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Coming of Shinken RAW novel - Chapter 77
가람은 침묵했다. 침묵은 짧았고, 그 침묵 동안에 라덴은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한, 그러면서도 가람의 의심을 받지 않는 거짓말을 생각해 내야 했다.
가람은 루아노스와 친구등록이 되어 있지 않다. 가람이 그에 대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이유? 이유야 뭐, 라덴은 어렵잖게 추측해 낼 수 있었다.
애초에 가람은 판타지아 때부터 독불장군이었다. 다른 길드와 연합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교류했던 것은 중립이었던 싸울아비의 루벡.
하지만 흑접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하하호호 웃었어도, 판타지아 안에서는 흑접과 바이스가 충돌하는 일도 많았다.
‘내가 접고 나서 몇 년이 지나기는 했지만, 그렇게 안 좋았던 사이가 좋아졌을 리는 없지.’
가람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라덴은 찡그리고 있는 가람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가람이 입을 열었다.
“너와 루아노스는 무슨 관계지?”
“그냥, 아는 사이에요. 아는 동생이고 아는 누나죠.”
사실 이건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루아노스는 라덴보다 나이가 많았으니 누나고, 라덴은 루아노스보다 나이가 적으니 동생이다.
라덴이 생각을 정리했듯이, 가람도 생각을 정리했다. 상황파악. 눈앞의 남자는 레벨이 그리 높아보이지 않는다. 가람의 마법에 별 대응을 하지도 못했고, 잡아 끌 때도 강한 저항감은 느끼지 못했다.
‘만약 저 놈이 루아노스와 관계되어 있다면 일이 귀찮아져.’
기본적으로, 가람은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따르는 바이스의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즌 던전도 놓친 탓에 업적 파밍이나 할 겸 솔로로 보스 러쉬를 하던 도중에, 가람은 우연히 황혼의 퀘스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번 시즌에는 각자 파밍이나 하라고 지령을 던진 뒤에, 혼자서 보하미르로 왔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레하브는 보이지도 않고, 혹시 나중에라도 오지 않을까 싶어서 며칠 동안 지저분한 집 안에서 잠복하고 있었는데..
‘게임이다 보니 입막음도 안 되고. 괜히 건드렸다가 루아노스에게 일러바치기라도 한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불칸까지 개입하게 된다.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했다. 가람이 아무리 한국 랭킹 2위고, 바이스가 한국에서 알아주는 길드라고는 해도 루카스의 불칸과는 비교가 안 된다. 흑접과 전쟁해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데, 불칸까지 더해진다면..
“루카스는 이 일을 모릅니다.”
가람이 생각에 잠긴 중에 라덴이 말을 걸었다. 그 말에 가람은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어 라덴을 바라보았다.
“뭐?”
“루카스는 이 일을 모른다고요. 황혼의 추적자 퀘스트를 알고 있는 것은, 지금은 나와 루아노스 뿐이에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알지. 라덴은 표정을 관리하면서 가람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몇 년 사이에 성격이 바뀐 것도 아닐 테고, 가람이 여전히 독불장군에 이기적인 놈이라면..
‘그런 주제에 자기 보신은 귀신같이 잘 했지.’
“루아노스도 루카스를 끌어들이는 것은 부담스러우니까요. 지금은 세하라의 왕릉을 공략하고 있기도 하고.”
“정말이냐?”
“내가 당신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뭐 있겠어요?”
“하지만 무조건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피차 자극하기 힘든 것은 똑같지 않나요? 나로서도 당신을 자극하고 싶지 않고, 당신도 나를 자극하고 싶지 않을 테고.”
“그건 조금 다르지. 나는 너를 자극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네 뒤에 있는 루아노스와.. 루아노스와 연결된 루카스를 자극하고 싶지 않은 거거든.”
“내가 혀 좀 놀린다면 당신이 자극하고 싶지 않아도 자극이 될 걸요.”
“나를 협박하는 거냐?”
“아뇨, 협력하자는 겁니다.”
라덴이 힘을 주어 말했다. 그 말에 가람의 눈이 가늘어졌다. 라덴은 가람이 데모니언을 더듬는 것을 보았다.
