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75)
◈ 75화. 당천의 다짐
“크아악!”
적사곡의 하늘로 버림받은 자들의 끔찍한 비명이 솟구친다.
산처럼 쌓인 시신, 붉은 피가 강처럼 흐르는 이곳은 아비규환의 참혹한 전장이었다.
사면초가에 놓인 환염대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갔다.
앞으론 입구를 철통같이 지키는 사천맹의 무인이, 뒤에는 살육의 본능을 충실히 이행하는 혈야광인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혈야광인의 처리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환염대는 결국 사천맹 무인들의 반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날뛰는 내력을 수습한 진무립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단려화의 검에 환염대주 사환의 목이 떨어지며 처절한 전투가 막을 내렸다.
* * *
숨 막히는 정적이 머무는 숲속.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언제든 반응할 수 있게 자세를 잔뜩 낮춘 천태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여기다.’
당천이 흘린 핏자국을 발견한 그는 도파를 움켜쥐고 은밀히 나아갔다.
‘큭큭큭. 제깟 놈이 숨어봤자지.’
요리조리 도망치며 자신을 이곳까지 유인해왔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수시로 풍향이 바뀌고 바람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이곳에선 독의 효과가 거의 먹히질 않았으니까.
옆구리에 내장까지 비칠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겼으니 놈을 잡는 건 시간문제다.
‘암기만 조심하면 된다.’
천태무의 위치에서 십 장 밖의 나무 위.
핏기 가신 얼굴로 나무에 등을 기댄 당천은 갈라진 옆구리에 금창약을 뿌렸다.
‘크윽!’
불에 덴 듯한 통증에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육신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또다시 패한다면 나는 가치 없는 존재가 된다.’
사천 제일의 기재이자 천하십대고수인 부친을 뛰어넘을 재목.
패배를 딛고, 친구를 머리에서 지우고 정을 버리면서 가까스로 되찾은 평판이다.
‘반드시 이긴다.’
한 번의 패배는 실수일 수 있으나 두 번의 패배는 실력이다.
자신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천재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것이 당가의 소가주다.
놈의 기척이 점점 가까워진다.
상처를 수습한 당천이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온다.
안간힘을 쓰고 일어난 당천은 식은땀에 흠뻑 젖었다.
‘남은 암기는 다섯 개.’
공격을 허용하며 암기 주머니 하나를 잃어버린 게 뼈아팠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당천은 허리춤의 검은 독낭(毒囊)에 손을 넣었다.
‘바람 좀 분다고 싸우지 못할 당가가 아니다.’
훌쩍 뛰어내린 당천이 지면에 착지하자 등 뒤에서 불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거기냐!”
거리는 오 장.
신법을 전개한 당천은 마른 수풀 사이를 전력으로 질주했다.
“크하하하! 당가의 이름이 아깝구나!”
광소를 터트린 천태무도 덩달아 속도를 높였다.
바람이 우측에서 불어오는 이상 망설일 것은 없다.
앞서가던 당천은 뒤를 힐끔 쳐다봤다.
신법만큼은 비등했는데 거리가 빠르게 좁혀지는 것을 보니 자신이 느려진 게 분명했다.
‘승부를 건다.’
눈을 빛낸 당천이 큰 나무를 돌아 사라졌다.
“놓칠까 보냐!”
빗살같이 뽑혀 나온 환도가 횡으로 그어지자 육중한 거목이 두 동강 났다.
갈라진 나무 틈으로 한 줄기 섬광이 짓쳐 들었다.
캉!
암기를 가볍게 막아내고 우측으로 돌아가던 천태무는 바닥에 깔린 철질려를 발견했다.
“흥!”
콧방귀를 뀌고 함정을 뛰어넘자 재차 암기가 날아든다.
내려친 도로 암기를 튕겨 낸 천태무는 마른 수풀을 헤집고 일직선으로 몸을 날렸다.
나뭇가지와 날카로운 수풀에 옷이 해지고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단숨에 일 장까지 거리를 좁힌 천태무는 도를 치켜들고 지면을 박찼다.
“크하하하!”
한 번의 도약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천태무는 도파를 움켜쥐고 강하게 내려쳤다.
바닥에 몸을 굴린 당천이 일격을 피하며 두 개의 암기를 쏘아냈다.
천태무는 즉시 도를 휘둘렀다.
카캉!
두 자루 암기가 튕겨 나가는 순간, 마지막 암기를 손에 쥔 당천이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마지막 발악이냐?”
