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32
00029 특별한 의뢰인 =========================================================================
광문을 만나본 뒤 바로 사무실로 돌아온 해경은 생각에 잠겼다. 언제 사망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가와타의 사체가 발견되고, 채 몇 시간이 지나기도 전 형사들이 숭삼동의 사가로 찾아와 환을 입건했다. 격리의 목적이라면 사가에 가두어 두는 편이 더 손쉬울 텐데도 굳이 소문이 빨리 퍼질 수밖에 없는 학교 기숙사를 강제로 비워 환을 감금하고 무장 경찰을 세워 두었다……언론 보도만을 간신히 막았다던 연숙의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하루 이틀 사이에 기자들이 들이닥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눈에 보이는 의도다.
이건 환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짜인 각본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가 왜? 환은 일단 왕공족 작위를 받은 신분이었고, 설령 이 일이 보도된다 해도 일신의 안위에는 딱히 지장이 없을 것이었다. 환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해 사람을 죽일 정도의 원한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은 가진 정보가 너무 적었다. 최소한 어제 가와타의 행적이라도 명확히 알아야 했다. 그러나 환의 말로도 그렇고, 광문을 만났을 때도 가와타가 조선인 학생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했으니 일본인 학생들에게 정보를 캐야 할 텐데 그것이 쉬운 일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가와타를 누가, 언제, 왜 죽였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사체가 발견됐고 살인으로 생각된다면 반드시 부검을 할 터였다. 법의학적 부검을 진행할 만한 곳은 당연히 경성제대 의학부다. 환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조선인 학생들은 무슨 일이든 할 거라던 광문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학생들의 도움을 얻자면 필연적으로 사건의 전말을 알릴 수밖에 없을 터였다. 팔다리 다 잘라 놓고 뛰라는 꼴이군. 속으로 생각한 해경이 짧은 한숨을 내쉬자, 소화가 차를 가져다 놓으며 해경의 눈치를 살폈다.
“선생님, 아무래도 일이 복잡하게 된 거지요?”
“쓸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군요.”
해경이 대답한 순간,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때 손님이라니 좋지 않았다. 소화가 문가를 돌아보고는 얼른 달려가 문을 열었다. 의뢰인이라면 일단 돌려보내야겠다 생각한 해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멈칫했다. 두 청년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나는 아까 만났던 광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낯선 얼굴이었다. 둘 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였다. 뜻밖의 방문이라 잠시 당황했던 해경은 곧 두 사람을 자리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은 광문이 숨을 잠시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저, 아까 주신 명함에 적힌 주소를 보고 왔습니다. 이쪽은 엄정훈이라고, 환이와 같은 의학부 학우입니다.”
정훈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해경은 정훈이 손을 벌벌 떨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광문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정훈이 그보다 먼저 말을 꺼냈다.
“환이가 기숙사에 감금돼 있는 게 사실입니까? 그게 가와타 유사쿠가 죽은 것과 관계가 있습니까?”
해경은 그의 입에서 나온 가와타의 이름에 눈썹을 좁혔다. 가와타가 죽은 것은 아직 대외비일 터였다. 물론 이틀 전부터 가와타의 종적이 묘연하다고는 했고, 기숙사 내부에서도 이미 환이 거기 갇혀 있는 것을 아는 이들이 혹시 그게 가와타와 관련이 있을까 짐작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광문으로부터 들은 바였다. 그러나 가와타의 죽음을 확신하는 건 경우가 달랐다. 해경은 정훈에게 물었다.
“가와타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겁니까?”
해경의 물음에 정훈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들은 게 아니라 내 눈으로 봤습니다. 조금 전에 제대 해부실에서, 가와타의 이름이 쓰인 시체가 누워 있는 걸 내 눈으로 봤단 말입니다. 병리학의 스즈키 교수가 수업을 취소한 건 분명히 가와타의 부검 때문인 게지요, 그렇지요?”
이건 뜻밖의 정보였다. 해경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학교라는 공간 안의 특수성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었고, 외부인인 자신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내부인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어차피 이들은 환이 감금돼 있는 것도 알고 있고, 그것이 가와타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사실상 해경이 가지고 있는 정보도 딱히 이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해경은 잠시 침묵하다 정훈에게 물었다.
“스즈키 교수가 부검 전문의입니까?”
“제대 법의학 교실의 교수입니다. 종로서나 용산서 쪽에서 들어오는 부검은 거의 스즈키 교수가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부검이 시작됐습니까?”
정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 지금쯤이면……해부실 근처에서 경찰들 몇 명이 오가는 걸 보았습니다.”
