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rongest brother ever RAW novel - Chapter 215
사상 최강의 오빠 217화
에필로그
낡은 식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방.
삐끄덕거리는 나무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던 흑발 사내가 눈썹을 찡그 렸다.
마치, 기분 나쁜 기억에 평온을 침 범당한 것처럼.
-아버지! 침식을 멈출 방법이 있 을 거예요! 그러니 제게 시간을… 제발 시간을 주세요!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게 된 누나 의 목소리가 뇌리를 울리고, 그 뒤 를 권위적인 목소리가 뒤따랐다.
-안 돼. 보이드의 침식에는 전염성 이 있다. 그러니 이 이상 지체할 수 없다.
그 단호한 대답에 누나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악을 질렀다. 마치, 언어 에 비명을 버무린 것 같은 소리였 고, 말이었다.
-싫어!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요! 어머니를! 어머니를… 이대로 보낼 순 없어요!
하지만 누나와 자신이 아무리 말려 도 소용없었고, 아버지는 결국 자신 이 제일 사랑하던 아내를 자신의 손 으로 추방해야만 했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바래 지긴커녕, 선명해지는 법.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 탓일까?
흑발 사내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누나와 나는 추방당한 어머니를 찾아 별의 바다를 헤맸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거라 믿고 있었기에. 왜 안 그렇겠는가? 우리는 신. 이 세계 에서 죽음이 침범치 못하는 유일한 존재이거늘.”
돌연 솟구친 구토감에 흑발 사내는 헛구역질을 했다. 망막을 기억이 침 범했고, 광경이 떠올랐다.
구더기가 흘러나오는 안구, 입안에 서 기어 나오는 지네.
썩은 몰골로 자신들을 마중 나온 어미의 사체. 부패한 생명, 소실된 영혼.
신격도, 신위도, 형체도 잃은 채. 죽음에 함몰당한 어미를 본 누이와 자신은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누이는 슬퍼했고, 절망했다. 하나, 반면에 나는 전혀 슬프지도, 안타깝 지도 않았다. 아마도, 슬픔보다 더 큰 감정이 나를 지배했던 탓이겠 지.”
두려웠고, 무서웠다.
죽음은 자신들과는 거리가 먼 얘기 라 생각했고, 그것에 대해 알 필요 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이 바로 지척까지 다 가와서야 알았다.
자신들은 죽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죽고 나면? 그 이후에는 뭐가 있지? 나라는 존재는 왜 있으며, 어떻게 되는 걸까?
죽음을 마주한 신은 그렇게 나약해 졌고, 초라해졌으며, 어쩌면 미쳐버 렸다.
“우리는 불멸이기에, 사후세계에 대해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과정 이 결말을 궁금해할 필요 없듯, 우 리에게 끝이란 와닿지 않는 단어였 기에. 그러나, 우리도 죽을 수 있다 는 걸 깨닫고 나서야, 나는 어째서 인간들이 종교를 갈구하고, 심취하 는지 알 수 있었다.” 미지와 공포는 종교를 부른다. 모르기에, 초월적인 어떤 것에 기 대, 안위하고 안도하고 싶은 것이다.
그때부터 였다.
사내가 인간들의 종교를 관심을 가 지고, 파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죽었다는 걸 안 아버지 는 괴팍해지고, 과격해지기 시작했 다. 지금에야 깨달은 거지만, 아마 아버지도… 죽음을 두려워했던 걸지 도 모르겠다.”
더 이상 자신들이 불멸의 존재가 아니란 걸 깨달은 아버지. 그리고 신들은 변하기 시작했다.
과격해졌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기존에 정립했던 윤리를 지르밟길 서슴지 않았다.
보이드를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자신들이 창조했으나 존중하기로 했 던 피조물들을 자원화하고, 소모하 길 망설이지 않았을 정도로.
“모두가 변했다. 신들, 나, 누이,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지기였 던 대부도.”
대부는 어머니를 추방해 죽음으로 내몬 아버지를 증오했다. 당시엔 둘 도 없는 친우였던 대부가 왜 아버지 를 그토록 증오했는지 몰랐으나, 지 금은 안다.
대부와 어머니가 서로 사랑하는 사 이였다는 걸.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난 자식이 바로 누이였다는 걸.