비릿한 미소를 지은 천태무는 간격을 유지하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어?’
그 순간 천태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유유히 흘러야 할 내력의 흐름이 둑에 막힌 것처럼 끊기는 것이다.
달려들던 당천이 말했다.
“옷이 많이 찢어졌군.”
옷이 찢어진 것은 두 사람 다 마찬가지.
천태무는 그제야 자신이 어떻게 중독됐는지 알 수 있었다.
일부러 나뭇가지와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달리며 독을 발라둔 것이다.
당천은 어깨로 떨어지는 도의 미세한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살은 내어주마.’
천태무의 도가 몸을 잔뜩 비튼 당천의 어깨를 스치고 떨어졌다.
쾅!
지면이 들썩이며 흙가루가 튀어 오르는 순간.
이를 악물고 통증을 견딘 당천은 놈의 목을 향해 암기를 그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천태무는 다급하게 물러나며 고개를 들었다.
쉬익!
좌수에 쥔 암기가 간발의 차이로 빗나간다.
당천의 우수가 허리춤의 비수를 꺼내 쥐었고.
용천혈에 내력을 쏟아부은 그는 멀어지는 천태무에게 달려들며 비수를 그었다.
서걱!
천태무의 왼쪽 눈에서 시뻘건 피가 튀었다.
“크아악!”
찢어지는 비명을 토해낸 천태무가 발악하듯 도를 휘둘렀다.
당천은 좌측에서 날아드는 도에 비수를 갖다 붙였다.
쾅!
손목이 부러질 듯한 괴력에 당천의 몸이 화살처럼 튕겨 나간다.
“큭!”
억눌린 신음을 토해낸 당천의 등이 거목에 거칠게 처박혔다.
벌어진 입에서 검붉은 울혈이 쏟아졌다.
“쿨럭!”
순간 눈의 초점이 흔들리며 사물이 겹쳐 보인다.
피를 너무 흘린 탓이었다.
“내 눈……. 내 눈! 크아아아!”
악을 내지른 천태무는 당천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감히! 네놈 따위가 감히!”
천태무의 전신에서 피부가 아려올 정도로 지독한 살기가 줄기줄기 솟구쳤다.
그의 하나 남은 눈이 혈광으로 번들거린다.
“죽여버리겠다!”
당천은 죽일 기세로 달려드는 천태무에게 마지막 암기를 출수했다.
쐐애액!
초점이 흔들린 탓에 암기는 목표를 한참이나 빗나간다.
하지만 당천의 표정에는 일말의 아쉬움도 보이지 않았다.
놈의 눈을 찢어낸 비수에도 나뭇가지와 수풀에 발랐던 것과 같은 동완독(動緩毒)이 발라져 있었으니까.
도를 내려치던 천태무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 이게 뭐냐?’
당장에 놈의 머리를 갈라버렸어야 할 도신이 한없이 느리게만 느껴진다.
천태무의 눈에 당혹감이 깃드는 순간, 도를 주시하는 당천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눈으로 침투한 독은 저항할 틈도 없이 머리에 스며든 상태.
당천은 떨어지는 도를 피해 구르며 비수로 놈의 발목을 그어버렸다.
서걱!
“크윽!”
흔들리는 천태무의 도가 목표를 잃고 나무에 틀어박힌다.
“하앗!”
젖먹던 힘까지 쏟아낸 당천의 신형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파파파팟!
역수로 쥔 비수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며 놈의 무릎과 허벅지, 복부와 가슴의 요혈을 차례로 쑤셔 박았다.
중독으로 움직임이 둔해진 천태무는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고스란히 공격을 허용했다.
“쿨럭!”
검붉은 피를 토한 천태무가 쓰러질 듯 휘청거린다.
“천태무.”
서늘하게 눈을 빛낸 당천은 놈을 덮치듯 올라타고 비수를 치켜들었다.
“널 쓰러뜨린 자는 당가의 소가주 당천이다.”
부릅뜬 천태무의 눈에 허무한 감정이 떠올랐다.
혈위사신에 합류하고 일 년, 고작 이런 곳에서 마지막을 맞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후후. 이런 애송이에게…….”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질 때, 뚝 떨어진 당천의 비수는 정확히 놈의 미간에 틀어박혔다.
콰직!
하나 남은 눈의 혈광이 빛을 잃어가고.
이내 숨이 끊어진 천태무의 몸이 마른 짚단처럼 풀썩 쓰러졌다.