해경은 몸을 조금 앞으로 숙였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가와타 씨는 어제 새벽 기숙사 뒤편 동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이환 씨는 가와타 씨의 살인범으로 지목되었고요. 이환 씨의 신분 때문에 일반 구치소에 가둘 수 없어 임시로 학교 기숙사를 비워 감금하고 있는 겁니다.”
“말도 안 됩니다!”
정훈이 외쳤다. 곁에 앉은 광문이 정훈의 팔을 잡으며 정훈을 말렸으나, 정훈은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눈치를 살피던 소화가 얼른 두 사람 앞에 차를 가져다 놓았다. 정훈은 차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해경을 마주보았다.
“절대로, 절대로 말도 안 됩니다. 환이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진심이었다. 환에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말하기도 했고, 어느 정도 의심을 가지고 시작했으나 환에게는 가와타를 죽일 만한 동기가 없었다. 물론 그가 가와타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당하기는 했으나, 그 정도 일로 가와타를 죽일 만큼 분별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해경의 말에 정훈이 맥이 풀린 듯 소파에 등을 묻으며 마른 얼굴을 문질렀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그걸 알아내기 위해 제가 간 겁니다. 알아야 할 정보가 좀 있는데, 혹시 제게 도움을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정훈의 대답에 해경은 속으로 감탄했다. 망국의 황족에 대한 충성심일 거라고 폄하한다면 뭐 그럴 수도 있을 터였지만, 광문이나 정훈이 보여 주는 환에 대한 태도는 그렇게 말하기에는 훨씬 더 인간적인 것이었다. 그건 충분히 우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고 그 기저에는 환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다. 해경은 정훈을 보며 물었다.
“그럼 부탁을 좀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스즈키 교수가 부검을 시작하면 보통 몇 시간 정도 걸립니까?”
“사건에 따라 다른데 보통 대여섯 시간 사이에는 끝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검 결과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정훈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법의학 교실에 조명수라는 형이 있습니다. 스즈키 교수의 집도를 보조하고 있고 저와도 친한 사이라 결과를 아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 결과를 아시게 되면 그 내용을 제게 바로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대답하며 초조한 듯 손끝을 잡아 뜯고 있던 정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광문이 정훈의 어깨를 토닥이자 정훈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광문이 해경에게 물었다.
“저희가 환이를 만날 수는 없습니까? 같은 기숙사인데…….”
“아마 어려울 겁니다.”
“환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우선 최대한 밖에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가와타 씨가 죽은 사실을 법의학 교실에서는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기숙사 7호실에 갇힌 사람은 사실 이환 씨가 아니라고 속여 주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오래 갈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하루 이틀 정도 시간은 벌 수 있을 테니까요. 저도 그 동안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 볼 겁니다. 혹시 제게 뭔가 더 알려주실 수 있는 건 없습니까? 무엇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말에 광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아, 하며 해경에게 말했다.
“가와타가 자주 무교정(武橋町: 중구 무교동)에 외출을 나갔습니다. 작년에 저와 잠시 같은 방이었는데, 무교정에 갔다가 늦게 돌아와서 잠을 설친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아마 최근에도 그랬던가 본데 방이 바뀌어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무교정이라고요.”
해경은 탁자 위의 종이에 무교정이라고 메모를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광문이 자신 없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말씀드리고 나니 아무 것도 아닌 일 같기는 한데…….”
“아무 것도 아닌 일은 없습니다. 무엇이든 생각나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해경의 말에 그럼요, 하고 대답한 광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훈을 채근했다.
“어서 가자, 정훈아.”
“아, 응.”
광문을 따라 일어난 정훈은 해경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서둘러 학교로 돌아가 검시 결과를 기다릴 작정인 듯했다.
“그러면 저희는 일단 돌아가 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인사를 건넨 광문과 정훈이 사무실을 나가자, 해경은 자리에 앉아 무교정, 무교정, 하고 두어 번 중얼거렸다.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해경은 소화를 불렀다.
“소화 양, 혹시 최근에 무교정과 관련된 신문 기사를 확인하신 일이 있습니까?”
“잠시만요, 선생님.”
소화가 신문 기사를 모아 놓는 서류철 몇 개를 분주하게 뒤적이더니 그 중 한 개를 빼어 가지고 왔다. 소화는 서류철을 해경의 앞에 펼쳐 놓고는 손끝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소화가 가리킨 기사에는 빨간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아마 소화가 먼저 읽고 흥미로운 기사라고 생각해 표시를 해 둔 모양이었다. 해경은 그 기사를 눈으로 훑었다.
