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64
64화 선배님?
“스킬인데 말하는 게 꼭 실물이 있는 거 같다?”
“있어.”
“…있어?”
아니 무슨 불이나 얼음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고 대장간이 나온다고? 그런 스킬은 또 처음 듣는다.
“정확히는 황금 대장간이 있는 아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적혀 있더라고.”
“와…….”
우와. 뭔데, 그게. 내가 알고 있던 스킬 형식과는 너무 다르잖아.
‘스킬이라기보단 아이템 쪽에 가까운 거 같은데.’
S급 함정 아이템 과자의 집이라거나 SS급 방어 아이템 침묵의 암실 같은. 둘 다 한참 뒤에나 나오는 특수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건물 같은 걸 만들어 내는 스킬은 듣도 보도 못했다. 스킬은 기본적으로 무형의 능력이다. 에너지나 원소를 끌어모아 단순한 형체까지는 만들어 내지만, 대장간이라니. 화덕이나 모루 같은 것도 다 있는? 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들어가는 건데?”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냥.”
명우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들어가려고 하면 그냥 들어가지는 건가. 일단 피스를 우리에 넣고 삐약이도 소파에 내려놓았다.
안정성이 살짝 의심되긴 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한 번은 따라가 봐야지 싶었다. 아직 마지막 보은 적용 시간이 남아 있기도 하니.
“아무나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건가?”
“내가 원한다면.”
“그럼 도피처로도 쓸 수 있겠는데. 비상식량 같은 거 쌓아 놓을 수도 있으려나?”
내민 손을 잡으며 말했다. 대장간이 있는 아공간이 안전하다면 만약의 사태 때 훌륭한 피난처가 되어 줄 것이었다.
던전 게이트를 통과하는 느낌이 덮쳐들고, 눈앞의 풍경이 변화했다.
커다란 창으로부터 햇살이 스며드는 실내였다. 커다란 가마 안에 흔들리는 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금빛을 띤 불은 장작은커녕 지푸라기 하나 살라먹지 않고 저 혼자 타오르고 있었다.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나무줄기와 뿌리가 얽힌 벽이었다. 짙은 나무 내음과 불 내음이 서로 뒤엉켜 공기 중을 떠돌고 있었다. 망치와 커다란 집게, 그 밖의 이름 모를 도구들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오래된, 옛날식 대장간이다. 그 가운데의 커다란 모루 위에 꽃다발과 메모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뜬금없게도.
“…저 꽃다발은 대체 뭘까.”
“글쎄.”
명우가 모루로 다가가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뭐라고 적혀 있기는 한데 한글은 아니고 한자나 알파벳도 아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문자였다.
“이거 나한테 보내는 거 같은데.”
“명우 너한테? 읽을 수 있어?”
“음… 환영한다, 후계자여. 그대의 앞날에 불꽃과 쇳물의 축복이 있기를. 이라는데.”
역시 스킬이 아닌 아이템이군. 후계자 어쩌고 하는 거 보니 누군지 모를 선배님이 챙겨 준 모양이었다.
“내가 후계자라는 거 같은데, 그럼 나 이전에 황금대장간의 주인 스킬을 얻은 사람이 있었던 건가?”
명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글쎄다. 각성자 생겨난 지 이제 겨우 3년 됐는데 단순한 선후배도 아니고 후계자 운운하기는 힘들지. 그간 제작된 장비도 하나 없었고. 적어도 우리 사는 세계에는 네가 최초 맞을걸.”
말하면서 시스템 관리자들을 떠올렸다. 그들 중에 과거 황금대장간의 주인 스킬을 가졌던 사람이 있는 걸까. 그리고 이렇게 다음 대 스킬 소유자를 위해 각종 아이템들을 챙겨 주었고? 그런 것도 가능했냐.
‘그 사람들 정체가 대체 뭔지. 물어볼 게 갈수록 많아지는군.’
그때 명우가 메모지의 뒷면을 돌려 보았다.
“여기도 뭐라고 적혀 있는데… 이스무아르?”
화르륵!
“물러서!”
가마의 불이 돌연 높이 치솟는다. 얼른 명우 앞을 막아서려는데 명우 놈이 물러나기는커녕 되레 앞으로 나섰다.
