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Coming of Shinken RAW novel - Chapter 83
랭커.
랭커는 곧 스타다.
발할라의 세계에서, 랭커라 불리는 이들은 스타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다. 한국 랭킹 1위인 루벡도, 2위인 가람도, 5위인 루카스도. 한국 내에서 어지간한 스타보다 스타처럼 취급받는다. 가상현실은 이미 제 2의 세계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탓이다.
세계 랭킹 1위 정도 되면 그 이름값은 단순히 스타라고 하는 것도 부족하게 된다. 발할라를 즐기는 수천만에서 수억에 달하는 이들 중에서 정점에 선 자. 그것이 발할라 세계 랭킹 1위의 이름값이다.
파라곤의 길드장, 레이크.
레이크의 경우에는 발할라 세계 랭킹 1위라는 타이틀 외에도 이런 저런 타이틀이 많이 붙어 있다. 그는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재벌가의 상속자이기도 했고, 단순히 금수저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레이크 본인도 세계적으로 꼽히는 수재이자 수완가이기도 하다. 레이크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문의 인맥. 자신이 만든 인맥. 그리고 발할라에서의 인맥. 힘, 권력, 돈.
사람들은 그런 레이크를 동경하고 환호했다. 그 정도로 가지고 있는 것이 많으면 오만할 법도 한데, 레이크는 이미지 관리 하나만큼은 귀신같이 잘했다. 매달 억 소리 날만큼의 금액을 기부하기도 했고, 게임 내에서도 젠틀하고 매너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대부분 플레이어들의 환심을 얻었다. 발할라 내에서 레이크를 싫어하는 플레이어는 단순히 레이크가 가진 것을 시기하고 질투할 뿐. 레이크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었거나 인간성을 두고서 욕하는 플레이어는 아무도 없다.
“라.. 라덴님?”
라덴은 레이크와 악연이 있다. 5년 전에, 라덴이 한창 자기 잘난 맛에 취해서 쏘다닐 때의 일이다. 알케나는 뻣뻣하게 굳은 라덴의 얼굴을 보면서 슬며시 그를 불렀다. 라덴은 부름에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라덴님..!”
“아, 네.”
알케나가 다시 부르자 라덴이 목소리를 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경직된 뺨이 손끝에서 푸들거리며 떨렸다.
악연이라고는 하지만, 라덴은 레이크를 원수처럼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의 일은 라덴이 자초한 일이었다. 멋대로 캐삭이라는 조건을 걸었던 것은 라덴이다.
5년 전의 라덴은 어려도 너무 어렸다. 당신의 나이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고, 판타지아 안에서 자신이 가장 강하다는 생각에 듬뿍 취해있던 때다.
파라곤 길드와 시비가 붙었을 때, 원만하게 해결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 방법을 걷어차고 발작하듯이 날뛴 것은 라덴이다. 쪽수만 많은 새끼들. 그런 새끼들이 주제도 모르고 깝쳐?
5년 전, 판타지아에서 투왕이라고 불리던 라덴은 그런 마인드였다. 그래서 깨버렸다. 파라곤 길드원들을 혼자서 박살냈고, 이후로도 몇 번이나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살냈다.
상황을 진지한 전면전으로 이끌고 간 것은 라덴이었다. 판타지아의 모든 유저들이 투왕 라덴과 당시 랭킹 1위였던 레이크가 이끄는 파라곤 길드와의 격돌을 주목했고, 파라곤의 길드장이었던 레이크가 나서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파라곤의 길드원으로 들어와라. 레이크는 그렇게 제의 했었다. 5년 전의 상황에서 가장 조용히, 그럴 듯하게, 서로가 가진 이름값에서 적당히 합의하는 것에는 그 방법이 최고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걷어 찬 것 역시 라덴이다.
“괜찮.. 으세요?”
알케나가 물었다. 뻣뻣하게 굳은 뺨을 어루만지던 라덴이 피식 웃었다.
“괜찮을 것이 뭐가 있어요? 옛날 얘기인데.”
기왕이면 지워버리고 싶은 옛날 이야기. 5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이름을 날렸던 랭커들이 모두 현실에서 한 몫 단단히 잡을 때, 라덴은, 김현성은 자신이 멍청하게 굴었던 것의 대가를 톡톡히 치루어야만 했다.
“얼굴이나 보러 가죠. 뭐, 레이크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라덴은 그렇게 말하면서 알케나와 함께 레이크가 나타났다는 거리로 향했다. 악감정은 없다. 당시의 행동은 라덴 본인이 자초했던 것이니까. 그것을 되뇌어도,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당시에 라덴이 레이크를 상대로 승리했다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라덴의 아이템 파밍이 조금만 더 잘 되어 있었어도. 반대로 레이크의 아이템 파밍이 조금만 덜 되어 있었어도.
‘다른 것 다 떠나서, 레이크가 신위 헤르메스만 가지고 있지 않았어도 내가 이겼을 텐데.’