― 기생가(妓生家)에서 마작 도박단 검거
시내 무교정 이십오번지 기생 장홍주(張紅珠)의 집에서 신사 칠팔 명이 칠일 오후 한 시부터 칠일 오후 여섯 시까지 마작 도박을 하다 금전 계산에 언쟁이 생긴 것을 시작으로 소동을 벌였는데, 마침 근방을 지나던 본정(本町) 서원(署員: 관공서 근무원)에게 발각되어 판돈 이백여원과 마작을 압수당하고 관계자 전부를 체포하였으나 이들 중 대부분이 일본인이라 초범임을 감안하여 훈방하였다.
보름 전쯤의 짧은 기사였다. 그러나 재미있는 부분은 분명 있었다. 마작 도박단……해경은 가와타가 마작 도박을 좋아해 기숙사에서 몇 번 몰래 판을 벌리기도 했다는 광문의 말을 떠올렸다. 작년부터 무교정에 자주 들락거렸다면 이 기생가의 마작 도박단을 다녔던 것일지도 몰랐다. 역시 이런 것은 인혜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터였다. 해경은 바로 향운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미랑이 전화를 받아 해경인 것을 확인하고는 잠시만요, 하더니 곧 인혜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 미스터 정?
“혹시 무교정의 장홍주라는 기생에 대해 아십니까? 자기 집에서 마작 도박판을 벌인다는데요.”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가는 해경의 말에 인혜가 웃었다.
― 어머, 오늘은 또 뭐가 그리 급하실까.
“죄송합니다.”
― 우리 사이에 죄송할 게 무에 있나요. 흠, 장홍주는 잘 알지요. 예전에 나와 같이 일했던 적이 있어요. 몇 년 전 사업가에게 출가했다가 이혼당하고 형편이 쪼들린다더니 마작 도박단을 꾸린다는 말은 들었지요. 왜인들에게 소문이 아주 잘 났다던데요. 본시 사업 수완은 좋은 아이라 꾼들 서넛 고용해 판을 조작하며 판돈을 나눠 먹는 모양이에요. 나는 그쪽 일에는 관심이 없어 그 이상은 잘 모르겠군요.
왜인들에게 소문이 잘 났다는 인혜의 말에 귀가 번쩍 트였다. 해경은 인혜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장홍주 씨를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 어렵지 않지요. 마작 도박판 얘기를 하는 걸 보니 도박판에 대해 알고 싶은 모양인데, 겉보기에는 그냥 기생집처럼 꾸며 놓았으니 내 이름을 대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해경은 신문 기사에 나온 홍주의 주소를 재빨리 메모했다. 무교정 이십오번지라고 적은 쪽지를 주머니에 넣은 해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소화를 보았다. 소화를 데려갈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마작 도박판을 벌리는 기생집에 굳이 어린 소화를 데려갈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소화는 해경이 빤히 자기를 보는 시선에 눈을 깜빡이다가 옷에 뭐가 묻은 줄 알았는지 고개를 숙여 자기 매무새를 살폈다. 해경은 역시 안 되겠군,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소화에게 말했다.
“지금 급히 가볼 데가 있어 나갔다 올 겁니다. 아까 왔던 의학부 엄정훈 씨가 부검 결과를 알려 줄 때까지만 사무실을 지켜 줄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늦으면 제가 향운정까지 직접 모셔다 드리지요.”
“네, 그럼요. 염려 마시고 다녀오세요.”
소화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해경은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명치정에서 무교정까지는 사내 걸음으로 20분 정도면 충분히 도달하는 거리였다. 가와타가 장홍주의 마작 도박판에 끼어 있었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일단 무교정과 마작이라는 공통점은 있었다. 만약 장홍주가 가와타를 모른다 해도, 무교정에서 일본인이 참여하는 다른 마작판이 있다면 분명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걸음을 재촉한 해경은 장홍주의 기생집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으리으리한 대문 앞에 홍등(紅燈)을 내걸어, 누가 봐도 기생집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해경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젊은 기생 하나가 안쪽 마루에서 몸을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해경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기생에게 물었다.
“장홍주 씨는 어디 계십니까?”
기생이 의아한 표정을 하더니 몸을 일으켜 안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누군가 마루를 가로질러 모습을 드러냈다. 위아래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하게 수를 놓은 녹색 한복을 입은 여인이었다. 삼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미인 축에 드는 얼굴이기는 했으나 한 눈에 보기에도 보통 성격은 아닌 듯한 인상이었다. 여인이 해경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뉘신데 날 찾소?”
홍주였다. 상당히 고압적인 말투였으나, 해경은 아랑곳않고 대답했다.
