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334)
334
쥐구멍.
떨어지는 새하얀 눈송이. 내 손바닥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눈 하나가 피부의 열에 녹아 스러졌다.
내릴 리 없는 시간, 계절, 시기에 내리는 눈.
비틀어진 섭리의 결과물은 절대 정상적인 자연 현상이 아니었다. 특히나 한겨울에도 눈 한번 잘 내리지 않는 남제국에 있어서는.
밖에서 볼 때는 혹시나 했지만, 수도로 진입하고 나니 이 눈의 원인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이 정도 대규모 기후조작을 홀로 지속 가능한 자는 그리 많지 않았기에.
“…역시 사도 짓이겠지.”
“그거 말곤 누가 있겠어.”
지젤의 대답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돌아보았다. 지젤도 나를 따라 하듯 손을 내밀어 내리는 눈을 손바닥으로 느껴보고 있었다.
지젤이 입은 옷은 이곳으로 이동하기 전 입고 있던 검은 성녀복 하나뿐. 척 보기만 해도 추워 보이는 얇은 옷 하나여서 나는 자그마한 걱정을 담아 물었다.
“근데 안 추워?”
“딱히? 사도인지 뭔지가 되고 난 뒤로 뭐라 해야 하지, 이 세계에서 조금 떨어져 나간 느낌이야. 추운 것도 더운 것도 딱히 크게 와닿지 않아. 덕분에 편하지만 말이야. 그리고 얇게 입은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야 원래 추위나 더위를 잘 안 타니까. 그나저나 얘네 왜 이렇게 느려.”
옆 건물의 문을 두드리고 잠시만 기다려달란 대답을 들은 게 조금 전.
슬슬 손님을 눈 내리는 길거리에 세워두고 자기 할 일하는 정보상이 조금 거슬리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아냐. 오히려 잘 됐지 뭐.”
지젤이 가볍게 손짓하자 바닥에서 그림자가 일어나 단단한 철제문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나는 텅 비어버린 공간을 쳐다보고서 말했다.
“어디로 보낸 거야?”
“네 요새 자재창고로 보냈지. 거기로 보내면 디스펜스가 알아서 처리할 거 아냐?”
아니. 맞긴 한데.
“되게 거침이 없네.”
지젤의 입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싱긋 웃은 지젤이 정보상이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언제나 거침없이 살고 싶었어. 그냥 힘이 없어서 납작 엎드려 있었을 뿐이지. 이젠 힘도 있는데 참고 살 이유가 있어?”
“없긴 해.”
“가자. 마르낙.”
지젤은 거침없이 앞장서서 건물의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뒤를 쫓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과 달리, 정보상의 건물 1층은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지극히 적막할 정도로.
뭐지? 이럼 아까 우리한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한 녀석은 대체 어디서 온 녀석인 거지?
아니면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그 새 다 같이 튄 건가?
지젤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주변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했다.
“다 튄 건가?”
“근데 건물 밖으로 튀었으면 우리가 인기척을 못 느꼈을 리가 없는데.”
“그건 또 그래. 누가 나가는 낌새는 없었는데. 흐음. 일단 더 살펴봐야겠네.”
우리는 서로 찢어져 1층의 방을 하나씩 뒤져나가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복도는 좁고 방은 많았는데, 정작 사람이 살던 흔적이 있는 방은 하나도 없었다. 안에 있는 가구들도 하나같이 먼지가 수북이 쌓여서는 관리 한 번 안 된 상태였는데 문조차 열릴 때마다 끼릭대며 비명을 질러대는 꼴이 아무도 문을 열어보지도 않은 듯했다.
“흐음.”
다음 방문을 열려고 하던 찰나. 언제 뻗어왔는지 모를 그림자들이 복도의 문을 일제히 열더니 안의 가구들을 차례로 모조리 집어 삼켜대기 시작했다. 나는 나아가던 발걸음을 돌려 지젤과 헤어졌던 첫 복도로 돌아왔다.
지젤은 늘어난 그림자들을 제 몸처럼 조종하며 건물의 모든 가구들을 싸그리 집어삼켜 대고 있었다.
“뭐해.”
“뭐하긴. 주인 없으니 그냥 우리가 챙기는 거지. 먼지가 앉아서 그렇지 가구들 상태는 꽤 괜찮더라고. 안목없는 내가 봐도 이거 전부 다 제법 비싼 거야.”
“아니, 이렇게 다 옮겨서 보관해둘 데는 있고?”
“네 요새 자재창고로 옮기는 중인데?”
“응?”
나는 눈을 끔벅이다 되물었다.
“아니, 이걸 왜 요새 자재창고로 옮겨?”
“우리 이미 한배를 탔잖아? 어차피 거기 공간도 한참 남던데, 조금 빌려 쓰는 거지. 겸사겸사 디스펜스가 망가진 가구들 수리도 좀 해줄 테고.”
