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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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조락(凋落)의 수춘
나는 쉬이 결정할 수 없었다. 저들의 말이 정녕 옳은가. 원요가 대장군이 되면 망하고, 내가 대장군이 되면 흥할 것인가. 정통성은 도리어 원요에게 있다. 사위는 또 다른 자식이라지만 나는 제갈씨이지 원씨가 아니었다. 내가 침묵하니 량이가 다시 소리쳤다.
“형님! 주저하지 마십시오!”
“이는 대의를 위함입니다. 합비후께서 선택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의를 따르십시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오래 서지 못한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힘을 주었다. 비틀거리면서 량이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들고 있는 관대를 잡았다. 나는 량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대의는 잘 모르겠다.”
나는 관모를 쓰고 허리띠를 맸다.
“그러나 너의 눈빛만은 배반할 수 없다.”
노숙이 반쯤 닫힌 문을 열었다. 빛이 들어왔다.
“가시지요, 정청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내 뒤로 무수한 사람들이 따랐다. 뒤가 보장되었으므로 나는 앞만 보았다. 수 십 개의 발소리가 나를 옹위했다.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발을 들이는가, 제갈찬. 한 조각 남은 양심마저 권욕에 팔아치웠나?”
정청에 들어서자 원요는 나를 향해 날선 힐난을 쏟아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양파의 가신들도 나에게 따가운 눈빛을 쪼였다. 영자는 내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찬, 의연하게. 넌 죄인이 아니야.”
그 말이 주술처럼 구부정하게 숙인 내 허리를 곧게 폈다.
원윤은 나를 한동안 흘겨보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가신들을 향해 말했다.
“구강공께서는 서거하셨소. 슬픔을 이기기에도 힘이 부족하지만, 난세를 헤치려면 구강공의 후사를 정하여 중심을 다잡아야만 하오. 이렇듯 가신들을 부른 것은 우리의 새로운 주군을 모시기 위함이오.”
나는 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원윤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후사를 깊이 논의할 것도 없소. 늠가연사 원요 공은 구강공의 적장자요. 누구도 늠가연사에 앞설 수 없소. 또한 늠가연사는 대장군부의 요직을 거쳐 경륜도 충분하니 이론이 없으리라 생각하오만.”
원윤은 가신들을 죽 둘러보았다.
“그대들도 모두 동의하겠지?”
모두 침묵했다. 담 작은 이의 침 삼키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렸다. 원윤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이 없다면 늠가연사로 하여금 구강공의 뒤를 잇도록……”
“이의 있습니다!”
이의를 외치는 목소리에게 온 시선이 향했다. 내가 아니었다. 량이었다. 원윤의 얼굴에 진한 불쾌감이 번졌다.
“일개 자사부 장사의 이의가 있다고 하여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 뜻을 거두어라, 제갈량.”
그때 내 등을 토닥이던 영자의 손이 떨어졌다. 영자가 앞으로 나서 크게 외쳤다.
“토역장군 손관! 이의 있습니다!”
“자사부 별가 염상! 이의 있습니다!”
“치중 노숙, 이의 있습니다.”
“장군 왕수, 이의 있습니다.”
“화평교위 감녕, 이의 있습니다.”
“아문장군 허저, 이의 있슈!”
내 뒤에 서있던 이들이 모두 내 앞으로 나서서 이의를 외쳤다. 원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대들은 마땅한 이치를 거스르는 것인가!”
노숙이 나서서 말했다.
“구강공의 작위와 대장군의 직책은 송경의 천자께서 내린 바,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땅히 송경에 품신하여 칙명을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구강도독 악취가 씩씩거리며 나섰다.
“송경의 천자가 감히 우리에게 간예할 바가 무엇인가! 궤변을 삼가라!”
왕수가 받아쳤다.
“구강공께서 친히 진왕이셨던 천자께 전국새를 바쳐 제위에 등극하시게 했소. 궤변은 그대가 늘어놓고 있소.”
기령은 불편한 기운을 담아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이의란 무엇인가? 누가 늠가연사를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영자가 답했다.
“합비후 양주자사 제갈찬은 구강공의 사위이자 혁혁한 군공을 세웠고, 영지의 안팎으로 신임이 두터우니 마땅히 구강공을 이을 만하오.”