“…대부는 누이에게 자신이 친부라 는 걸 밝히고, 반역을 종용했다.”
친어머니가 죽고, 친부가 대부라는 걸 안 누이는 망가져 버렸다. 그리 고, 자신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방법 은 틀렸으니, 우리가 이 잘못된 것 을 모두 바로잡자고.
“나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당시, 인간들의 종교에 심취해 그릇 된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다.”
흑발 사내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후, 말을 이었다.
“대부. 아니 앙그라의 손에 아버지 가 나락에 떨어진 후… 나는 누이, 앙그라와 함께 Y 코드를 나눠 가졌 다. 그렇게 이그드라실의 제어권의 일부를 얻은 나는 본격적으로 움직 이기 시작했다.”
모든 신이 보이드를 막을 방법. 혹 은 자신들이 살 방법을 모색했을 때, 사내는 보이드가 ‘왜’ 나타났을 까를 궁리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사내는 인간들 의 종교를 연구하며 얻었다.
성경, 불경, 코란. 이 모든 성서가 이르는 신들은 전지전능하다.
그러나, 이것들이 가리키는 신은 그들에게 관여하지 않는다.
그래, 방관하는 것이다.
반면, 자신들은 달랐다.
그들이 더 풍족하게 살길 바라고, 더 완벽한 세계에서 살길 바라는 마 음에 관여했다.
굶주리면 음식을 내렸고, 부패한 이들은 척결했고, 오염된 이들은 정 화했고, 다친 이들은 살려줬다.
뿐인가? 불멸은 아닐지라도, 불로 와 장생을 내렸으니.
이것이야말로 유토피아.
이상향의 세계였다.
“선조신들은 우리에게 일렀다. 그 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 그저 지켜보라. 그것이, 그들을 위한 것이 며, 그것이 바로 그들이 원하는 세 계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을 가엽게 여겼다. 원래 그런 분이다. 권위적이고, 냉정해 보였으 나, 속은 여리고, 세심한 분이었다.
그렇기에, 김세훈을 그리 아끼고, 안타깝게 여긴 것이겠지.
또한, 그렇기에, 자기 생각대로 움 직여주신 거겠지.
“이 세계에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우리다. 그래, 우리 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다. 관여 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여했다.”
흑발 사내가 의자에 등을 기대자, 낡은 나무가 자아내는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우리를 신이라 칭했으나, 사실… 신이 아니라면? 진정한 신은 따로 있고, 그들은 지켜만 보고 있 을 뿐이라면? 그리고, 우리에 의해 정체된 세계가 잘못된 것이라 여긴 다면? 아마도, 그들은 이리 생각하 겠지. 우리를… 배제해야겠다고.”
그렇다면, 보이드가, 버텍스가 나타 난 이유가 설명된다.
그래, 죽음과 같이 미지인 그들이 왜 자신들에게 나타났는지, 전부.
“…물론, 이 모든 것은 내 망상일 수도 있으나, 나는 이 망상을 확신 한다. 그래서다… 그래서… 이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으로 아버지, 앙그라. 그리고 내 목표는 명확해졌 다.”
주신의 목적은 자신들의 일족이자, 동족인 신들의 존속.
앙그라의 목적은 주신의 파멸.
사내, 까마귀의 목적은 사육되고, 소모되고 있는 피조물들을 해방함으 로써,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
그리함으로써, 일그러진 법칙을 바 로 세우는 것.
“그러나,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그렇기에 찾았다. 적합한 이를.”
사내는 신이었기에, 자신이 꿈꾸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알 고 있었다.
무신 행성과 인간들의 창조를 관장 하는 우주수 이그드라실을 제어할 수 있는 코드 Y코드의 주인, 주신 의 죽음만이 그들을 해방시킬 수 있 는 유일한 길.
하나, 이것은 가능성이 너무도 희 박했다.
“이것은 영웅왕조차 못 하고, 앞으 로도 하지 못할 일.”
G 코드 결계를 허무는 데 필요한 두 개의 키.
롱기누스의 창. 그리고, 태초에 하 늘과 땅을 갈랐다는 검, 괴리검(乘 離劍).
이 중 롱기누스는 연옥 안에 잠자 고 있었고, 괴리검은 영웅왕이 가지 고 있다.