“그래도 디스펜스 의사는 물어보고 해야…”
지젤은 자그마한 구슬 하나를 꺼내 내게 보였다.
“이미 물어봤어.”
– 저는 괜찮습니다. 후계자님. 이 정도는 별거 아닙니다.
대답은 구슬 대신 내 오른 손목의 팔찌에서 들려왔다. 저 구슬은 디스펜스가 지젤한테 챙겨준 통신기인가?
“아니, 우리가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이런 거 하나하나 다 챙길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너, 혹시 돈 필요해? 좀 챙겨줄까?”
주변 모든 가구들을 다 챙긴 건지, 지젤의 발끝에서 늘어났던 그림자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그녀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딱히 돈이 필요해서 이러는 건 아니고. 그냥 나도 무법자처럼 전리품을 싸그리 다 취해보고 싶었어. 이게 힘 있는 자들이 살아가는 방식 아냐?”
아주 힘에 취했네. 이거.
생각해보니 정작 지젤이 사도가 되고 나서는 교단에서 시키는 대로 화물만 옮겨대면서 마라트 눈치를 보느라 본인 힘을 마음대로 쓸 여유가 없었겠지. 그 조여있던 목줄이 풀리자마자 한 번 천방지축으로 날뛰어보는 건가.
“그래, 마음 가는 대로 한 번 해봐.”
지젤이 진짜 멍청한 녀석도 아니고, 적당히 재미만 좀 보면 알아서 잘 자제하겠지. 드디어 기분 좀 내보겠다는데 굳이 말리고 싶진 않았다.
“그럼 1층은 다 정리한 거야?”
“응! 이제 2층 털러 가자.”
지젤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걸음을 옮겨 2층 계단으로 향했다. 지젤의 뒤를 따라 복도를 가로질러 좁은 계단이 우리를 기다리는 곳에 도착하자, 한 여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핼쑥한 표정의 퀭한 얼굴을 한 여인은 비쩍 마른 몸 위로 깔끔한 하녀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녀는 나와 지젤을 빤히 쳐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시길.”
“그래?”
지젤은 어딘가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비쩍 마른 하녀를 쳐다보다 내 얼굴을 힐긋 쳐다보곤 내게 속삭였다.
“…슬쩍 딴 데로 이동시켜버리고 계속 2층 털면 안 되겠지?”
이 천방지축이 진짜. 나는 내 안의 지젤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제법 어른스럽다.’에서 ‘괜히 쟈멜 친구가 아니다.’로.
“…우리 정보상한테 정보 사러 온 거야. 지젤. 가구 털러 온 게 아니라고.”
“알고 있어. 그냥 한번 말해본 거야. 농담농담~.”
“…그래.”
비쩍 마른 하녀는 2층, 3층, 4층을 지나쳐 꼭대기 층인 5층까지 말 한마디 뱉지 않고 그저 우리 앞에서 계단만 묵묵히 올라갔다.
그렇게 살짝 비좁은 계단을 지나 도착한 5층은 그나마 다른 층들과 달리 먼지도 적고, 가구들의 상태도 괜찮아 어딘지 모르게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났다.
조금 어두컴컴하고 의미불명의 그림들이 잔뜩 걸려있는 것만 빼고.
주변을 살펴본 지젤이 의미불명의 추상화 같은 그림을 감상하고는 말했다.
“요즘 그림은 이런 게 비싼가? 나는 아무리 봐도 뭘 그렸는지 모르겠는데. 마르낙, 어때? 이 그림 비싸 보여?”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지젤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내가 비싸다고 하면 지나가다 하나 슬쩍 훔치려고?”
“뭐래! 전혀 아니거든?!”
과하게 반응하는 꼴이 되게 수상했지만,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비쩍 마른 하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퀭한 눈으로 우리를 조용히 쳐다보며 우리가 자신을 따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따라가기나 하자. 구경은 나중에 나가는 길에 하고.”
“그래.”
지젤이 감상을 끝내고 내게 따라붙자, 하녀는 다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지젤은 여전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근데 분위기 하나는 꽤 괜찮다. 뭔가 으스스하고 수상한 느낌이 물씬 나네. 우리 교단도 옛날엔 이런 느낌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옛날에? 지금은 어떻길래?”
내 물음에 지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은 그냥 교단본부도 상단 휴게소 건물이 다 됐지. 마라트가 건물이 우중충하고 어두운 분위기면 다들 아침부터 힘 빠진다고 빤닥빤닥하게 다 쓸고 닦은 다음에 화사하게 꾸며놨어. 휴게실도 재단장해서 산뜻하게 만들어놨고. 진짜 사제들이 딱 일하다 돌아와서 쉬기 좋도록 모든 걸 맞춰놨어.”
