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52
153화
Chapter 14. 마리오네트의 비극
소녀는 묘실의 긴 회랑을 걷고 있었다.
짧게 잘린 검은 단발이 목덜미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바싹 마른 몸에 커다란 검은 눈, 방황하는 시선. 소녀는 잔뜩 겁에 질린 생쥐를 닮았다. 도살장에 억지로 끌려가듯, 소녀는 주춤거리며 냉기 서린 묘실을 건넜다.
묘실 양옆의 커튼은 활짝 젖혀져 있었다. 흰 로브를 입고 눈을 가린 수백 명의 성녀와 신관들이 소녀가 지나온 길에도 지나갈 길에도 줄지어 늘어선 광경이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
분명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어쩐지 그들의 시선이 저를 좇는 느낌이었다.
소녀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아그네스 님.”
묘실을 중간쯤 지나쳤을 때, 나직한 목소리가 고요한 묘실을 울렸다.
소녀는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니 흰 로브를 뒤집어쓴 신관이 서 있었다. 소녀는 긴장으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가, 상대가 로브의 후드를 살짝 젖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룬.”
성녀, 아그네스는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신관의 소매를 잡았다. 회랑의 기둥 너머, 마리오네트들의 전시실로 그를 이끌었다. 뻣뻣하게 박제된 마리오네트들을 지나쳐 회랑의 구석으로 숨어들고 나서야 신관이 후드를 완전히 벗어젖혔다.
아그네스는 들뜬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하도 오지 않아서 헬라르께 들킨 건 아닌가 하고 걱정했어.”
“아슬아슬했던 때가 있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그래서, 뤼켄과 연락은 닿았어?”
하룬은 복잡한 눈으로 어린 성녀를 내려다보았다. 성녀는 몇 달 전 떠나올 때보다 확연히 말라 보였다. 그의 소매를 잡은 마른 손에 뼈마디가 툭툭 불거져 있었다.
“지난번에 그들이 대악마 소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었잖아. 그들에게 내 의사는 전달했어?”
아그네스의 검은 눈이 기대감으로 타올랐다. 이번 대의 성녀, 아그네스 라그놀라가 뤼켄의 악마 소환 계획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몇 달 전, 대륙 서부에서 뤼켄의 마법사들과 성기사들 간의 충돌이 있었다. 거기에서 사로잡은 뤼켄의 간부 중 한 명에게서 얻어 낸 정보였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헬라르와 비등한 힘을 가진 마법 가문이 결전을 준비한다.
그들이 가장 먼저 노릴 것은 당연히 성녀였다. 헬라르를 품은 그릇. 여신의 마리오네트. 그 사실을 알자마자 아그네스는 그녀의 수족을 몰래 성전에서 빼내 뤼켄으로 보냈다.
목적은 분명했다. 도움 요청.
아그네스가 성녀로 각성한 것은 재작년의 일이었다. 권능이 발현되자마자 이 바리엔으로 끌려온 뒤, 아그네스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던 적은 손에 꼽았다.
여신은 그녀에게 그녀의 의지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주지 않았다. 다음에는 또 언제 이렇게 제대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그네스의 눈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왜 대답이 없어? 질질 끌 시간 없단 말이야. 여신께서 또 부르셔서 가 봐야 해.”
하룬은 속으로 혀를 찼다. 가여운 것. 그는 재촉하는 성녀를 내려다보며 선선히 대답했다.
“예. 전달했습니다.”
“대답은?”
“뤼켄의 가주가 긍정의 뜻을 표해 주었습니다.”
아그네스의 검은 눈이 순식간에 기쁨과 환희로 물들었다. 그녀가 하룬을 시켜 뤼켄 측에 전달하도록 한 전언은 이랬다.
당신들의 악마 소환 계획을 눈감아 줄 테니, 나를 바리엔에서 빼내 달라. 나를 내 고향으로 데려다 달라.
“예정된 소환식은 이달 말일입니다. 뤼켄 측에서 마법사를 보내오는 건 다음 달 중순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한 달……. 응,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
아그네스는 떨리는 웃음을 뱉어 냈다. 하룬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그 악마 소환 건, 헬라르께 들키지 않을 자신은 있으십니까?”
“당연하지. 그것도 생각 못 했을까 봐?”
아그네스는 해맑게 웃었다. 헬라르에게 조종당하고 있을 때, 그녀의 사고는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무의식과 영혼 한 조각까지 전부 여신의 손 아래 있다.
