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62
62화 준비 끝 (2)
“드디어 연락 주셨네요. 기대해도 될까요?”
석하얀이 눈을 빛내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오늘도 피서지에서나 볼법한 화려한 롱원피스 차림이었다. 귀에는 커다란 파인애플 모양 귀걸이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우선 이것부터 보시죠.”
일본 던전의 자료가 담긴 태블릿을 내밀었다. 하얀 손가락이 두어 번 태블릿 위를 스치고, 그녀의 두 눈이 점점 커진다.
“이건…….”
석하얀의 손가락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시선이 바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석하얀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길게 심호흡하고는 입을 연다.
“확실하게 조사한 자료, 맞으시죠?”
“맞습니다. 장담하지요.”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이렇게나 많은 자료라니……. 게다가 확실하게 체계를 잡고 정리까지 하셨네요.”
“보충할 부분은 없습니까?”
“그걸 제게 물으시면 안 되죠. 전 아직 국내 던전도 몇 조사하지 못했는걸요. 헌터협회가 아직 협조적이지 않거든요. 물론 아직 뭐 하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허락해 주는 게 이상하긴 하겠지만요. 그래서 연구실을 차리려 한 거예요.”
“참, 혹시 연구실 문제로 해연 길드에서 연락하진 않았습니까?”
석하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이 도움 줄 의향 있다고 말해 왔어요. 하지만 어느 한 길드에 소속되는 건 내키지 않더라고요. 던전에 대한 연구 결과가 너무 영리적으로 이용되는 건 바라지 않거든요. 물론 해연 길드가 그럴 거라는 건 아니지만 던전 정보는 누구든 자유롭게, 최소한 대등한 비용을 지불하고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훌륭한 마음가짐이시군요. 저도 그에 동감합니다. 하지만 쓸 만한 결과물이 나온다면 석하얀 씨로서는 지켜내기 힘드실 겁니다.”
내 말에 석하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건, 그렇겠죠. 역시 해연 길드와 협력하는 편이 좋을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제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유진 씨가요?”
“네. 몬스터 사육 시설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물론이죠. 오면서 공사 중인 것도 봤어요. 아, 혹시!”
탕, 하고 석하얀의 손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뉴스에서 봤어요! 지금 들어서는 몬스터 사육 시설과 그 옆의 빌딩은 향후 5년간 다섯 길드의 보호를 받게 된다지요? 혹시 제 연구실 자리 내어주시게요?”
눈치 빠르네. 길게 설명할 필요 없겠다.
“네. 맞습니다. 적어도 5년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으니까요. A급 헌터가 상주하며 유사시 바로 옆의 해연 길드로부터 지원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면 이걸로는 부족할 것이다.
‘역시 S급 헌터가 필요하겠지.’
리에트 남매가 진짜 딱인데. 아니면 동생이라도. 길드 소속도 아니고 능력도 뛰어나고. 일단 맞팔은 해 놓았다. 서로 댓글 좀 달면서 보여 주기용 친분 쌓은 뒤에 본격적으로 연락할 생각이었다.
‘제일 좋은 건 최상급 몬스터지만.’
마수는 사람에 비해 회유당하거나 배신할 가능성이 훨씬 낮았다. 던전 공략하느라 자리 비울 일도 없고. 문제는 현재로서는 S급 헌터보다 최상급 몬스터 새끼 구하기가 더 힘들다는 거지만. 아직 딱 두 마리뿐이었다. 피스와 배 타고 오는 중인 한 마리였다.
S급 던전 공략이 가능한 길드에서 힘들게 구한 새끼 몬스터를 내어주려 하지도 않을 테고. 정 안 되면 내 보호용으로 줄 예정이라는 녀석이라도 붙여 줄까. 나야 뭐 앞으로 주위에 애들 득시글거리게 될 테니.
아직은 해연뿐이지만 여기저기서 새끼 몬스터들이 들어오게 되면 걔들 생각해서라도 길드들이 알아서 더 철저히 보호해 줄 것이다. 애들 두고 이런 말하기 뭣하지만, 일종의 인질이 되는 셈이었다. 아니, 몬스터질?