“유진이 너야말로 물러서! 지금은 네 스탯 등급이 더 낮잖아.”
…아니, 아직 마지막 보은 적용 중인데. 이걸 말할 수도 없고.
“…나한테 방어막 스킬 아이템 있잖아. 세성 길드장이 준 거.”
명우한테 쓸 생각이긴 했지만—
“어차피 그거 나한테 쓰려고 했을 거잖아.”
…얘가 언제 이렇게 눈치가 빨라졌냐. 하지만 지금 내 스탯은 B급 이상이고 B급 방어막은 딱히 필요 없고…….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안 그런 것도 아니지만… 그보다 저것 좀 봐!”
말을 돌려 치솟아 오른 불길을 가리켰다. 그것은 어느새 사람과 비슷한 형체를 이루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어린애와 길쭉길쭉한 어른 크기를 몇 번 오가더니 그 중간쯤 되는 모습으로 자리 잡는다.
이어 완전히 인간과 흡사한 모습이 되었다.
불로 빚어낸 듯한 모습이라 누가 봐도 진짜 인간은 아니었지만. 저것도 아이템인가?
“처음 뵙겠습니다, 주인님.”
…말했어?!
“말을 해?!”
명우도 화들짝 놀란다. 말하는 이종족?은 처음 봤다. 시스템분들 제외하고. 그 사람들은 직접 본 적은 없으니까.
“저는 창조주의 마지막 숨결에서 태어난 정령 이스무아르입니다.”
“…정령 같은 것도 있어?”
“…나도 몰라.”
명우의 물음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정령이 실제로 있는 거였나. 살라만더니 실프니 하는 정령은 게임이나 소설 같은 곳에서나 등장하지 현실에 진짜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었다. 정령 소환 스킬 같은 거 지닌 각성자도 물론 없었고.
그런데 갑자기 정령이라니. 뭐야, 저게.
우리가 당황해하는 사이 자칭 정령이라는 이스무아르는 무감정한 금색 눈동자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인가?
‘떡잎 스킬 통하려나.’
확인해 보기 위해 스킬을 썼다. 그런데… 상태창이 나타나질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 정보들이 떠오른다.
‘…불의 정령, 무척이나 강하고, 불길을 다루고. 성장은 다 끝난 상태. 계약자는 내 옆에 있는 사람. 아니 이게 뭐야.’
네모난 창에 글자로 쓰이질 않고, 정보가 직접 느껴졌다. 글로 써진 것에 비해 애매하기도 했다. 이 정도 강한 느낌이면 등급이 대체 뭐야? 최소 A는 될 거 같긴 한데. 스킬은 감도 안 잡혔다.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 외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물리력은 통하지 않는 거 같고.
뭐지 이게. 시스템 에러라도 났나.
당황하며 내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내 상태가 어떤지 느껴지지도, 정보가 떠오르지도 않는다. 등급도 레벨도 스킬도 칭호도. 아무것도 모르겠다.
돌연 불 꺼진 밀실에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명우야, 너 혹시 상태창 열 수 있어?”
“상태창?”
명우가 잠깐 멈칫거리더니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안 뜨는데? 각성 취소도 되는 거였어?!”
“아니, 나도 안 떠. 그런데 스킬은 써지는 거 같더라. 아마 스탯도 그대로지 싶고. 그냥… 시스템창만 안 뜨는 거 같아. 인벤토리는… 내용물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꺼내고 뺄 수는 있고.”
마석가루 병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원래는 내용물 목록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뜨지 않았다.
“스킬이 없어진 게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이 공간이 이상한 건가?”
“아마도 그런 것 같아.”
아공간이라서 시스템의 영향을 벗어난 건가. …근데 각성 자체가 시스템의 일부 아니었나? 창 같은 게 안 떠도 능력치는 그대로라면, 그럼, 게임 같은 시스템과 각성은 별개라는 뜻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주인님.”
묵묵히 공중에 떠 있던 이스무아르가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은 딱 다문 그대로 목소리만 나왔다.
“내 이름 말하는 건가? 유명우.”
