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61
―똑. 똑.
“들어오게.”
“반갑습니다, 외무인민위원 동지.”
“앉게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텐데.”
결국 그렇다면, 자신들 뒤통수를 거나하게 갈긴 양반에게 돌아가는 수밖에.
‘진정한 비타협적 야당’, ‘대안적 세력’의 결말치고는 꽤나 초라하지만 이건 작전상 후퇴에 불과하다. 절대 대중 유세해 봤더니 결과가 시원찮게 나와서 이러는 게 아니다. 결코 치졸하게 1.5지대로 붙어먹으려는 게 아니다.
스피리도노바의 앞에 선 이들은 다소 민망하고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찻잔과 재떨이만을 내다본다. 막상 그의 앞에 섰지만 뭘 어떻게 할지 몰라 가만히 앉아만 있는다.
결국 그들을 한참이나 기다리던 스피리도노바 쪽에서 먼저 한숨과 함께 입을 연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요구 사항은 별다른 게 없는 것으로 생각하겠네. 결국 힘을 잃은 자들은 떠돌이 개처럼 사방을 쏘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 잘 알겠네.”
그러나 그 한숨은 안도의 한숨이다. 자신의 계획이 이뤄졌다는 듯, 승리가 가까워왔다는 듯 기쁨이 섞인 숨소리에 다들 고개를 든다. 그의 미소 속에 어떤 계략이 숨어 있는지 뜯어보려고 하지만 아직은 알 수 있는 게 없다.
스피리도노바는 설탕을 잔뜩 넣고 찻잔을 저어 내용물을 식힌다.
“우리가 새로 배를 건조한다네. 무장상선이지. 아마 지금껏 건조한 함선들 중 가장 거대할 걸세.”
뜬금없는 이야기에, 스코틀랜드계 위스키 장인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를 바라본다. 그런 그들의 반응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서 스피리도노바는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다가 삼킨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딱 한 가지밖에 없다네.
자네들, 뱃멀미하나?”
앞으로 아주 멀리 출장 떠날 일이 있을 텐데.
그 많던 사회주의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4)
―“소련 내 첫 정당 ‘사회민주노동당’ 탄생! 그들의 강령과 정책 제안은?”
―“트로츠키 ‘머저리들이 잡다하게 모여 봤자 잡다한 머저리 말고 더 되나. 멘셰비키처럼 부숴 주겠다.’ 발언 파문.”
―“제3지대, 신생 사회혁명당과의 연대 천명.”
인구가 30만 명 정도 되는 나라에서 하루에만 정당이 스무 개씩은 창설되고 다시 해체된다. 창당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니 담당 공무원들은 과로에 시달려 드러눕기 시작한다.
“의료인 여러분! 노먼 베순 동지가 창당한 세계보건연대에 입당하시오!”
“우리 프랑스계가 핫바지입니까? 우리가 의용군 중 수가 가장 많은데 어떻게 이리 무시만 당한답니까? 여러분, 우리 장 조레스 연맹으로 오십시오!”
“여러분! 우리 국가사회주의원산노동자당에 가입하시어… 다, 당신들 누구야! 읍, 으읍, 원산 생활권 만세!”
정당별 깃발이니, 배지니, 완장이니 하는 것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원산의 거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이번 제3 제지 노동자 소비에트에서 이번 분기 4번째 대표 소환이 있겠습니다.”
“사회혁명당 출신 대표는 우리 제지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전혀 대변하지 못하고 있소! 지금 당장 블로크 동지에 대한 해임안을 발의하는 바요!”
“이의 있소! 당신들은 그저 블로크 동지의 민족주의에 대한 의견이 불만인 것 아니오? 제지 노동자의 이해관계와 그게 무슨 상관이오!”
“상관이 있을 수밖에! 제지 노동자 중 4할이 프랑스인이니까!”
“나도 프랑스인이지만 납득할 수 없소!”
갑작스레 이뤄지는 조직적 움직임들로 인해 원산의 정계 역시 한 치도 예측하기 어려운 수렁으로 빠져든다.
예산 심의를 위해 소비에트 대회가 열릴 때마다, 각 소비에트에서 대표로 오는 인사들의 면면이 뒤바뀌어 있다. 그들의 가슴에 달린 배지나 팔찌나 완장 역시 바뀐다.
허나 의문스럽게도, 이 모든 혼란 속에서 가장 중요한 키 플레이어가 오직 침묵만을 지키고 있으니.
“트로츠키 동지? 현재의 상황에 대한 소감은 어떠십니까? 예산안이 지금 다섯 번째로 부결되었는데요?”
“아무 소감 없소.”
“현재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동지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여 가는 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창당에 대한 생각은….”
“아무 생각 없으니 나가시오.”
“트로츠키 동지? 한 말씀만 더….”