“기실, 영웅왕에게 그럴 마음만 있 었다면야… 그는 충분히 롱기누스를 손에 넣었을 수 있었으리라. 하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 었기 때문이다. 설사, 그 두 개를 손에 넣더라도… 주신을 죽일 수 없 다는 걸.”
G 코드를 허물더라도, 영웅왕은 절대 주신을 죽일 수 없다.
이유는 명료하다.
영웅왕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을 죽이는 것은 허구 속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당 연하지 않은가? 애초에 인간이 죽일 수 있는 존재라면, 신은 신이라 불 릴 자격이 없을 터인데….” 그래서였다. 사내가 무언가를 찾아 해맨 것은.
그렇게 얼마나 많은 세월을 찾아 헤맸던가?
끝내 그는 찾았고, 만났다.
김세훈을.
“나의 심장을 쪼개, 씨앗을 만들었 다. 그리고 그것을 임신한 트롤에게 심어 태어나게 했으니… 이것이 바 로 올-로그가 태어난 경위라. 이후, 나는 시리우스에게 말했다.”
-올-로그. 이 이름을 기억해두게.
-올-로그…? 그게 뭡니까?”
-내가 뿌려둔 씨앗의 이름이지. 잊 지 말게. 올-로그라네. 그리고 김세 훈에게 단단히 이르도록 하시게. 적 어도 두 번째. 아니, 첫 번째 십좌 는 올-로그로 선택해야 한다고.
과거, 전승 의식 때 시리우스와 나 눴던 대화를 떠올린 그가 중얼거렸 다.
“올-로그는 내 심장이며, 그의 육 신을 비옥한 옥토로 만들 거름. 그 리고, 그 옥토를 해갈시키는 데 필 요한 것은 신혈.” 낡은 것을 새것으로 바꾸기 위해 선, 먼저 낡은 것을 파괴하고, 버려 야 하는 법.
백년 간 김세훈의 육신은 수없이 파괴됐고, 올-로그는 그 육신을 수 없이 재생시켰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쳐 그의 육신 은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다.
인간의 것이 아닌 것으로.
“눈치챈 이는 탐무가 유일했느 니….”
-…을-로그의 그것은 재생이 아니 다. 그것은… 부활이다.
“정확했다. 나는 올-로그를 통해 낡은 것을 죽이고, 새것으로 부활시 키는 행위를 반복했으니까.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사내가 일어나, 옆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피접이 상접한 몰골의 시체 가 낡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사내 는 그 시체의 모발을 쓰다듬으며 말 했다.
“나의 심장, 올-로그가 너를 복원 하는 과정 속에서, 너의 세포는 나 의 것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너는 비로소 준비됐 다. 나의 모든 피를 받아들일 준비 가….” 사내가 침대 옆에 있는 유리관을 시체의 팔과 자신의 팔에 있는 정맥 에 꽂았다. 이윽고, 사내의 팔에서 흘러나온 붉은 핏물이 유리관을 통 해 시체로 흘러갔다.
“신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신뿐. 하나, 우리를 창조하고 사라진 선조신들은, 우리를 창조할 때 절대 동족을 죽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너희의 명령어 코드와 동일 한 것으로, ‘이것은 절대 동족을 해 칠 수 없다’라고 되어 있지.”
사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 다.
“그렇기에 우리는 절대 서로를 해 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앙그라는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고 봉인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필요했다. 우리가 아닌 다른 신이. 그래서 찾았다. 신이 될 수 있는 재 목을. 그리해서 만들기로 했다. 신을 죽일 수 있는 신. 데미 갓(Demigod) 을 ”
사내가 시체를 내려다봤다. 유리관 을 통해 피가 말라비틀어져 있던 시 체의 혈관을 적시자, 사막의 꽃처럼 메말라 있던 시체가 서서히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침대 옆에 사내가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깨어나라 김세훈. 그리고 돌아와 라, 이대로 잠들기엔… 네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너무 많이 남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시험의 숲. 하늘제를 통과한 이들 이 검증을 받기 위해 마지막으로 거 치는 관문.
그곳을 관장하는 랭커.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라고?”
