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4
4화
지칼이 마침내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보폭으로 테이블 옆을 지나치던 그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무언가를 집어 리즈벨에게 던졌다.
“자, 받아라. 네 시녀가 두고 간 모양이로구나.”
“……?”
“누군지는 몰라도 충직한 시녀로군.”
리즈벨은 멍하니 치맛자락을 스치고 떨어진 작고 납작한 통을 내려다보았다. 연고였다.
지칼이 문밖으로 사라진 뒤에도 리즈벨은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의심이 가득 어린 푸른 눈이 바닥을 구르는 작은 통을 응시했다.
발디마르의 수치인 데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왕녀를 진심으로 챙기는 시녀는 한 명도 없었다. 그녀를 거의 키우다시피 한 유모마저도 리즈벨이 광증을 보이기 시작한 뒤부터는 그녀를 멸시하기 일쑤였다.
리즈벨은 손을 뻗어 작은 연고 통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자신이 방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럼 이 연고는 누가 가져다 둔 거지?
의문은 오래도록 해결되지 못하고 남았다. 누가 두고 갔는지도 모를 연고를 사용할 수는 없었기에, 리즈벨은 일단 그것을 서랍 안에 넣어 두었다.
생각은 곧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 지칼이 뱉고 간 말은 그냥 흘려들을 말이 절대 아니었다.
“이번 사절에는 제국의 거물들이 많이 온단다.”
제국에서 사신이 온다. 심지어 사절단의 수장은 황제의 오른팔, 나르나크 공작이라고 했다.
리즈벨은 지칼에게 그 소식을 들은 다음 날부터 종일 왕성을 헤집고 다니며 사절단에 관한 정보들을 엿들었다. 왕녀가 국사에 관심을 둔다는 말이 나돌면 안 되었으므로 조각조각 주워듣는 수밖에는 없었다.
희한하게도 왕성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주요 화제는 사절단의 수장인 나르나크 공작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파견 명단에 그 사람이 있었대. 라타에 마탑의 주인.”
“들었어. 그래서 전하께서 몹시 꺼림칙하게 여기셨단다.”
“그러실 만도 하지. 세상에나, 마법사를, 그것도 제국 마탑의 주인을 볼 수 있다니.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잖아?”
“그렇지. 그런 거물이 왜 이 마법의 불모지까지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사. 리즈벨은 생소한 기분으로 그 단어를 곱씹었다.
발디마르는 여신 헬라르를 따르는 전사들의 국가였다. 마탑도 없고, 국가적으로 마법사들을 양성하지도 않는다. 발디마르에서 마법적 재능을 보이는 이들은 대부분 라타에로 보내지곤 했다.
라타에의 마탑은 발디마르뿐 아니라 온 대륙의 마법사들이 전부 열망하는 마법의 성지였다. 그 대단한 곳의 수장이 이곳으로 오다니.
‘신기하네.’
하지만 그뿐, 리즈벨의 생각은 곧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나르나크 공작과 마탑주. 그만한 거물이 둘이나 발디마르로 온다. 사절의 목적은 명확했다. 10년에 한 번, 동맹 협약을 공고히 할 겸 반 속국이나 다름없는 발디마르를 감시하러 오는 것이다.
사절이 머무는 동안에는 관심이 온통 그쪽으로 쏠릴 게 분명했다. 아무리 잔혹한 왕과 왕자라 해도 그 기간에는 왕성에 피를 뿌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라타에의 심기를 거슬러 좋을 것이 없으니까.
그러니 발디마르 왕위 계승전은 그 기간에는 멈춘다. 10년에 한 번 돌아오는 일종의 암묵적인 휴전 기간인 셈이었다.
이건 위기일까, 기회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였다.
‘그렇다면…….’
리즈벨이 기둥 뒤에 숨어 한창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던 때였다.
“너, 여기서 무엇 하니?”
무심히 내려앉은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그녀를 덮쳤다.
“……!”
리즈벨은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라 후닥닥 기둥 반대편으로 숨어들었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세차게 뛰었다. 이 느릿하면서도 조용한 목소리. 알고 있다.
하지만 놀란 채 오래 있으면 안 되었다.
리즈벨은 활짝 웃으며 기둥 뒤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로제스 오라버니.”
그녀보다는 채도가 낮은 금발에 짙푸른 눈. 그러나 형제자매 중에서는 그녀와 가장 닮은 색채를 지닌 오라비, 2왕자 로제스가 서 있었다.
연무장에 들렀다 오는 길인지 그는 딱 붙는 검은 훈련복 차림이었다. 민소매 아래로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만 같은 두툼한 팔 근육이 드러나 있었다.
지칼같이 거대한 체구는 아니었으나 로제스 역시 타고난 전사였다. 다만 지칼이 거대한 사자과라면 로제스는 날렵한 표범과에 가까웠다.