“지금 의장 동지께선 집무 중이십니다. 인터뷰는 다음에 다시 일정을 잡고 오십시오.”
그렇게 닫힌 집무실의 문은 다시 열리지 않고, 언론들 사이에서는 이 침묵에 대한 설왕설래만 오간다.
* * *
“재밌군.”
스피리도노바는 ‘정당의 난립, 정권의 무대응’이란 헤드라인을 달아 놓은 오늘 자 ‘원산의 소리’를 내려놓는다. 고개를 들어 보니 두 눈을 반짝이는 사회혁명당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고지가 머지않았으니 명령만 내려 달라는 듯 열정에 찬 얼굴들.
“캄코프 동지, 현재 당원 수는?”
“약 7천 명 정도 됩니다. 얼마 안 있어 1만을 넘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라쇼(Хорошо). 앞으로 지금 양조장에서 ‘제3지대’에 가입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놈들은?”
“손봐 주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사회민주노동당은 양조업계에서 모조리 퇴출당할 겁니다!”
“훌륭하오.”
스피리도노바가 박수를 치자 블레어나 다른 사회혁명당원들도 따라서 손뼉을 부딪힌다.
“무장상선의 발주 소식은?”
“거의 준비를 끝마쳐 가고 있다 합니다! 얼마 안 있으면 선원들을 구해 출항할 수 있을 듯합니다!”
“기억하시오. 항속 거리는 반드시 1만 킬로미터를 넘어야 하오.”
“물론입니다!”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어 간다.
가장 중요하게는 양조업계를 장악하고, 그 외에 금속, 화학, 농업 분야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손을 뻗쳐 나간다. 그중 다른 분야보다도 충성파를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업계가 바로,
“당 대표 동지, 늦어서 죄송합니다!”
“유자광 동지.”
피혁업계.
“늦어도 괜찮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여기, 제 자리에 앉으십시오!”
“걱정하지 마시오, 유 동지. 보시다시피 모두들 동지의 보고를 기대하고 있으니. 입당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소? 물론 그렇겠지. 피혁 산업은 그대 모자가 일으켜 세우다시피 했으니.”
여기 모인 사람들, 볼셰비키가 감방에 집어넣고 묵혀 둔 세월을 다 합치면 100년에서 200년이 넘는다.
심지어 병원에 ‘요양 목적으로’ 갇힌 누구, 제3국으로 망명한 누구들의 인생까지 합치면 그 기간은 더 길어지리라.
그러니 한 번이라도 트로츠키를 꺾어 본다는 생각들에 얼마나 희희낙락하겠나?
정권 장악의 마스터플랜에서 유자광이 스피리도노바와 사회혁명당에 왕관을 씌워 주고 최금옥이 이끄는 피혁 노동자들이 그를 축성해 주리라!
양조업계로 자금줄을 쥐고, 계속 수요가 늘어 가는 피혁업계로 동원력을 확대한다면 트로츠키 따위야….
“어, 어법법… 업….”
“…잘 진행되고 있는 것 맞소?”
“죄송합니다. 어머니가 탈당하셨습니다.”
“…음?”
“새로 창당하시고 독자 노선 걸으신답니다.”
스피리도노바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드디어 볼셰비키 한번 이겨 보겠다며 싱글벙글하던 당원들의 얼굴이 굳는다.
이쯤이야, 이제 원산의 정치적 혼란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이 기묘한 상황은 원산이라는 찻잔 속에서의 폭풍으로 끝나지 않았다.
“원산의 소식 들었나? 지금 붕당들이 난립하고 제신들이 이합집산하니 나라가 기울어 간다고 하지 않나?”
“내가 듣기로는 조금 상황이 다르네. 도리어 트로츠키 동지께서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 공화의 뜻을 바로 펼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맞네! 아조 또한 건국 이래 학문을 높여 왔으며, 과학을 드높인 지 또한 20년 가까이 되니 이제 공론을 세울 때가 되지 않겠는가? 조선이 어디 원산보다 모자란 것이 있어 뒤처지겠나?”
이미 경원선이 지어지고 사방으로 수운이 연결된 데다 웬만한 원산의 정치, 학술 출판물들은 빠르게 조선 곳곳의 향민계와 소비에트, 민련으로 유통되어 책장에 꽂히고 있는 실정이니.
원산의 혼란상은 빠르게 퍼져 나가 선비들의 시회에, 농군들 끽다(喫茶) 시간에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한다.
―“본래 바라옵건대 상께서는 부디 정당으로서 언로(言路)를 여시어 하정(下情)이 통달케 하소서.”
―“아니 되옵니다. 어찌 이 밝은 시절에 조신들이 붕당을 교결(交結)하여 서로 무리 짓고 망상(罔上)하도록 가만둘 수 있겠습니까?”