“유명우 님, 창조주께서 준비하신 기초 교육을 받으시겠습니까?”
“기초 교육?”
“네. 어디까지나 기초 수련으로, 이미 대장장이로서의 숙련도를 충분히 갖추셨다면 받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제작의 길에 입문하셨다면 빠른 성장이 가능합니다.”
뉘신지 몰라도 후계자 생각하는 마음이 크나큰 친절한 분이신 모양이었다. 나는 저런 선배 없나.
“그럼 당연히 받겠어.”
명우의 대답에 이스무아르의 시선이 나를 향해 움직였다.
“제 불길은 계약자에 한해서만 안전합니다. 열에 대한 저항력이 높지 않다면 화상 또는 소사의 위험이 있습니다.”
작업실은 괜찮은 건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난 나가 있을게.”
“그래. 아, 이것도 가지고 가.”
명우가 꽃다발을 들어 내밀었다. 여기 두면 타 버리겠지. 잠시 뒤 나 혼자 원래의 위치, 거실로 돌아왔다.
– 삐약!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던 삐약이가 파다닥 일어나며 아는 체를 해왔다. 유리벽 너머의 피스도 꼬리를 살랑인다. 애들 반응을 보니 여기나 아공간이나 시간은 비슷하게 흘러간 모양이었다.
‘…당장에라도 던전에 들어가 캐묻고 싶다.’
지금은 가 봤자 말 못 한다는 이모티콘이나 날아오겠지만. 그래도 며칠 안 남았지.
‘그 전에 유현이 놈 삐친 거 풀려야 할 텐데.’
내가 각성센터 일에 끼어들기로 한 것 때문에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었다. 어떻게 기분을 풀게 하지, 꽃이라도 갖다 줄까?
“근데 무슨 꽃이지.”
손에 든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큰 꽃송이 다섯에 중간 크기 열 송이 남짓, 그리고 자잘한 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부 처음 보는 꽃이었다.
꽃 종류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 세계 꽃은 아닐 듯했다. 특히 커다란 꽃은 희미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작은 꽃 중에 금색은 촉감이 금속처럼 단단하고 차갑다. 꽃잎 한 장 뜯어 보니 진짜 금속은 또 아니었다. 호접란 비슷한 꽃은 간간히 저 혼자… 움직인다.
분명 보통 꽃들은 아닌데, 그렇다고 던전 부산물처럼 설명창이 뜨는 것도 아니고.
예쁘긴 예쁘네.
* * *
헌터 협회로부터 각성센터 관련으로 방문 요청이 들어왔다. 예상대로 반응은 긍정적인 모양이었다.
그야 그쪽에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세성과 브레이커, 한신 길드장 또한 방문할 예정입니다. MKC는 이번 일에도 제외되었지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석시명이 말했다. 내 품에 안겨 있던 피스가 훈련실로 향하는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천재인가 봐. 층수도 알아보고.
“김성한 헌터 외에 타 길드에서도 경호를 위한 A급 이상 헌터를 보내올 예정입니다.”
예림이는 레벨업을 위한 던전 공략 중이었다. 그리고 유현이는,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중이라 일부러 오지 말라고 했다. 듣기론 찬바람 쌩쌩 날리고 있다나.
그런 상태로 같이 갔다가 협상 엎어 버리기라도 하면 안 되지. 아무튼 과보호라니까.
“석 팀장님.”
김성한과 도중에 합류해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해연 길드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석시명을 불렀다. 거의 동시에 석시명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휴대폰 문자를 확인한 석시명이 미간을 좁혔다.
“아니, 왜…….”
그러고 보니 주변 분위기도 어째 묘했다. 무슨 구경이라도 난 듯 계단을 통해 내려와 기웃거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요.”
석시명을 부른 해연 길드원이 말했다.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한유진 씨.”
“네?”
“한유진 씨의 경호 담당으로, 세성 길드장이 오셨습니다.”
“…예?”
뭔 소리야 그게. 세성 길드장이 여기서 왜 나와.
“아니, 그, S급 헌터가 그렇게 막 움직여도 돼요?”
유현이랑 예림이 붙이고 다닌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아무튼.
