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rld After the Withdrawal of the Warrior Party RAW novel - Chapter 97
EP.97 막고 막히고 – 2
“…으…”
두통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눈치챈 것은 정신병이 사라졌다는 것.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해도 머릿 속에서 감돌던 것은 자신에 대한 원망, 그리고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뿐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온 몸을 좀먹어가던 무력감과 패배감이 사라졌기에 에반젤린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엘프의 숲에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오던 패배주의자 엘프를 볼때마다 항상 생각했었다.
얼마나 못났으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도 가지지 못하고 저렇게 패배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걸까.
직적 겪어보지 않는다면 모른다는 말에 언제나 콧방귀를 뀌었던 에반젤린은, 자신이 가졌던 그 끔찍한 패배의 기억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
아니. 지금은 그런 것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현우는?
그가 말했다. 자신의 정신병을 가져가겠다고.
그럼 그는 괜찮은 것일까?
물론 인간종에게는 패배주의자가 엘프만큼 타격이 없다는 것 쯤은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현우는 자해증까지 가져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현…”
-우드득!!
다급하게 현우를 부르던 에반젤린은 귓가를 파고드는 끔찍한 파열음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방금.
방금 내가 들은 소리는 도대체 뭐지?
“아아악!! 혀, 현우야!!”
바로 옆에 있는 현우이기에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한없이 우울한 얼굴로, 한없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현우가 자신의 손가락을 꺽어버렸다.
자해증.
자신을 상처입힘으로서 스트레스를 회복하는 정신병.
에반젤린은 귀나 손목을 상처냈을 때 자신이 진정되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급하게 현우에게 손을 뻗었다.
“안…”
“큐어!!”
어둠의 오라 너머에서 빛이 뿜어져나왔다.
추기경 베로니카다.
현우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사제.
비록 인간이지만 엘프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미모와 힘을 지닌 여인.
그녀가 이를 꽉 깨물며 황급히 큐어를 사용해 현자의 손을 고쳤다.
-우드득…!!
부러진 뼈가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추기경 정도 되는 사람의 치료이기 때문일까?
순식간에 그의 손이 복구되자 반짝이는 머리의 남자가 도끼를 들고 달려들었다.
분명, 식스맨이라는 이름의 모험가였다.
“젠장! 저번에는 옆에 있으면 튕겨냈으면서 쟤는 왜 안튕겨내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옆에 있을걸!! 에라이!! 이까짓 오라!! 뚫어주지!!”
-쿠우웅!!
유니크 도끼인 처형자가 어둠의 오라와 부딪힐 때마다 오러가 흩어져간다.
-쿵!! 쿠우웅! 쿵!!
한번으로는 그저 오라가 흔들리기만 할 뿐 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이를 악 문 채 오라를 향해 도끼를 휘둘러낼 뿐.
그렇게 오라가 흔들리는 사이 현자는 음울한 얼굴로 손을 들어올렸다.
“안돼!!”
“멈춰!!”
베로니카의 외침.
그리고 세실의 비명.
에반젤린은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현우의 팔을 잡았다.
“혀, 현우야! 하, 하지마!! 하지마아!!”
나 따위 때문에 왜 네가 상처를 입어야 하는건데.
시련에서 봤던 현우가 떠오른 에반젤린은 온 몸에서 흐르는 식은 땀을 무시하며 애원했다.
“제발! 제발 그만… 제발 그러지마! 제바알…!”
네가 상처입지 말아줬으면 한다.
네가 고통스러워하지 말았으면 한다.
멍청하고, 못나고, 자기만 아는 쓰레기 같은 나 때문이 이미 너는 충분히 아팠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실패했다.”
현우의 팔을 잡은 에반젤린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 뭐야…
이 목소리는 도대체 뭔데…?
어째서?
어째서 너에게 이런 절망감 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건데?
패배주의자에 걸린 엘프 뿐만 아니라, 인간, 드워프, 수인, 그 외에 다른 종족들까지.
마왕이라는 거대한 힘에 맞서 싸우며 실패해 패배감에 물든 이들은 많이 봐왔다.
그리고 마왕을 처치한 이후에 가담했던 전장에서도 패배주의자가 된 인간은 얼마든지 봤었다.
하지만.
에반젤린이 봤던 그 누구도 현자만큼 우울하고 처절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왜?
네가 왜 그런 소리를 내는건데?
너는 항상 성공해왔잖아.
너는 항상 목표를 달성해왔잖아.
그런데 왜…
“꺄악!!”
잡혀 있던 팔을 뿌리친 현우는 엉덩방아를 찧은 에반젤린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너무나도 차갑고, 너무나도 무거운 그 시선.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옥죄어오는 그 강렬한 시선에 에반젤린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실패했어.”
또다시 발동된 주술.
이번에는 그림자 주술이었다.
수십개의 그림자 촉수가 나타나 접근하는 이들을 막으려 한다.
