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40
40화 건물주입니다
툭, 투툭.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정겹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여유로웠다.
소파에 길게 누워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은 피스의 가르랑거림을 듣고 있자니 늘어진 몸뚱이의 속도 겉도 전부 노글노글해진다.
역시 할 일 없이 한가한 게 최고다.
유현이도 예림이도 둘 다 던전에 들어갔다. 김성한도 A급 신규 던전 공략에 참가했다. 그에게 어떤 식으로 스킬을 써 줄까 고민하다가 일단 스탯부터 성장시키기로 하였다. 신규 던전의 추가 경험치를 놓치긴 아까우니까. 혹시나 싶어서 스탯 성장 집중으로 써 봤는데, 역시나 되더라.
명우의 칼 만 개 갈기도 순조로웠다. 하루 만에 천 개 갈았다가 다음 날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긴 했지만. 지금은 하루 사오백 개 정도로 타협했다.
도깨비는 그날 이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정체불명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의뢰를 받고 있으니 연락처를 알아내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찾아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제 또 이렇게 뒹굴거리겠냐.’
앞으로 바빠질 테니 쉴 수 있을 때 쉬어야지. 이것도 이제 곧 끝이지만.
유현이가 던전 공략을 시작한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다. 별일 없다면 오늘내일쯤에 나올 것이다.
아아, 더 놀고 싶다.
평생 놀고 싶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배경 1이 되고 싶다.
‘회귀 전에도 열심히 살았는데 왜 또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지.’
어린 동생 데리고 개고생하다가 세상 바뀌고 또 개고생했는데. 그나마 고생은 안 하니 다행인 건가.
“밥이나 먹을까.”
원래는 불규칙하게 대충 배나 채우는 편이었지만 요즘은 세 끼 꼬박꼬박 챙기고 있었다. 밥이 맛있으니까.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가지런히 쌓여 있는 반찬통이 보인다.
저 파김치, 진짜 맛있었지. 하얀 쌀밥에 매콤 알싸한 파김치 올린 것이 그렇게나 맛있을 줄은 몰랐다. 풀떼기는 고기가 곁들여야 먹을 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물론 고기반찬도 맛있기론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꽈리고추를 넣은 쇠고기장조림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갈비찜도 대단했지. 소시지 볶음은 놀랍다 못해 신기할 정도였다. 학교 급식으로 나오던 것과 겉보기엔 비슷한데 맛은 비교가 불가능했다.
‘명우 녀석 집 나갈 거 생각하니 벌써부터 우울해진다.’
라면이나 끓일 줄 안댔던 놈의 요리 실력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일취월장하냐. 역시 사기다. 알고 보면 명우 놈이 제일 사기캐인 거 아닐까.
마약 넣었나 의심되는 순두부찌개를 데워 상을 차리고 한술 뜨자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SS급 스킬 얻고 나서도 나한테 얹혀살지는 않겠지. 당연히. 사흘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대로 더 실력이 늘었다간 진짜, 시발, 어쩌냐. 지금이라도 끊어야 하나. 요리하지 말라고 할까. 이래서 예쁘면 3개월, 음식 잘하면 평생이란 말이 있는 건가 보다.
“슬프다… 가끔 반찬 받아 올 수 있을까.”
식탁을 치우고 피스에게도 밥을 주었다. 덩치가 커졌음에도 먹는 양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마석은 여전히 두 개만 먹었고 고기 양만 조금 더 늘어났다.
– 끄응, 끄응.
밥을 먹고 나자 피스가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낑낑댔다. 훈련을 끝낸 다음 날부터 밖에 나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종일 실컷 놀다가 집에 처박혀 있으려니 심심한 모양이었다.
“미안, 미안. 협상만 끝내면 매일 단련실 데리고 가서 놀아 줄게.”
– 끄르르.
달래 보았지만 피스는 팩 몸을 돌려 현관 중문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꼬리 끝이 불만스럽게 바닥을 탁탁 내리친다.
“우리 피스, 삐졌어?”
– 꾸우우.
“못 나가서 화났구나. 미안해.”
– 끼으응.
