혹시 착각하고 있을까 봐 말해주는데 이거 시간제한 있다? 동이 틀 때까지 내 검이 내 눈앞에 안 나타나면 너네 영주도 그날로 이 세상과는 영영 이별이야.”
“…정말로?”
이 질문은 눈앞의 노인이 아니라 내게 붙잡힌 영주, 솜니아가 건넨 질문이었다. 나는 솜니아를 보며 방긋 웃었다.
“응. 쟤네가 동틀 때까지 내 검 안 가져오면 넌 나한테 죽을 거야.”
솜니아는 반쯤 뜬 눈으로 날 보더니, 몇 번 눈을 끔벅거리고는 노인을 향해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검 찾아와. 나 죽기 전에.”
노인은 침착하게 솜니아를 향해 말했다.
“영주님. 최대한 빨리 검을 찾으려면 그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솜니아는 일리가 있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떡거리더니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렇대.”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네가 신하라고 데리고 있는 노인이 딱히 지혜가 있거나 하진 않은 거 같네. 꼭 내가 말로 하지 않아도 내 검을 찾을 정보가 지금 여기 잔뜩 널려있는데 말이지.”
솜니아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손가락을 하나 펼쳐 보였다.
“우선 하나, 내가 참을성이 많은 인간으로 보여? 참을성이 많고 계획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자기 검을 찾으려고 들지 않겠지. 이것만 봐도 내 검을 경비대가 압류해간 건 정말 채 몇 시간도 안 된 일이란 걸 알 수 있지.”
손가락을 하나 더 펼쳤다.
“둘. 몇 시간도 채 안 된 일이란 걸 알았으면 이제 뭘 해야 해? 그냥 오늘 밤, 경비대에서 근무한 인원들을 모조리 불러서 족치면 될 일이잖아. 이 쉬운 걸 못해서 지금 나한테 정보가 필요하니 뭐니 하는 거야? 멍청한 노친네야?”
내 욕에도 노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혹시라도 경비대원 한 짓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가령 도둑이 들거나 했을 수도 있지.”
“너네 경비대가 무능한 거 지금 자랑하자는 거야? 경비대 압류품을 도둑이 훔쳐? 늙더니 뇌가 굳었나. 아. 안 되겠다. 노인네. 너 지금 되게 거슬려.”
나는 솜니아의 목을 위협하던 검을 뻗어 노인의 얼굴을 가리켰다.
“마음이 변했어. 너, 내 검 찾기 전에 영주를 살리고 싶거든 이 자리에서 수염부터 밀어.”
노인의 표정에 자그마한 파문이 일었다. 제법 길고 탐스럽게 기른 저 수염으로 볼 때, 그가 그 수염을 위해 투자한 세월이 제법 길었을 게 분명했다.
“하? 이거 봐라? 영주 목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도 안 하더니 제 수염 자르라니까 살짝 인상을 찡그려?”
나는 다시 솜니아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며 활짝 웃었다.
“충신이면 얼른 그 수염을 잘라서 네 충심을 증명해봐. 노인네야.”
병사와 기사들의 시선이 노인에게로 향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즐겁게 말을 보탰다.
“설마 진짜 수염이 영주 목숨보다 중요해서 안 자를 건 아니지? 왜 안 움직이냐 너?”
“…”
겨우 안정을 되찾은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수염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소. 이건 그저 단순한 분풀이 아니오.”
“분풀이는 무슨. 내가 진짜 화났으면 겨우 그 수염으로 안 끝났어. 그 수염은 그냥 네가 너무 무능해서 잘리는 거야. 빨리 안 잘라? 여기 검이 몇 갠데. 거기 옆에 선 너. 그래, 너.”
나는 기사로 보이는 사내를 부르며 턱짓했다.
“아무래도 많이 늙으신 바람에 혼자서 수염도 못 자르는 거 같은데, 네가 도와줘. 영주님 살려야지. 안 그래?”
기사는 잠깐 고민하더니 노인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히르멘툼님. 실례를 범하겠습니다.”
노인은 할 말이 많은 눈빛으로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노인에게로 향하는 병사와 기사들의 시선은 더욱 많았다. 결국, 히르멘툼이라 불린 노인은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자르게.”