그때의 성녀는 백치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중요한 기억은 그녀 자신조차 잊어버려야 한다. 아그네스는 흰 성의 밑으로 둥근 환을 꼭 움켜쥐었다.
하룬이 나직하게 경고했다.
“그걸 계속 복용하시면 나중에는 정말 백치가 되실 텐데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걸, 뭐.”
아그네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환을 입에 넣고 씹어 삼켰다. 단기적으로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약이었다. 효과는 마약에 가까웠다.
“다음 달 중순.”
아그네스는 딱 그 사실 하나만을 뼈에 새겼다.
“다음 달 중순에 나를 코웰로 돌려보내 줄 사람이 올 거야.”
코웰은 라타에 남부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아그네스는 그녀가 떠나온 작고 허름한 고아원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입가엔 여전히 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사고가 몽롱하게 멀어지다가 산산이 조각나 허공으로 흩어졌다. 아그네스는 뤼켄도, 악마도, 그녀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사실도 당연하단 듯이 잊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검은 눈은 다시 텅 비어 있었다. 마른 몸이 바람 부는 들판에 놓인 연약한 갈대처럼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하룬이 그녀를 반쯤 들다시피 하고 다시 회랑 위로 올라섰다.
묘실 끝에는 왕좌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하룬이 문에 손을 대기도 전에, 문이 두 팔을 벌리듯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성스러운 기운이 문밖으로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딸아.]여신의 부름에 축 늘어져 있던 아그네스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하룬의 품을 벗어나 제 발로 왕좌의 방으로 들어섰다.
마른 몸이 까마득히 높은 계단을 올랐다. 왕좌 앞까지 도착한 아그네스는 여신이 그녀를 이끄는 대로 왕좌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황금빛으로 빛나는 두 손이 아그네스의 여린 양어깨를 짚었다. 헬라르는 어린 인간의 목으로 목소리를 냈다.
“하룬.”
왕좌의 계단 아래 부복하고 있던 하룬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새로운 악마의 주인이 될 예정이라던 그 뤼켄의 아들은 잘 처리했니?”
“부상을 당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하룬의 입에서 술술 대답이 흘러나왔다. 헬라르는 기껍게 웃었다.
사라락. 아그네스가 앉은 왕좌 밑으로 여신의 금빛 옷자락이 우아하게 미끄러졌다.
“그래. 그럼 첫째는 잘 처리한 셈이고. 남은 건 둘째, 그리고 셋째인가?”
“셋째는 아직 어리다 합니다. 아마 둘째 딸에게 순서가 돌아가지 않을까 합니다.”
“둘째는 어디 있지?”
“에엘, 뤼켄의 본저에…….”
“그래. 그럼 내 기사들이 다음으로 향할 곳은 명확하구나.”
“예. 전달해 놓겠습니다.”
헬라르는 어린 딸의 창백한 뺨을 쓸었다. 인형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네가 그래 봤자 내 손 안인걸, 아그네스.”
성녀는 헬라르의 소중한 그릇이었다. 깨지지 않도록 귀히 아껴 줘야 할 그릇. 그녀의 눈을 피해 감히 장난질을 시도하려고 한 것은 괘씸하지만……. 지난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이런 깜찍한 짓을 하려 한 그릇들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헬라르는 계단 아래 부복한 인간의 등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바리엔은 온전한 헬라르의 왕국이다. 아그네스가 그녀의 눈을 피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성기사들이 라나크 뤼켄이 기거하는 아카데미를 습격해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다음 달에도, 다다음 달에도, 1년이 지나고 5년, 10년이 더 지난대도 아그네스를 코웰로 돌려보내 줄 이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헬라르의 성력이 천천히 아그네스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온전히 여신의 지배 아래 놓인 아그네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룬. 이 땅에 나타났다는 또 다른 내 ‘그릇’은 어찌 되었지?”
“그게…….”
하룬의 낯에 곤란한 빛이 스쳤다. 정체 모를 여자의 손목에 각인을 새겼다는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여자의 기척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이다.
“다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빠른 시일 내로 잡아들이겠습니다.”
“그러렴. 굳이 내가 나설 필요 없게.”
헬라르는 고개가 바닥에 닿을 만큼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인간을 보며 미소했다.
그러나 헬라르조차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은, 또 다른 ‘그릇’이 그녀가 알지 못하는 힘을 가지고 바로 그녀의 왕국에 숨어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