구강태수 진기가 코웃음을 쳤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반박의 가치도 없군. 그대들은 그것을 원할지 모르나 다른 이들은 결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외다.”
원윤도 말을 보탰다.
“방종이다! 어찌 원씨가 아닌 자가 구강공을 잇는단 말인가!”
노숙이 말했다.
“늠가연사로 하여금 구강공의 작위를 잇고, 합비후로 하여금 대장군에 취임하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당치도 않다!”
“늠가연사가 구강공의 후사로 온당하다는 것은 여기 계신 몇몇 분들이 주장하시는 바일 뿐, 외지의 무장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터입니다.”
노숙의 항변에 왕수가 말을 보탰다.
“예주의 온후, 여남의 장료, 진국의 진규, 패국의 진등, 단양의 장패, 예장의 제갈현, 여강의 유훈 공을 모두 불러 중지를 모으시지요.”
기령이 이를 갈았다.
“그들은 모조리 외방의 객장들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할 권한이 없다!”
“그러면 그대에게는 그럴 권한이 있소?”
“나는 소싯적부터 원 가의 밥술을 얻어먹으며 자라왔다. 네 녀석의 말을 들어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자비심을 베풀고 있는 게야! 어디 함부로 객장들을 끌어들여 후사를 결정하게 하느냐!”
왕수는 비아냥거렸다.
“밥 많이 먹은 게 자랑은 아닐 터, 그대는 그 만한 밥값을 했소? 백 번 양보하여 객장인 합비후께서 북방의 영지를 개척하고 산월을 잠재웠으며 여강의 떠들썩한 도적을 진압하고 팔략의 일원이 되어 천하를 호령할 동안, 밥 많이 먹은 그대는 대체 무얼 했소? 똥이나 많이 쌌겠지. 부끄러운 줄 아시오.”
기령은 더 참지 못하고 칼을 빼들었다.
“네 놈이 정녕 목 안에 칼날을 품고 싶은 것이냐!”
간 큰 왕수가 두려워할 리 없었다.
“얼른 집어넣지 않으면 도리어 그대가 화를 입을 것이오.”
“그것은 칼을 부딪쳐봐야 알겠지! 네놈의 목부터 따야 직성이 풀리겠다!”
분위기는 일순 험악해졌다. 영자와 허저, 감녕도 나를 둘러싸고 당장 칼을 빼들 기세였다. 신중한 성정의 원윤도 더 인내심이 바닥난 표정이었다. 그때 정청의 문이 벌컥 열렸다. 정청 호위병의 뒤늦은 알림이 들렸다.
“원 소저 입시요!”
나는 무심결에 정청의 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시영이 땀을 흘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있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그녀는 가쁜 숨 사이로 간신히 말들을 밀어 넣었다.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원윤도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시영아! 어찌 네가!”
“이 꼴을 보고 아버님이 편히 눈을 감으시겠습니까. 정녕, 정녕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원요가 나서서 시영을 공박했다.
“누이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돌아가!”
“닥쳐!”
시영의 날카로운 외침이 격앙된 공기를 찢어버렸다.
“나도 원가의 적녀(嫡女)로서 말할 권한이 있어. 닥치라고, 원요.”
적녀의 사자후는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하는 힘을 지녔다. 시영은 위태로운 걸음으로 원윤의 앞으로 다가갔다. 근접한 시야에서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파리했다. 맺힌 땀방울들마다 병색이 완연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시영은 원윤을 직시했다.
“숙부, 부공께서는 후사를 지명하지 않았습니다.”
원윤은 여전히 당혹스러운 얼굴로 시영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이제 누구에게 권한이 있습니까? 누가 부공의 후사를 지명할 수 있습니까?”
시영은 자답했다.
“누구도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누구에게나 권한이 있습니다. 부공의 은혜를 입고 부공을 위해 싸웠던 자들 누구나 후사를 입에 담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는 형님의 적자다. 가장 우월한 정통성을……”
“그 정통성은 누가 보증하죠?”
“뭐라.”
“부공의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요가 가진 정통성이 정통성입니까? 부공의 사람들이 요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리 피가 진하다한들 그것이 정통성을 보증할 수 있습니까? 피가 진하기로 따지면 제가 더 그렇습니다. 저와 합비후는 혼인하여 일심동체가 되었으니 저의 피는 곧 합비후의 피, 허면 합비후 또한 부공의 후사를 이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너의 말이 불편하다.”
