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74
(73)
“사람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분명히 청회색의 불빛이 이 방향에서 보였었는데.
그러면 불을 피운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맞다.
나는 직접 게르 속으로 들어가서 실내를 살펴봤다.
한기를 막기 위한 두꺼운 천으로 벽을 덧댄 게르의 실내는 4인 가구가 겨우 몸을 누일 수 있을 법한 넓이였다.
방 가운데에 있는 작은 화로, 냄비, 여기저기 적당히 흩어진 생활용품.
이것만 봐서는 어떤 가족이 평범하게 생활했다가 잠시 외출한 것처럼 보였다.
“공작님, 뭘 보고 계시는 건가요?”
“사람들이 없는 게 이상하잖아. 아까까지 불빛도 보였고, 여기에 물건도 아직 남아있는데.”
촌락 주민들이 전부 어딘가로 떠난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루셀은 머리를 들이밀고 휙휙 둘러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군요. 공작님 말씀대로 사람들만 통째로 사라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시간이 꽤 지난 것같아 보이는데요?”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는 의미야?”
“저기 화로에 장작 넣는 곳 문이 열린 거 보이세요? 불씨도 없고, 다리 쪽에는 서리까지 얼어있잖습니까. 오랫동안 안 썼다는 뜻이죠. 이렇게 추운 곳에서 살면서 불을 안 쓸 수는 없을 테니까요.”
루셀이 나에게 윙크를 보내고는 안으로 들어가 높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옷을 뒤적거렸다.
밖에서 기다리기 힘들었던지, 아멜리아와 레안드로스도 슬금슬금 들어왔다.
“그럼 불빛은 대체 어디서…….”
“공작님, 그보다 일단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떨까요?”
루셀은 뭔가를 한아름 안고 와서 바닥에 쏟아냈다.
“주인이 없는 집인 것 같으니 잠시 빌리자고요.”
“이래도 돼?”
“안 될 건 어디 있습니까. 원래 세상 만물은 전부 신께서 빚으셨답니다. 그러니 이 집주인과 저희는 신앙적 형제자매인 셈이죠.”
이럴 때만 신성기사단 티를 내네.
하지만 확실히 쉴 필요가 있긴 했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체력에 각별히 유의해야 했다.
게다가 공작저에서 준비한 겨울옷은 북부의 추위에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두껍고 싸늘한 옷을 몇 벌씩이나 겹쳐 입고서 뒤뚱거리면서 실내를 정리했다.
밖에 붙어 있던 찌그러진 쇠 냄비에서 토막 난 채 얼어버린 생선도 몇 마리 찾아내서, 우리는 그걸 눈과 함께 끓여 먹어야 했다.
밍밍한 생선국에 아멜리아는 좀 역하다는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혹한 속에서 속을 덥힐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지.
어떻게든 배를 채우고 난 우리는 한군데에 모여 눈을 잠시 붙이기로 했다.
화덕에 불이 붙으니 실내가 생각보다 따뜻해져서 잠이 솔솔 왔다.
얼어서 가려운 발가락을 몰래 꼼지락거리면서 뭔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수마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보자…….
“공작님.”
“흐억!”
레안드로스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나만 또 늦잠 잔 거야?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자 레안드로스가 낮게 말했다.
“휴식을 방해해서 송구스럽습니다. 아까 마을에 오기 전에 봤던 불빛을 발견해서 추적이 필요하실까 싶어.”
“불빛? 그 파란색?”
“네. 방금 밖을 둘러보고 왔는데 마을 밖에서 그 빛이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밖이라.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게르를 나서자 시린 공기가 바로 얼굴을 후려쳤다.
레안드로스의 말처럼 저 멀리,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시야 안에서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확실히 그건 청회색의 불빛이었다.
하지만, 뭔가가 조금.
“……사람이 들고 있는 램프가 아닌 것 같아. 나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좀. ……춤추는 것 같지 않아?”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요. 어쩌시겠습니까?”
불길 자체가 너울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맹렬하게 타올랐다가 꺼질 듯 사라지고, 그러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저게 램프의 불이라면 램프의 주인은 램프를 무슨 쥐불놀이처럼 돌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체 누구길래 설원 위의 환상 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단 말이냐.
목에 걸린 호각을 짧게 불자, 게르의 뒤편에서 검은 말이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늠름한 말은 숨은 쉬되 콧김조차 피어오르지 않았다.
“가보면 정체를 확인할 수 있겠지.”
“공작님께서도 동행하시겠습니까?”
“응. 궁금해서.”
슬레이가 높게 울었고, 눈이 잔뜩 얼어붙은 설원 위로 뛰어나갔다.