“물론 S급 헌터, 그것도 길드장이 같은 S급 헌터의 길드를 방문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헌터 길드란 일종의 무력집단인 만큼 기본적으로는 밖에서 약속을 잡지요.”
석시명이 멈추었던 걸음을 옮겨가며 한숨 섞어 설명했다.
“세성 길드장이 해연 길드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 아니 저번을 포함해 두 번째입니다. 물론 길드장님께서도 세성 길드를 방문한 적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남의 구역에 들어간다는 뜻이니까. 등급 차이가 난다면 모를까, 같은 S급이면 꺼려지긴 하겠지.
“다른 S급 길드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만, 수담에는 한번 찾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석시명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수담? 여기도 S급 헌터가 길드장인 길드인데, 무슨 일로 간 거지. 친한가.
“…덕분에 구속되셨지요. 벌금과 일주일 근신으로 끝났지만 말입니다.”
안 친하구나. 뭔 짓 했냐, 동생아. 석시명이 그래서 더더욱 S급 길드장이 타 길드를 개인 방문하는 일은 드물다고 말을 덧붙였다.
검문소를 지나 외부인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눈에 딱 들어오는 차가 있었다. 특수 제작했지 싶은 잘빠진 차였지만, 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차에 묻히긴커녕 배는 더 눈에 띄었다.
…들고 있는 꽃다발은 뭐지.
“연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방문하시면 곤란합니다.”
석시명이 정중한 인사 후 말했다.
“저런. 해연의 업무 체계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로군. 한유진 군의 경호를 위한 방문 허가 요청은 분명 오전 중에 들어갔을 텐데.”
“예. 분명 A급 이상 헌터가 방문하겠다고, 연락은 받았습니다만.”
석시명이 애써 한숨을 삼켰다. 성현제가 A급 이상 맞지 않냐는 듯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맞긴 맞지.
“한유진 군의 안전은 확실하게 책임질 테니.”
성현제가 꽃다발에서 파스텔 톤 푸른색 겹겹의 잎이 풍성한 꽃 한 송이를 빼냈다. 긴 줄기를 뚝, 짧게 쳐내곤 석시명의 가슴포켓에 꽂아 넣는다.
“걱정 말게나.”
석시명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현제가 이번에는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 저기 잠깐만요.
“그럼 가실까요.”
성현제가 내게 꽃다발을 내밀며,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쓸데없이 그림이 되다 못해 저 뒤쪽의 구경꾼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나올 정도의 모습이라 더 소름이 돋았다.
“제 손이, 비질 않아서요.”
내 입꼬리도 석시명 못지않게 바들바들 떨렸다. S급 고객님이니 웃어야지, 하하. 피스 데리고 나오길 정말 잘했다.
성현제가 아쉬워하는 척을 하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이인승이라 조수석이었다.
“아 저는…….”
해연 차량을 타고 가도 됩니다, 라고 말하려는 나를 향해 석시명이 급히, 짧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의 눈빛이 수많은 속마음을 담은 듯 복잡하게 흔들린다.
“…감사합니다.”
그래, 유현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A급인 김성한의 보호를 받겠다는 건 성현제에게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
무려 길드장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손수! 차문까지 열어 주셨건만 F급이 어쩌겠어. 뭐, 최소한 안전은 확실히 보장될 것이다.
차에 올라타자 세성 길드장님께서 꽃다발을 내 무릎에 놓아 주곤 문도 닫아 주셨다. 피스가 앞발로 꽃을 툭툭 쳤다.
“좀… 한가하신가 봐요.”
성현제가 차에 타고 시동을 걸자마자 더는 못 참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불쑥 뻗었다. 뭐, 뭐.
“한유진 군은 스탯 F이니 안전벨트를 해야지.”
“그렇, 죠. 깜박했네요.”
상급 헌터에겐 안전벨트는 필요 없었다. 차만 박살 나지. 성현제를 향해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피스를 쓰다듬어 달랬다. 이내 차가 출발했다.
사이드 미러를 흘끗 보니 해연 차량이 바로 뒤따르고 있었다. 한 대는 옆으로 와 붙고 다른 한 대는 뒤쪽에 자리 잡았다.
보호받을 만한 처지이긴 해도 이런 상황이 여전히 낯설었다.
