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679
677화 옛 사람들 (4)
“삐약이든 누구든 딱 한 번만 더!”
성현제가 초승달과 계약한 이후 시점으로 한 번만! 지금의 초승달도 말이 잘 통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계약 해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방이 무너져 내리며 어린 혼돈의 모습 또한 사라졌다.
“아직 아니야, 신입아!”
잠시만 더 머무르게 해다오. 딱 성현제 상태만 확인하고 나서… 마음 같아서는 그보다 더 이후로도 가고 싶었지만.
‘…여기서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변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다시 한번 더 기회를 가지고 싶었다. 들꽃처럼.
-삐약!
삐약이가 내 손 안에서 파닥거렸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쩌저적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음… 혹시 위험한 상황인 건 아니겠지.
“저기- 엇!”
발밑이 훅 꺼졌다. 크게 휘청거린 몸이 그대로 추락하려는 그때.
콰드득!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첫째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년 모습을 한 혼돈이 쏟아져 내리는 세계의 틈을 더욱 크게 가르며 나타났다. 틈 안으로 발을 내딛는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성장한다. 혼돈의 손이 떨어지는 내 몸을 낚아채며 아직 멀쩡한 공간의 조각 위로 올라섰다.
“어르신?”
“이곳과 연이 있는 건 나뿐이라더구나.”
“아, 그, 엄청 옛날이거든요.”
초승달이 아직 어린 취급을 받던 시기니까. 신입은 물론이고 인어 여왕도 없었을 때겠지.
“내게 걸린 제약이 없으니 그렇겠지. 첫째 너는 어찌 된 게.”
혀를 쯧 차던 어린 혼돈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따라 고개를 숙이자 내 신발이 보였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꽃이 아직 묻어나 있는 신발이.
“꽃향기.”
혼돈의 입술이 부드러운 선을 그렸다.
“좋은 녀석이지?”
그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머물렀던 과거의 기억은 이미 부서지고 흩어져 멀리 흘러가 버렸다. 뒤를 돌아보는 나와 달리 어린 혼돈은 미련을 비추지 않았다. 잊은 것은 아니지만, 꽃 한 송이에 떠올릴 정이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혼돈이 나를 한 팔로 든 채 위로 뛰어 올랐다. 한때 밤하늘이었던 파편들을 디디며 무너져 내리는 공간을 대충 쳐 낸다. 느슨한 소맷자락이 텅- 밤의 일부를 밀어 내고 깎아 지르는 절벽을 타는 산양처럼 미세한 조각을 박차 올랐다.
“어르신! 한 번 더 초승달을 만나 봐야 합니다!”
“모른다.”
“예? 윽!”
순식간에 치솟는 움직임에 일순 숨이 턱 막혔다. 끝없던 파편들도 모두 떨어지고 혼돈의 발끝은 숫제 허공을 밟고 있었다. 그저 새카만 공간이었다. 별이 없는 우주 같았다. 나와 삐약이, 어린 혼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널 챙겨 놓고 기다리면 토끼가 날 찾을 거라 하더라.”
혼돈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를 내려놓지는 않은 채 주위를 살펴본다. 내 눈에는 그저 어둡기만 한데 뭔가 있는 것일까.
“도저히 네 위치를 찾을 수가 없다며 징징거리더구나.”
“다시 말해 어르신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뜻이로군요. 그 긴 시간 동안 변하신 게 없으시네.”
“이 녀석이.”
“외로우셨습니까?”
홀로 떠나서 모든 초월자를 배척한 채로. 어린 혼돈이 미소 지었다. 그러곤 내 귀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잠깐-
“악! 왜요! 악!”
나이 들어서 유해지기는 무슨! 과거의 어르신이 더 점잖은 거 같아! 최소한 내 귀는 멀쩡했으니.
“이상한 곳에 떨어졌으면 돌아갈 생각부터 해야지.”
“제가 그런 거, 아야아!”
“첫째 네가 원한 게 아니라고?”
음, 내가 오고 싶어 한 건 맞지만. 오류 났을 때 일부러 낯선 풍경의 세계에 뛰어든 것도 맞고.
“귀 떨어집니다악!”
“당연히 외로웠다.”