“무엇보다도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유수의 길드들이 알아서 찾아올 장소입니다. 상대적으로 자료가 부족한 상급 던전을 주로 공략하는 헌터들이 말입니다. 그것도 을의 입장으로 방문하는 것이니만큼 정보를 얻어내기도 어렵지 않겠죠. 이 부분의 협조도 물론 해드릴 생각입니다. 뿐만 아니라 던전 연구 결과를 가장 필요로 하게 될 상급 헌터들인만큼 석하얀 씨께서 따로 연줄을 엮어 놓으실 수도 있을 것이고요. 하시기에 따라 제 도움 없이도 연구실이 얼마든지 커질 수 있을 겁니다.”
연구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독립적인 거대 기관도 충분히 될 수 있었다.
“아…….”
석하얀이 얼어붙었다.
“어, 그런가요? 그렇겠네요?”
“일단 S급 헌터라면 모두 한 번 이상은 찾아오게 될 테니까요. 특히 최상급 몬스터를 맡겨야 한다면 불안해서라도 직접 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니면 최소 A급 헌터라도 여럿 딸려 보내겠지.
“저기, 저는, 솔직히 그런 것까지는 어려워서요.”
석하얀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조부님께서 인맥이 무척이나 좋으신 편이라 학위 따면서도 아쉬운 소리 할 일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단순히 연구회 발표 같은 게 아니라 결과물 가지고 흥정 조율하는 건 좀…. 연구실에서 석 달 열흘 두문불출하는 건 잘하지만요.”
“저한테는 제안 잘 하셨잖아요?”
“아이, 그건 제안이라기보단 들이받기였죠. 또 한유진 씨를 같은 연구 종사자 정도로 생각했고요.”
하긴 무작정 같이 연구해요! 협력해요! 소리쳤었지.
“걱정 마세요. 애초에 석하얀 씨 혼자 다 맡을 순 없고, 그래서도 안 되죠.”
자잘한 일까지 다 하기엔 석하얀이 아깝지. 또 관련 협상 같은 거야 전문가가 맡아 줘야 할 테고.
“연구실을 혼자 운영하실 것도 아니시잖아요.”
“네, 네! 그럼요. 참, 이것 좀 보실래요?”
석하얀이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어 보였다. 화면에 떠 있는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석하얀과 외국인으로 보이는 다섯 남녀. 그녀 또래부터 중년, 노년까지 다양한 나잇대에 인종이었다.
“D메이트예요. 올해로 2년 차인 던전과 각성자 연구모임이랍니다.”
“연구모임이요?”
“네. 물론 한유진 씨가 제공해 주기로 한 자료 이야기는 아직 안 했어요. 괜찮으시면 제 친구들을 데리고 와도 될까요? 다들 좋아할 거예요.”
그녀의 말에 사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머리칼이 희끗한 노인과 중년 여자는 낯이 익었다. 석하얀과 함께 던전 펄슨즈에 속해 있던 연구원이었다. 석하얀과 함께 대표로 몇 번 TV에도 나와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석하얀 씨께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환영하겠습니다.”
“쪼끔 부담되는 말씀이시네요.”
“부담이라니요. 애초에 석하얀 씨의 연구실이잖습니까.”
“그래도 도와주시는 부분이 너무 많으니까, 제가 마음대로 굴 수는 없죠. 참, 요기 요 제이든이요. 얜 던전보다 각성자에 더 관심이 많아서 상급 헌터들이 자주 찾아 주는 곳이라면 돈 내고서라도 붙어 있으려고 할걸요? 이야기 들으면 이박삼일은 잠 못 자고 지저스를 찾을 거예요.”
그 밖의 모임 사람들을 소개해 주는 석하얀의 얼굴이 빛나는 듯 환했다. 목소리 또한 노래하듯 명랑했다. 상당히 사이좋은 팀인 모양이었다.
‘적당히 뒷받침만 해주면 알아서 잘할 거 같네.’
연구 모임이 있었다니. 하긴 던전에 열정적으로 관심 많고 능력도 되는 사람이 그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을 리 없지.
“태블릿은 일단 가지고 가세요.”