“조금만 참자, 응? 유현이 삼촌 곧 돌아올 거야.”
– 끼이잉, 끄웅.
꼬박꼬박 대답은 하면서도 뒤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었다.
“그럼 공놀이라도 할까?”
공놀이라는 말에 탁탁거리던 꼬리가 멈추었다. 눕져 있던 귀가 쫑긋 서며 내 쪽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대신 저번처럼 흥분해서 TV 부수면 안 된다. 조심해서 놀아야 해.”
– 끼앙!
피스가 자신 있게 대답하며 폴짝 뛰어왔다. 진짜 조심하겠다는 건지 그냥 신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부수면 또 사지 뭐. 아직 마석 팔고 남은 돈 많다.
그렇게 피스가 TV 대신 소파를 부숴먹고 있을 때였다.
삐리리릭.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명우가 벌써 왔나? 너무 빠른데.
“누구세요?”
[석시명입니다!]인터폰 너머로 대답이 들려왔다. 저 아저씨가 여기까진 웬일이지. 목소리도 어째서인지 평정을 잃고 있었다.
“피스야, 잠깐만 기다려.”
피스가 튀어나가지 못하도록 중문을 확실히 닫은 뒤 현관문을 열었다. 평소의 여유로움은 엿 바꿔 먹었는지 흥분하다 못해 상기된 석시명의 얼굴이 보였다. 뭐야, 무슨 일이지.
“왜 여기까—”
“한유진 씨!”
현관으로 들어온 석시명이 문을 쾅 닫으며 말했다. 이어 나를 와락 끌어안는다. 석시명 탈을 쓴 명우인가?!
“슬라임입니다!”
“예? 우왁!”
석시명이 헹가래라도 칠 듯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시발 잠깐만. 진정해라.
“잠깐 이것 좀, 악, 흔들지 마! 돌지도 마!”
미쳤나, 진짜!
“세상에! 어디서 이런 보물이 나타났을까!”
석시명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껄껄껄 웃었다. 시발 내려 줘. 스탯 B급인 거 티 내냐! F급 서러워서 못 살겠네!
석시명의 우악스런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욕만 하고 있을 때였다.
쿵!
– 캬아앙!
닫힌 중문이 크게 흔들리며 사나운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방금 그거—”
“당장 놔요! 피스야, 괜찮아!”
시끄럽게 구니까 애가 놀랐잖아! 석시명이 당황하며 나를 놓아주었다.
중문을 열자 털을 잔뜩 세운 피스가 튀어나와 앞발로 내 한쪽 다리를 감싸 안았다. 이어 석시명을 향해 사납게 송곳니를 드러낸다.
– 크르르르.
“괜찮아, 피스야! 진정해!”
얼른 피스를 품에 안아들고 부푼 갈기를 쓰다듬어 주었다.
– 크흥, 그르릉.
“그래, 그래. 괜찮아. 나쁜 사람 아니야.”
착한 사람도 아니지만. 회색빛깔 우리 편쯤 되겠다.
“전해 듣기는 했지만 정말 유진 씨를 잘 따르는군요.”
석시명이 감탄 어린 눈빛으로 나와 피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진정이 좀 됐나.
“그러니까, 신규 A급 던전이 슬라임 던전이 맞았다는 겁니까?”
“예. 한유진 씨의 예상이 정확했습니다.”
이 아저씨 눈깔에 또 광기 같은 것이 맴돌기 시작했다. 진정해라, 진정. 릴랙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들어가시죠.”
찬물이라도 좀 퍼부, 아니 마시게 해야겠어.
“공략은 끝났나 보죠?”
식탁 의자에 앉은 석시명에게 얼음물을 건네주며 물었다. 우리 집 냉장고에 얼음 정수기도 달려 있었다. 문짝 하나 달린 오래된 놈만 써 왔었는데.
“예, 조금 전 연락 받았습니다.”
석시명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런 그를 피스가 내 옆에 딱 붙은 채 감시하듯 노려보았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간간히 콧등을 찡그리며 작게 으르렁거린다.
“정말로 슬라임 던전이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랬겠지. 미래가 변하지 않는 한.
