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369
“청금령의 비밀보고가 있는 탓으로, 그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고가 앞으로 나서겠습니다.”
노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청금령의 비밀보고라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살짝 혀를 빼 물었다.
“말했잖습니까? 비밀이라고.”
노숙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신은 군부를 통할하는 직무를 맡고 있습니다. 신에게도 비밀을 유지하실 겁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곧 말씀드릴 때가 올 것이니.”
왕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더 캐물을 정도로 노숙은 무례하지 않았다.
신왕(晨王)이라고 적힌 거대한 깃발은 본영에 한참 서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깃발이 내내 그곳에 서있다가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왕 제갈찬은 군대를 쥐락펴락하는 데는 서툴고, 창칼을 다루는 데는 더 서투니까 구태여 앞으로 나아갈 까닭이 없다는 판단이었을 터였다.
뭐, 나도 선봉에 나선 다섯 장군들보다 힘이 달리고 숱한 모사들보다 머리가 달린다는 사실은 당연히 인정한다. 그래도, 명색이 군의 주장이,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이 전쟁에서 시시한 농담이나 따먹다가 돌아간다는 것은 영 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유엽의 보고에 따르면 적을 분명히 분쇄할 수 있을 터이니,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힘 좋은 기수가 본영에 꽂힌 신왕의 깃발을 들고 천천히 행진했다. 나를 중심으로 하여, 본영의 대군이 그 신왕의 행진에 발맞춰 북으로, 북으로 진군했다. 퍽 장관이었다. 나는 마차에 올랐고, 그 옆에서 왕평은 차를 우렸다. 그리고 그 좌우로 대도독 노숙을 비롯하여 각지의 도독들, 그리고 그 휘하의 제장이 따랐다. 나의 병사들은 북으로 향하면서, 적의 목을 점점 조였다.
“요동의 공손강이 신왕 전하를 뵙습니다!”
공손강은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하얀 평복으로 갈아입은 채로 나를 맞았다. 그들의 병사들도 모두 삼엄한 경비 속에서 귀순한 병사들에게 알맞은 차림과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무릎을 꿇은 공손강에게 다가갔다.
“공의 위명은 익히 들었는데, 공의 영토가 북비에게 가로막혀 있어 그간 안부를 전하지 못했소. 그런데 공이 스스로 찾아와 귀순하기를 청하니 오늘처럼 기쁜 날이 있을까 싶소.”
오늘처럼 기쁜 날이야 세자면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이 모자라지만, 이렇듯 가증스러운 접대용 사탕발림이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왕으로 굴러먹을 재간이 없었다.
“송구스럽습니다. 감히 전하께 맞설 생각을 품었으니, 이 공손 모의 죄가 지극하옵니다. 그럴진대 이렇듯 따뜻하게 맞아주시니 이 하해와 같은 은혜를 어찌 다 갚겠습니까.”
나는 무릎 꿇은 그를 몸소 일으키며 다독였다.
“공이 용맹하게 앞장서 적을 무찌른다면, 죄라고 부를 수도 없는 티끌만 한 실수가 용서되는 것은 물론 공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오. 부디, 힘써주시구려.”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마땅히 그리하겠습니다!”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인명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승리를 거둔 장패와 고순의 공을 치하했다.
“두 도독의 공이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소이다.”
나의 말에 장패가 땀을 삐질 흘렸다.
“전하, 그 말씀은 솔직히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그랬나. 눈이 부셔서 애꾸가 될 것 같소이다. 이건 어떻소?”
장패는 내 말을 무시했다.
“요동도 요동이지만, 오환의 병력 역시 조 장군이 나서서 답돈의 머리를 베었다 하니 그 공을 마땅히 크게 상찬하심이 옳습니다.”
내 시답잖은 농담은 가뿐히 무시하는 장패였지만, 내 의중을 읽고 듣고 싶은 말을 건네주었다. 군부의 가장 오래된 장수이자, 이제 여포와 공융이 죽게 됨으로써 나의 주인 노릇을 했던 유일한 인물인 장패는, 그 중량감이 다른 신료들과는 퍽 달랐다. 그런 그가 먼저 조운의 전공을 언급하고 크게 상찬하라 건의하는 것은, 조운의 위상을 높여주는 직접적인 효과가 있었다.
