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Coming of Shinken RAW novel - Chapter 82
지금 당장 알라베스 산으로 들어간다면 개죽음뿐이다. 라덴은 그것을 확신했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최상위 랭커들로 이루어진 공격대가 몰살당하는 알라베스 산에서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단 은둔자 퀘스트를 클리어 해야 돼.’
은둔자 퀘스트의 내용은 알라베스 산에 봉인된 악희의 봉인을 점검하는 것. 이전 시대의 용사라는 유성이 호위로 붙는 퀘스트다. 은둔자 퀘스트를 클리어 한다면 알라베스 산을 중심으로 뻗어진 블랙벨트가 사라질 가능성이 있으니, 일단은 은둔자 퀘스트를 클리어 하는 것을 먼저로 둔다.
‘정 안 되면 유성을 꼬셔보자.’
유성과 친분을 쌓는다면 알라베스 산 너머로 데리고 가 달라는 부탁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오히려 라덴은 그것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차라리 은둔자 퀘스트가 블랙벨트의 소멸에 아무 관계가 없다면 좋겠다. 가람은 국내 랭킹 2위에 바이스의 길드장이지만, 그런 가람으로서도 알라베스 산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상황에서 라덴이 유성을 호위로 붙이고서 알라베스 산을 넘을 수 있다면? 라덴은 가람을 제쳐놓고서 황혼 관련 스토리 퀘스트의 선두에 설 수 있게 된다.
‘그 이후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괜찮아. 텔레포트 링으로 알라베스 산 너머에 있는 도시의 좌표를 저장한다면 나 혼자서 알라베스 산 너머를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되니까.’
당장 그것만 해도 압도적인 이점이 된다. 유성과 알케나와 함께 악희의 봉인을 점검하는 날까지 앞으로 일주일.
그 일주일 동안 라덴이 해야 할 일은
유성과 친해지는 것이었다.
*
유성의 집은 라덴으로 하여금 서량 백호 무술관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백호 무술관을 떠난 지 두 달여. 사실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갈 수야 있겠지만, 라덴은 그러지 않고 있었다.
백호의 선봉이 되라고. 그런 말을 듣고서 서량을 나왔다. 서량을 처음 나섰을 때와 비교해서 강해지기야 했을 테지만, 솔직히 라덴은 아직도 백호 무술관의 제자들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뭔가는 이루고 가야지.’
그것이 라덴이 서량으로 돌아가지 않게 만드는 고집이었다. 라덴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유성을 마주 보았다.
“서량에서 무술을 배웠다고 하셨지요?”
유성이 물었다. 닫힌 문이 열리고 알케나가 들어왔다. 양 손에 든 쟁반 위에는 찻잔과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알케나는 일주일 동안 유성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먼저 그를 권했던 것은 유성이었다. 청성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알케나는 유성의 집에서 청소나 빨래 등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유성은 알케나의 그런 행동에 기겁하면서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었지만, 알케나는 유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된다는 그녀의 고집이었다.
“네. 백호 무술관에서 배웠죠.”
“백호 무술관.. 그렇군요. 제가 서량에 방문했을 때에는 백호 무술관의 관주는 진천이라는 노인이었습니다. 뛰어난 무술가였지요. 지금 백호 무술관의 관주는 누구입니까?”
“백설 관주님입니다.”
“백설. 아아, 기억나는 군요. 진천의 수제자였지요. 어린 나이였지만 무술관의 간판을 짊어질 만큼 재능이 뛰어난 남자였습니다. 지금쯤이라면 더 강해졌겠군요.”
유성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알케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알케나는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서 쟁반 위에 올라가 있던 찻잔을 라덴과 유성의 앞에 놓았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걸요.”
“하지만.. 아니, 아닙니다. 제가 말을 해서 들으실 분은 아니니까요.”
유성은 쓰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알케나가 내온 찻주전자에 담긴 차를 라덴의 잔에 부어주었다.