시체들이 즐비한 숲의 중심. 그곳 에우뚝 선 4인.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 랑하는 말꼬랑지 여인의 위세에 놀 란 마리아의 물음에 옆에 있던 이가 답했다.
“TYPE 1 출신의 김세정입니다.”
마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 다.
“몇 명이나 죽였지?”
“313명입니다.”
“와우, 300? 나한테 할당된 자원이 대충 천명이니… 혼자서 3분지 1을 처리한 거잖아? 이야, 대단한걸?”
“저도 그간 나름 난다 긴다 하는 인재를 봐왔지만… 이런 케이스는 처음입니다. 필히 영입해야 합니다.”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마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저 우스꽝스러운 하키 가면은 대체 왜 쓰고 있는 거야?”
“그게… 오라비의 유품이라고 하던 데요.”
“오라비의 유품? 흐응… 뭐, 됐어. 한번 만나보자. 안 그래도 인재가 부족했던 참인데… 아주 잘 됐네.” 핏물로 범벅된 하키 가면을, 들뜬 숨으로 채우던 김세정이 고개를 떨 궜다. 양손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핏 물의 감촉.
가면을 뚫고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 내.
이제는 익숙해진 그것들을 애써 외 면한 그녀가 아들을 잃은 후 실어증 에 걸린 박정숙을 바라봤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을 최강혁 등에 기댄 채 업혀있는 박정숙의 머 리칼을 김세정이 어루만졌다. 자신의 손에 피가 묻었든 안 묻었 든 개의치 않는 손길. 그리고, 박정 숙 또한 피비린내에 찌든 그 손길이 익숙하다는 듯 눈 하나 깜짝 않았 다.
“엄마. 걱정 마.”
김세정이 고개를 들고, 자신의 손 아래 죽은 이들의 시체를 마주했다.
“엄마는 내가 지켜. 그리고… 오빠 의 유지. 내가 잇기로 했어. 괜찮 지?” 김세정의 입에서 나온 오빠라는 말 에 박정숙이 반응했다. 말을 못 뗀 갓난아이처럼 어버버 하는 박정숙. 그런 그녀를 본 김세정의 턱 끝에 매달린 투명한 액체가 위태롭게 흔 들리다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옆에 있던 최강혁이 말했다.
“세정 씨… 이들을 이렇게 다 죽일 필요는….”
김세정이 답했다.
“강혁씨. 약한 소리 집어치워요. 이 세계에서 약한 자는 도태되고, 잡아 먹혀요. 그래요. 강혁 씨도 알잖아 요? 그토록 강했던 오빠가… 어떻게 됐는지?” “…세정 씨… 그 친구는….” 김세정이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살아남을 거예요. 그리고, 그 러기 위해 오빠보다 더 냉혹해지고, 잔혹해질 거예요. 맹세해요. 필요하 다면, 오빠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 일 각오가 돼 있다고. 그렇게 함으 로써 강해질 수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마치, 자기 자신을 단도리치듯 씹 어 삼키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김 세정이 말을 뚝, 멈췄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꿈꾸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 랑한 것인지.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 할 순 없었다.
누군가는 그의 유지를 이어야 했 고, 빚을 갚아야 했으니까.
‘오빠. 걱정 마. 이제 편히 잠들어. 오빠가 하던 일… 내가 마무리할테 니까.’
자신의 눈앞에서 벌레처럼 김세훈 을 밟아 죽이던 그 노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앨리스가 말했다. 그 노인이 신이 라고.
그리고, 김세훈이 그를 죽이기 위 해 평생을 살아왔으며, 끝내는 실패 했노라고.
‘앞으로 다신 울지 않을게, 나약해 지기엔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대 신… 오늘만 울어도 될까? 비밀인 데… 진짜 너무 보고 싶거든. 미치 도록… 그리워….’
김세정이 고개를 떨구고, 등과 어 깨를 들썩이자, 서예림이 고개를 돌 리며 눈을 감았고, 앨리스는 무표정 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김세정이 눈물로 축축해진 흙바닥 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그래야만, 자신의 안에 있는 모든 감정의 찌꺼기를 없앨 수 있는 것처 럼.
눈을 뜬 김세훈을 제일 먼저 맞이 한 것은 흡혈귀에게 피를 다 빨린 것처럼 피골이 상접한 흑발 사내였 다.
