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285
283화 태우는 것도 깔끔하죠 (2)
“뭔데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뒤에 나온 말은 전혀 엉뚱한 소리였다.
“휴식을 취해 두는 편이 좋지 않겠나.”
“던전에서도 그렇고 밖에 나와서도 전 딱히 한 일 없이 쉬었는데요.”
입만 움직였지. 좀 졸리긴 했는데 지금은 멀쩡하다.
“말 돌리지 마시고요.”
성현제가 미간을 약간 좁혔다. 뭐랄까, 곤란한 듯한 표정이었다. 뭔지 더더욱 궁금해지네. 말하기 꺼려지는 내용인 건가. 왜지. 그런 눈치 안 살피는 편 아니었던가.
…아 혹시.
“제가 너무 약한 꼴을 보여서, 그래서입니까?”
썩은 속을 토해 놓았더니 역시 안 되겠다 싶어지기라도 한 걸까. 예전 같았으면 또 성현제의 기준에 못 미쳤구나, 가슴이 서늘해졌을 텐데 지금은 괜찮았다.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전처럼 주눅 들진 않았다.
어쨌든 날 신경 써 주고는 있잖아. 여전히. 아니었으면 이미 대놓고 말했겠지.
“전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완벽하진 않을 겁니다. 아시겠지만. 그러니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이제 와서 더 무너질 것도 없고, 지금은 무슨 말이든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거든요.”
“어째서지.”
“예?”
“그 속을 전부 드러내고 싶다네. 깊은 곳까지 모두.”
나직한 말에, 순간적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공포 저항은 발동하지 않았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하려면 할 수 있지. 언제든지.”
약간 나른하게까지 느껴지는 무덤덤한 목소리가 오히려 더 소름 돋게 다가왔다. 분명 위협적이지도, 무섭지도 않은데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안 할 거잖습니까. 이제 와서 뭘 새삼.”
내 말에 성현제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도련님이 답지 않게 인내심이 강하다고 생각한 것이 엊그제 같건만.”
“성현제 씨도 참는 건 별로 안 어울리는데 말입니다. 너무 참으면 병나요.”
“다행히 S급 정도는 되어서 튼튼하다네. 그리고 참지 않는다면.”
시선이 나를 스윽 훑어보았다. 속을 꿰뚫기라도 할 듯한 시선이다.
“한유진 군이 남아나질 않겠지. 부스러기 정도나 흩어질까.”
“파헤쳐 보고 싶은 게 많으신 모양입니다.”
“목록을 만들어야 할 정도야.”
그건 그렇겠지. 일단 가슴 속 마석의 상태에 대해서도 궁금할 테고, 내가 왜 그렇게까지 힘들어했는지도 의문일 것이다. 지금의 나는 사실 그리 큰 상처는 가지고 있지 않아야 했으니까. 부모님은, 오래전 일이고 동생과도 사이가 좋아졌고 미래가 불안해도 일단은 잘 먹고 잘살고 있지.
그 밖의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니 예민한 파트너 씨께서 여태껏 참아온 것만 해도 대단하다 싶었다. 여기에 자기 일까지 겹쳤으니 터질 법도 했는데, 그걸 억누르고 있는 걸까.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친애하는 파트너 씨의 속을 태워서야 면목이 안 서죠.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말해 주겠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네.”
만약 패륜아들이 내 회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상대가 단 한 명뿐이라고 한다면 나는 고민할 것 없이 유현이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결정한다면, 그 상대는 성현제여야 할 터였다.
그는 나 이상으로 회귀 전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기억, 잠든 초승달, 체인질링, 송태원과의 일까지. 게다가 회귀 전 세상을 구하려고 했던 사람은 사실상 성현제였을 것이다. 초승달의 간섭으로 잠적해야 하지 싶었지만, 얌전히 몸을 숨기고 있지만도 않았겠지.
‘적어도 초승달에 대한 사실만큼은 말해 줘야 할 테고.’
그의 자유가 걸려 있는 일이니.