“물론이오. 그리할 것이오. 허저와 황충 역시 오환의 진을 토멸하는 데 그 공이 크니, 그들도 마땅히 상찬할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리하셔야지요.”
오환과 요동이 순식간에 날아가버리니, 이제 최전방은 관우와 주유의 진이 되어버렸다. 신왕 제갈찬은 그들과 바로 직면한 언덕에 진을 치고 그들을 도사렸다. 관우와 주유는 껄끄러운 사이였다. 함께 담왕 유비를 섬긴 역사가 있지만, 관우는 유비와 의형제의 연을 맺을 정도로 끈끈한 사이인 반면에 주유는 다분히 정치적 목적으로 결합한 사이였다. 의리는 없는 관계였다.
게다가 담왕부의 멸망 이후 주유는 미련 없이 조조에게 의탁한 반면, 끊임없이 화호와 반목을 반복했던 조조에게 좋은 감정이 있지 않았던 관우는 조조를 따르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는 연주에 웅거한 채로 조의 인수를 받았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받은 독립 세력으로서 구실했다.
또한, 태자 조앙과 이황자 조비의 후계구도가 명확하게 굳지 않고 백중세를 이루면서 조정의 대신들이 각자 유망하다고 판단한 쪽에 줄을 대었는데, 주유는 조정의 비주류로서 이황자 조비에게 협력하여 반전을 노린 반면에 관우는 이러한 후계구도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승상 정욱과 대장군 하후돈 등 기존의 주류세력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태자 조앙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그 때문에 관우는 조앙의 서군에 배속되었고, 주유는 조비의 동군에 배속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속성을 지닌 관우와 주유였고, 그런 터라 관우와 주유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가 없었다.
관우는 주유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유는 관우가 자신의 미래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조의 신료로서 안정적으로 기반을 잡으려면, 관우의 존재는 없는 것이 좋았다.
그러한 주유의 속내를 조조는 잘 알고 있었다. 오환과 요동의 뒤에 관우와 주유를 배치한 것도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포석이었다. 조조는 주유에게 따로 명을 하달했다.
“관운장은 매우 용맹한 장수이나, 그의 존재는 경에게나 짐에게나 껄끄럽소이다.”
조조는 그렇듯 주유의 마음을 깊숙이 찔렀다.
“우리가 퇴군을 결정한 마당이오. 낙양의 점령도 요원하게 되었으니, 빈손으로 돌아갈 판이오. 벌이를 해내지 못하는 아비는 자식들이 눈알을 까뒤집고 상대하지 않으며, 아는 것이 없는 스승은 배움 짧은 제자들이 논파하고자 도전하는 법이니,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임을 생각한다면 어찌 임금이라고 벌지 못하는 아비와 알지 못하는 스승과 다른 신세라고 하겠소. 이기지 못한 임금은 신하들이 가벼이 여기는 법이니, 짐이 빈손으로 업도로 돌아가면 조정에 소란이 일 수밖에 없을 것이오.”
조조는 그렇게 말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조정에 소란이 일면 충성의 두께가 얕은 자부터 임금을 떠나기 마련이니, 대저 얕은 충성을 지닌 신료를 꼽자면 운장이 제일일 것이오. 운장은 나를 마음으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세력을 운용하니 어찌 짐이 두려워하지 않겠소. 발바닥의 상처 같은 자라, 짐이 걷고자 하면 반드시 고통스럽게 할 것이니, 더 둘 수가 없소이다.”
조조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닫았다. 그 안에 담긴 뜻을 두뇌가 녹슬지 않은 주유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답돈과 공손강을 버림패로 삼았듯, 훗날 위험이 될 수 있는 관우 역시 이번에 버려야겠다. 그리하여 신왕부의 경계에 있는 연주를 직할령으로 두고 방비를 강화하여 훗날을 도모해야겠다. 공근(주유의 字)이여, 나와 그대의 적 운장을 그대의 손으로 도려내야겠다.