날이 선 검에 의해 탐스러운 수염이 뭉텅이로 잘린다. 노인은 미련 넘치는 눈빛으로 잘린 수염을 바라보다 이내 미련은 분노가 되어 선명한 증오와 함께 나를 노려보았다.
“…자네는 반드시 이 일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걸세.”
“너 진짜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구나? 나는 지금 당장 너한테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머리도 한 번 밀어볼래?”
“…”
노인이 침묵하고, 나는 잘라낸 수염을 들고 있는 기사를 향해 물었다.
“내 검 찾는 건 어떻게 되고 있어?”
“일단 경비대로 사람을 보내긴 했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계속 이 방에 있어서 모른다.”
맞는 말이었다. 나랑 같이 여기 서 있었는데 어떻게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저 사람이 어떻게 알까.
“그렇네. 그럼 너희 일단 전부 이 층에서 다 꺼져봐. 검 찾기 전까진 돌아올 생각하지 말고. 분명히 충고할게. 쓸데없는 짓 할 생각 말고 검 열심히 찾아. 검만 찾으면 조용히 떠나줄 거니까.”
기사는 잠깐 고민하고는 대답했다.
“너와 영주님만 이 층에 두고 우리가 전부 물러나는 건 안 된다. 우리가 없는 틈을 타서 네가 영주님에게 무슨 짓을 할 수도 있으니.”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다른 사람들을 전부 물리는 대신, 내가 이 방에 남겠다.”
그것이 그가 양보할 수 있는 마지노선으로 보였다.
그 정도쯤이야.
“방 안에 있으면 거슬리니까 문도 부서진 김에 문밖에 서 있는 거까진 허락할게. 싫으면 말고.”
기사는 다른 기사들과 무어라 말을 나눈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래. 그럼 너만 남고 다 나가서 내 검이나 찾아. 얼른.”
“나가라.”
기사의 말이 떨어지자 다른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괜히 뻣뻣하게 굴다 수염이 잘린 노인은 수염의 원한을 잊지 못했는지, 나가면서도 나를 한 번 지그시 노려보고 떠나갔다.
모두 다 떠나고, 이 층엔 문밖의 기사 하나와 나, 칼라게인, 영주 솜니아만이 남았다.
나는 솜니아의 목에 대고 있던 검을 치우고 침대 끝자락에 주저앉았다.
“하아. 검 언제 찾아오려나.”
칼라게인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이 정도로 일을 벌였으니, 제법 빠르게 찾아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거야 두고 봐야 알겠지. 아, 이름이 솜니아지? 너도 편히 앉아 쉬어.”
탁한 우유빛 머리칼과 눈. 솜니아는 반쯤 뜬 눈으로 나와 칼라게인을 바라보더니 이내 길게 하품을 했다.
“하아아암.”
나른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솜니아는 느릿하게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잠 다 깼어.”
느긋한 한마디. 솜니아는 붙잡힌 인질답지 않게 여유가 넘쳤다.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자기 신하들을 믿어서 그런 건가.
쩍쩍 하품하고 입맛을 다시는 모습을 보면 그냥 원래 성격이 느긋할 확률이 높았다.
어린 영주 솜니아는 어리다는 그 말이 맞게 아직 성인이 되려면 한참 남은 애였다. 말이 그렇지 진짜로 완전히 어린 꼬맹이는 아니었지만.
“너, 몇 살이야?”
“…열다섯.”
“열다섯 치고는 되게 침착하네. 신기할 정도로.”
“…지금도 깜짝 놀란 상태인걸.”
특유의 반 박자 느린 대답에 말투마저 느려 살짝 듣는 사람마저 답답해지는 그런 무언가가 있었다.
“부모님은 어쩌고 네가 영주를 하는 거야?”
탁한 우윳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끔뻑거린다. 솜니아는 나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돌아가셨으니 내가 영주를 하는 게 아닐까?”
“친척은?”
“…없으니 어린 내가 영주를 하고 있지 않을까?”
“확실히 그렇네. 이건 물어본 내가 멍청했다. 미안.”