“패륜아들이 말해선 안 된다고 했지만, 저도 더는 얌전히 따를 생각 없습니다. 어떤 영향이 미칠지 확인 정도는 해봐야겠지만 말할 겁니다.”
“내게 말인가.”
“첫 번째는 유현이에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그다음은 성현제 씨, 당신이겠지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확실한 건, 기분 나빠 보이진 않았다. 옅게 미소마저 띤다.
“한유진 군에게 있어 내가 도련님 다음이라니. 영광이로군.”
“아 뭘 멋대로 착각하십니까. 이번 일에 있어서고 아니거든요? 우리 애들만 해도 한둘이 아닌데 뛰어넘지 마시죠.”
괜히 투덜거리다가 성현제와 시선을 마주했다. 원래라면 이렇게 마주 보고 있을 일, 없었을 텐데. 새삼 신기하다 싶었다. 정말로.
“기분 꿀꿀할 땐 단게 좋대요.”
인벤토리에서 별사탕 병을 꺼내 하나를 성현제에게 내밀었다.
“맛있더라고요.”
분홍색 반짝거리는 별사탕이다. 따끈따끈 별사탕이라더니 먹으면 속이 훈훈해져 기분도 절로 편안해졌다. 그걸 가만히 바라만 보던 성현제가 별사탕을 받아먹었다. 커피는 치워버리라고 해야지, 쓰기만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운지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드디어 납시셨구만.
“몬스터들을 모아서 한 번에 처치하겠다고?!”
우렁우렁한 외침과 함께 덩치 큰 사내가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비릿한 쇠 냄새 같은 것이 훅 풍겨왔다. 부상을 입은 것 같진 않지만 아마테라스 길드도 피해가 컸겠지.
“그게 가능한 건가?”
“부탁하는 입장인데 목 한번 꼿꼿하시네.”
내 말에 시시오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자존심 상하시겠지. 하지만 이대로 일본이 폭삭 망하게 되면 기반 버리고 타국으로 망명해야 할 판이다. S급 헌터니 받아주는 곳이야 많겠지만 왕 노릇은 끝난다.
그나마 아이템은 챙겨갈 수 있겠지. 하지만 자기 소유 던전 없이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 나라든 이미 중대형 길드들이 자리 잡은 후니까. 적당히 중간쯤 가는 거야 쉽겠지만 꼭대기에 앉아 있던 사람이 성에 찰리가.
“…아직 방법도 확실치 않은데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냐.”
“못 믿으면 뭐, 어쩔 건데요? 한국 갈까요? 그리고 도움 받는 입장에서 밑천 다 털어내 놓아 보라는 건 완전 도둑놈 심본데.”
내 스킬을 어느 정도 들키기는 할 것이다. 대놓고 쓰는데 완전히 감추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줄줄이 설명하길 요구하는 건 물에 빠진 쪽에서 할 짓이 아니지.
“뭘 던져주든 간에 붙잡고 기어올라 와야 할 판에 말이야. 됐고 계약서나 작성하죠. 깔끔하게 마리당 보상 하나.”
“마리당?”
“예. SS급 한 마리당 SS급 장비. S급 한 마리당 S급 장비나 던전 권리. 물론 고를 권한은 제게 있습니다. 와, 진짜 선심 썼다. 솔직히 배로 요구해도 받아들이고도 감사하다 머리 숙여야 할 판인데.”
내 말에 시시오의 얼굴이 더더욱 구겨졌다. 주변 다른 일본 헌터들 또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일본의 SS급 장비를 모조리 쓸어갈 셈이냐!”
“고작 다섯 개 가지고 뭘 그럽니까. 그 배는 가지고 있을 거면서. 그리고 후불로 챙겨갈 건데요? 지금 있는 건 우리 애들한테 안 맞는 게 많을 거라. 아, 앞으로 나오는 SS급과 S급 아이템 전부 제게 상세보고 해야 한다는 조건도 추가해야겠네요. 그래야 고르지.”
“뭐? 이 자식이!”