주유는 바로 눈앞에서 나부끼는 신왕의 깃발을 보고 잠시 골몰하다가, 이내 부장 여몽에게 명했다.
“퇴군 준비를 서둘러라.”
뜻밖의 명령에 여몽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적의 대병이 눈앞에 육박하였거늘, 허면 맞서 싸운단 말이냐.”
“등 뒤에는 대사마 조인이 버티고 있습니다. 함부로 군을 물렸다가는 우리를 엄히 다스릴 것입니다.”
“알고 있다.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 너는 명령만 따르면 된다.”
여몽은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주유의 진은 소란을 피우며 퇴군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의 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관우의 진영에서도 그러한 풍경이 잘 보였다. 관우는 심기가 불편했다.
“싸우지도 않고 군을 물리려 하느냐…… 졸장부가 아니냐.”
관우로서는 조조의 퇴군 결정이 못마땅했다. 일생의 원수 제갈찬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다. 만일 이번에 퇴군하게 된다면, 조의 내부는 상당한 세월을 조정의 암투로 보낼 운명이었다. 그러자면 조조로서는 내부 기율의 단속을 급선무로 여기게 될 것이고, 내부이면서 외부의 세력인 연주의 관우를 구워삶으려 할 것이라는 판단을 관우 스스로도 해냈다.
이 전쟁이 실패로 끝난다면 천하의 인심이 제갈찬에게로 확연히 기울 것이요, 넓은 땅을 다스려야 하는 제갈찬은 합비의 구중궁궐에 머무르고 전장에 나서려 하지 않을 터이니, 제갈찬을 치자면 지금이 호기였다. 지금뿐이었다.
“게다가 놈이 바로 눈앞에 있어……”
눈앞에서 나부끼는 신왕의 깃발은 관우에게 달군 쇳덩이를 집어삼킨 듯 뜨거운 복수심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저 앞에서, 제갈찬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잠을 잔다. 저 앞에서……
“그런데 퇴군이라니……”
용납할 수 없다.
주유가 서두르는 퇴군준비가 관우의 복수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관우는 부산스럽게 짐을 싸는 주유의 진을 건너다보고, 정면에서 나부끼는 제갈찬의 막사를 바라보다가, 긴 수염을 떨면서 뜨거운 복수심으로 말했다.
“단독으로 적을 친다.”
화평 2년 5월, 외사령을 지내던 왕수와 양주자사를 지내던 염상을 각각 신설된 서량도독과 삼보도독에 임명했다.
“이룬 공이 많은데 외지로 쫓아내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소이다, 서량도독.”
나는 왕수의 손을 잡고 하등 쓸모없는 인사말을 건넸다. 왕수는 푸근하게 웃었다.
“아직도 이 왕수의 쓰임이 남았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서량은 의후(유복)가 세상을 등진 땅이니, 그의 혼이 아직 달래지지 않아 등지를 떠돈다면 불러다 술이나 나누지요.”
나는 유복을 떠올리고 씁쓸하게 웃었다.
“서량에서만큼은 경이 곧 짐이오. 혹 경을 거스르는 자가 있거든 합비까지 품신하지 말고 즉각 대처하도록 하시오.”
“물론이옵니다. 폐하의 권위를 해하려는 자가 있다면 모든 힘을 다하여 제거하겠습니다.”
“내내 고맙소.”
“신이 올릴 말씀입니다. 시골의 포의로 늙어가야 온당할 이를 고관으로 삼으신 은혜가 거듭 감사할 뿐입니다.”
“종종 좋은 음식이 들어오면 서량으로 보낼 터이니 부디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쓰시구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나는 염상과도 왕수처럼 독대했다. 내가 원술의 막하로 들어갈 때 맨 처음 나를 무지렁이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우해준 이였다. 나는 그에게도 건강을 신경 쓰라 당부했다. 아무래도 삼보는 서량보다 기후도 좋고 시가도 번화하여 훨씬 나을 것이었다.
두 숙성한 대신들을 새로 개척한 땅으로 보내면서, 서량의 량왕부는 권위만 남았고 주인이 내직으로 소환된 삼보는 나의 직할령이 되었다.