“사실 저는 두 분이 친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뜬금없이 유성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몸을 일으키고 방을 나서려던 알케나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알케나가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 유성을 보았고, 라덴 역시 찻잔을 들어 올리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예?”
“마침 한창 때의 남녀이지 않습니까. 서로 모난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그런 말은 라덴은 몰라도 알케나에게는 우스운 말이다. 판타지아 시절부터 알케나는 여고생이라는 간판과 예쁜 얼굴로 유명했었으니까.
‘나도 못생긴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주관적인 관점이 상당히 들어가 있기는 해도, 라덴은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했다. 미남이라고는 낯간지러워서 도저히 못하겠지만, 훈남 정도는 될 거야. 물론 라덴은 이 말을 입 밖으로 낼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다.
“음.. 조금.. 갑작스러운 말이네요.”
“알케나.”
유성이 알케나를 불렀다. 머뭇거리며 선 알케나를 향해서 유성이 빙그레 웃었다.
“이리 와서 앉으십시오.”
“아, 아직 청소가..”
“제가 나중에 하겠습니다. 이리 와서 앉도록 하세요.”
그 말에 알케나는 어쩔 수 없이 주춤거리며 유성의 근처로 다가왔다. 한쪽에 쌓여져 있던 방석이 둥실 떠올랐다. 유성은 들어 올린 방석을 라덴의 옆에 놓고서 알케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결국 라덴과 알케나는 서로 사이좋게 앉아서 유성을 볼 수밖에 없었다. 유성은 그런 둘의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보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선남선녀라고 생각하는데.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 음.. 선녀는 맞지만, 선남이라고는..”
일단 라덴은 겸손하게 한 번 물러섰다. 알케나는 얼굴을 붉히고서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라덴님에게는 죄송합니다. 하지만.. 으음.. 제가 청성에게 부탁받은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무슨 부탁을?”
설마 제자의 맞선이라도 주선해 달라는 부탁인 것일까.
“믿을만한 사람을 만들어 달라더군요.”
“유, 유성님. 그건..!”
알케나가 숙이고 있던 머리를 급히 들어올리며 외쳤다. 유성은 그런 알케나를 향해 살짝 머리를 숙여 보였다.
“늙은이의 오지랖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조금 성급하다고는 생각합니다만.. 보아하니, 애초에 두 분은 아는 사이이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예.. 뭐.. 그렇죠.”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이고, 두 분이 서로를 꺼려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는 함께 퀘스트를 수행해야 하는 사이 아닙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거야? 라덴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같이 퀘스트를 수행하는 사이일 뿐. 사적인 관계는 아니다.
사실 라덴은 알케나와 사적으로 친해지는 것에 조금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알케나가 워낙 유명인이었던 탓이다. 사실 유명도로 따지자면 판타지아의 라덴이 알케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만, 당분간은 자신이 라덴이라고 떠벌릴 생각은 없다.
“뭐.. 저야 상관없지만. 알케나님이 어떨는지..”
라덴은 슬쩍 알케나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유성이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성에게 부탁해야 할 것이 있는 이상 유성의 말을 정면에서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빠져나가기 위해 알케나에게 바통을 넘긴다.
“전.. 상관없어요.”
알케나의 반응에 라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 여자는 또 왜 이래? 라덴은 얼떨떨한 얼굴로 알케나를 보았지만, 알케나는 라덴의 시선을 피해서 머리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겠군요.”
유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강압적인 자리를 만든 것이 내심 미안했던 모양이다.
“이건 보하미르에서 유명한 연극단의 공연표입니다.”
아니, 꼭 그런 것도 아닌가. 유성은 빙긋 웃으면서 소매에서 두 장의 연극표를 꺼내 바닥에 내려 놓았다.
“유명도와 실력과는 달리 극단도 소규모고, 공연장도 작아서 표를 구하는 것도 힘들지요. 아마 플레이어에게 판다면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걸.. 왜?”
“두 분이서 외출하고 오세요.”