SS~S급 아이템을 상세보고 해야 한다. 이건 어느 길드든 펄쩍 뛸 만큼 불리한 조건이었다. 장비 능력치를 죄다 남에게 밝혀야 한다는 뜻이니까. 약점까지 모조리. 특히나 일본은 길드끼리 싸움이 잦았으니 더더욱 거리껴지겠지.
“어휴, 무서워서라도 집에나 가야겠다~”
혀를 쯧쯧 차며 의자를 하나 빼어 걸터앉았다. 피스가 무릎 위로 올라오며 시시오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예림이와 노아가 그런 내 양옆으로 지키듯 섰다. 명우와 문현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성현제 또한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시시오 씨도 이쯤에서 관두고 고향 땅으로 가시든가요. 아프리카 사바나, 좋잖아. 잘 어울리겠네.”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잖아도 굵은 목에 핏대까지 굵게 섰다. 어휴, 주먹에 힘 들어가는 것 좀 봐라. 저러다 한 대 치겠네. 팔뚝 굵어서 좋겠다.
“…만약, 네놈이 해결하지 못한다면.”
“보상해 주면 되잖습니까. 현재 일본에 나타난 SS급 몬스터 다섯 마리를 제거해 줄 것, 이렇게 조건 넣고 실패 시 보상으로 SS급 장비 다섯 개 드리겠습니다.”
실패할 린 없지만. 만약 일이 어긋난다 해도 상관없다. 기간은 넣지 않을 거니까. 게다가 내 저주 저항은 L급이고 아마테라스 길드 망하면 계약 지키란 압박도 못 주겠지. 아주 약간, 개미 눈곱만큼 미안해지네.
“화염뿔사자도 포함시켜라.”
“우리 애는 안 돼요. 향후 생포할 화염뿔사자에 그쪽이 원하는 기승수 우선적으로 키워 주는 것도 넣어 주죠 뭐. 보너스로.”
이 정도면 만족하냐는 듯 쳐다보자 시시오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계약서를 꺼내들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무려 SS급짜리다.
“아이템 상세보고는…….”
“반드시 넣어야죠. 좋은 거 빼돌리고 안 보여 줄지 누가 알아.”
“보안은 지켜라.”
“예, 예. 그것도 조건에 넣으세요. 계약 위반 페널티 뭐든 넣어도 됩니다.”
이런저런 조건 걸어가며 계약서를 작성했다. SS급 장비도 컸지만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건 S급 던전 권리였다. 한 마리당 하나. S급 몬스터의 수가 몇 마리나 될까. 물론 그걸 우리가 다 관리할 순 없고 가치가 큰 던전이 아니라면 첫 공략 보상 정도나 먹고 되팔거나 해외에 넘겨 버리면 된다.
“일본에 아마테라스 길드만 있는 거 아니잖습니까. 중형 이상 길드들 전부 서명하라고 하세요. 향후 생겨나는 길드 또한 마찬가집니다. 일본의 국제 기준 중형 길드라면 모두 이 계약에 해당되는 겁니다.”
편법 쓸 수도 있으니까. 소형 길드까지는 봐줬다. 시시오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여기저기 연락을 넣기 시작했다. 나한테 못 푼 화를 터뜨리는지 당장 오라며 버럭버럭 소리를 쳐댄다.
“화가 많으시네.”
그럴 거 같은 관상이긴 했어.
일본의 다른 중대형 길드장들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리를 보낸 곳도 있었다. 다들 나를 힐끔거리며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러는 사이 준비는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었다. 방어나 회피에 일가견 있다는 A급 이상 헌터들 백 명이 모이고 S급 이상 몬스터들의 위치도 파악되었다.
“반경 200km 내에 SS급 몬스터를 몰아넣기 위한 유인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SS급 몬스터는 최대한 중앙 지점에서 떨어뜨려 놓으세요. 마지막에 다다를 수 있도록.”
그렇게 해가 저물어갈 즈음, 유현이가 쉬고 있는 객실로 올라갔다.
“유현아, 들어간다.”