걸어 나가던 지젤의 하얀 손가락이 고풍스러운 가구를 툭툭 두드렸다.
“대부분의 사제들은 그 변화를 좋아하긴 했어도. 소수의 사제들은 그래도 명색이 악신의 교단인데 어느 정도 분위기는 챙겨야 하지 않나 하는 의견을 품긴 했지. 마라트한테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그거 소수의 사제들이 아니라 그냥 네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 아냐?”
지젤은 볼을 작게 부풀리고는 톡 쏘는 목소리로 내게 쏘아붙였다.
“그래! 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아니, 좀 분위기 있고 어두컴컴하면서도 느낌 있는 그런 실내장식으로 꾸미면 어디 덧나? 무슨 그림자 교단이 유채색에 밝고 산뜻한 분위기로 교단을 꾸며! 진짜 멋없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실용성을 중시해 교단을 편의시설로 개조한 마라트의 의도가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굳이 그 말을 지젤에게 내뱉는 멍청한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래. 마라트가 잘못했네.”
“그렇지?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내 대답에 대번에 지젤의 안색이 밝아지는 걸 보니, 역시 괜히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이야기가 나온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주인님께선 방안에 계시니 들어가시면 됩니다.”
퀭한 눈의 비쩍 마른 하녀가 우리의 대화를 끊어내고, 조용히 굳게 닫힌 문 옆에 서서 우리를 쳐다보았다.
보통 이런 건 문을 직접 열어주지 않나?
꼿꼿이 선 하녀는 절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나는 직접 문손잡이를 잡고 돌려 한 쌍의 문 중 한쪽의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익.
삐걱 거리는 소리를 내뱉으며 밀려난 문 뒤로 드러난 공간은 꽤나 널찍한 서재 같은 곳이었다. 방안에는 자그마한 창문 단 하나뿐이라 전체적으로 조금 어둑했는데 그걸 고려한 것인지는 몰라도 서재 곳곳에 불붙은 초들이 놓여있었다.
다만, 양초로서는 넓은 서재 전체를 밝히기에 부족한 터라 방은 여전히 어두컴컴한 편이었다.
자그마한 창문 너머로 눈 내리는 광경이 보이고, 그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온 은은한 빛이 비치는 곳엔 오래되어 보이는 책상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 책상 너머엔 이 방의 주인이자 우리가 찾던 정보상으로 보이는 기이한 모습의 사내가 몸을 굽히고 앉아있었고.
사내는 자신의 하녀처럼 전신이 무척이나 깡말랐는데, 그 깡마른 몸에 걸맞지 않게 커다란 의자에 앉았음에도 그 의자보다 몸이 길어 몸을 조금 굽혀야 할 정도였기에 사내의 키 자체는 무척이나 큰 듯했다. 대충 어림잡아도 저 사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면 성인 남성보다 족히 머리 두세 개는 더 얹어놓은 키일 게 분명할 정도로.
톡톡.
그는 얇고 삐쩍 마른 데다 길기까지 한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더니 얇고 긴 입술에서 말라비틀어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의자에 앉으시지요. 손님분들.”
퀭하다 못해 텅 비어 보이는 멍한 눈이 책상 앞에 놓아둔 두 개의 의자로 향했다. 나와 지젤은 그의 말대로 우리를 위해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그는 우리의 모습을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제게 정보를 사러 오셨겠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쩍 마른 사내가 고개를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무슨 정보를 사러 오셨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살 정보가 여럿인데 괜찮아?”
“팔 것이 많다면야 저야 좋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일단 이 여자를 알아?”
나는 품속에서 디스펜스가 그려준 페리토드의 초상화를 꺼내 비쩍 마른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는 길고 얇은 손가락으로 내게서 초상화를 건네받아 살펴보았다.
텅 비고 퀭한 쓸데없이 커다란 눈이 초상화를 핥듯이 훑길 한참.
그는 조용히 내게 다시 초상화를 내밀었다.
“압니다. 다행히 제가 아는 분이시군요.”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아?”
“그건 곧 알 수 있겠지요.”
곧 알 수 있다? 대답이 뭔가 이상했다.
“그 말은 이 여자가 어딨는지에 대한 정보를 팔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팔아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는 말라붙어 갈라진 입술을 텁텁한 혀로 한 번 핥더니 지젤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젤은 왜 쳐다보냐는 듯이 비쩍 마른 사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비쩍 마른 사내는 여전히 지젤을 지그시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고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서 정보를 사시려거든 훔쳐 가신 1층 가구들과 저희 집 대문부터 돌려주셔야지요. 그것이 응당 맞는 도리 아닙니까?”
“…”
나까지 조용히 지젤을 쳐다보자 지젤은 살짝 볼을 붉히곤 말라비틀어진 사내와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슬쩍 돌렸다.
마치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