중부교위 기령이 끼어들었다.
“소저, 그러나 합비후가 대장군의 인을 받든다면 더욱 반발이 심할 것입니다.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4만의 회병이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가 대장군이 된다면 온후를 위시한 북방의 대병이 따르지 않을 것이요, 제 낭군의 일만 화평사가 따르지 않을 것이요, 여강 유훈 공의 대병이 따르지 않을 것이요, 예장과 단양의 대병 또한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원윤이 시영을 질타했다.
“그것이 바로 역모이니라!”
“숙부께서는 함부로 역모를 규정하실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중부교위의 반발도 엄연히 역모이겠지요.”
“허면 누가 역모를 규정할 수 있느냐!”
“송경의 천자입니다. 부공께서는 송경 천자께 전국새를 바치고 스스로 그의 신하가 되셨습니다. 송경의 뜻이 곧 부공의 뜻입니다.”
“억지다!”
“허면 정녕 이 수춘 땅에서 숱한 목숨들이 죽어나가야 성이 풀리시겠습니까?”
“역적들이 그리하겠다면 받아주는 수밖에!”
“…그렇습니까?”
그때 성의 북문을 수비하던 북부교위 척기(戚寄)가 달려왔다. 그는 양주파의 일원이었다.
“급한 일이기에 먼저 아뢰지 않은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온후께서 기병 5천을 이끌고 수춘의 북문에 당도하였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전언에 원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뭐라!”
중부교위 기령이 왈칵 성을 내었다.
“그것을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어찌 제 소임을 저버리고 사사로이 병력을 수춘으로 끌고 온단 말인가! 불허하라!”
척기가 읍하고 물러나려는데, 짙은 그림자가 척기의 몸을 덮었다. 척기는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에 몸을 굳혔다. 두터운 손바닥이 척기의 어깨에 올려졌다.
“중부교위 기령, 네가 뭔데 불허한다 만다 지껄이는 거냐?”
묵직한 음성이 정청을 울렸다. 기령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 온후!”
여포가 척기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오래 사귄 사람이 죽었다. 술 한 잔 올리겠다는데 뭐가 잘못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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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조락(凋落)의 수춘
여포는 원윤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맹수 같은 몸뚱이가 뿜어내는 위압감이 정청의 뭇 사람들을 저절로 굴복시켰다. 숱한 목숨을 빼앗아간 여포의 큰 주먹에 원윤은 겁을 먹었다. 그럼에도 체면은 차려야 하는 것이 귀인의 숙명인가보다.
“정북장군! 어째서 임지를 버리고 아무런 보고 없이 사사로이 운신한단 말인가!”
여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고? 누구한테 보고를 해야 하오?”
원윤의 턱 끝에 매달린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구강공이 별세했다며.”
여포는 좌중을 죽 둘러봤다.
“여기 나보다 높은 사람 있어?”
정청을 한 바퀴 둘러본 여포의 시선이 다시 원윤을 향했다. 그는 어깨를 들썩였다.
“없네.”
여포는 여유가 흐르는 웃음에 물음을 띄워 원윤에게 보냈다.
“내가 누구한테 보고를 해야 하오? 정동장군.”
원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포가 열어젖힌 정청의 문틈으로 돌풍이 불었다. 여포의 기세당당한 웃음 앞에서 원윤은 제대로 몸을 펴지 못했다.
“늠가연사가 구강공의 후임이라니! 나는 인정할 수 없소. 멋쟁이 제갈찬이라면 모를까, 저 얼굴 뿌연 놈의 명령을 받을 수는 없단 말이지!”
여포는 멋쟁이 말고 더 유식하고 적절한 낱말을 쓰고 싶었겠지만 그의 머리에는 멋쟁이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었던 터였겠다. 어휘의 수준이 어쨌건 여포의 말에는 위압감이 있었다. 원윤을 비롯한 남양파가 내내 지껄였던 논리는 여포의 앞에서 무기력해졌다. 삼척동자가 시위를 힘껏 당겨봤자 가죽 한 장 뚫지 못하듯이.