그와 동시에 창백한 불도 함께 눈안개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저건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
이를 악물고 슬레이의 위에 납작 엎드려 불빛을 추적했지만, 그것은 쫓으면 쫓을수록 더 멀리 달아날 뿐이었다.
“슬레이! 저거 놓치지 마!”
슬레이가 포효했다.
한순간 온몸으로 맞고 있던 풍압이 거세졌고, 레안드로스가 뭐라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매서운 바람 소리에 묻혔다.
단번에 어마어마한 거리를 도약한 슬레이는 우리를 태운 채 그것의 앞을 막아섰다.
간신히 고개를 들고 불빛의 정체를 본 순간, 우리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사람이었다.
북부 차림새를 한, 전형적인 북부인.
온통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은 다듬지 못한 지 꽤 된 것 같았다.
옷에 구멍이 숭숭 뚫려 안에 채워 넣은 보충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에 씌운 장갑 역시 구멍이 나 있었고, 그 구멍으로는 새까만 손가락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말을 잃은 건 아니었다.
사람이 통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그 사람의 맨발부터 허리께까지 창백한 불이 활활 타올랐다.
불은 뜨겁지 않았으며, 붉거나 찬란하지도 않았다.
다만 모든 이들에게 북부의 냉기를 흩뿌릴 뿐.
그의 충혈된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저기.”
“나프샤카-타플라흐룸! 나프샤카-타플라흐룸!”
날카로운 괴성.
레안드로스가 말에 탄 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얼굴의 살갗을 쥐어뜯으면서 외쳤다.
“헬름 타프카 나프샤카 타플라흐룸! 극권의 군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나를진노케하지말라너희의심장을바치고얼음의권속으로부활하리라죽음은영겁의너머로사라지고내가너희를축복하니이로써삼라만상의지혜를득하리라너희는인간됨을버리고무릇악한것을긍휼이여기라.”
“공작님,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아하하, 우후후후, 흐흐.”
레안드로스의 말에 미친 듯이 웃던 남자의 얼굴이 찢어졌다.
그 사이에서 흐르는 건 붉은 피가 아니라 새로운 푸른 불꽃이었다.
그는 검은 손가락이 삐져나온 양손을 우리에게로 향했다.
“마크나티 넬람, 그분의 선지자가 이 땅에 내려오리라! 불길한 저 별들이 제 궤도를 찾을 때 이야기가 시작되리라! 너희는 그날까지 불멸하리라!”
선지자, 별, 궤도.
그는 미친 듯이 웃다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거뭇거뭇하게 얼어붙은 맨발이 푸른 불꽃이 감쌌다.
춤추는 불꽃은 눈 깜박할 새에 저 멀리 멀어졌다.
그가 딛고 있던 자리는 발자국도 없이, 그저 반투명한 얼음으로 덮여 있을 뿐이었다
하얀 설원에 둥그렇게 남은 얼음.
“방금, 대체, 저건.”
레안드로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혼잣말에 답해줄 수가 없었다.
얼음. 극권의 군주. 마크나티 넬람, 나프샤카 타플라흐룸,
차가운 불꽃.
청회색의, 무한하게 타오르는 차가운 불과 미친 사람…….
“공작님?”
생각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북부에도 구덩이가 있었다.
오래된 신의 강림을 기대하며 만든 구덩이가.
그리고 구덩이에 강림할 예정인 존재는 아마도…….
“레안드로스, 당장 돌아가자. 마을에 뭔가가 있었어.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거야.”
분명 ‘극권의 군주’라고 불리는 고대의 신.
모든 것을 얼리는 차가운 불꽃,
아품 자가 틀림없었다.
* * *
촌락의 게르로 돌아가니 난리가 나 있었다.
잠에서 깬 아멜리아와 루셀이 우리가 말도 없이 사라진 걸 발견한 모양이었다.
“공작님, 대체 레안드로스 선배님과 어딜 갔다 오신 겁니까! 말씀이라도 하시고 가시지!”
“마, 맞아요, 걱정, 해, 했는.”
두 사람은 우다다 달려와서 잔소리를 퍼부으려 했지만 내 표정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공작님,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푸른 불꽃을 조사하려고 나갔었는데 뭔가 이상해. 마을을 조사해야 할 것 같아. 다들 옷 입고 밖으로 나와.”
몇 분 후, 채비를 한 우리는 각자 흩어져서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조사할 수 있는 건 수상한 문양이나 조각상, 기이한 언어가 적힌 거라면 뭐든.
그 밖에도 조금이라도 수상한 게 있다면 바로 공유하기로 했다.