내 귀를 여전히 비틀어 쥔 채로 어린 혼돈이 대답했다.
“심심하고 이따금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어느 날은 덧정이 떨어져 근원을 없앨 시도라도 해 볼까 싶기도 했지.”
“근워어억! 진짜, 귀! 귀!”
간신히 귀가 풀려났다. 그리고 반대쪽 귀가 잡혔다. 살려 주세요.
“하나 성공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근원에 문제가 생긴 후 감당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닐 터이니. 책임감이 큰 편은 아니다만 아주 없지도 않아.”
“제 귀도, 악! 책임!”
“몸에 좋은 거다.”
귀 마사지 같은 겁니까. 야단치는 겸사겸사인 듯하지만.
“애초에 살다 보면 온갖 감정이 들기 마련이고. 그 반대가 오히려 문제지.”
“지금, 은요?”
“이 난리를 쳐 놓고서 묻는 거냐. 역시 못된 송아지는 엉덩이를-”
“잘못했습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어르신에 비하면야 갓난아기만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말이야. 나머지 귀도 겨우 풀려났다. 양쪽 귀가 얼얼하다 못해 감각이 사라졌다. 묘하게 전신이 시원한 것도 같지만 그래도 아파.
“음, 신입이 늦어지는 거 같은데 조금만 움직여 보면 안 될까요?”
“또 뭘 하려고.”
“그냥 관광이요. 여기서 멍하니 기다리는 건 지루하잖습니까.”
“가만히 있고 싶다 해도.”
혼돈이 돌연 뒤로 훌쩍 뛰었다. 그와 동시에.
까가가각!
날카로운 발톱이 우리가 있던 자리를 길게 갈랐다. 십 미터는 됨직한 칼날 같은 네 개의 발톱이 그대로 쾅! 어둠을 찍어 누른다. 흰 털에 뒤덮인 앞발은 여섯 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 개는 잘려 나가고 없었다.
-광검(狂劍)! 여기 있었구나!
으르렁거림과 함께 거대한 대가리가 튀어나왔다. 오소리처럼 길쭉한 머리에 희고 굽이진 쌍뿔이 달려 있다. 뒤로 더 물러난 혼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구더라.”
“어르신한테 발가락 잘려 먹힌 분이 아닐까요.”
그런 거 같아. 아마도.
“내가 자른 놈이 한둘이어야.”
바람이 날을 세웠다. 미친 듯이 몰아치는 공기의 칼날을 혼돈이 산들바람인 양 가벼이 흘려보내며 그 결을 타고 몸을 높이 띄운다. 그르렁거림, 날뛰는 바람, 치솟은 발톱과 방향을 가리지 않는 화살 비. S급 헌터라 해도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 나갈 공격 속에서 두루마기 자락이 한들거렸다.
옷깃 하나 가르지 못한 채 바람이 기억의 저편으로 흘러간다.
철썩, 파도가 쳤다. 어린 혼돈이 모래사장 위로 내려섰다.
“이것 참.”
그가 짧게 혀를 차고.
“이 무뢰한.”
조그맣고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금붕어 꼬리지느러미 같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통통한 어린애가 보였다. 실제로는 나이가 많겠지만. 흰자 없는 새파란 눈이 어린 혼돈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어르신.”
“튀자.”
“두 번 다신 나타나지 말라 했었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엄청난 외침과 함께 바다가 벽이 되었다. 모래가 창날이 되었다. 신입아, 아무래도 사람 잘못 보낸 거 같다!
“허구한 날 싸우고 다니셨습니까?”
창날 끝을 교묘하게 디디며 혼돈이 내달렸다. 긴 머리채가 꼬리처럼 거칠게 흔들린다.
“저 녀석과는 그리 나쁜 사이는 아니었다.”
“완전 나쁜데요?”
“이때는 그랬지. 그러니 도망치고 있잖느냐.”
“그래도 튈 줄은 아시네요. 끝까지 버틸 거 같았는데.”
“흘러가 버린 시간과 싸워 뭐할까.”
검이 검집째 파도를 가르고 흩어지는 물방울이 길이 되었다. 삐약이가 삐약삐약 감탄했다. 이내 바다가 사라지고 새파랗게 맑은 하늘이 빙그르 돌았다.