‘입막음은 안 돼. 여기는 게임이니까.’
아무리 현실같다고 해도 게임이다. 가람이 최상위 흑마법사이기는 하지만, 흑마법 저주 중에서 로그아웃을 막거나 현실의 입을 막는 저주 따위는 없다.
결국 게임 안에서 죽는다고 해도 현실에서는 입을 놀릴 수 있다는 말이다.
“..협력. 무슨 뜻이지?”
“손을 잡자는 것이죠.”
라덴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뻔뻔한 미소를 떠올리고 그대로 입 꼬리를 움직였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루아노스는 아무 것도 몰라요.”
“루아노스를 배신하겠다는 거냐?”
“배신이라뇨. 그냥 모르는 척 하겠다는 거죠. 뭐 상황에 따라서는 모르는 척 안 할 지도 모르고.”
“결국 협박이로군.”
“당신한테 나쁠 것은 없잖아요? 루아노스와 루카스를 끌어들일 일도 없고.”
“도중에 네가 변덕을 부린다면?”
“당신과 나는 가진 것이 달라요.”
의심 많은 자식. 라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은 바이스의 길드장. 한국 내에서도 많은 영향력을 갖추고 있죠. 내가 배신한다면, 최악의 경우에 당신은 여론 몰이라도 할 수 있잖아요?”
“하긴 그렇지.”
가람은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 이 대화는 동영상으로 녹화하고 있거든. 네가 배신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정도의 손해는 감수해야 한다. 라덴 본인도 가람을 배신할 생각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가람이 황혼의 추적자 퀘스트를 받은 이상, 괜히 가람을 견제하려 들었다가는 힘이 약한 라덴이 잘려나갈 뿐.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적당히 협박을 하면서 손을 잡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래서. 어때요? 협력하시겠어요?”
“어쩔 수 없지.”
가람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는 데모니언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자리에 털썩 앉았다. 라덴은 안도의 한숨을 삼키면서 가람을 지켜 보았다.
“앉지?”
“네.”
라덴은 얌전히 가람의 앞에 앉았다. 조명이 적은 칙칙한 어둠 속에서 가람과 마주 앉아 있으니 속이 근질거렸다.
“..레하브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런 무거운 침묵 속에서 십분. 체감 상으로는 몇 시간은 된 것 같은데, 시간은 고작 십 분밖에 흐르지 않았다. 참다못한 라덴이 그렇게 묻자, 가람이 머리를 흔들었다.
“몰라. 며칠 동안 이곳에 있었지만 보이지도 않았어.”
“..설마 떠난 것은..”
“그렇다면 퀘스트가 갱신되었겠지. 발할라의 퀘스트, 특히 추적 관련 퀘스트는 제법 친절해. 퀘스트가 레하브가 보하미르에 있다고 한다면, 레하브는 보하미르에 있는 거다.”
“보하미르는 넓어요. 집 말고 다른 곳에 있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지금 나가서 이 넓은 보하미르 땅을 뒤져볼까? 이곳에 살고 있는 NPC가 몇 천은 우습게 넘을 텐데?”
가람이 이죽거렸다. 라덴은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단서가 너무 적다. 퀘스트가 표시하고 있는 것은 ‘보하미르의 레하브.’ 그러니 보하미르에 레하브가 있는 것은 틀림없겠지만..
‘대도시를 둘이서 뒤지는 것은 불가능해.’
이 넓은 보하미르의 NPC의 동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리는 없다. 아니면 인해전술로 인력을 끌어다가 도시 전체를 뒤지면.. 아니, 그 수단을 쓴다면 어떻게 해도 흔적이 남는다. 누군가가 이 대도시에서 NPC 하나를 찾고 있다는 소문만 나도, 수상한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이 몰려 들 것이다.
“음..”
라덴은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앉은 가람은 일어선 라덴을 올려 보았다.
“뭐냐?”
“일단 집 안 좀 살펴보려고요.”
“소용없어. 이미 내가 다 뒤져봤거든. 내가 아는 모든 탐색마법을 사용했고, 손에 닿는 모든 것을 건드려봤고, 바닥도 뒤집어 봤다. 이 집에는 아무 것도 없어. 단서는 없..”