그와 함께 바닥을 나뒹군 당천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숨 막히는 사투의 끝, 승리자는 당천이었다.
“큭큭큭.”
비틀린 입술을 뚫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이겼다.”
두 번 다시 지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당천은 하늘을 향해 피 묻은 손을 들어 올렸다.
활짝 펼친 손가락 사이로 한 청년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단자룡. 기다려라. 반드시 네 녀석이 있는 위치까지 올라가겠다.”
나직한 혼잣말은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세상이 점점 어둑해지며 당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깃들었다.
“당천!”
귓속을 파고드는 외침을 끝으로 당천의 기억이 아득해졌다.
현장에 도착한 진무립은 즉시 당천의 맥부터 확인했다.
‘죽지는 않겠군.’
진무립은 당천의 상처를 지혈하며 전신을 살펴보았다.
본래의 형태를 의심케 할 정도로 넝마가 된 무복, 어깨와 옆구리의 큰 상처를 비롯해 전신에 새겨진 자잘한 상처는 당천이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그의 옆으로 차갑게 식어가는 천태무가 보인다.
만만치 않은 상대인 만큼 그저 시간만 벌어줬으면 했는데 기어코 승리를 거뒀다.
‘제법이야.’
빙그레 웃은 진무립은 당천을 품에 안고 몸을 날렸다.
* * *
전투의 열기가 사라진 협곡에 한밤의 어둠이 짙게 드리웠다.
진무립 일행은 환염대가 숙소로 사용하던 동굴을 하룻밤 거처로 삼았다.
작은 공동의 아늑한 모닥불 앞.
격전에 지친 일행이 잠에 빠져든 가운데 단려화와 육군명이 마주 앉았다.
진설란이 부상자를 살피고 돌아오자 단려화가 물었다.
“상태는 어때요?”
그녀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노사님의 상처는 조금 지나면 회복될 거예요. 다른 세 사람도 피를 너무 흘리긴 했으나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니에요. 정말 천운이 따라준 것 같아요.”
단려화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운도 실력이에요. 실력이 없었다면 살아남기 힘든 싸움이었어요.”
진설란이 빙그레 웃었다.
“그건 그렇네요. 총대주는 어디에 계신가요?”
“입구에서 번을 서고 있어요.”
“책임감이 강한 사내로군요.”
격전을 치른 것은 그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책임자의 역할을 다하고자 자처해서 번을 서고 있으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릎을 끌어안은 진설란은 타오르는 모닥불을 응시하며 낮의 전투를 상기했다.
‘상대를 끌어내고 명백히 열세인 아군으로 거둔……. 잠깐만, 열세였어?’
정신없이 싸울 땐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떠오른다.
생각해보니 정말 엄청난 전공이다.
혈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혈위사신 중 둘이 패했고 한 명이 죽었다.
당초 목적했던 혈야광인의 실험장을 불태운 것도 모자라 이백이 넘는 숫자를 상대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솜털이 쭈뼛 서며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단려화와 육군명을 쳐다본 진설란의 눈이 부릅떠졌다.
육군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우리가 이긴 게 맞죠?”
“이겼으니 살아있겠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 말란 말이에요. 우리가 오늘 무슨 일을 해냈는지 알고 있어요?”
듣고 보니 낮의 일이 서서히 떠오른다.
육군명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와. 생각해보니 정말…….”
금호대도, 철검대도 지금까지 악행을 벌이고 도주한 흉수와 싸운 경험은 있을지라도 이런 전투는 처음이었다.
사천에 돌아가서 이야기하면 과연 믿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만큼 엄청난 대승이다.
진설란의 눈에 묘한 흥분이 떠올랐다.
“우린 정말 누구도 해내지 못할 엄청난 일을 해낸 거예요.”
조위성을 쓰러뜨린 육군명, 천태무를 죽인 당천의 공적도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은 누구도 아닌 진무립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전투를 벌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진설란이 단려화에게 물었다.
“그 사람, 정말 우리와 같은 후기지수가 맞아요?”
사냥꾼의 아들로 살아오다가 마도림에 들어간 게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진무립이 보여준 심계와 전황을 단숨에 뒤집는 엄청난 무공은 마치 수십 년간 전장에서 살아온 노고수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생각하던 단려화가 입을 열었다.
“조금 특별한 후기지수라고 하면 될까요?”
대답하는 그녀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오른다.
진무립이 인정받는 것이 마치 제 일처럼 기쁘게 느껴진 까닭이다.
‘잠깐, 내가 왜 뿌듯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