-약속대로 떠났습니다!
금빛 깃털 날개를 지닌 아름다운 드래곤이 긴 목을 휘며 슬프게 외쳤다.
-첫 번째 근원의 황혼이여!
용은 멀리 날아가고 어린 혼돈의 몸은 어느새 소년으로 변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손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첫 번째 근원에 속한 세계에서 태어난 초월자들은 모두 쫓아 보냈다. 그중 하나야.”
“온건해 보이는데요.”
“그렇다 해도 초월자고, 내 방식은 초월자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어린 혼돈은 던전을 처리하는 것에 실패한 세상이 근원에게 삼켜지기 전, 직접 난입해 막아 낸다고 했었다. 그 와중에 해당 세상을 보호하는 막은 사라지고 초월자가 쉽게 침입할 수 있게 되어 버린다. 하지만 첫 번째 근원의 세상들에 존재하는 초월자는 혼돈 한 명뿐이기에 막이 사라진다더라도 안전했다.
“혼자 계실 때군요.”
“최근은 아닐 거다.”
그래도 지금쯤이면 성현제가 초승달과 계약하지 않았을까. 삐약이를 감싸 잡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삐약아.”
-삐야
“초승달 기억나? 분홍머리에 밤의 눈. 아빠 끌어안았던.”
-삐약삐약.
“뭐하는 거냐.”
“비밀입니다만 삐약이가 뭔가 능력이 있는 것 같거든요. 주로 공간과 관련된 능력이요. 평소에도 공간이동 잘하거든요. 초승달한테로 가 보자, 응?”
어르신 입 무거우시니까 괜찮겠지. 성현제 일도 비밀로 해 주셨고. 혼돈이 눈을 약간 찡그리며 삐약이를 바라보았다.
“어린 개체로만 느껴지는데. 나와 비슷한 경우인 건가.”
“모르죠. 수상하기는 무척 수상한데 알아볼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도 저한테 해를 끼치진 않았거든요. 그치, 삐약아. 삐약이 아빠 좋아하지?”
-삐약!
작은 솜털 날개가 열심히 파닥거렸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어르신!”
“할 줄 모른다.”
혼돈이 허리끈을 내 허리에 감아 묶어 들며 대꾸했다. 이거 꼭 미아 방지 끈 같네. 주위의 숲이 흔들렸다.
“우리랑 연관 있는 곳으로 가는 거 같으니까요. 초승달! 초승달! 아니면 성현제! 어르신은 거 뭐냐, 존재감을 지워 주세요. 계속 어르신과 엮인 초월자만 나타나는 게 저보다 어르신의 존재가 더 커서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저와 관련된, 초승달 아니면 성현제 한테로 부탁드립니다! 신입도 사양하고요 인어 여왕이나 무해의 왕도 거절합니다. 채터박스 놈은 꼴도 보기 싫어요.
땅과 하늘이 뒤집혔다. 한데 섞여 무너지고 어둠이 내리깔렸다가- 은빛 평원이 나타났다. 사방에 달빛이 흩어진다. 어린 혼돈이 허리끈을 당겨 나를 가까이 오게끔 했다.
“성공했구나.”
“유진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다정한 속삭임과 함께 달빛이 연분홍색으로 물들어 간다. 반투명한 빛이 머리카락으로 변화하고 달을 담은 눈이 나를 비춘다. 물결치는 긴 로브자락 아래, 부드러운 풀잎들 속으로.
“네가 말한 아이인가.”
“성현제!”
낯익은 얼굴이 누워 있었다. 시그마보다는 옅지만 지금의 성현제보다는 짙은, 본래의 색을 모를 머리카락이 풀잎 위로 흐트러졌다. 반사적으로 달려 나가려다가 허리끈에 붙잡혀 멈추었다.
“결국 데리고 온 겁니까!”
“너의 기준으로는 오래전에. 결혼이라는 것이 소유의 계약의 완성이라 한다면 예비 신랑이라는 말도 틀린 것이 아니더구나.”
“앞에 강제를 붙여야겠죠. 강제적인 결혼은 하지 않았으면 싶다고 말했었잖습니까!”
