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ampire went to Murim RAW novel - chapter (15)
15화
“혹 흘막간이라는 분을 아나?”
“흘막간?”
당연히 처음 들어 보는 이름.
“원나라 때 중원으로 왔던 색목인의 이름이네.”
윤왕은 탁자 아래에서 서책 한 권을 꺼내 들어 야현에게 내밀었다.
받아 보니 온전한 책자도 아니었다.
서책을 내려다본 야현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흰 것은 백지요, 검은 것은 글씨라.
지금 야현이 딱 그 입장이었다.
서방의 뱀파이어 왕국에서 대공작, 최상위 귀족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고아에 배수짓이나 일삼던 하층민이었다. 당연히 중원의 글, 한자(漢字)를 배운 적이 없었고, 배울 기회도 없었다.
야현은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한 문장을 발견했다.
Marco Polo
‘마르코 폴로?’
낯선 글자들 속에 껴 있는 익숙한 알파벳.
‘이자가 흘막간인가?’
야현은 피식 웃음을 보였다.
“아는가?”
안다.
물론 그를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저술한 『Livres des merveilles du monde』(세계 불가사의의 서 : 동방견문록)라는 책을 봤었다.
“그 색목인이 원 관직에 있을 때 재미 삼아 쓴 책이지. 선조 태조 폐하께서 명을 건국하며 정책적으로 원에 관련된 서책을 분사할 때 겨우 살아남은 책이기도 하지.”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 관리로 있었다는 대목을 동방견문록에서 읽은 적이 있었기에 야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덮었다. 더 펴 놓고 있어 봤자 읽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재미있는 글이 있어 그대를 불렀지.”
“무엇이 궁금하신 겁니까?”
야현은 서책을 윤왕에게 밀며 물었다.
“이종족에 관한 것이네. 참으로 과인의 호기심을 자극해.”
윤왕은 서책 마지막 장을 펼쳐 반쯤 찢어진 마지막 장을 야현에게 보였다.
“흡혈귀라는 존재를 아는가?”
윤왕의 질문에 야현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눈동자에 붉은 동공이 피어났다.
툭!
야현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들겼다.
야현은 윤왕을 쳐다보던 붉은 동공을 지우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흡혈귀라…….”
펼쳐진 책장을 살펴보니 흡혈귀라 짐작되는 세 글자 옆에 알파벳으로 ‘Vampire’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순수한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는 윤왕.
“도깨비를 본 적이 있습니까?”
야현의 질문.
“없지. 그건 어디 괴담에나 나오는 허황한 것이 아닌가?”
“호인족(虎人族)을 본 적은?”
“……흠.”
질문이 거듭될수록 윤왕의 목소리는 작아지다 결국 침음을 삼켰다.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윤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마르코…… 아니, 흘막간이라는 자가 흡혈귀에 대해서 뭐라고 적어 놓았습니까?”
“내용 일부가 유실되어 정확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피를 빨아먹는 저주받은 인간이라 적혀 있어. 뭐, 음식을 먹지 못하고…… 햇빛을 싫어하고 어둠을 좋아하며…….”
야현은 천천히 술을 마시며 마르코 폴로라는 자가 뱀파이어에 대해 적어 놓은 것을 들었다.
‘인간이라…….’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래도 인간으로 봐 주었군.’
“그리고 태양을 마주하면 불에 타 한 줌의 재가 되어 죽는다, 뭐 대충 이런 이야기들일세.”
“야사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를 풀자면 비슷합니다.”
“그런가?”
윤왕은 야현의 대답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미지의 곳이라기에 이런 미물들이 혹여나 있을 줄 기대했지만 역시 허황된 잡설이었군.”
“생김새나 문화야 다르지만 이곳이나 서방이나 어차피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충분한 답이로군.”
야현은 가늘어진 눈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윤왕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 흘막간이라는 자.”
“말하게?”
“그가 쓴 책은 그게 다입니까?”
야현은 서책을 보며 물었다.
“정확한 바를 알 수는 없겠지만 이거 말고는 없을 것이야. 이 서책 한 권만 해도 과인이 몇 년간 중원 전체를 뒤지다시피 해서 겨우 구한 것이니, 아마 이거 외에는 없을 듯싶어.”
그래서인지 윤왕은 뿌듯한 눈으로 서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렇습니까?”
야현은 무심한 듯 시선을 거두며 술잔을 들었다.
“한 잔 드시지요.”
“그러지.”
잔을 부딪치고 술잔을 입에 가져가던 야현은 탁자 위에 빛을 밝히는 촛불을 잠시 응시했다.
찰랑!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 듯 촛불에 붙은 불이 흔들리더니 자그만 불똥이 갈라져 나와 반쪽밖에 안 남은 서책 종이 위로 튀었다.
화르륵―
불똥은 흡혈귀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는 종이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어? 어?”
서책에 불이 붙은 걸 본 윤왕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동동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야현은 천천히 일어나서 술잔에 담긴 술을 불붙은 서책 위에 뿌렸다.