14강의 흑광검 라그나크. 당시 판타지아에서, 아니, 판타지아의 서비스가 종료될 때까지 최강이라고 불리던 무기. 사실 그것은 라덴에게 별 위협은 되지 않았다. 그 전투에서 라덴은 레이크의 공격을 거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이크가 가지고 있던 신발. 신위 헤르메스. 이 엿같은 아이템이 문제였다. 밸런스 붕괴. 신위 헤르메스는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아이템이었다. 마력만 불어넣는다면 딜레이 없이, 쿨 타임 없이 차원 굴절을 일으켜 모든 공격을 무로 돌려 버린다. 라덴이 항상 정확한 타이밍에 공격을 넣었다고 생각해도, 신위 헤르메스의 차원 굴절은 라덴의 공격을 모조리 흘려 버렸다. 가끔 레이크가 반응할 수 없는 타이밍에 공격을 넣어 성공하기는 했지만, 라덴의 공격은 레이크가 몸에 둘둘말은 장비 아이템과 크루세이더 직업의 단단한 몸빵과 방어 스킬 덕에 제대로 데미지를 박지 못했었다.
신위 헤르메스만 없었어도 그 방어를 박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미련 속에서 라덴과 알케나는 사람이 북적거리는 거리에 도착했다. 랭킹 1위인 레이크는, 다른 랭커를 비교적 포착하기 쉬운 대도시 보하미르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유명인이다. 덕분에 거리에는 레이크를 보겠다고 나선 플레이어들이 가득했다.
“잘 보이지도 않네.”
라덴은 투덜거리면서 보이는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레이크를 볼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그래도 기왕 얼굴을 볼 기회가 생겼으니 두 눈으로 한 번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5년이 지나서 레이크가 얼마나 잘나졌는지.
“야, 야!”
북적거리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몸을 들이 밀 때. 가까운 곳에서 누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뭐야 싶긴 했지만 라덴은 무시했다. 무시하고 앞으로 나가려던 라덴의 어깨를, 누군가가 덥썩 잡았다.
“사람을 밀쳤으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지!”
그렇게 외치는 놈은 얄팍하게 생긴 째진 눈이었다. 라덴은 잡힌 어깨를 힐긋 보고서 머리를 꾸벅 숙였다.
“아, 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이 새끼 뭐 어쩌자는 거야? 라덴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째진 눈이 손을 들어 라덴의 가슴을 강하게 밀쳤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 선 라덴은 가까운 플레이어와 등을 부딪쳤다.
“뭐야?”
부딪힌 플레이어가 눈을 부라리며 등을 돌린다. 작은 소란. 그것에 사람들의 이목이 끌린다. 멀찍이서 라덴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 다가 오던 알케나의 표정이 굳었다.
‘뭔지 알겠군.’
라덴은 혀를 차면서 밀친 가슴을 손으로 털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한 가운데에 선 레이크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랭킹 1위의 눈에 들어서 떡고물이라도 얻어먹고 싶나 보지. 레이크가 인재에 목이 말라 있다는 것은 유명한 소문이다. 사냥터에서 우연이 마주쳤을 때 스카웃 제의를 받거나, 스카웃 제의를 거절해도 비싼 아이템을 후원해 주곤 한다는 이야기. 판타지아 시절에도 레이크는 자신의 이미지를 그렇게 관리하곤 했었다.
“왜 밀치고 지랄이야?”
등 돌린 플레이어의 시선이 라덴을 밀쳤던 플레이어와 닿는다. 서로 시선이 나뉘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 라덴은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한 통속인 모양이다.
“사과하지 않았습니까?”
“사과로 기분이 풀리면 얼마나 좋겠어? 무릎이라도 꿇고 빌던가.”
의도적으로 상황을 몰아간다는 것이 느껴졌다. 인파에 끼인 알케나가 어쩔 줄 몰라하며 라덴을 보았다. 라덴은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쓱 보았다. 시비를 건 놈들은 고함이라도 지르듯 목소리를 높였고, 덕분에 레이크를 보러 나온 플레이어들의 이목이 라덴에게 꽂혀 있었다.
“무릎 꿇는 것은 조금 그렇고..”
“그럼 뭐?”
“깃발 꽂죠.”
차라리 깔끔하게 깃발을 꽂는 편이 낫겠지. 무조건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깃발을 꽂고 정식으로 PVP를 한다면 저들도 더 이상 시비를 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목은 이미 끌려 있다. 무릎을 꿇는 것은 당연히 싫었고, 그렇다고 나 몰라라 도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레이크가 보고 있었고, 알케나가 보고 있었다. 이놈의 자존심. 라덴은 입맛을 다시면서 시스템 창을 조작했다. 흐릿하게 나타난 붉은 깃발이 라덴의 손에 쥐어졌다.
“왜, 싫어요?”
