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13
213화
장비는 적의 두려움을 공감할 수 있기에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붓을 들어 글을 적어 내려갔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모두 적은 장비는 꽤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봐도 자비로운 감정이 드러나는 명문이었기 때문이다.
죽간을 말아 끈으로 묶으려던 장비는 전령을 불러 그것을 읽어 보게 시켰다.
“한번 읽어 보거라.”
전령은 담담한 목소리로 낭독을 끝내자, 장비가 약간 흐뭇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어떻더냐?”
순간, 전령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로서는 그저 전달만 하면 그만인데, 평가하고 말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다 이내 장비가 어떤 인물인지를 떠올리고는 바로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명문입니다. 거기다 서필에 힘이 넘치니, 적은 서신을 읽는 즉시 절로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장비는 전령의 말에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죽간을 끈으로 묶어 전령에게 건네며 말했다.
“놈들이 혹 글을 못 읽을 수 있다. 누규가 죽은 판국에 제대로 된 놈이라면 항전하겠다고 요새를 보수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네가 직접 읽어 주어야 할 수도 있다.”
장비의 말에 전령은 순간 욕지기가 목 끝까지 치밀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무지한 이들에게 항복을 권한다는 것이 제 목숨을 내놓는 짓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비는 전령의 목숨 따위는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결국, 전령은 가슴에 어마어마한 돌을 얹고서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 * *
불안한 마음을 품은 채 요새에 들어선 전령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모든 이들이 마치 제 일인 것마냥 나서서 요새의 보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낱 징집병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의가 넘치는 모습에 당황하던 찰나, 문득 그들에게서 이유 모를 불안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전령은 주변을 쓱 훑어보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공포에 잠식되어서 정신을 놓아 버렸구나. 제 죽을 무덤이나 파고 있는 팔자라니, 불쌍하기 짝이 없구나.’
병사의 안내를 받아 군막에 들자마자 묘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늪지 주변이다 보니 관리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냄새일 수밖에 없지만, 대장의 군막임에도 향을 피우지 않고 방치하는 것을 느끼며 전령은 고개를 내저었다.
‘쯧쯧, 명색이 대장의 군막인데도 이 모양이라니.’
그렇게 내심 깔아보던 전령은 뒤에서 나몽이 들어서자 흠칫 놀랐다. 온몸에 흙을 묻힌 그의 모습에서 장군의 위엄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진짜 농군이 군을 통솔하고 있구나.’
전령이 눈치를 살살 보며 죽간을 펼쳐 들려는 순간, 나몽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내 직접 읽을 터이니, 죽간만 두고 가게.”
전령은 약간 미묘한 표정으로 나몽을 바라보았다. 겨우 땅이나 파먹고 살아온 인간이 어찌 글을 읽겠느냐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괜히 목숨이 달아나지 않으려면 웃으며 아부를 할 줄 알아야 했다.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 적에게 보내는 문서는 항복을 종용하는 서신밖에 없을 터이니, 아무리 무식한 무지렁이라도 느낌상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을 모른다면 또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전령은 고개를 숙이며 애써 공손하게 말했다.
“예, 알겠사옵니다. 하온데 저희 측 장군께옵서 작금의 상황을 안타까워하시며 고순의 횡포가 두려워 그러는 것이라면 나서서 막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고순이 보여 준 모습에 두려움이 큰 것이 사실입니다. 저희가 꾸린 진형을 그저 힘으로 때려 부수면서 밀고 들어왔던 모습이 아직 뇌리에 생생합니다. 제가 이럴진대, 병사들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병사들이 많이 두려워합니다.”
나몽의 솔직한 토로에 전령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이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더욱 숨겼다.
잠시 후, 나몽은 죽간을 전령에게 쥐여 주며 말했다.
“잘 보았습니다. 장군께서 저희를 불쌍히 여겨 말씀해 주시니, 미욱한 이 몸도 기꺼이 따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몰라 바로 성문을 열기는 어렵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나몽은 행여나 누가 들을까 걱정된다는 기색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제발 이런 제 형편을 장군께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반드시 병사들을 설득할 테니, 제발 시간을 달라고.”
* * *
나몽의 대답을 전해 들은 장비는 역시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전령이 자신이 목격한 모습을 말하자 웃음을 지었다.
“하하, 어쩔 수 없군. 그렇게 겁에 질려 있으니, 우리가 기다려 줘야지. 어차피 고순은 남양을 떠나 형님을 쫓아갔으니, 시간이 지나면 현실을 깨닫고 스스로 문을 열겠지.”