치이익―
종이가 타며 만들어 낸 특유의 그슬림 냄새가 연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이런…….”
윤왕은 서책의 나머지 부분이 술에 더 젖지 않게 재빨리 마지막 장을 찢어 내며 울상을 지었다. 야현은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 * *
인시가 다 되어 파장된 술자리 말미에 전해진, 윤왕의 명 아닌 명에 야현은 별관 별채에 들어섰다.
“목욕물을 받아주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시와요.”
방으로 안내했던 두 명의 시녀 중 하나가 허리를 숙인 후 다시 방을 나갔다.
“취침 시 갈아입을 침의입니다.”
다른 시녀가 깨끗한 순백의 옷을 침상 위에 올려놓은 후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마땅히 할 일이 없기에 야현은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화려하지 않지만 정갈한 방이었다. 큰 방이 아니었고, 들어서 있는 가구 역시 많지 않았기에 그저 서서 한 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방 안을 모두 훑을 수 있었다.
대충 눈대중으로 방을 살핀 야현은 서 있기가 그래, 의자로 다가가다가 문득 지붕 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야현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야현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별채 지붕 위였다.
인적이 끊겨 고즈넉해 보이는 별관 허공에는 은은한 살기가 맞부딪치고 있었다.
그 수는 다섯.
그리고 하나 대 넷.
하나는 독고결의 기운이었고, 넷은 윤왕의 신변 주위로 은신한 수신호위들의 기운이었다.
야현은 깃털처럼 부드럽게 별관 정원으로 내려섰다.
“그만들 하세요.”
크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는 정원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부딪치는 살기가 옅어지기는 했지만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내 사람입니다. 그대도 이곳에 윤왕 전하가 계시니 경솔한 행동은 삼가라.”
야현의 명이 있어서인지 독고결의 살기가 사라졌고, 그 뒤로 순차적으로 다른 넷의 살기도 희미해졌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후 시녀가 다소곳하게 다가왔다.
“준비를 마쳤사옵니다.”
어느새 돌아온 야현은 시녀를 따라 별채와 이어진 목간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을 금방 받았는지 목간실 안은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야현은 목간통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러자 시녀 둘이 다가와 그의 옷을 조심스럽게 벗겼다. 곧 알몸이 된 야현은 목간통으로 들어가 온수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느낌에 야현은 기분이 좋아졌다.
사락― 사라락―
눈을 감고 따뜻함을 음미하는 야현의 귀로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녀 둘이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 옷을 벗는 소리였다.
야릇한 소리임에도 야현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몸을 닦아드리겠나이다.”
야현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목간통에서 몸을 세워 그녀들의 손에 편히 몸을 맡길 뿐이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그보다 더 부드러운 천이 야현의 몸 구석구석을 지나갔다.
야현은 눈을 뜨고 몸을 닦는 두 시녀를 내려다보았다.
전라는 아니었고 젖가리개와 속곳을 입은 그녀들의 몸은 땀인지 수증기인지 모를 물기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풍성한 옷차림에 가려져 알지 못했던 그녀들의 몸매는 아름다웠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쭉 뻗은 팔과 다리.
그저 시녀는 아닌 모양이었다.
궁녀일 것이다.
아닐 수도 있고.
형형색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서방의 여인들과는 또 다른 정취가 느껴졌다.
젖은 그녀들의 몸을 천천히 감상하는 야현의 눈에는 그 어떤 욕정도, 색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조각상을 감상하듯 무심함 그 자체였다.
야현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녀들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불편한 곳이 있으신지요?”
“없습니다.”
“……모, 모두 벗으오리까?”
시녀 하나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게 편하십니까?”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진작 벗었을 터.
시녀는 입술을 표 안 나게 꼭 깨물며 젖가리개로 손을 가져갔다. 어차피 원하면 동침 시중을 들어야 할 몸. 그때 보이나, 지금 보이나 매한가지라 여겼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하세요.”
야현은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눈을 감았다.
잠시 망설이던 시녀들은 결국 모두 벗은 후 다시 야현의 몸을 씻겼다.
목욕이 끝나고 야현은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몸을 닦은 후 침의로 갈아입었다.
“오늘 밤은 어떻게 하오리까?”
시녀들은 전라 차림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허리를 숙였다.
“골라야 합니까?”
“……함께 모시겠습니다.”
한 시녀가 제법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수고했습니다.”
야현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아, 차 한잔 부탁하겠습니다.”
시녀들은 옷을 입고 차를 내왔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저 줄을 당기시면 되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시녀 둘이 공손히 읍하고 방에서 나가고 야현은 김이 모락 피어나는 찻잔을 들었다.
그렇게 한 모금 마시다 말고 무언가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윤왕의 곁에서 느껴지던 한 기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하를 위해 본인을 살피는 것은 좋은데 앞으로 목욕까지 훔쳐보시지는 마세요. 과년한 처자가 할 행실은 아니라 봅니다.”
야현은 천장을 향해 웃음기를 보인 후 다시 입으로 찻잔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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