“그래도 될까요? 자료 유출될까 걱정 안 되세요?”
“어차피 일본의 일부 던전일 뿐인걸요. 그리고 던전 생성 법칙보다는 다른 것을 먼저 연구하셨으면 합니다. 마나 포화도 같은 거요.”
“하지만 생성 법칙이 제일 급하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 당분간만요. 따로 확인해 봐야 할 게 있거든요.”
리에트 건도 있고, 원래 미래와는 던전 생성 법칙이 달라져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며칠 뒤 시스템분들 만나면 확인해 봐야지.
이번에는 제대로, 속 시원하게 다 알려 주면 좋겠다.
* * *
집으로 돌아오자 초조하게 거실을 맴돌고 있는 명우가 보였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도는 게 무슨 탑돌이라도 하는 것 같다.
[날붙이 10,000개 날 갈기(진행도 9,839/10,000)]이제 이백 개도 채 남지 않았다. 오늘로 끝이네.
“그렇게 긴장돼?”
명우가 걸음을 뚝 멈추었다. 어젯밤 잠도 설쳤는지 흰자위에 핏발이 섰다.
“…너무 빨리 한 거 같아. 너무 빨리 대충해서 D급 이하 이상한 거 나오면 어쩌지.”
“그럴 일 없어.”
딱 잘라 말하며 피스를 꺼내고 방으로 가 삐약이도 데리고 왔다. 삐약이는 머리 위로 올린 뒤 피스를 안아 들었다. 둘 다 달라붙어 있으려고 해서 곤란하다니까. 그나마 삐약이는 마석 병 주면 한두 시간 정도는 얌전히 떨어져 있는데 피스 얘는 그런 것도 없고. 다 커서도 안아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쓸모없는 게 나오면, 역시 실망하겠지……?”
“설사 그렇다더라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
당연히 SS급 스킬 나오겠지만 만에 하나 시스템 오류라도 생겨 망한다 해도, 그래도 유명우가 대단한 놈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방향만 잘 잡으면 당장에라도 성공해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췄으니까.
“아니, 나 말고 너 말이야…….”
명우가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나?
“내가? 아니, 난 실망할 일 없는데.”
내 말에 우울한 얼굴이 죽을상으로 진화해 버렸다.
“기대 자체를, 안 해서……?”
“아니, 아니. 기대를 안 하는 건 아니야. 당연히 하지. 아무런 기대가 없었으면 이렇게 마지막 날 기다려서 같이 가려 하지도 않았을 걸? 다만 명우 넌 지금 이대로도 나한테는 충분히 대단해서, 스킬을 아예 못 얻는다고 해도 실망할 일이 전혀 없어. 나만이 아니라 예림이도 툭하면 냉장고 털러 오잖아.”
하루는 나 붙잡고 명우 오빠 요리 잘한다는 소문 절대로 내면 안 돼요. 우리 먹을 것도 부족하잖아요, 를 시작으로 음식 감상평을 한 시간 넘게 늘어놓았었다. 왜 명우가 아니라 나한테 감상 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헌터 말고 요식업으로 나가도 대박 날걸? 본격적인 식당은 바쁘고 힘들 테니까 카페 같은 것도 괜찮고. 음료는 알바 쓰고 그냥 과자든 케이크든 적당히 뭘 만들어 팔든 간에 줄을 서다 못해 프랜차이즈도 줄줄이 낼 수 있을 거야. 원한다면 얼마든지 자리 내줄 수 있어.”
명우가 바빠지면 내가 슬퍼지니 제대로 된 식당 내는 건 반대지만. 틀림없이 미어터지겠지.
“…말은 고맙지만 그런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아.”
“그래?”
의외네. …설마 요리하는 거 안 좋아하나.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는데.
“진정하고 일단 내려가자. 끝은 봐야지.”
“응.”
현관으로 걸어가던 명우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결과가 어떻든 정말로 고마워. 진심이야. 그러니 유진이 네가 실망하지 않는다면 나도 괜찮아.”
“실망 안 한다니까.”