“직접 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그렇다고 협상에 플러스되는 건 없습니다.”
“순수한 호기심과 저번 납치 건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두지.”
“MKC 책임인데요, 뭐.”
“덕분에 머잖아 잘라내야 할 정도로 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고.”
MKC 회귀 전보다 빨리 망하려나. 원래도 제일 빠르게 망한 거대 길드였지만.
“이미 들으셨겠지만 각성 소질을 알아내는 스킬은 각성센터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사용할 겁니다. 기승수 키우는 것만으로도 바쁠 거라서요. 길드들과 협회는 저 빼고 알아서 협의하세요.”
“해외에도 나가 주었으면 싶었는데.”
“지금으로서는 서울도 못 벗어날 판입니다.”
유현이가 들었으면 세성에다 불 질렀다. 나도 해외까지 나갈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고.
잠깐 침묵이 흐르고 신호가 바뀌었다. 멈추었던 차가 앞으로 튀어나간다. 해연 길드에서 협회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몇 분 안 지나서 도착할 텐데.
‘떡잎 스킬 한번 써볼까.’
세계 랭킹 1위라는 헌터의 상태창이 궁금했다. 리에트에겐 바로 들키긴 했지만 지금 성현제는 운전 중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내가 계속 흘끔거리고 있지만 딱히 신경 안 쓰는 눈치고. 스킬 써서 상태창 뜨면 창밖의 간판 읽는 척하면서 확인하는 거다.
다 읽지 말고 그냥 일부만, 빠르게. 눈 최대한 굴리지 않은 채.
스킬을─
“아.”
목이 잡혔다. 정확히는, 내 뒷목에 서늘한 손바닥이 닿았다.
– 캬앙!
피스가 사납게 이를 드러내고, 성현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한 손으로 핸들을 움직여 코너를 돌았다. 꽃다발이 발치로 툭, 떨어졌다.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그의 엄지가 내 목덜미를 가볍게 눌러 매만진다. 공포 저항 메시지가 눈앞에 떴다.
“…피스야, 괜찮아.”
– 그르르.
젠장, 눈치챈 건가. 하지만 스킬 쓰기도 전인데 어떻게.
“경호원으로 오신 줄 알았습니다만. 설마 MKC의 뒤를 따르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색조 옅은 눈이 가늘게 웃었다. 뒷덜미에 닿아 있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반사적으로 등받이에서 몸을 떼자, 내 등을 쓸어 달래듯 토닥이곤 손을 거둔다.
“우리 둘 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 그렇지 않나, 한유진 군.”
“…그랬죠.”
설마 내가 무언가 하려고 한 걸 감으로 알아차린 걸까. 더럽게 예민하시네.
역시 S급 헌터에게 떡잎 스킬을 쓰는 건 싸움 걸 때가 아니고선 자제해야겠다. 특히 성현제 저 인간한테는 두 번 다시는 안 써. 더러워서라도 안 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헌터 협회에 도착했다. 얼른 차에서 내려 뒤도 안 돌아보고 석시명 일행과 합류했다.
돌아갈 때는 해연 차 타고 가야지. 반드시.
* * *
빨대 끝에 얼음이 잘그락, 휘저어졌다. 음료를 쪽 빨아 마시며 창 너머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헌터 협회는 내 조건을 받아들이고 적극 협조까지 해주기로 하였다. 다만 그 전에 확실한 증거를 요구해 왔다.
“얼음 섞어 마셔도 되는 거예요?”
어쩌고 프라페를 받아 온 예림이가 내 앞에 놓인 컵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마시고 있던 음료는 다름 아닌 마나 포션이었다.
“별 상관없지 않을까.”
“색 보니 오렌지 맛 같은데. 슬슬 질릴 때 안 됐어요?”
“질려.”
안 질릴 리가 있냐. 원래도 먹을 만한 정도지 맛있는 건 아니었는데, 물처럼 마셔 대려니 슬슬 힘들다.
한숨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B급 이상 특수 초기 스킬 소유자를 찾기 위해 유동 인구가 많은 대로변 1층 카페를 통으로 빌렸다. 예림이 외에도 A급 헌터 하나, B급 헌터가 셋 있었다. B급 헌터 한 명은 예전에 카페 알바 했었다면서 이런저런 음료를 만들어 주었다.