“정말로, 슬라임…….”
“물 좀 더 마시세요.”
흥분하지 말고. 석시명이 이번에는 벌컥벌컥 잔을 반쯤 비웠다. 그리고 말했다.
“좀 더 보안이 확실한 곳으로 옮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이곳은 A급 헌터 위주로 관리되고 있다 보니 방범 시설은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감시카메라도 입구에만 있고요. 그리고 이왕이면 위치추적기를—”
“거절합니다.”
내 안전에 집착하는 건 동생 놈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생판 남의 헛소리까지 들어줄 이유도 인내심도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싫습니다.”
석시명의 탈을 쓴 한유현인가. 또 그놈의 하지만이야. 단호한 내 말에 석시명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한유진 씨는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잘 모르시는 듯하군요.”
“대충은 압니다.”
내 가치라. 회귀 전에는 구르는 돌멩이 5,912번쯤 되었겠지.
“상급 기승수를 키워내는 것도, 던전을 예측하는 것도 무척이나 큰 파장을 불러올 능력이긴 하지요.”
“무척이나 큰 정도가 아닙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길드 정도가 아니라 국가에서 나서게 될 수도 있습니다.”
미국 놈들이 그랬듯이 말인가. 손에 쥘 수만 있다면 세계를 휘두를 수 있는 정보이긴 하다. 하지만.
“던전 예측은 아직 불확실합니다. 정확한 법칙을 발견해 낸 것이 아니라, 반쯤은 운에 기대는 가설이지요.”
진짜 계산해 낸 것도 아닐 뿐더러, 어차피 이번 슬라임 던전 같은 유명한 곳이 아니면 기억하지도 못했다. 던전이 한둘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결국 실제 제가 가진 것은 마수 사육사 스킬뿐입니다. 하니 협상만 잘 끝내면 과도한 보호까지는 필요 없어요.”
기승수를 키워내는 것만으로도 가치야 차고 넘치고도 남겠지만, 던전 생성 법칙에 비하면 약했다. 던전 생성 법칙을 알게 되면 가치 있는 던전을 선점할 수 있으며 신규 던전의 공략 안정성을 높이고 미발견 던전 브레이크를 막는 것도 가능해진다.
무엇보다도 그 정보만 손에 쥔다면, 단숨에 모든 길드를 발아래에 놓고 홀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상급 던전의 비율과 수가 늘어나는 수년 후라면 나라 단위까지 흔들 수 있겠지.
석시명이 그답지 않게 과히 흥분할 만하긴 했다.
“아직은 가설이라 해도 언젠가는 법칙이 될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만, 제 힘으로는 솔직히 역부족입니다. 저는 그런 쪽의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거든요. 대신 석하얀 씨가 있지요.”
“통계학 말입니까.”
길게 설명할 필요 없어서 좋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하얀 씨에게 연구를 맡긴다면 머잖아 법칙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왕이면 믿을 만한 연구자를 몇 더 구할 수 있다면 더 좋고요.”
이것도 석시명에게 떠맡기자. 각성자도 아닌 일반 학자 찾아다닐 능력은 없어.
“길드 차원에서 지원을 하라 이 말씀이십니까?”
“그럼 좋죠. 슬라임 던전 덕분에 웬만해선 자금 부족할 일은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이참에 던전은 물론 각성자까지 포함한 연구 시설 하나 만드시죠. 덧붙여 던전에 대한 자료 제공은 제가 맡아 주기로 했습니다.”
“자료 제공입니까.”
석시명이 뭔가 말하려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꽤나 수상하긴 하겠지. 그래도 어쩔 테냐. 길드장의 친형이고 S급 데려왔고 이젠 나도 유용한 특수 스킬 소유자인데. 수상한 점 한둘쯤은 모른 척 넘어가 줘야지.
“연구 시설 건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검토 말고 그냥 지르시죠? 선점이 최고예요. 빨리 시작해야 결과물도 빠르게 나옵니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년 단위로 걸릴 텐데. 내 말에 석시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승수 건으로 거대 길드들에게 시설 하나 뜯어내면 거기에 포함시키죠.”