재차 말해 주자 명우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 * *
명우와 함께 장비 관리팀으로 내려갔다. 물론 A급 헌터도 동행했고, 그리고 삐약이랑 어쩌다 보니까 피스도 안아 든 채였다. 얘가 품에서 내려가려 하질 않아서. 최근에 연속으로 던전 돌고 이래저래 바빠 신경을 못 쓴 탓인가, 간만에 고집을 부려 그냥 데리고 오고 말았다.
덕분에 장비 관리팀 사람들의 시선이 묘해지긴 했지만 뭐. 삐약이를 머리가 아니라 어깨 위에 올릴 걸 그랬나. 하지만 어깨에선 균형을 잘 못 잡아서.
그간 명우가 써온 세공실은 처음 왔을 때에 비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새로 큰 선반이 두 개 들어와 정돈도 깔끔해졌고 조명도 더 밝은 것으로 교체되었다. 그라인더 앞의 의자도 전의 것보다 편하고 좋아 보였다.
“사람들이 신경 좀 써 줬나 봐?”
명우가 쑥스러운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응. 열심히 한다고. 하루는 민석이 아저씨가 칼 가는 거 지켜보더니 생각 있으면 관리팀에 들어오라고 하셨어. 근력 딸리는 건 장비 차면 된다면서.”
그걸 봤으면 당연한 반응이지. 보는 사람이 홀릴 정도로 멋있었으니까.
“역시 너, 대단한 거 맞다니까.”
어색하나마 미소 짓는 게 이제 긴장은 확실히 던 모양이었다.
유명우가 그라인더 앞에 익숙한 태도로 자리를 잡았다. 구석으로 밀려난 원래 쓰던 의자를 가지고 와 나도 자리에 앉았다. 전원이 켜지고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 삐약!
삐약이가 놀랐는지 파닥거리다가 내 무릎 위, 피스 위로 굴러떨어졌다. 잠깐 뒤집어졌다가 몸을 일으켜 기계를 향해 뛰어가려는 걸 얼른 붙잡았다. 놀란 게 아니라 그라인더 돌아가는 게 신기했던 건가.
“얌전히 있어.”
그사이 명우는 능숙하게 칼을 갈아내고 있었다. 여전히 정확하고, 빠르고, 끊김 없는 동작이 유려하다.
[날붙이 10,000개 날 갈기(진행도 9,843/10,000)]켜 놓은 상태창의 숫자 또한 쉼 없이 올라갔다. 피스는 별 관심 없어 보였지만 삐약이는 부리를 딱 벌린 채 칼 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알고 구경하는 걸까. 모르고 봐도 눈을 홀리는 광경이긴 했지만.
지루하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숫자는 9천 9백을 돌파했다. 구백십, 이십, 삼십.
평소에는 사오십 개쯤 갈면 쉬었다 한다더니 오늘은 한순간도 손을 멈추지 않는다. 저러다 또 몸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마지막이니까 괜찮겠지.
그리고 드디어,
챙그랑.
만 개째의 칼이 바닥에 쌓인 칼 위로 떨어져내렸다.
(진행도 10,000/10,000)
상태창의 조건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나는 움직임을 멈춘 유명우를 바라보았다. 겉보기로는 아무 변화가 없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허공에 못 박혀 있었다. 내가 볼 수 없는 메시지창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성공했을까. 제대로 떴을까.
혹시나 싶은 불안감이 이제야 들었다.
“…명우야?”
뭐라고 말 좀 해주라. 그때 후욱, 하고 거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뚝 떨어졌다. 기계는 완전히 멈추었고, 바닥에 흩어진 칼날이 조용히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드르륵, 의자가 뒤로 밀려나고 유명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돌아보는 얼굴은 눈물기 하나 없이 마냥 환하다.
자신만만했다.
“유진아.”
“응.”
녀석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내 목소리가 오히려 더 흔들렸다.
“나 SS급 스킬 나왔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얼굴 위로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그럴 줄 알고 있었는데도 까맣게 몰랐던 것처럼 웃음이 나왔다. 기쁨을 꾸밀 필요 없이 진짜로 기뻐졌다.
“축하해.”
긴말하진 않았다.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녀석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