화평 2년 6월, 공주 제갈온과 제갈영을 각각 합비공주와 낭야공주에 봉했다. 합비와 낭야는 수많은 천하의 고을들 중 나에게 각별한 지역이었다. 그녀들은 밝으면서도 얌전한 성정으로 자라났다. 모두들 최고의 신붓감이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차라리 시절의 문화가 세련되어 딸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이 가당했다면 어땠을까. 합비공주 온에게 제위를 물려줄 수 있었다면 차라리 나으련만. 오로지 정치의 야합을 위한 매개로 밖에 쓰일 일 없는 그녀들이 안쓰러웠다.
그렇게 안쓰러워하면서도 이미 내 머릿속은 그녀들의 혼처를 궁구하느라 바삐 돌아갔다. 젠장할 일이었다. 나는 적당한 때에 적당한 사내와의 혼사를 명령할 계획을 짰다.
화평 2년 8월, 풍년이 들었다. 오랜 가뭄을 견딘 백성들은 넉넉한 양곡을 즐겼다. 술을 빚고 떡을 쪄서 배불리 먹었다. 백성들에게는 제갈찬이 아니라 밥이 천자였다. 그들은 배가 불러지자 천자를 찬양하는 유행가를 지어 불렀다.
그즈음, 나는 조정에 명하여 서원(西苑)을 설치했다. 합비궁의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너른 정원을 낀 건물이었다. 연못을 여러 군데 팠고, 사슴을 풀어놓았다. 서원은 황실과 고위관료의 자제들의 학습을 위해 설치되었다.
서원의 총괄을 태사 화흠에게 맡기고 여러 기린아들을 입학시켰다. 대표적인 이들이 원자 제갈단, 승상 종요의 아들 종육, 종정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 백각대부 왕평, 서촉도독 장료의 아들 장호, 전장군 조운의 아들 조광 등이었다.
내가 원자 단에게만 유능한 스승을 붙이지 않고 구태여 서원이라는 교육기관까지 만든 것은, 부디 단이 군왕의 재목으로 자라나길 바란 까닭이었다.
단은 제 외조부와 어미를 닮아 무에만 천착하고 이따금 포악한 성정을 드러낸다고 하니, 교정하지 않으면 그에게 제위를 물려줄 수 없었다.
“문에 힘쓰라. 부디 문에 힘쓰라. 그것이 너의 살길이니라. 부디 아비의 뜻을 거스르지 말거라.”
나는 예사롭지 않은 악력을 지닌 단의 손을 꼭 잡고 그렇기 당부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쇠귀에 경 읽기인지는 알지 못했다. 부디 문과 덕에 힘쓰라. 그렇지 않으면 아침은 짧으리라.
조나라는 이황자 조비를 태자에 봉했다. 그가 조 천자 조조의 후계로 낙점되었다. 조조는 패전 이후 몸 상태가 쇠약해져서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얼굴은 하얗고 눈두덩에는 검은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손톱은 푸르뎅뎅하고 뿜는 숨에서는 단내가 끼치니, 완연한 병자의 기색이었다.
“짐은 태자에게 청정하도록 하겠노라. 나라의 작은 일은 태자가 도맡도록 하고, 짐에게는 긴요한 사항만 간단히 이르라.”
조조는 그리 전하고, 일체의 이의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지쳐있었다. 천하의 대기운은 조를 떠나 신에게로 부쩍 기울었다. 그 대기운을 다시 일으키기에 늙은 조조에게 남은 힘이 적당하지 않았다.
“부디 어진 정치를 하여라. 너는 아비의 실패를 반드시 똑바로 봐야한다. 서두르면 안 된다. 알았느냐?”
조조의 말에 조비는 한껏 자세를 낮췄다.
“반드시 천하의 인심을 되찾아오겠사옵니다.”
“너의 자리는 너의 형을 죽여 얻은 것이다. 그것을 항상 잊지 말거라.”
조조의 말에 조비의 등줄기를 타고 찌르르한 기운이 흘렀다. 조비는 더욱 바짝 몸을 낮췄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아비는 심히 권태로워졌구나. 부디 아비를 괴롭히지 말라.”
“예,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