각자 맡은 구역을 들쑤시면서 수색을 하던 차였다.
그러던 중 내가 담당한 구역으로 오던 아멜리아가 눈에 띄었다.
“아멜리아. 어쩐 일이야? 뭐 좀 찾았어?”
“고, 공작님. 이, 이리 와보셔서, 한 번 봐, 주셔야 하, 할 것 같아요.”
그녀가 이끈 곳은 촌락의 중심부라고 부를 법한 구역이었다.
중앙의 작은 공터의 가장자리에는 뭔가를 기원하듯 높은 기둥이 서 있었다.
상당히 낡은 천이 기둥의 꼭대기에 감긴 채 계속해서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대의 뒤에 보이는 천막.
그 천막은 다른 천막들보다 확연히 더 컸으며, 무늬를 짜 넣은 천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중요한 장소처럼 보이는 천막으로 냉큼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사람 없는 집 특유의 냉기가 반겼다.
생활에 필수적인 가구나 도구가 널려 있던 다른 집들과는 다르게, 여기에는 무언가를 말려 다발로 묶은 것이나, 여러 사냥도구만 즐비하게 걸려있었다.
어느모로 보나 독특한 집.
하지만 정작 내 시선을 빼앗은 건 벽에 걸린 지도였다.
거대한 태피스트리로 걸려있는 지도의 위로 핀이 박혀 있었다.
나뭇가지를 뾰족하게 깎아서 붉은 안료를 칠하고 지도 태피스트리의 얽힌 실 사이로 찔러넣은 모양이었다.
“부, 북부의 지도인 것 같, 은데요. 왜, 이런 표시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북부 지도는 저희한테도, 필요할 것 같, 아서요.”
아멜리아가 불쑥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깜짝이야!”
“죄, 죄송……. 방금 들어왔, 다고 말씀 드렸는데.”
“아냐. 내가 못 들은 탓이지. 그보다 이게 지도라고?”
북부만 오롯이 그려낸 지도의 위에 꽂힌 핀에서 어떤 규칙성이 느껴졌다.
북부의 중앙에서 약간 위로 치우치면 변경백의 성이 있다.
그것을 동그랗게 둘러싼 다섯 개의 나무 조각 핀.
그 핀들은 북부를 다섯 구역으로 분할하고 있었다.
이게 어떤 의미지?
“혹시 우리가 어디인지는 알 수 있어?”
“여, 여기, 노란색, 나무 조각이 아닐, 까요? 여기만, 이렇게 크고.”
노란색 나무핀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 핀은 변경백 성을 중심으로 했을 때 5시 방향에 있는 붉은 핀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찜찜했다.
다섯 개로 쪼개진 북부.
혹한 속에서 사람이 증발해버린 촌락.
유일하게 만난 건 불타는 미치광이.
내 손가락 끝이 천천히 변경백의 성을 짚었다.
“여기 검은 자국은 뭐지?”
“다, 다른 곳에는 이런 자, 국이 없는데요.”
다른 지역은 단순히 산이나 벌판을 표기하는 표식만 있을 뿐이었다.
변경백의 성만 이렇게 검게 칠해진 이유는 뭘까?
그걸 유심히 보던 아멜리아가 중얼거렸다.
“꼬, 꼭 여기만 큰, 구멍이 뚫린 것, 같네요.”
구멍?
“그거야!”
“네, 네?”
“이게 구멍이야. 여기가 구덩이라고! 성이 구덩이의 한가운데에 있어. 북부의 구덩이는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
아멜리아는 어안이 벙벙해서 나와 지도를 번갈아 봤다.
하지만 그녀의 의문을 풀어줄 시간은 없었다.
만일 성의 구덩이에 아품 자가 강림했다면 서둘러 돌려보내야만 했다.
유릭의 수작으로 북부가 이따위 꼴이 된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아멜리아, 태피스트리에 있는 지도를 그려줘. 우리 위치와 저 붉은 나뭇조각의 위치도 함께 포함해서.”
“네, 네!
다른 사람들의 조사까지 얼추 끝난 후, 우리는 촌락의 집들을 전부 털어 재정비를 완료했다.
촌락을 떠나고 나서도 마을이나 촌락을 몇 개 더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촌락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거주민들은 없었고, 마을마다 긴 기둥에 천을 질끈 감은 구조물만 쓸쓸하게 서 있었었다.
그렇게 서른 번이 넘게 쉬고, 열네 번 잠들었다가 깨어난 후에야 겨우 붉은 나뭇조각이 박힌 위치까지 올 수 있었다.
모든 게 폐허가 된 석조의 도시 위로 하얗게 눈이 내려 얼어붙은 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