라덴의 말에 시비를 걸었던 플레이어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 새끼 뭐야? 뭘 믿고 나대는 거야?’
장비도 시원찮아 보였기에 딱 좋다 싶어서 시비를 걸었는데, 보이는 자신감이 기묘하다 싶을 정도로 강하다.
‘이거 잘못 건드린 것 아니야?’
그는 레이크 쪽을 힐긋 보았다. 라덴의 예상대로, 그는 레이크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일부러 라덴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라덴은 잠깐 머뭇거리는 남자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왜. 시비 걸고서 막상 깃발 꽂으려니까 후달려요?”
“이.. 개새끼가.”
도발은 재밌다 싶을 정도로 잘 먹혀 들어갔다. 라덴은 보란 듯이 깃발을 든 손을 위로 치켜 들었다. 레이크의 눈이 흥미를 담아 반짝였다. 그 역시 라덴에게 시비를 걸었던 남자들처럼, 라덴의 장비를 파악하고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악세사리 파밍도 제대로 안 되어 있고. 무슨 자신감이지?’
그런 의문 속에서 라덴은 깃발을 내리 꽂았다. 파악! 바닥에 꽂힌 붉은 깃발이 바람도 불지 않는데 크게 펄럭거렸다. 씨근거리며 다가 온 남자가 깃대를 붙잡았다.
라덴이라는 이름을 밝히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래서 라덴은 설정을 바꾸어 자신의 이름을 익명으로 표기했다. 제라스는 이를 뿌득 갈면서 허리에 꽂은 검을 뽑았다.
‘강기 사용할 정도의 고레벨은 아닌 것 같은데.’
마오처럼 까다로운 고유특성만 없다면, 설령 강기를 사용한다고 해도 라덴이 크게 불리하지는 않다. 강기 실린 공격을 맞지 않으면 되는 것이니까.
“너 뒤졌다.”
제라스가 거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투 핸드 소드. 라덴은 제라스가 쥐고 있는 대검을 보면서 살짝 발을 들어 뒤로 물러섰다. 무기를 쥐고 있다는 것은 맨 손보다 리치가 압도적으로 길다는 뜻.
츠츠츠. 제라스의 검에 푸른 빛이 어린다. 거기에 강기까지. 라덴은 작게 혀를 찼다. 다행인 것은 놈의 검을 둘러 싼 강기의 색이 미약하다는 것이다.
‘레벨은 80대 초반 정도. 검강 스킬을 익힌지 얼마 안 되는 거야.’
발할라의 스킬은 사용할수록 성장한다. 초반에 익힌 스킬이라도 사용만 자주 한다면 후반에 익히는 스킬에게 크게 밀리지 않는다. 제라스가 보여 준 검강은 분명 80 레벨의 스킬이었지만, 숙련도가 낮은 탓인지 그 빛이 너무 옅었다.
‘검강은 마력를 어마어마하게 잡아먹지. 숙련도까지 낮다면 오래 쓸 수 없어.’
길어야 몇 분 정도. 초장부터 검강을 뽑아낸다는 것은 허세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겠다는 것인지. 차라리 빙빙 돌아서 시간을 끌어 볼까. 회피는 자신 있다. 양자택일을 써서 힘을 모두 민첩으로 돌려 버린다면, 라덴은 본래 레벨인 58을 아득히 뛰어넘는 속도를 갖게 된다.
‘그건 멋이 없지.’
관객도 많다. 5년 전에 악연을 맺은 레이크도 보고 있다. 알케나도 보고 있고. 라덴은 양 손을 내려 보았다.
손톱을 꺼내야 할까? 아니, 손톱은 너무 눈에 띈다. 그렇다면 그냥 맨 손으로. 라덴은 쥐고 있던 주먹을 펴고서 손가락을 살짝 굽혔다. 제라스는 검강까지 뽑아 놓고서 먼저 들어오지는 않았다. 보기보다 신중한 타입인 모양이다.
‘아니면 겁이 많거나.’
어느 쪽이든 라덴이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라덴은 먼저 들어오는 놈이나, 신중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놈을 가리지 않고 모두 좋아했다. 각각 상대하는 맛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얏!”
들어갈까 싶었는데, 제라스가 촌스러운 기합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라덴은 피식 웃으면서 보란 듯이 상체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알아서 들어 와 주네.’
정직한 내려찍기. 고유특성은 염두에 두고.. 내리 긋던 투 핸드 소드의 궤적이 라덴이 비틀었던 방향으로 꺾인다. 일직선 찍기에서 대각선으로, 앞으로 뻗었던 오른 발은 미리 끝을 들어 두었다.
라덴의 몸이 왼쪽으로 크게 회전했다. 콰앙! 내리 찍힌 검이 바닥을 박살냈고,
발뒤꿈치에 얻어맞은 제라스의 턱이 옆으로 돌아갔다.
끝
ⓒ 목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