가람은 말을 끝까지 뱉지 않았다. 가람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라덴은 멈칫하고서 가람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누가 왔군.”
가람은 그렇게 소곤거리면서 내려 놓았던 데모니언을 다시 잡았다. 그 말에 라덴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 NPC?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라덴은 알아서 호흡 소리를 줄이고 자세를 낮추었다.
방문은 닫혀 있다. 가람은 데모니언을 앞으로 세우고서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라덴은 가람을 방해하지 않도록 옆으로 비켜서고서 귀를 기울였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다가온다. 낡은 복도를 걷는 발소리, 복도가 삐걱거리며 울린다. 가람은 주문을 외우지 않았다. 저 정도 수준의 마법사라면, 간단한 마법에 캐스팅은 필요하지 않다. 데모니언의 산양 머리 주변을 불길한 어둠이 떠돌았다.
‘응? 소리가..’
귀를 기울이고 있던 라덴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발걸음. 낡은 복도를 누르는 소리. 삐걱거리는 나무의 소리가 낮다.
철컥, 하고 문고리가 돌아간다. 가람은 데모니언을 앞으로 뻗었다. 문이 열린 순간, 데모니언이 흔들렸다.
“우왁!”
깜짝 놀란 비명이 터져 나온다. 데모니언에서 뻗어진 사슬이 누군지 모르는 방문자를 붙잡았다. 역시나. 라덴은 사슬에 손목이 잡힌 방문자를 보면서 혀를 찼다.
꼬마였다. 남자아이.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까? 라덴은 하얗게 질린 꼬마의 얼굴을 보면서 가람을 힐긋 보았다.
“..플레이어?”
“보기에는 NPC인데요.”
“에.. NPC에요!”
오가는 대화를 들은 꼬마가 외쳤다. 가람은 싸늘한 얼굴로 데모니언을 자신쪽으로 당겼다. 사슬이 당겨지고, 꼬마가 비명을 질렀다.
“아, 아파요..!”
“저기, 너무 과한 것 아니..”
“이곳에는 왜 왔지?”
가람은 라덴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슬에 끌려 온 꼬마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겁을 먹은 것이겠지. 라덴은 미간을 찡그리고서 가람의 얼굴을 노려 보았다.
“그렇게 강압적으로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플레이어라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NPC잖아? 죽여도 별 탈이 없고.”
“죽일 생각인가요?”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지.”
“나.. 나는.. 나는..”
대화를 모두 들은 꼬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꼬마는 주저앉으려고 했지만, 손목을 팽팽히 당기고 있든 검은 사슬은 꼬마가 앉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묻는 말에 대답해. 거짓말을 할 생각은 하지 마라. 나는 흑마법사거든. 플레이어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NPC를 상대로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저주 마법은 아주 많이 알고 있지.”
가람의 목소리는 차갑고 낮았다. 라덴은 가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필요하다면, 가람은 상대가 꼬마든 뭐든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람의 협박은 아주 잘 먹혔다.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죽음은 로그아웃이지만,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NPC들에게 죽음은 진짜 죽음이기 때문이다.
“비, 빈집이라서.. 뭔가를 훔치려고..”
꼬마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라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꼬마는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았다. 표정만 봐도 저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꼬마의 말을 들은 가람은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데모니언을 흔들었다. 데모니언에서 뻗어진 검은 빛이 머리 근처를 맴돌았다.
“머리가 나쁘군.”
“네..?”
검은 빛이 내리 꽂혔다. 꼬마의 입이 벌어졌다. 라덴은 입술을 뿌득 씹었다. 길쭉한 검은 송곳이 꼬마의 발등에 박혀 있었다.
꼬마는 입을 벌려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비명은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가람의 마법이 꼬마의 비명을 막은 것이다.
“다음은 왼쪽 발.”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심문의 기본은 고문이야. 상대가 NPC라면 더더욱.”
가람이 라덴을 힐긋 보았다.
“불만이라도?”
빠드득.
라덴은 주먹을 쥐고서 이를 갈았다.
끝
ⓒ 목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