기령이나 악취 등이 우리의 앞에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잘 질러놓고, 여포의 앞에서는 순한 강아지가 되었다. 여포는 천자가 업도로 유수(幽囚)되기 전, 낙양에서 후의 작위를 받았으며 삼공으로 대우받았다. 송경이 세워진 후에도 그 공고한 지위를 인정받았다. 또한 원술의 생전에도 원술과 군신이 아닌 느슨한 연맹의 형태로 합류하였으며, 원술이 없는 지금 최고위 인사인 원윤과 동급의 장군직을 수행하고 있다. 북방의 책임자로 대병을 거느리고 있으니 그가 원술의 후사가 될 수는 없어도, 후사를 세우는 데 강한 영향은 미칠 수 있었다. 지금 돌아가는 판으로 봐서는 최소한 원윤의 영향력 정도는 상쇄한 것 같다.
여포가 대동한 병력이 비록 기병 오천에 불과하다지만, 여포는 무의 상징이었다. 또한 나처럼 앞뒤 다 재가며 움직이는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남양파는 알았다. 수틀리면 피 묻은 방천극이 좌충우돌할 터. 원윤은 나를 대하듯 강경하지 못했다.
이 유리한 기류를 노숙이 놓치지 않았다.
“온후께서도 합비후를 지지하셨으니, 정동장군을 비롯한 남양파의 제공(諸公)께서도 양보를 해주시지요. 송경에 품신하여 늠가연사와 합비후 중에서 구강공의 후사를 정하는 걸로.”
“하지만……”
기령은 말꼬리를 흐리며 최후의 저항을 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비록 수춘에 4만의 회병이 있다지만 수춘의 지척에는 나에게 우호적인 병력들이 즐비했으니 내전에 돌입한다면 그들도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원윤의 고집스러운 입술이 닫혀있다가 한참 뒤에 열렸다.
“…좋다. 한윤! 그대가 송경으로 가서 천자를 알현하라.”
왕수가 딴죽을 걸었다.
“위조의 염려가 있으니 우리 쪽에서도 사람을 보내지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기령은 왕수가 어지간히도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재수 없는 자식!”
왕수는 가볍게 무시해주었다.
송경의 천자에게 품신할 글은 한참의 승강이 끝에 남양파도, 합비류도 아닌 양주파인 남부교위 교유가 작성하기로 했다.
신 대장군부 남부교위 교유가 천자께 아룁니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뭇 백성들의 자애로운 제후였던 대장군 구강공 원술이 세상을 떴습니다. 이를 비통한 심정으로 천자께 아룁니다. 부디 천자께서는 충신 원술에게 시호를 내리시고, 대장군부를 새로이 맡을 신하를 임명해주십시오. 대장군부의 대소신료들이 격론 끝에 적절한 인물을 골라 아뢰니, 만약 폐하께서 불민히 여기지 않으신다면 신들의 편협한 소견을 들어주십시오.
원술의 적장자이자 늠가연사 원요는 위아래의 인망이 두텁고 원술의 덕행을 보고 체득하였고 또한 원술과 오래 종사한 자들이 믿고 따를 자입니다. 대장군의 감으로 삼을 만합니다. 그를 대장군으로 영전하여 폐하의 삼군을 거느리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원술의 사위이자 양주자사 합비후 제갈찬은 천하에 팔략의 일원으로 명성이 드높고, 동서남북으로 숱한 군공을 세워 역시 대장군의 소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이 둘은 폐하에 대한 충심도 매우 깊으니, 이 중에서 대장군을 임명하신다면 반드시 폐하의 충실한 심복으로 종사할 것입니다. 이렇듯 폐하께 아뢰나니, 부디 신들의 소견을 물리치지 마시고 숙려해주시옵소서. 항상 천자의 은혜 아래 평안하나이다.
남부교위 교유
한윤과 왕수는 똑같은 문서를 하나씩 지니고 송경으로 급히 떠났다. 나는 왕수의 호위로 진도를 붙이고, 원윤 또한 장군 진익을 한윤의 호위로 붙였다. 원윤은 한윤을 전송하고 돌아오며 툴툴거렸다.
“송경에는 유표와 손책의 객관교위가 머물고 있다! 이제 구강공의 서거를 천하가 다 알게 되었군! 부끄럽도다!”
심술쟁이 왕수가 가만히 보고 넘어가지 않았다.