허리를 묶은 끈을 풀었다. 어린 혼돈이 못마땅하게 눈썹을 휘었으나 나를 붙잡지는 않았다. 초승달의 앞으로, 성현제에게로 다가갔다.
“저는 이곳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말해 주세요. 지금의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일 테니 계약을 풀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가장 간단하게는 나를 죽이렴.”
…뭐가 간단하냐.
“하나하나 끊어 낼 수도 있겠구나. 혹은 네가 아는 내가 포기할 가능성도 미약하나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을 쓴다 하더라도.”
초승달이 스르르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눈길이 성현제를 향하였다.
“그 아이는 그대로일 것이다. 수많은 세상을 받아들여 가득 차오른 달.”
상냥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유진아. 계약은 달을 묶고 있지만 동시에 보호하고도 있단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보호. 초승달은 성현제가 다른 초월자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감추었다. 감추어질 만 한 존재감이 아닐 터인데도 성현제는 태생 S급으로만 여겨졌다. 어린 혼돈만이 유일하게 이상을 눈치챘을 뿐이었다.
만약 그 보호가 사라진다면 얼마나 많은 초월자들이 만월에 가까운 작은 달을 노리게 될까.
“…진짜 더럽게 골치 아픈 인간이라니까.”
초승달한테서 벗어나도 문제야. 우리를 내려다보던 초승달이 고요히 달빛으로 흩어졌다. 풀잎에 무릎을 대고 잠든 얼굴을 쳐다보았다.
“거참. 그냥 자기 삶 살겠다는 것도 힘드네요.”
“포기 못하는 첫째 너도 너다만. 네가 짊어질 이유는 없다.”
“그렇긴 한데요. 야, 성현제.”
부름에 답하듯 금빛 눈이 떠졌다. 깜짝이야. 설마 지금 이름도 성현제인 건 아니겠지. 옷차림은 낯선데. 아직 꿈결을 헤매는 듯 흐릿한 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 안녕하세요.”
그가 달빛이 어린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입술이 느리게 열린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또 이곳이군.”
“여러 번 온 거 맞을걸요.”
“그리고 이곳에 있어선 안 될… 듯한데. E?”
“F. 헷갈리는 거 보니 덜 깨긴 했네.”
그가 눈을 깜박였다. 희미하게 웃음기가 어렸다. 초승달의 영지에 F급이 들어와 있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겠지.
“여기에는…….”
“왜 왔냐고요. 왜기는, 댁 구하러 왔지.”
금색 눈이 더욱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즐거운 모양이었다. 이 와중에도 말이야.
“먼 미래의 일이긴 하지만요. 그래도, 음.”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어라 말하든 현재가 변할 일은 없겠지만. 이 성현제 또한 지금 이 일을 모두 잊게 되겠지만.
“삶도 죽음도 다 빼앗겼지만 다시 생깁니다. 무척 다정한 죽음과도 만나고,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가게 될 테니까요.”
더는 뜨고 있기 힘든지 눈이 감겼다. 동시에 어린 혼돈이 내 옷자락을 잡아챘다.
“왔다.”
쿵! 무언가가 공간을 두들겼다. 이어 와장창 깨지며.
“……!”
꽃 달린 거대한 촉수가 나타났다. 공포 저항 메시지도 함께 나타났다. 아 씨 소름 끼쳐! 신입아!
‘대왕 오징어다, 오징어 다리다, 버터구이 오징어다.’
이러다 오징어도 싫어지겠다.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꽃촉수 여럿이 사방을 휘감아 왔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꽃 달고 반짝이 뿌리니까 더 징그럽다고! 초승달의 들판이 사라지고 촉수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한숨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귓가에 부드러운 것이 와 닿았다.
[너는 □□□ 사랑□ □□□□□.]뭐? 눈을 뜨자 코앞까지 들이닥친 촉수 사이로 분홍빛 달빛이 흩어지는 게 보였다. 초승달의 목소리. 방금 대체 뭐라고…….
[허니이이이!]신입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몸이 휙 끌려 나갔다.
“형!”
꽃잎과 반짝이로 뒤덮인 나를 유현이가 와락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