“향운정의 자련을 아십니까?”
자련이라는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홍주의 얼굴이 대번에 변했다.
“경성 기생 중에 그 언니 모르는 년이 있을까, 무슨 일이시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시지요.”
홍주가 서둘러 해경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향운과 비교하면 비할 바 없이 초라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방 몇 칸에 슬쩍 보기로 젊은 기생도 두셋 정도 구색을 맞춰 놓은 듯 했다. 안쪽 방으로 들어온 해경은 술상을 내오려는 홍주를 제지하고는 물었다.
“마작 도박판 관련해 물을 것이 있어 온 겁니다. 여기가 왜인들에게 유명하다던데요.”
홍주가 품에서 궐련을 꺼내 한 개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순사요?”
“아닙니다. 그저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무어, 왜놈들에게 좀 유명하긴 하지요. 끗발이 좋아 초반에 판돈 따기 쉽다고 멋모르는 자들이 많이 옵니다.”
홍주가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했다. 구렁이가 속에 들어앉은 듯한 표정이었다. 해경은 눈을 약간 가늘게 떴다. 해경은 홍주의 말에 뼈가 있음을 쉽게 눈치챘다.
“판을 조작하신다는 얘기처럼 들리는군요.”
해경의 말에 홍주가 깔깔대며 웃었다.
“미남자가 눈치도 빠르시군. 보통 무리를 미리 짜고 초반에 몇 판 작게 잃어 주다가 판돈 크게 걸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이겨서 판돈을 따지요. 왜놈들은 대체로 조심성이 심해 너댓 판은 잃어 줘야 그 때부터 판돈을 올려요. 약은 놈들은 너댓 판 하고 돈을 땄을 때 바로 접기도 하지만 안 그런 놈이 더 많으니 손해는 아니지요.”
“그럼 혹시 여기 가와타 유사쿠라는 자가 드나든 적이 있습니까?”
해경의 입에서 나온 가와타의 이름에 홍주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뒀다. 가와타를 아는 것이 틀림없었다. 잠시 해경을 뚫어지게 보던 홍주가 물었다.
“가와타와 아는 사이요?”
해경은 쾌재를 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대답했다.
“뭐, 조금 안다고도 할 수 있지요.”
해경의 대답을 들은 홍주가 궐련을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뱉으며 잠시 사이를 두고는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이 되질 않아 좀 난처해하던 참이었어요. 가와타가 우리 무리 중 한 군데 끼어 있던 자라서요.”
“돈을 잃기만 한 건 아니다?”
“왜놈들도 요즘은 약아져서 조선인만 있는 판은 안 하려고 하니 왜놈이 한둘 낀 판을 벌리는 게 유리하지요. 가와타 그 놈도 초반에 우리 가게에서 엄청나게 털려먹혔는데, 돈 조금 떼어 줄 테니 같이 하자 했습니다. 성미가 불같은 점을 잘 이용해서 가와타가 지면 난리를 부리게 했어요. 그러면 가짜 판도 진짜처럼 믿게 되니까.”
“가와타가 언제 마지막으로 왔었습니까?”
“음, 그러니까 그게, 보자……이번 달엔 꽤 여러 번 왔는데, 가와타가 어디서 데려왔는지 호구 같은 놈들을 두셋 끼고 왔습니다. 첫날은 모조리 따게 해 주고 이튿날도 적당히 져 주면서 판돈을 올리니 그 다음 판에는 판돈이 엄청나게 커지더군요. 한 번 이기게 해 주고 나머지는 다 털어먹었는데 그러고 나니 분했던지 놈들이 가와타 없이도 왔었지요. 가와타가 가장 최근에 온 건 이틀 전이군요.”
이틀 전이라면 가와타가 마지막으로 살아 있었던 날이었다. 해경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가와타에게 그 날 별 일은 없었습니까? 몇 시에 돌아갔지요?”
“별 일은 없었는데 방 안에서 좀 다투는 듯한 소리가 나기는 했어요.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해서 모르겠고, 돌아간 건 아마 밤 열한 시 이후일 겁니다.”
“누구와 다투었습니까?”
“마작을 하다 보면 다투는 건 숨 쉬듯 일어나는 일이라서요.”
홍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해경은 머릿속으로 가와타의 동선을 그려 보았다. 경성제대에서 무교정까지 온 가와타는 역시나 그 날도 마작 도박을 했고,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다. 해경은 가와타의 뒤를 따르는 검은 그림자를 상상해 볼 수는 있었으나, 그것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안개 사이에서 멀리 떨어진 채 부정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