“깨어났군.”
깨어나자마자, 김세훈은 전후 사정 을 알 수 있었다. 까마귀의 피에 담 긴 기억의 일부가 그의 뇌에 흘러들 어왔기 때문이다.
김세훈이 물었다.
“하나 묻지.”
“ 뭘?”
“너는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하면서 도, 왜 죽음을 택하는 거지? 사실, 너는 우리를 가엽게 여기지도 사랑 하는 것도 아니잖나.”
기억의 일부. 그리고 거기에 스며 든 진심. 그곳에서 김세훈을 알 수 있었다. 까마귀가 사실, 인간을 그렇 게 사랑하지도, 아끼지도 않는다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까마귀는 자신들 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죽 어가고 있다.
대체 왜?
“나도, 아버지도, 신들도…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챔피언과 성소를 이용해 보이드를 막고 있으나, 결국, 우리는 막아내지 못할 것이란 것을. 그래, 우리에게 죽음은 예정된 결과 란 것을.”
“너는….”
사내가 말했다.
“네 말대로, 나는 너희를 위해 희 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 나는 오 로지 나만을 위해서 희생한다.”
까마귀는 두려웠다. 자신이 죽고 나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신의 영혼은, 자신의 자아는 죽 음 뒤에 어디로 향할지.
그때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이끈다면, 그리함으로써 이 잘못된 세상을 수정하는데 이바지 한다면.
그러면 자신만은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이 가져다주는 이 지독한 불안 감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너희는 왜 남을 돕는가? 정말 그 것은 대가 없는 이타심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너희가 타 인을 위해 행동하는 것 또한 철저히 자신을 위해서라고. 그래, 그것이 적 어도 종교에서 비롯된 선행이라면… 말이지.” 사내가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두 손을 꽉 잡고 한참을 기도했다.
이 세상 모두가 지옥의 구렁텅이에 떨어지더라도, 자신만은 구원해달라 며, 그래, 자신만은 천국의 입구로 인도해 달라며.
기도를 끝낸 사내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지금부터 난 이그드라실의 씨앗을 너에게 심을 것이다.”
“이그드라실의 씨앗?”
“너는 탈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것은 내 심장과 신혈을 받아 데미갓 이 된 지금도 동일하다. 하나, 이그 드라실과 접속하지 못하는 신은 반 쪽도 안 되는 팔푼이인 법. 너를… 이그드라실과 접속시킬 필요가 있 다.”
사내가 품에서 꺼낸 씨앗을 김세훈 의 가슴에 심었다. 그러자 씨앗은 김세훈의 피부에 스며들더니 그의 명치에 뿌리를 내렸다.
“이그드라실의 씨앗은 탈피하지 못 한 이를 강제로 탈피시키는 귀물. 그리고, 이것으로… 너는 다른 존재 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명치에 내린 씨앗의 잔뿌리가 혈관 을 통해 자신의 뇌와 심장. 사지육 신에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김세 훈이 몸을 덜덜 떨었다.
이내, 그의 몸에서 휘광이 퍼져나 오며 빛의 번데기가 나타나 김세훈 의 육신을 집어삼켰다.
빛의 번데기를 보며 사내가 말했 다.
“이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했다. 그래,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어… 그러니… 나는 자격이… 있….”
그 말을 끝으로 사내가 고개를 떨 구고 숨을 거두자, 그곳에 남은 건 심장처럼 맥동하고 있는 빛으로 된 번데기뿐이었다.
10년 후.
생명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쓸쓸한 행성의 대지.
그곳의 황량한 벌판 위에 놓여 있 던 나무 오두막의 문을 열고 한 소 년이 걸어 나왔다.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긴 흑발.
앵두처럼 작고 예쁜 입술, 눈웃음 을 지으면 애간장을 태울 것 같은 실눈. 그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언 뜻 그를 소년이 아니라 소녀로 착각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소년은 앙증맞은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주머니에서 조약돌을 하나 꺼냈다.
소년이 바닥에 조약돌을 뿌리자, 조약돌에서 뻗어 나온 빛이 푸른빛 포탈을 만들었다.
포탈 앞에 선 소년은 행성을 을씨 년스러운 풍경을 한 눈에 담으려는 듯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걸음을 옮 겨 포탈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