“예? 뭘 뜯어내요?”
“몬스터들을 여기서 키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두 마리도 아닐 텐데. 옆 빌딩 밀어 버리고 새로 하나 세우려고요. 물론 저희 돈은 안 쓸 겁니다.”
능구렁이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돌볼 몬스터가 여럿 될 테니 확실히 여기서 케어하긴 힘들겠지만 외곽에나 지을 줄 알았는데. 통도 참 크셔라. 그것도 남의 돈으로.
“그래도 될까요? 괜히 반발이라도 사면…….”
“물론 건물주는 한유진 씨가 될 겁니다.”
“그래도 되죠, 완전 되죠.”
아니 이게 웬 떡이야. 생각지도 못한 부수입을 얻게 되다니. 석시명이 능구렁이가 아니라 꽃뱀처럼 보일 정도였다. 물론 꽃뱀도 뱀은 뱀이지만.
“협상 조건 중 하나로 넣을 생각입니다. 다른 길드들로서도 가까이에 위치하는 편이 나을 테니 어렵지 않게 뜯어낼 수 있을 겁니다.”
건물주, 그것도 새 빌딩의 주인이라니. 입꼬리야, 진정해. 너무 노골적으로 굴지 말자, 우리.
그럼 명우도 여기 말고 새 건물로 옮기게 하면 되겠다. 장비 제작소 크게 하나 넣고 판매도 협회에 수수료 떼 줄 필요 없이 바로 할 수 있도록 장소 마련해 줘야지.
“새로 건물을 짓는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 임시 장소를 마련하긴 해야겠군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각성자와 스탯을 올려 주는 장비가 있으니까요. 거기에 보조 스킬과 던전 부산물도 더해 주면 공사 기간이야 얼마든지 단축 가능합니다.”
각성자와 던전 아이템을 단순 공사에 들이붓겠다니, 엄청난 돈지랄이었다. 땅값, 건물값보다 공사비가 더 들어가겠네.
내 돈 아니니 상관없지만.
다 됐고 건물주잖아. 죽이는 위치에 특수 설비로 들어가는 자잿값도 어마어마할 테니 건물만으로도 내 머리로는 시세 측정이 안 될 정도였다. 거기에 명우랑 석하얀만 끌어들여도 미친, 가치가 진짜 미쳤다는 말밖에 안 나오네. 물론 나도 있고.
‘아니, 명우와 석하얀 둘 다 장소만 옮기지 말고 소속까지 그냥 내 쪽으로 할까.’
원래는 스킬 얻으면 해연에 넣을 생각이었지만 내 건물이, 대장간 넣을 장소가 생기면 굳이 그래야 할 필요는 없었다. 석하얀도 그렇고.
석시명은 땅을 치며 아까워하겠지만 해연이라는 아직 덜 자란 바구니에 너무 많은 것을 담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없잖아 있었다. 예림이에 더해 김성한까지 키워 주는 걸로도 충분하겠지.
애초에 해연은 던전 공략 위주의 헌터 길드다.
기승수 사육에 장비 제작, 던전 측정까지 단시일에 밀어 넣었다간 되레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아무리 몸에 좋은 귀한 음식이라 해도 소화를 시킬 수 있을 만큼 먹어야지.’
대책 없이 합치기보다는 세력을 나누어 서로 협력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다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 그때 가서 합치면 되니까.
‘좋아, 나누자.’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떠들어대는 석시명을 조금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줬다 뺏는 거 같아 미안하지만 그래도 해연이 1순위니 그걸로 만족해 주세요. 잘 크면 다시 돌려주기도 할 테고.
* * *
“…뭐라고?”
슬라임 던전의 등장으로 떠들썩해진 사이, 해연은 거대 길드들과 헌터협회에 마수 사육 스킬에 대해 넌지시 알렸다.
반응은 당연히 폭발적이었고 순조롭게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여길 오겠다고? 날 만나러?”
나는 황당해하며 소식을 전해 온 동생을 쳐다보았다. 아니 길드장이라는 인간들이 그렇게나 할 일이 없나, 뭐 하러 직접 납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