―“토크빌(Tocqueville)이 논설한즉, 자유스러움이란 시민들의 불화와 격랑 속에서 이루어지옵니다. 어찌 변증법적 과학에 닿는 길이 한 무리에만 열려 있겠습니까? 편벽된 사언들을 물리치시고 부디 정당 열기를 허하소서.”
―“근래 원산에서 붕비(朋比)의 폐단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혼탁한 이단들이 감히 제 흉한 속을 떳떳한 정견인 양 밝히고 정사(正邪)의 구분을 어지럽히니 이는 실로 군자로서 취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청컨대 정당 짓기를 금하시고 인주(人主)와 정학의 위엄을 세우소서.”
“…정당이라.”
이홍위의 앞에 주르르 널린 상소문들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말이다.
정당. 이홍위는 그 단어를 잠시 입속으로 굴려 보다 옆자리에 앉은 윤순비를 바라본다.
“중전은 어찌 생각하시오?”
“소첩은 아직 지식이 얕아 정견을 낼 만하지 못하지만, 붕당을 금지하는 것이 옳지 아니한가 생각합니다.
조정에 붕당이 많으면 국정에 잡음이 많고 사익을 취하는 설설(屑屑)한 무리가 날뛰지 않겠습니까?
옛 레닌이 분파주의를 배격하고 율문(律文,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률을 뜻함)의 간당조(奸黨條)에서 ’조정에 있는 관원이 붕당을 맺어 조정을 문란시키는 자는 참(斬)하라.’ 한 바는 다 이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소? 흠….”
“왜 그러십니까?”
뭔가 탐탁찮아 보이는 주상의 표정에 중전이 되묻는다.
“하하, 중전이 확실히 지식이 얕기는 하구려.
…아니, 그, 미안하오. 화내지 말고 끝까지 들어 보시오. 나 또한 뒤늦게 트로츠키 동지에게 들어 알게 된 것이니.“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날카로워지는 윤순비의 앞에서 일국의 인군이 급히 허둥댄다. 그러고 보니 지난 쥐약 제조 실험에서 쓰고 남은 비상이 중전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뇌리에 떠오른다.
이홍위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때가 한… 10년은 되었나? 어쩌면 더 되었나? 잘 모르겠지만….”
* * *
정확히 몇 년이었는지, 그가 몇 살 때였는지는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다.
“트로츠키 의장.”
“네, 전하.”
“방금 부분에 대해 다시 설명해 줄 수 있겠소? 사회민주노동당의 분열 건에 대해서 말이오.”
“알겠습니다.”
그저 자신이 경복궁으로 환궁한 이후였다는 것, 트로츠키가 자신을 퍽 다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시절이었다는 것 외에 자세한 기억은 없다.
때는 그리 늦지 않았으나, 겨울이라 해가 벌써 산의 어깨에 기대어 미끄러져 가던 저녁 시간.
“러시아 최초의 과학적 사회주의 정당이던 사회민주노동당은, 두 번째로 열린 전당 대회 이후 두 파벌로 분열됩니다.”
트로츠키의 조금 까탈스럽고 웅변조의 화려한 억양이 섞인 조선어가, 어느덧 세월에 젖어 누그러지고 인자한 관록과 함께 발성된다.
“여기서 레닌은 당파를 지어 이름을 ‘다수파’라는 뜻의 ‘볼셰비키’라 합니다. 당 중앙 위원회에서 다수를 점했다는 사실을 선전하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이 볼셰비키가 이후 러시아 공산당이 되고, 소련의 공산당이 되어 소련을 다스리게 됩니다.”
“흐음….”
아직 어린 이홍위가 고개를 기울이자 트로츠키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되묻는다.
“뭔가 걸리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사실 전부 그렇구려.”
“’전부’라 하심은?”
트로츠키가 채근하니 이홍위로서도 궁금한 점을 술술 풀어낸다.
“혁명 이후에 제헌 의회를 폐하고 권력을 소비에트로 돌리잖소? 그 뒤로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를 통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맞소?”
“맞습니다.”
“헌데 어째서 혁명을 하고도 사회혁명당과 다른 붕당들을 남겨 둔다는 말이오? 그리하면 조정이 나라에 온전히 헌신토록 하지 못하게 되지 않소?”
“분파주의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 말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뿐이 아니오. 의회를 소집할 때 의원들이 제각기 붕당을 지어 모이는 것이며, 그를 국가에서 공인하고 인정하며 나랏돈까지 떼어 준다는 것이 전부 이해가 되지를 않소. 대체 왜 그리하는 것이오?”
“그건… 역시 허를 찌르는 질문입니다.”
트로츠키가 미소를 지으니 순간 옆에 있던 신숙주의 눈에 질린다는 표정이 스친다. 수하들은 악귀처럼 갈군다지만 이홍위에게는 언제나 인자한 스승이다.
