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21
221화
구덩이 속에서 농기구를 쥐고 있던 이들이 피리 소리가 들리자마자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광기 섞인 모습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당황한 병사들이 창을 들어 경계하였으나, 상대는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미 목숨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오로지 유비의 깃발이 세워진 곳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할 뿐이었다.
허름한 행색에 손에 쥔 것이라고는 조잡한 농기구뿐. 그 모습만 보자면 겁에 질려 도망치는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병사들은 잠시잠깐 넋을 놓고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유비는 달랐다. 광기에 휩싸여 달려드는 농민병들의 모습에서 과거 황건적을 떠올린 것이다.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려 앞으로 달려 나갈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지금 이들의 모습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순간, 유비가 있는 힘껏 외쳤다.
“막아라! 저들은 힘없는 무지렁이 농군이 아니다! 광기에 취한 미치광이일 뿐이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병사들은 농민병들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농민병들은 창에 찔려 죽어 가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죽음을 반기기라도 하듯 웃음마저 띠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병사들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만약 적의 손에 제대로 된 무기가 들려 있었더라면, 이처럼 쉽게 쓰러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한 법. 아무리 악을 써 봐도 일개 농민병이 제대로 된 병사를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농민병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쌓여 갔다.
농민병들의 괭이는 방패를 뚫지 못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복장은 창칼을 전혀 막아 내지 못하였다.
처음 광기와도 같은 기세에 당황하던 병사들은 이제 잔인한 학살자가 되어 농민병들을 잔인하게 도륙했다. 아니, 순간적으로나마 겁을 먹었다는 창피함에 오히려 더욱 자비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모두가 미쳐 가는 상황 속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행색은 여느 농민병과 별다른 바 없지만, 손에 쥔 무기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비록 조잡하기는 하나, 제대로 흉내라도 내려는 듯 도리깨와 단단해 보이는 나무 몽둥이를 든 이들이었다. 그들은 옆구리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지를 끼고 있었다.
이윽고 우두머리인 듯한 농민병이 앞으로 나서며 크게 소리 질렀다.
“창천이 무너지고 황천이 다시 들불처럼 일어나리니, 우리는 건초가 되어 이 한 몸 불사를 것이다! 황천이여, 일어나라! 장만성의 아들 장일이 황천신사(黃天神使)들과 함께 황천의 재림을 세상에 알리리라!”
장일의 외침과 동시에 농민병들의 기세가 일변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느낀 병사들이 장일을 향해 창을 내질렀으나, 옆에 있던 농민병이 몸을 날려 대신 창을 받아 냈다.
배가 관통된 상태에서도 광기 섞인 미소를 보인 농민병은 들고 있던 단지를 병사들에게 던졌다. 그와 동시에 다른 농민병들 역시 사방으로 달려나가며 단지를 내던졌다.
단지가 깨지는 것과 동시에 진득한 기름이 사방에 잔뜩 뿌려졌다. 온몸에 기름을 뒤집어쓴 병사들은 순간 상황을 깨닫고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만약 조금의 불씨라도 붙는다면 자신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란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병사는 더는 불에 타 죽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장일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의 목을 그대로 부러트려 버린 것이었다.
죽은 병사에게서 무기를 빼앗아 든 장일은 여전히 멍청히 서 있는 병사들을 베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 황천은 다시 일어난다! 황천의 신도들이여, 그 목숨을 살라 새 시대의 등불이 되어라!”
그의 외침과 동시에 농민병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몸에는 이미 기름을 먹인 짚이 달려 있었다. 이어 망루에 있던 방통이 지시를 내리자, 부곡들이 불화살을 날렸다.
일방적인 학살이 자행되던 전장은 이제 완전히 상황이 역전되었다. 온통 광기에 물든 농민병들은 제 살이 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비군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진형이나 장비 따위는 의미가 없어진 상황. 사방에서 불길이 타오르며 한 번 시작된 공포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갔다.
장일은 그 속에서 빼앗은 칼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방패병들이 겨우겨우 막아 내고는 있으나, 워낙 살벌한 장일의 기세에 쉽게 제압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 틈을 타 온몸에 불이 붙은 농민병들이 동귀어진의 각오로 달려들었다.
완전 엉망이 되어 버린 상황 속에서 유비는 검을 꾹 쥐며 분노를 터트렸다.
“황건의 잔당들이 아직 남아 있었단 말이더냐! 내 저 악도들을 모두 처단하리라!”
유비가 직접 말을 타고 나아가자, 그 뒤로 진도와 위연이 급히 따라붙었다.
* * *
한편, 군영을 돌파한 관우는 문빙과 조우했다. 문빙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미소를 지은 채 관우를 맞이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문빙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 뒤로 석궁을 든 일단의 병사들이 관우를 노리고 있었다.
대번에 상황을 파악한 관우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말 머리를 돌렸다.
그런 관우에게 문빙이 도발을 걸어왔다.
“관우여,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꼴이 우습구나. 그러고도 네가 장수라 할 수 있겠는가!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나!”