기척을 내고 문을 열었다. 거실의 의자에 앉아 있는 동생이 보였다. 천둥새의 예장을 걸치고 검을 가로로 길게 눕혀 들고 있었다. 점검을 하고 있었는지 주위로 다른 무기들도 보였다. 반쯤 내리뜨고 있던 눈이 천천히 들려 나를 향했다. 미소를 띠었지만 잘 갈린 칼날과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쉬라고 했더니.”
“쉬었어. 조금 전에 일어난 거야.”
“조금은 아닌 것 같다만.”
유현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볍기 그지없는 움직임이다. 인벤토리에서 와이어를 꺼내들더니 휘릭, 주위의 무기들을 단숨에 쓸어 감으며 정리했다.
“준비는 다 끝났어?”
“응. 이제 출발하면 돼.”
“그럼 가자.”
“걱정은 안 되냐?”
유현이와 함께 객실을 나서며 물었다.
“SS급 몬스터만 다섯 마린데.”
지금 유현이의 능력으로는 한 마리도 버겁다. 공격 스킬 효과 두 배가 적용된다 하더라도 스탯은 S급인 채니 목숨을 걸라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긴장감 하나 없었다. 오히려 살짝 기대하는 기색이었다.
“형이 나를 위험하게 만들 리 없잖아.”
“믿어 주는 건 고맙긴 하다만.”
“형 혼자나 다른 사람들과 나서겠다고 했으면 걱정했겠지. 하지만 나한테 부탁했으니까.”
녀석도 참. 약간 부스스한 동생의 머리칼을 정리하듯 쓰다듬었다.
“네 말대로 위험할 거 하나 없어. 신나게 날뛰면 돼.”
“응.”
“가는 데 시간 좀 걸린다니까 저녁 먹자. 뭐 먹을래? 만들어 줄게.”
“아무거나. 다 좋아.”
라운지로 내려가자 극명하게 갈린 분위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시시오를 비롯한 아마테라스 길드원들은 나라 망한 표정으로 한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자기들끼리 뭐라고 위로하다가 우리 쪽을 힐끔거렸다.
반면에 우리 일행들은.
“역시 SS급 거창은 없네. 이거라도 가지고 갈까.”
“언니, 이 허리띠 어때요? 옵션 괜찮아 보이는데.”
건네받은 아이템 목록을 신나게 뒤적이고 있었다. 아직 S급 장비가 부족한 편인 예림이가 제일 신났다.
“노아 헌터는 왜 앉아만 있어.”
“그러게, 이런 건 준다고 할 때 챙겨야 하는 거라고요!”
“아뇨, 전…….”
“이건 어때? 약간 개조하면 수화 상태에서도 쓰기 괜찮을 듯한데.”
“명우 오빠! 제 것도 봐줘요! 이거, 이 부츠요. 디자인 바꿀 수 있을까요? 여기 금속 장식 떼버리고.”
다들 쇼핑 삼매경인 게 보기 좋네. 흐뭇하다. 노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편히 고르라고 말해 주었다.
“노아 씨 도움도 받아야 하는데 골라 가셔야 제 맘도 편하죠.”
“아, 네. 그럼 조금만요.”
“많이 고르셔도 돼요. S급 몬스터 득시글하다던데 그만큼 우리가 가져가는 거니까. 파트너 씨는 눈에 차는 게 없으십니까?”
“괜찮아 보이는 활이 있더군.”
“길드원을 챙기시는 마음, 멋지네요. 소영 씨한테 목록 보내셔도 돼요. 기승수에 맞는 장비들 여럿 갖춰야 할 테니.”
기승수 욕심 때문인지 아마테라스 길드엔 상급 기승수 장비도 더러 있었다.
저녁 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향하자 명우는 물론 문현아도 거들어 주겠다며 뒤따라왔다. 성현제도 슬쩍 끼어들더니 남은 애들도 우르르 몰려와, 스무 살 이하는 출입 금지라며 쫓아 보냈다.
저녁 든든히 먹고 목적지로 출발했다. 화려하게 불타 버릴 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