“전하께서 그리 이야기하시는 이유를 알 듯합니다. 제가 유교 경전을 읽어 보니 소위 ‘붕당’의 폐해를 지적하는 바가 많덥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전제 군주가 서 있고, 그 아래로 조정의 신하들과 백성이 있는 사회에서 붕당이란 곧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신하들끼리 편을 짓고 세력을 모은다? 궁극적으로는 반대 당파의 압도와 정권 장악을 노린다?
“그냥 반역이 아닙니까? 엄연히 주군이 존재하는 이들이 권력을 얻으려 서로 연합한다니? 권력 탈취를 목적으로 한 관료들의 사조직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붕당이 세지면 군왕의 힘은 그에 반비례하여 추락하고, 붕당 간 다툼이 커지면 국정은 마비됩니다.
이 아시아 사회에서 붕당이 엄격히 금지된 바는, 적어도 표면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 바는 모두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다르게 작동하는 붕당이 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국왕의 전제성과 그를 통한 사회 안정을 꾀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전의 경연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법한 발언들이 나오자 신료들은 잠시 기침을 하나, 정작 당사자인 주상이 트로츠키의 발언을 되새기고 있으니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마치 이 자리에 오직 이홍위와 트로츠키 두 사람만이 있는 듯, 서로의 말에 집중한다.
하나의 압도적인 권력 아래의 평화가 아니라 다수의 합의와 연정 속에서 굴러가는 체제….
그렇다면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 그 뜻을 모아야만 정치가 굴러갈 수 있으리라.
“민주 공화정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오? 듣기로는 귀족들 간의 공화정에도 들어맞을 듯하다만.”
“정확합니다.”
이홍위의 말에 트로츠키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진도를 잘 따라오는 학생의 모습에 약간의 쾌감을 느끼는 듯하다.
“그런 사회에서 일개 시민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정치에 반영되겠습니까? 어떻게 일관성을 지닌 국정 운영이 가능해지고 인민들의, 적어도 참정권자들의 의도대로 국가가 움직이겠습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정치적 견해를 모으고 정리할 조직이 필요하다.
이 조직들이 국가 기관 내에서만이 아니라 그 바깥의 대중들까지 포섭하여 이들이 정치에 관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반대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당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
대중을 설득하고 결집시킴으로써 작동하는 정치에서, 정당은 그런 역할을 한다.
“소련 공산당은 인민을 조직하고, 인민을 계몽하며, 노동 인민을 위한 세계관을 제공하는 조직이었습니다.”
트로츠키는 잠시 자부심을 담아 말한다. 본래 멘셰비키 출신이었으니 볼셰비키의 성립까지는 약간 회의적인 말투였으나, 자신의 활약상이 결부되는 시점부터 목소리에 자신감이 붙는다.
“인민의 의지를 반영하고, 또 한편으로는 인민의 의지를 특정한 방향으로 조직합니다. 자신의 이념을 사회에 보편적으로 적용시키려 애씁니다.”
정당이란 그런 것이다.
국가 기관은 아니나 국가와 인민을 연결하는 조직. 근대의 도래와 함께 분리된 국가와 시민사회를, 둘 사이에서 매개하고 연결하는 결사체.
이홍위는 트로츠키와의 대화에서 이런저런 지식을 길어 낸다. 자신이 이후 읽고 배운 바와 함께 엮어 가며 지식의 지도를 그려 나간다.
주상은 중전에게 말한다.
“중전도 한번 살펴보지 않겠소? …여기를 보면 지지자들은 한결같이 정당(政黨)을 말하고, 반대자들은 모두 붕당(朋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소. 중전이 그러하였듯 모두가 20년 전의 조선을 생각하며 붕당에 반대하는 것이오.“
이홍위는 고개를 내젓는다.
“시류를 잘못 읽은 것이지. 비록 작금에 정당 제도에 반대하는 상소가 더욱 많으나 이는 한낱 발악에 불과하오. 정당의 성립에 대한 상소가 이미 빗발치니 나는 그를 막을 수 없소.“
“그렇다면….”
“정당을 허할 것이오. 나는 결단을 내렸으니 이는 다시 뒤집히지 않소.”
이홍위는 내일의 어전 회의를 상상한다. 신숙주는 기대하고, 박팽년이 흥분하며, 김종직은 골머리를 썩이는 그 상황.
바로 내일부터 펼쳐질 급격한 변화들.
“이번 정당 제도 도입이 동아시아적 제제도와 어떻게 접합될지 기대되지 않소?”
한밤중 부부가 단둘이 있을 때 꺼내기엔 그닥 로맨틱하지 못한 대사.
“맞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현상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저는 특히 향민계의 성질 전환이 기대되오니….”
물론 윤순비에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 듯싶다.
“이 문제에 관하여 써 놓은 논문 초록이 있소. 내 그대를 공저자로 올릴 터이니 부디 검수해 주지 않겠소?”
“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