나는 깔끔하게 내 멍청함을 인정했다.
딱히 할 말이 없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솜니아는 특유의 멍한 눈으로 그저 조용히 끔벅거렸고, 칼라게인조차 따로 할 말이 없는 듯했다.
이어지는 지루한 적막. 결국, 숨 막히는 적막을 못 이긴 내가 솜니아에게 물었다.
“뭐 가지고 놀 거 없어? 카드라던지.”
“…카드 있어. 저쪽 책장에.”
잠시 후, 우리는 셋이 나란히 둘러앉아 카드를 쳤다.
“…왕, 왕 셋이야.”
솜니아의 패를 본 칼라게인이 자신의 패를 깠다.
“나는 줄이다. 내가 거의 이긴 셈이군. 네 패는 뭔가?”
“씁, 완전 개똥패인데. 졌어.”
원 페어로 끝까지 달리는 건 역시 무리였나. 나는 손수 종이에 숫자를 적어 만든 가짜 돈을 던지며 외쳤다.
“이거 누가 섞었어? 분명 섞으면서 무슨 장난질을 친 게 분명해! 나만 계속 똥패잖아!”
솜니아는 칼라게인에게 돈을 밀어주며 말했다.
“…이 판 네가 섞었어.”
흠. 그럼 어쩔 수 없지. 내 손이 똥손이었나 보네.
나는 카드를 솜니아한테 건넸다.
“네가 섞어.”
“…응.”
솜니아가 작은 손으로 카드를 착착 섞자, 그 모습을 보던 칼라게인이 솜니아한테 물었다.
“혹시 친한 소꿉친구는 없나?”
“…그런 거 없는데.”
“아쉽게 됐군.”
나는 세기의 소꿉친구 바라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별 쓸데없는 걸 물어보고 있네.”
“…패 받아.”
솜니아는 착착 카드를 한 장씩 돌렸다.
카드를 몇 판 쳐본 결과, 솜니아는 말만 느리지 생각이 느리거나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특유의 느린 말투와 나른한 눈빛은 영특함을 숨기는 위장에 가까웠다.
지금 우리 셋 중에 가장 돈을 많이 딴 것도 정작 솜니아였고.
나는 카드를 한 장씩 받으며 물었다.
“아까 내 앞에서 뻣뻣하게 굴던 노인있잖아.”
“…히르멘툼?”
“어. 그 노인네. 충고 하나 하자면 걔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쳐내는 게 좋아 보여. 그놈은 네 목숨보다 자기 체면이 더 중요해 보이더라.”
“…못 쳐내.”
“왜?”
카드 배분을 마친 솜니아가 자신의 패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실권 없는 어린 영주. 히르멘툼은 어렸을 때 고아가 된 나 대신 이 코렌틴을 다스려온 실질적인 영주야.”
“흐음. 그래서 그렇게 뻣뻣했구만. 체크.”
카드가 한 장씩 더 돌고, 내 패는 또 똥패의 조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죽지. 패가 안 좋아.”
칼라게인이 빠르게 죽고, 나랑 솜니아만 남았다. 나는 아무리 보아도 변하지 않는 똥패를 지그시 노려보며 말했다.
“흠, 완벽한 패네.”
“…그럼 다 걸게. 따라오든지.”
솜니아는 자신의 가짜 돈을 쭉 밀어 다 집어넣었다. 나는 카드를 덮었다.
“아주 살짝 덜 완벽했네. 죽을게.”
솜니아는 판에 걸린 돈을 가져가며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 얼마나 강해?”
“코렌틴의 사법체계를 무시할 정도는 되지.”
내 대답을 들은 솜니아가 자신이 딴 가짜 돈 일부를 뭉텅이로 덜어내더니 내 쪽으로 쭉 밀어주며 말했다.
“…그럼 히르멘툼을 죽여.”
열다섯 살짜리 소녀의 입에서 나오기엔 전혀 안 어울리는 살벌한 한마디.
나는 굳이 주는 가짜 돈을 거절하지 않았다. 연속된 똥패 때문에 당장 내 가짜 돈이 다 털려버리기 일보직전이었기에. 솜니아가 내민 가짜 돈을 내 쪽으로 슬쩍 끌어당기며 대답했다.