심한 모멸이 섞인 도발에 관우는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문빙을 한 번 바라보고는 그대로 말을 몰아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문빙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었다.
“젠장, 무슨 놈의 기세가 이렇게 무섭단 말인가.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하였구나.”
문빙의 말에 호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관우가 그대로 달려들었다면, 자신들은 꼼짝없이 죽었을 게 분명했다. 비록 석궁병들이 있다 하나 관우에게 치명상을 입히기에는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비로소 문빙은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관우가 돌아간 것인지.
‘나 또한 나름 무명을 쌓았다고 자부했거늘, 저자에게는 감히 상대할 엄두도 나지 않는구나. 그런데 대체 무슨 이유로…….’
그때, 한 병사가 급히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장군, 사방에서 불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순간, 문빙은 인상을 찌푸렸다. 겨우 목숨을 구했다 여기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난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짜증이 치민 탓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전장을 바라본 순간, 문빙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눈앞에 그야말로 한 편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저런 짓을 벌였는지는 묻지 않아도 빤했다.
‘미쳤군. 완전히 미쳐 돌아가고 있어.’
혼란에 빠진 유비군 병사들을 향해 달려드는 농민병들. 하지만 감히 그 앞을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온몸에 불이 붙은 농민병을 피하려 무기조차 내던진 채 도망치는 장면이 속출했다. 개중에는 온몸이 불타 도중에 쓰러지는 농민병도 있었다.
문빙이 황망한 시선으로 전장을 바라보는 와중에 방통이 부채를 부치면서 나타났다. 문빙은 방통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저 상황은 자네가 만들어 낸 것인가?”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저라도 저런 명령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건 대체 어찌 된 상황이란 말인가.”
“저는 그저 저들에게 선택지를 주었을 뿐입니다.”
말장난 같은 방통의 대답에 문빙은 인상을 찡그렸다. 선택지라 해 봐야 이미 답이 나와 있는 결정임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문빙은 여전히 사납게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방통에게 물었다.
“얼마나 타오르겠는가?”
“이틀 정도는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뒤에는 어찌할 텐가? 내가 직접 대면해 보니, 우리만으로는 절대 관우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 느꼈네.”
“정말 그렇습니까?”
“…….”
문빙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 반응으로 충분한지 방통도 더 묻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더 전장을 바라보던 문빙이 방통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다시 묻지. 저들을 어찌 설득하였는가?”
“그저 원하는 것을 주었을 뿐입니다.”
* * *
전투가 벌어지기 전, 방통은 농민들의 수장인 장일에게 잔을 건네며 빤히 바라보았다. 거칠게 술을 들이켠 장일은 노화가 묻어나는 어투로 말했다.
“지금 그 말은 우리더러 죽으라는 말 아니오.”
방통은 부정하지 않았다. 기실 장일의 말은 틀린 게 없었으니 말이다.
“맞네. 확실히 죽겠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쉽게 말하는 방통을 보며 장일은 주먹을 꾸욱 쥐었다. 당장에라도 방통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싶었으나 이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방덕의 조카에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조용히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이 다시 험난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런 일을 시킨단 말입니까?”
“어차피 자네는은 역당들 아닌가. 황건의 씨앗 말이야.”
“방 공자!”
장일은 뜨끔하여 소리를 쳤다. 그러나 방통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장만성의 아들, 장일. 그런 인물이 황건적의 잔당을 이끌고 형주에 숨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삼족이 몰살당하겠지요.”
“그러니 그런 굴레를 지워 버릴 공을 세우면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불이 붙을 섶을 들고 적진에 뛰어드는 것이란 말입니까?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유비에게 항복하는 것이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음입니다.”
그러나 그런 어설픈 협박은 방통에게 통하지 않았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유비의 군사가 내 친우라는 것을. 게다가 유비가 황건의 후예들을 그냥 내버려 둘 것으로 생각하는가?”
너무도 적나라한 사실에 장일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인의를 내세우는 유비가 황건에 대해서는 일체 자비가 없다는 사실을 그 역시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자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두 가지네. 그저 조악한 농기구를 들고 저들의 기병을 상대할 것인지, 그게 아니면 불이라도 지를 것인지 말이야.”
장일은 인상을 찌푸리며 방통에게 물었다.
“결국 한 가지 아닙니까?”
“그거야 자네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말을 마친 방통이 일어나려고 하자, 장일은 다급히 붙잡으며 물었다.
“무슨 선택을 하든 죽는 길인데, 어떻게 저들을 설득하라는 말입니까?”
방통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장일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자네들이 숭상하는 황건의 이름을 팔면 될 일 아닌가.”
“하지만…….”
“어차피 자네들 반수는 죽을 거야. 그러니 누가 항변하겠는가.”
너무도 냉정한 방통의 말에 장일은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을 귀족 놈들.’
결국 장일은 장만성이 꿈에 나와 계시를 내렸다며 농민들을 설득했고, 전투의 막바지에서 유비에게 머리가 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