“이미 천하 제후들의 세작들이 수춘에 들러 보고를 했을 터입니다.”
한윤과 왕수가 송경으로 떠난 뒤, 양 진영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원윤은 수춘의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혹시 모를 나의 기습공격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수춘의 남문을 지키는 남부교위 교유와 북문을 지키는 북부교위 척기는 양주파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여태 중립을 견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우리 쪽으로 돌아선다면 원윤의 방비는 헛것이 되고 말 터였다.
이렇게 되니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은 양주파의 좌장인 파로장군 장훈이었다. 우리 쪽과 남양파가 부단히 장훈의 저택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술을 권하고 은밀히 파격적인 승진을 약속했지만 장훈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이미 결정적인 패를 쥔 상황에서 미리 기미를 보일 까닭이 없는 탓이었다. 상황을 끝까지 주시하다가 유리한 쪽의 손을 들어주겠다는 심산. 그를 힐난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제3자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마냥 팔자 좋게 송경의 품신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나의 별가에 합비류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왕수가 말했다. 자리한 이들이 이에 대체로 공감했다.
“저들은 언제든지 동병하여 우리를 기습할 수 있습니다. 방비는 충분히 하셔야 합니다.”
나 또한 이의가 없었다. 송경의 천자가 깊이 신뢰하는 상서령 낙준은 나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태부 공융은 나와 깊은 관계에 있다. 송경 조정 내부에 종사하는 신료들이 천자의 결정에 미칠 영향은 상쇄되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결국 천자의 뜻에 달린 것이다. 이렇게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량이가 내 쪽으로 눈을 흘겼다.
“설마 천자의 명령을 그대로 따를 작정은 아니시죠?”
나는 놀란 토끼눈을 하다가 멋쩍게 웃었다.
“그, 그, 그럼! 나는 그렇게 순둥이가 아니거든!”
량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숙도 량이의 눈빛을 따라하다가 내가 조금 삐진 표정을 지으니 금세 헤헤 웃었다.
“천자께서 원요를 대장군으로 세워도 합비후께서는 굴복하시면 안 됩니다.”
“음……”
내가 관자놀이를 긁으며 주저하자 량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음은 뭐가 음이에요!”
“귀청 떨어지겠네!”
“유총은 교활한 사람이란 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천자의 휘(諱, 군왕의 이름)를 함부로……”
“천자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원요가 대장군에 오르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천자라면 원요를 택할 수도 있어.”
“원요가 대장군에 취임하고, 형님이 인정하지 않고 독립하고, 구강공의 영지에서 각 군벌이 난립하고! 그러면 이 일대에서 천자의 영향력이 커지고, 마침내 유총은 숨겨왔던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겠죠. 진짜 천자가 되는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왕수는 이에 십분 공감했다.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칙명을 거스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아니, 그럴 거면 왜 천자를 운운한 겁니까?”
“시간을 벌려고요.”
“시간?”
왕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자가 대장군으로 누굴 택하든, 내전은 불가피합니다.”
답답한 기운이 내 속을 메웠다.
“천자가 합비후를 대장군으로 선택해도, 저들은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결국 끝은 칼과 피입니다.”
노숙이 말을 받았다.
“현재 상태로 전투를 벌인다면 우리가 집니다. 수춘에만 4만의 병력이 도사리고 있거든요. 이미 각지의 군벌들에게 전령을 보냈습니다.”
“뭐라고 말을 전했소?”
“내전 임박. 전투태세 갖출 것. 읽은 후 소각할 것.”
량이가 말했다.
“이미 가까운 군벌들은 이에 응하는 전령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봉화를 올리면 그 즉시 대병을 수춘으로 몰고 올 것입니다.”
한참 말이 없던 여포도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나 또한 고순 등에게 말을 전하고 왔지! 수춘에서 불이 오르거든 즉각 출병하라고.”
“유표와 손책, 유비가 준동할 수도……”
“그거야 원요의 엉덩이를 금방 걷어 차주고 상대하면 될 일이야!”
“웬만하면 피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량이가 내 말에 퉁을 놓았다.
“우리는 뭐 피가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요?”
제법 날카로운 반응에 나는 그의 허리를 쿡 찔렀다.
“부쩍 싹수가 노래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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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나가야 해서 리리플은 오늘만 생략하겠습니다.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