“싫은데.”
“…거래해.”
“이 가짜 돈으로?”
솜니아는 고개를 들어 탁한 우윳빛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날 인질로 삼은 거, 그거 없던 일로 해줄게. 그리고 네가 코렌틴에서 도망쳐도 나는 널 쫓지 않을 거야.”
“아, 싫다니까. 최근에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한동안은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은 기분이거든.”
“…히르멘툼의 막내아들이 경비대에서 일해.”
새로운 판을 위해 카드가 착착 섞인다. 솜니아는 카드를 섞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느릿하게.
“…내가 알기론 오늘이 근무 날일 거야.”
솜니아의 말이 은유하는 것은 간단했다. 네 검이 사라진 것과 히르멘툼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지적.
카드를 나눈다. 나는 카드를 받으며 말했다.
“왜 죽이고 싶은 건데?”
빼앗긴 권력을 되찾고 싶거나 그런 비슷한 이유인가 싶었다.
솜니아는 차근차근 카드를 나누며 답했다.
“…자꾸 자기 자식이랑 날 결혼시키려 해.”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서 그래?”
“…히르멘툼의 아들들은 다 못생겼어.”
“…”
아들들이 못생겨서 결혼하기 싫으니 죽여달라니. 내가 무어라 말하려던 그때, 일련의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문이 열리고 수염 잘린 노인과 기사와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아까보다 훨씬 기세등등한 코렌틴의 실세이자 내겐 그냥 노인네인 히르멘툼이 나를 향해 말했다.
“네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았다. 그러니 영주님을 이리로 보내라. 그럼 네 물건을 건네주지.”
“흐음.”
이불 위에 깔린 내 똥패를 슬쩍 쭉 밀어 다른 카드들과 섞으며 대답했다.
“정말 내 검을 찾았어?”
“그렇다.”
“진지하게 충고해주는데 그거 거짓말이면 넌 죽어. 특별히 다시 한 번만 물을게.”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 검, 찾아서 여기로 들고 온 거 맞지?”
히르멘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서 대답했다.
“그렇다.”
“뻔뻔한 데다 입에 거짓말이 발린 노친네야. 나는 네게 분명 기회를 줬어.”
“네 검은 분명 여기 있…”
푹.
내가 던진 검이 정확하게 히르멘툼의 미간을 꿰뚫었다. 채 해소되지 못한 힘 때문에 검은 그대로 히르멘툼의 부드러운 얼굴을 뭉개버리고 빠져나와 벽에 꽂혔다.
즉사한 노인의 몸이 쓰러지고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진짜 오늘은 아무도 안 죽이고 싶었는데.”
노인이 절망을 가져왔다고 그랬지만, 절망의 기운은 한참 전부터 이 도시 한구석에서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처박혀 있었다.
당연히 노인네가 내뱉은 말은 전부 가증스러운 거짓.
히르멘툼의 죽음에 당황한 병사와 기사들이 웅성대는 사이, 솜니아의 목소리가 내 귓가로 들려왔다.
“…시작해버렸으니 끝을 봐야 해.”
고개를 돌리자 탁한 우윳빛 눈동자가 날 반겼다. 명백한 기쁨을 한가득 담고서.
하이얀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고 처음으로 웃은 솜니아가 나지막이 내게 속삭여왔다.
“…히르멘툼의 아들들도 전부 죽여.”
사람의 죽음을 보고 처음으로 내게 웃어준 소녀는 이 순간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다음 죽음을 바라왔다.
사람의 죽음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첫인상부터가 평범하지가 않더라니. 역시 부모님 없이 가정교육을 독학해서 그런가?”
“…말이 심해.”
맞는 말이었다.
가정교육을 독학했어도 얼마든지 훌륭하게 자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방금 내뱉은 실언은 그분들에 대한 크나큰 실례이자 명백한 내 실수였다.
“미안. 내가 말실수했네. 가정교육을 독학한 게 뭐가 문제야. 그건 전혀 문제가 아니지.”
나는 솜니아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냥 네가 맛탱이가 간 건데 말이야. 그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