“냐아앙! 복잡하다냥!!”
“에반젤린! 막아!! 현우가 자해하는 것을 막아!!”
바깥 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온다.
현우를 구하기 위해서.
그가 자신을 상처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저들은 저토록 열심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는 관심없다는 듯 에반젤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뻐해야 한다.
그리도 원하던 그의 시선을 독점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 느낌은 뭐지?
심장을 콱콱 찌르는 듯한 고통을 받으며 에반젤린은 멍하니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선을 마주했을까?
현우의 입술이 열렸다.
“…나라면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거야. 그랬다면, 더 원만하게 마왕처치 여정을 유도할 수 있었을텐데… 뭐가 고인물이라는거야…”
커다란 해머가 뒷통수를 후려친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아… 니야.”
아니다.
너는 잘해주었다.
그 누구보다 더 제대로 지원해주었다.
그것을 알아주지 못하고, 너를 배척하고 미워했던 것은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아. 아으…”
하지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의 눈이 너무나도 슬퍼보여서.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안타까워보여서.
가슴이 저며오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에반젤린이 간신히 입술을 열었을 때.
현자의 손이 또다시 손가락을 잡았다.
“안돼!!”
그 손이 손가락을 꺽는 일은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잡힌 것처럼 현우는 손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잡았다! 이대로…”
-챙그랑!!
“꺄악?!”
사이론의 비명이 들렸다. 그녀가 주술이라도 쓴 것일까?
염동력이겠지.
하지만 그걸 어떻게 깨트렸단 말인가.
지팡이는 커녕 다른 장비조차 없으면서 가볍게 사이론의 주술을 막아낸 현우는 자신의 손을 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또 실패했어. 나를 상처입히는 것 조차 실패했어. 패배자에 불과한 나를 부수는 것 조차 할 수 없어…”
-쾅!! 쾅!!
“거의 다 뚫었어!!”
“블레스!! 식스맨!! 더 세게 부탁할게!!”
안쪽의 음울함과 다르게 바깥 쪽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조금이라도 더 강하게.
어떻게든 저 검은 오라를 부숴버리고, 그가 만든 배리어를 깨트리는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에반젤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베로니카.
현우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녀.
청록색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었음에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현자에게서 단 한번도 눈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 누구든지.
그것이 현자 자신이라 할지라도 현자를 상처입힌 순간 바로 치료해버리겠다는 듯.
참으로 강하고, 빛나는 여자다.
나와는 다르게.
우월감에 빠져 그를 상처입혔던 멍청하고 이기적인 나와는 다르게 그를 언제든지 구원하려 하고 있다.
“너희들이 나에게 향했던 적의는 정당한 것이야. 그것을 통제하지 못한 것은… 결국 내 잘못이겠지. 모든 것을 안다고 했으면서도 결국…”
“무슨… 아니야!! 그건…!!”
“나는. 실패했어.”
“실패하지 않았어!! 실패한 것은 나…”
“나는 실패했고.”
또다시 손이 올라간다.
손가락을 잡은 현우는 우울한 표정 그대로 중얼거렸다.
“또다시 실패할거야.”
손가락이 가선 안될 방향으로 꺽인다. 과한 힘에 점차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손가락을 본 에반젤린은 다시 그의 팔을 잡아채 그의 자해를 막았다.
“크윽… 나는… 나를 파괴하는 것 조차 못하는…”
자해증.
그리고 패배주의자.
패배주의자는 실패에 대한 부담과 그에 대한 자책감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자해증은 자신을 상처입힘으로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현우의 정신을 생각한다면 그가 자해를 하게 둬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둔다면 그는 상처입고,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막으면?
자신을 상처내지 못하고, 또 상처내는 것에 실패하여 그가 겪게 될 막대한 정신적 고통은?
시련에서 봤던 것처럼 현우 역시 사람이었다.
매도에 상처받고, 괴롭힘에 고통받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자해를 하지 못해, 그리고 자해에 실패해 부담할 그 정신적 고통은 어떻게 해야하지?
그가 육체의 고통을 느끼게 놔둬야 하나?
그가 정신의 고통을 느끼게 놔둬야 하나?
뭘 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 현자의 자해를 막기 가장 좋은 위치에 있지만 에반젤린은 혼란에 빠진 채 덜덜 떨었다.
어떻게든 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에반젤린!! 막아!!”
사이론의 다급한 외침에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현자가 순간이동을 쓰려 하고 있었다.
에반젤린은 빠르게 튀어올라 그의 팔을 잡았다.
“…또 나는.”
순간이동의 실패로 인한 정신적 부담감에 현자의 안색이 흐려진다.
아아. 난, 난 어떻게 해야하지?
옛날이 그립다.
예전처럼, 현우가 길을 제시해줬을 때가 그립다.
왜 그때 나는 그의 지시를 비웃었지? 왜 나는 그를 업신여겼지?