늘 허리춤에 찬 검 자루에 손을 얹고 있는 것이 그의 습관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등골이 서늘했다.
리즈벨은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미워. 깜짝 놀랐잖아.”
저자는 늘 등 뒤에서 다가온다.
로제스 발디마르. 리즈벨의 둘째 오라비가 뒤에서 5왕자의 목을 통째로 날려 버린 것이 바로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늘 족제비같이 깐족대며 그녀를 희롱하던 5왕자의 머리통이 바로 발밑까지 굴러왔었다. 형제의 잘린 목에서 솟구친 피를 뒤집어쓴 로제스의 표정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찌 보면 텅 빈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르게 보면 밀도 높게 꽉 채워져 돌덩이처럼 무기질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눈. 로제스는 저 무심한 얼굴로 3왕녀와 5왕자를 죽였다.
지칼이 제 과격한 성질머리를 온갖 곳에 풀어 놓는 자라면 로제스는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자였다.
하지만 그는 이상할 정도로 리즈벨에게는 한 톨의 관심도 없는 오라비이기도 했다.
뭐, 경멸하는 거겠지. 발디마르를 욕보이는 눈엣가시 같은 누이라 상대하기도 싫은 걸 테다.
리즈벨보다 아주 살짝 더 짙은 푸른빛 눈이 똑바로 그녀를 응시했다. 로제스가 조용히 물었다.
“여기서 뭐 하는 중이냐고 물었어.”
“내가 못 있을 곳이 있어?”
리즈벨은 눈을 새초롬하게 뜨며 되물었다.
“여기는 내 집인데.”
로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 대의 발디마르 왕족 열 명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셋의 공통점이 있다면, 눈치가 굉장히 빠르다는 것이었다. 쟁쟁한 형제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죽을힘을 다해 상대를 살피고 수를 읽어 내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칼을 가장 전면에서 상대하는 로제스의 눈치야 리즈벨보다 더 빠르면 빨랐지 절대 느리지는 않았다.
“엿듣는 습관은 좋지 않아.”
리즈벨이 로제스의 그 말에 초연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은 무서울 정도의 반사 신경 덕분이었다. 그녀는 기둥을 끌어안으며 순진하게 말을 반복했다.
“내가 못 들을 말이 있어?”
“…….”
“여기는 내 집인데.”
로제스가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죽 훑었다. 그의 짙푸른 시선은 가끔 지칼의 대놓고 적대적인 시선보다 더 견디기가 어려웠다.
무감하고 불투명하다. 리즈벨이 그 눈 안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으니 형제들은 대부분 로제스를 싫어했다.
푸른 시선이 잠시 리즈벨의 흰 옷자락과 발 어디쯤 머물렀다가 이내 떨어졌다.
“……저녁에 아버지께서 부르실 거다.”
아버지가?
리즈벨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마 남은 왕족 셋을 저녁 만찬에 소환할 예정이라는 뜻일 것이다. 리즈벨은 활짝 웃었다.
“내 춤이 좋으셨나 보다. 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렸다니 기뻐.”
“글쎄. 좋은 일일까.”
이상하다. 이상하게 로제스가 오늘 말이 많았다.
남자가 리즈벨의 바로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누이. 조심하는 게 좋아.”
그 마지막 말만 아니었더라면 그저 로제스의 이유 모를 기행이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
광증을 보이는 누이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것은 이상하다.
설령 리즈벨이 광녀가 아니라 정상인이라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 제 심장을 노릴지 모르는 누이에게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건, 역시 이상하다.
로제스의 모습이 왕성 어딘가로 사라지고 난 뒤에도 리즈벨은 기둥을 끌어안은 채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풋 웃음이 터졌다.
“아…… 하하하.”
여린 손톱이 단단한 기둥을 까득거리며 긁었다. 왕성 한가운데서 기둥을 끌어안은 채 폭소를 터뜨리는 리즈벨의 모습은 이질적이기 짝이 없었다.
지나가는 시녀들이 질린 눈으로 리즈벨을 흘끔거렸다.
또 저러네. 저러다 또 발작을 일으키겠지. 제 명줄을 제 손으로 불태우는구나.
리즈벨은 제 등 뒤로 오가는 이야기들을 전부 들었다. 그리고 눈이 돌아갈 정도로 크게 웃어 젖혔다.
“아하하…….”
울 수가 없으니 웃을 수밖에.
토할 것같이 속이 울렁거렸다. 먹은 것도 없는데 위액이라도 게워 내고 싶었다. 웃는 와중에도 절망이 뇌를 갉아먹고 있었다. 맹독처럼 서서히 증식해 세포를 마비시키고 이성을 잠식한다.
리즈벨은 동물적인 본능으로 알았다.
들켰다. 로제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