장비는 이번 전투를 가볍게 여기며, 그저 저들을 어찌 이용할지 고민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요새를 포위하고 칠 주야가 지나자 장비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그동안 많은 선물과 조언이 담긴 죽간들을 보냈는데도 상황이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장비는 유비의 조언대로 제 딴에는 인의를 보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비가 형주를 장악하고 허도를 노리기 위해서는 민심을 얻을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장비의 노력과 다르게 시간이 흐를수록 요새는 점점 강화되었고, 나몽의 답변 또한 언제나 징징거리는 푸념만이 전부였다. 결국, 참다못한 장비는 죽간을 전령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사실 전령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고래로부터 전령은 극한 직업이었다. 말을 전달하는 능력도 뛰어나야 하지만, 분위기도 잘 파악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피치 못할 상황이 찾아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죽간에 얻어맞은 전령의 이마가 금세 부어오르며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전령은 감히 내색하지 못하고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요새의 문을 열면 병사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으니, 이는 장군의 너그러운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장군께서 좀 더 인내를 가지고 저들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할 듯싶습니다.”
전령은 더욱더 깊게 머리를 조아렸으나, 이미 인내의 끈이 끊어져 버린 장비는 분노를 표출하며 소리쳤다.
“설득은 무슨 놈의 설득! 벌써 칠 주야가 지났다! 무능도 이런 무능이 없어! 나몽이라는 놈이 어쩌지 못하겠다면, 내가 설득을 시켜 주어야겠다. 사모! 사모를 가져오너라! 내 직접 저들에게 공포가 무엇인지 알려 주겠다! 이 빌어먹을 것들은 자비를 베풀어 줄 이유가 없어!”
결국, 본성이 튀어나온 장비는 무기를 챙겨 들고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직접 북을 쳐서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잠시 후, 병사들이 준비를 마치자, 장비는 직접 앞장을 서며 돌격을 명하였다. 그러자 병사들도 크게 함성을 내지르며 요새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내 갈고리가 요새를 향해 던져지고, 병사들이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의 저항도 만만치는 않았다. 장비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내준 시간 동안 차근차근 요새의 강화에 전력투구한 덕분이었다.
뜨거운 기름이 쏟아져 병사들의 살을 태우고, 무자비하게 떨어지는 투석 세례에 맞아 추락하는 이가 속출하며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상황을 연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방이 늪지인 탓에 사다리는 제대로 고정되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지기 일쑤였다.
이처럼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장비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죽일 듯이 성벽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장비의 눈에 활을 든 병사들이 보였다.
“흥! 고작 땅이나 파먹던 주제에 무슨 놈 활이냐! 놈들에게 궁병이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 주어라!”
장비의 우렁찬 포효에 쇠뇌를 든 병사들이 달려와 급히 화살을 쏘아 올렸다. 그러자 활에 맞은 이들이 속절없이 요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본 장비는 더욱 기세가 끓어오른 듯 사모를 휘두르며 명령을 내렸다.
“놈들은 무지렁이에 불과하다! 사다리 따위는 필요 없으니, 어서 충차를 가져와라!”
질퍽거리는 지형 탓에 충차를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았으나, 서슬 푸른 장비의 기세에 감히 제동을 걸 수는 없었다.
많은 병사가 힘겹게 충차를 이동시키며 죽어 나갔으나, 장비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충차가 요새의 나무문 앞에 이르렀다.
장비가 직접 당목을 움켜쥐고는 병사들을 다그치자, 몇몇 병사들이 황급히 달려들었다. 그렇게 몇 차례 충차가 두드리자, 요새의 나무문이 금세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기세가 오른 장비가 다시 한번 강하게 들이치자 더는 버티지 못한 나무문이 뒤로 넘어갔다.
장비는 곧장 사모를 챙겨 요새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은 마치 양 떼 사이로 뛰어든 호랑이와도 같았는데, 의외로 병사들은 겁먹지 않고 차분하게 진을 짜서 장비를 견제했다.
장비는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푸하하! 고순 따위에게 겁먹은 놈들이 감히 나에게 창을 들이밀어? 내 네놈들의 다리를 모조리 분지르고, 두 번 다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장비의 말은 험악하기 그지없었지만, 병사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더욱 열이 치솟은 장비는 사모를 늘어트리며 크게 소리쳤다.
“내가 바로 연인 장익덕이다! 누가 나를 막겠느냐!”
장비는 눈앞의 병사들을 쓰러트려 아군이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장비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 사모가 누군가에게 가로막힌 것이었다.
장비는 놀란 눈을 치뜨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네놈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이냐!”
두 개의 도끼를 교차시켜 사모를 막아 낸 고순은 아무 말도 없이 당황한 장비를 향해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주저 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그 빠른 움직임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장비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가까스로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다. 고순이 휘두른 도끼가 갑주만을 베고 지나간 것이었다.
겨우 봉변을 모면한 장비는 사모를 들어 올려 고순의 접근을 차단했다. 하지만 고순은 어느새 거리를 벌려 냉정하게 장비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고순의 곁으로 검은 갑주를 차려입은 병사 둘이 다가왔다.
결코, 징집병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에 장비는 새삼 긴장하며 말을 꺼냈다.
“이 모든 게 다 함정이었느냐?”
현재 자신의 부하들은 검은 갑주를 입은 이들에게 밀려 요새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징집병들 또한 나몽의 지시에 따라 나름 질서정연하게 방진을 갖춘 채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좋을 대로 생각해라.”
장비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고순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달려들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일단 빠져나간 뒤에 생각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