왜 나는…
옳은 길을 제시하는 그를 괴롭혔던거지?
“차라리 날… 나를…!!”
그래.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너는 실패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나를 공격해.
나를 상처입혀줘.
“나에게 해!!”
그가 순간이동을 쓰지 못하게 팔을 꽉 잡은 채 에반젤린은 간절히 외쳤다.
하지만 현우는 그녀를 밀어버린 채 또다시 자신의 몸을 상처입히려 할 뿐 이었다.
“왜!! 왜!!”
“…나는 실패했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니까. 그리고… 아무것도… 못하는 자가 될테니까. 결국.”
“….”
“난 돌아가지 못할테니까.”
힘없이 중얼거린 현자의 손에 얼음으로 만들어진 단검이 들렸다.
초급 마법인 아이스 대거.
그것으로 그가 자해하려는 순간.
-챙그랑!!
세실의 디스펠이 그의 마법을 취소시켜버렸다.
얼음의 단검이 사라진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현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 아아아…”
자해에 실패할 수록 그는 고통받는다.
그리고 그 고통만큼 절망이 찾아온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이다.
내가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야.
“으아… 아아아… 내, 내가… 내가… 없었으면… 내가 너의 말을 들었더라면…!!”
에반젤린은 머리를 쥐어뜯을 것처럼 꽉 쥔 채 신음성을 토해냈다.
처음 지하수로에서 현우가 말했다.
너희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그런데 난 왜 도전했지?
왜 그를 돕겠다며 나섰고, 버티지 못하고 정신병에 걸려 결국 그를 힘들게 한거지?
“아아아아아!! 제바아알!!”
그에게 사과하고 싶어서.
그에게 미안하다는 것을 전하고 싶어서.
하지만 그 또한 결국 욕심에 불과했다.
그것이 현자를 또다시 고통스럽게 만들다니.
한심함이, 경멸이, 증오가.
부정적인 감정이 에반젤린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
눈물을 펑펑 쏟으며 에반젤린은 현우의 손에 들린 그림자 창을 잡아채 그의 주술을 막았다.
또다시 자해가 실패했다.
자해를 하지 못해 생긴 정신적 스트레스가 그를 괴롭힌다.
그리고 자해에 실패했다는 것에 대한 자책이 현자를 구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실패했어.”
아니야.
“실패했어.”
내가 실패했어.
“실패했어.”
잘못된 것은 나야.
그러니까 제발…
에반젤린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어찌할 바를 몰라 그를 꽉 잡은 채 발만 동동 굴렀다.
그를 막아야 하나?
그를 내버려둬야 하나?
“실패했어. 실패했어. 실패했어.”
무감정한 한마디가 흘러나올 떄마다 가슴이 찢어진다.
그 고통은 너무나도 강렬하여, 결국 그녀에게 애원을 하게 만들었다.
“잘못…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제가… 제가…. 제 욕심이… 흑… 흐윽… 흑… 제가…”
그녀를 향해.
현자는 암울한 어조로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실패했어.”
혼란스럽다.
현우의 말을 부정할 수 있을까?
현우는 항상 옳았는데?
이번 일만 해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아 결국 이 사달이 나버렸는데?
에반젤린은 눈물로 더럽혀진 얼굴을 들었다.
그를 긍정해야 할지, 부정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머릿 속이 새하얗게 변한 채 에반젤린은 숨을 헐떡거리며 그가 순간이동을 쓰지 못하게만 막으며 울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진정으로 실패한 것은 나일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패배주의자에서 벗어났음에도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퍼어억!!
너의 옆에 있어 줄 저 빛나는 여자와는 다르니까.
어느새 뚫린 어둠의 오라를 넘어 들어 온 베로니카의 손이 현자의 손목을 단단하게 잡아챘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그에게 그녀는 주먹을 휘둘렀다.
“그렇게 말하는 너! 수정해주겠어!!”
“….나는…”
“너 실패 안했어. 교회의 추기경이자 너의 진정한 친구 베로니카가 말하지. 현자. 너는 절대 실패하지 않았고, 절대 실패하지 않을거야. 왜? 내가 네 옆에 있을테니까.”
단지 그것만으로, 베로니카는 현우가 자신을 상처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베로니카가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회복술인 ‘신성의 빛’이 현자의 몸을 감싼다.
이제, 그 어떤 짓을 해도 현우는 자신을 상처내지 못할 것이다.
그 빛나는 모습이.
자신과 다른 그 당당함과 확신이 너무나도 눈부셔서.
이제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된 자신과 너무나도 다르기에.
에반젤린은 현자를 잡고 있던 손을 힘없이 놓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낄 수 밖에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안녕하세요! 말물말물입니다!
즐거운 금요일! 다들 불금을 즐기도록 합시다!
하하. 그럼 재밌게 보셨길 바랍니다! 내일 만나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