작정했나 봐. 라덴은 벙 찐 얼굴로 유성을 보았다. 서량 문화에 심취한 엘프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중매쟁이 같은 면도 있었던 모양이다.
“뭐, 저는 표만 전해줄 뿐입니다. 두 분이서 연극을 볼지 말지는 두 분이서 결정해 주세요. 마음에 안 드신다면 표는 팔아도 상관없습니다.”
“어.. 그러면 외출은..?”
“혼자 있고 싶습니다.”
유성이 활짝 웃었다. 그 단아한 얼굴에 걸맞는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나가주세요.”
축객령은 무자비했다.
서로 바보가 된 것 마냥 유선의 집 문 앞에 섰다. 알케나는 서량 때 보았던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라덴은 그런 알케나의 옆에 서서 손에 쥐어진 연극표 두 장을 내려 보았다.
“어..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당연한 말이지만, 라덴은 남자다. 알케나 정도의 미인과 단 둘이서 다닐 기회가 생긴다면, 이것저것 생각 다 버리고서 순수하게 남자로서 환호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내가 꼬신 것도 아니고, 알케나 쪽에서 말한 것도 아니고.. 이 상황을 좋아해야 돼, 싫어해야 돼?’
단순히 그런 문제였다. 유성이 주선해서 소개팅을 하는 느낌. 서로 원하지 않는데, 강제로 소개팅을 하는 느낌. 라덴은 알케나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표정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면사 때문에 알케나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
“가.. 갈까요?”
라덴이 어쩔 줄 몰라서 머뭇거리는데, 알케나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감추면서 라덴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면사를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달아오른 얼굴을 보여줄 필요는 없을 테니까.
“어.. 어디로요?”
“연극.. 시간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았잖아요? 그러니까.. 사, 산책이라도..”
목소리가 왜이리 떨리는지. 처음 공중파 방송에 나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았는데.. 알케나는 가슴을 졸이면서 꿀꺽 침을 삼켰다.
“산책.. 뭐.. 산책. 좋네요. 보하미르까지 와놓고서는 별로 관광도 안 했으니까.”
보하미르는 대도시인 만큼 볼 거리가 많은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발할라를 즐기는 플레이어는 각양각색이다. 단순히 몬스터와 싸우는 것이 재밌어서, 퀘스트를 수행하고 이 넓은 세계를 떠도는 여행이 즐거워서 하는 플레이어도 있지만,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세계를 관광하는 느낌으로 게임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오죽하면 휴가철마다 발할라의 관광명소를 도는 패키지 상품이 쏟아질 정도다.
결국 라덴과 알케나는 둘이서 나란히 보하미르의 거리를 걷게 되었다. 이러다 가람과 마주치는 것 아냐? 라덴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음.. 알케나님은 저랑 이러고 있는게 안 불편하세요?”
침묵이 거북해서 일단 그렇게 질문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말에 알케나는 잠깐 멈칫 굳었다가, 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저, 전혀요. 별로 불편하지는 않아요.”
“그.. 그래요?”
도대체 뭐하자는 거야? 설마 나한테 반한 거야? 라덴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알케나를 바라보았다. 쭈뼛거리던 알케나가 대뜸 머리를 들더니 하늘을 올려 보았다.
“나.. 날씨가 참 좋네요.”
그 말에 라덴은 알케나를 따라서 하늘을 보았다. 확실히 날씨는 좋았다. 해는 높았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바람은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불었다.
“..아.. 예.”
다만 공기가 무거웠다. 잠자코 서있던 둘은 결국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보하미르의 화려한 거리. 넓은 도로에 인종과 복장이 다양한 플레이어들 NPC들이 걸어 다닌다. 건물은 아름다웠고 활기찬 목소리들이 어울려 진다.
“야, 떴어!”
그런 한가로움이 옆에서 들린 누군가의 외침으로 인해 박살났다.
“뜨긴 뭐가 떠?”
“저쪽 거리에 레이크 떴다고!”
뚝, 하고 라덴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끝
ⓒ 목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