솜씨가 제법 좋은 게 그쪽 적성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커피에 마나 포션 섞어 먹어 볼까.”
“더럽게 맛없을 거 같은데요. 차라리 진짜 오렌지 주스에 부어요. 찐하게.”
“오렌지 맛이 질려… 사과도.”
“그럼 수제 마나 포션 같은 거 주문해 보는 건 어때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
비싸겠지만 이대로 이삼 일만 더 퍼마셨다간 질리다 못해 토해 버릴 것 같다.
“장비를 마력 위주로 도배할까. 마나량 자체가 적으니 너무 자주 마셔야 하잖아.”
근데 또 그러기엔 갑갑하고. 심지어 여름이었다. 투덜거리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길을 따라 오가는 행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증거만 내놓으면 되니 아무 특수 스킬이라도 상관없었지만, 그러기엔 또 스킬이 아까웠다. 그래서 현재 목표는 B급 이상 특수 스킬 소유자였다. 물론 A급 이상 스탯 소유자도 놓칠 순 없고.
하지만 아직은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또 C급이네. 듣기 좋은 달변.”
“앗, 저 사람 맞죠? EVS 중학 강사인데 유명해요. 확실히 강의가 귀에 쏙쏙 잘 들어오더라고요. 학원가에서 러브콜도 엄청났다던데.”
적성 찾아간 셈이구나.
“의외로 C급까지는 꽤 있네요. D급은 더 많지 않았어요?”
“응. E급 이상은 거의 절반쯤 되었고.”
내 말에 예림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스킬 E급 이상이면 헌터 자격증 나올 텐데, 각성자 중 헌터 비율은 1퍼센트 정도라고 했잖아요.”
“그야… 지금까지의 각성자는 대부분 전투 관련 스킬을 지녔으니까?”
아침에 잠깐 살펴본 것으로는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사람들의 적성은 대부분 전투가 아니었다. 그동안 C급 아래는 별생각 없이 지나쳐서 비율도 굳이 계산하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백 년 전쯤이면 모를까, 현대인 중에 싸움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우리나라는 아직 내전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백년이 넘게 평화로운 편이었다. 그러니 군대에서 말고는 제대로 된 무기를 손에 쥘 일도 별로 없었다. 양궁이나 검도, 사격 등의 선수가 아니고선 취미로 끝난다. 흔한 취미도 아니고.
“사람들의 반 이상이 평범보다 더 나은 재능을 가졌다면, 그중 전투와 관련된 재능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많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하긴 직업만 봐도 극소수죠.”
예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전투 관련 각성을 시켰으니 FF가 대부분일 수밖에. 스탯 F야, 현대인의 운동 부족은 유명하잖아.”
F등급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쯤으로 세분화 되었다면 F마이너스도 수두룩했을 거다.
“새삼스럽지만, 세상에는 자신의 가치를 까맣게 모르고 묻히는 사람이 정말 많았구나.”
아까 지나간 C급 초기 스킬 소유자도 평범하게 각성센터를 거쳤다면 F~E급 전투 보조 스킬 정도나 나왔겠지.
“저기 저 회사원, 노래 관련 스킬 같은데 C급이네. 저번 방송국 갔을 때 가창력 좋다는 가수도 몇 봤는데 그중 한 명의 초기 스킬이 저거랑 똑같더라.”
“진짜요?”
예림이가 흥분하며 내가 가리킨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서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데뷔하라고!”
“연예인은 노래 잘하는 것만으론 힘들지 않냐.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할 수도 있고.”
나도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도 모르고 사는 것보단 낫죠.”
프라페를 쭉 빨아들인 예림이가 문득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근데요. 이렇게 E급 이상이 많으면 아저씨가 힘들어지는 거 아녜요? 백 명 중 50명을 도와줘야 할 판인데.”
“당연히 내가 다 못 하지.”
어떻게 그걸 혼자 다 떠맡겠냐. 몬스터 키우랴 사람 키우랴 몸이 서넛 있어도 모자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