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Mine RAW novel - Chapter 82
82화
‘속이 다 후련하네!’
염호는 청풍각 안에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앉아서 공력 운기에 여념이 없는 진무와 장로들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봤다.
기어이 다 늙어 오늘내일 하는 장로들의 임독양맥을 모조리 뚫어버린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전 무림이 발칵 뒤집어지고도 남을 경악스러운 사건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반로환동할 걸!’
사실 염호 자신도 이런 일이 가능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수십 년 전 환골탈태를 겪으며 노쇠해진 뼈와 근육이 강해지고 공력을 되찾는 단계를 넘어 추측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을 때만 해도 굳이 피부가 윤택해지고 머리카락이 검어져 젊어지는 반로환동(反老還童)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젊어져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머리카락이 검어지고 주름진 피부가 펴진다고 해서 마음이 젊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육체가 젊어진다고 해서 인생의 말년에 다다른 정신마저 지난 세월을 부정하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반로환동을 겪는 순간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반로환동이 그저 육체만 젊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천살마공의 근본인 마기를 지울 줄이야!’
그랬다.
반로환동을 받아들이는 순간 가장 이상적인 육체의 재구성뿐만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쳐진 내공의 성질도 태초의 근본이랄 수 있는 선천지기로 모조리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극단적으로 패도적인 자신의 마기를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화산파 현오궁 안에서 눈이 빠지고 손이 닳도록 달달 외운 화산파 비전 무학들을 아무런 문제없이 펼칠 수 있게 됐다.
선천지기란 것은 모든 기운의 근본이다.
정종내공이니, 좌도방문의 사공이니 하는 것도 모두 갈래에 불과하고 이는 마공이나 독공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천인합일의 경지마저 초월한 장대하고 드넓은 내공을 지녔으니, 그동안 달달 외운 화산파의 내공 운기법을 한 번 쓰윽 돌려보는 것만으로 완벽히 터득해 버렸다.
그 당시 신바람이 난 염호는 앉은 자리에서 자하신공을 시작으로 화산파의 모든 내공비결을 단숨에 모조리 완성해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연히 그 장면을 홀로 목격하고 있던 야도는 넋이 나갈 정도로 경악하고 말았다.
그는 검신이 일부러 자신 앞에서 무력시위를 한다고 오해했다.
생각해 보라. 눈앞에서 반로환동을 하고, 또 눈앞에서 화산파의 온갖 기공들을 단숨에 끝까지 끌어 올리는 염호의 모습과 그걸 멍 때리며 치켜봐야 했던 야도를.
‘흐흐! 이제는 나도 내공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안 간단 말이지…….’
염호는 진무와 장로들이 새로워진 기운을 수습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임을 알고 홀로 청풍각 밖으로 나왔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조그만 마당에는 일대제자 왕직과 볼모로 잡힌 연산홍과 서귀, 그리고 야도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염호의 시선이 폐립을 눌러쓰고 있는 야도에게로 향했다.
‘사실 저놈이 아니었으면 반로환동을 할 일도 없었을 테니 따지고 보면 다 저놈 덕이군.’
백마첨봉에서 야도와 모든 것을 마무리 지으려던 그때.
여양종을 격살하고 남도련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한을 푼 뒤에 애초 염세악이란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우려 마음먹었다.
자신이 곧 불행의 씨앗이라는 자책감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장평의 한을 풀고 화근인 남도련을 지웠지만 그것이 끝일 수가 없었다.
차후에 있을 모든 위협과 그 후에 화산파가 감당해야 할 여파까지 모두 무효로 돌리려면 염세악, 즉 검신 한호라는 존재는 반드시 사라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점의 의구심 없는 다수가 보는 곳에서 확실하게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로 죽을 생각은 없었다.
‘죽긴 내가 왜 죽어? 죽은 것으로 하면 그만이지.’
그래서 화려한 죽음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이 강남무림의 지존이자 무림제일도라는 야도였다.
그 정도 상대면 검신의 죽음을 수긍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검신과 야도의 대결이니만큼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의미도 있기에 둘 다 사라지면 화산파와 남도련 간에 은원이니 뭐니 해서 더 이상 왈가왈부할 일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야도와 조우한 염호는 뜻밖의 사실을 알고 난 뒤 더욱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염호는 그때를 다시 생각해도 저절로 실실 웃음이 새 나왔다.
그만큼 절묘했기 때문이다.
***
“가르쳐 줘? 도의 끝이라는 ‘지천’ 말이다.”
“…….”
“너의 그 미완성인 파천십이도결의 정수 중의 정수인 후삼식의 구결도 내가 알지.”
“……!”
야도는 충격에 빠져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모든 것을 올곧이 믿을 정도로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사연이야 어찌 됐든, 아무리 막역한 친구지간이더라도 자신의 비기를 핵심 구결까지 나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무림은 그렇게 낭만적인 곳이 아니었다. 그것이 설사 백 년 전의 세상이라 하더라도.
게다가 파천십이도결의 전 주인은 도마(刀魔)라고 불렸다지 않은가.
그가 만일 정파무림 출신인 자였다면 별호에 ‘魔’라는 글자가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
하물며 친구지간이었다고 자처하는 자가 화산파의 검신이라면 누구라도 믿지 않을 이야기다. 무림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화산파의 검신과 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패도지학의 도객이 서로의 무공 구결을 나눌 정도로 깊은 사이였다고?
야도의 눈빛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물들어 갈 즈음,
“탈혼출천 등봉파황(奪魂出天, 登峰破荒).”
“……!”
“이게 굉천파황의 구결 중 첫머리지?”
의심의 빛을 띠던 야도의 안색이 싹 변했다. 검신이 정확히 구결을 읊었기 때문이다.
또한 도법의 요결을 아는 이는 세상에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굉천파황과 함께 연환이도인 성라개옥의 요결 첫 구절은 심화련금 환우탈심(心火練金, 寰宇脫心)이란 글귀로 시작한다.”
야도로서는 귓등으로 흘리고 싶어도 흘릴 수가 없는 유혹의 속삼임이었다.
“후삼식뿐만 아니라 성라개옥도 모르지?”
폐립을 벗어던진 지 오래인 야도의 강인한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물론 공짜는 없다. 뭔가 대가 없이 이뤄지면 주는 쪽도 받는 쪽도 찝찝하잖아. 안 그래?”
그때 처음으로 야도의 입이 열렸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짧은 물음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기서 니가 아는 가장 화려하고 허세가 가득한 공격으로 내게 덤비면 된다.”
“……?”
“물론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그리곤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지금부터 삼 년. 딱 그 세월만 두말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따라라. 그 정도 시간이면 미완의 파천십이도결을 완성하고 지천도 얻을 수 있을 게야.”
“일 년이면 충분하오.”
그리고 벌어진 대결.
야도는 기대 이상으로 부응했다.
정작 문제는 너무 과할 정도로 기대 이상이었다는 것.
우르르르르릉! 쿠콰콰콰콰콰쾅!
“헉? 야 이놈아! 화려한 건 맞지만 허세로 하랬잖아! 허세! 허세가 뭔지 몰라?”
“내가 익힌 것은 모두 일격필살의 도법이오.”
“그럼 하는 척만 해!”
“나는 그런 건 모르오!”
“아니,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으헉? 너, 너 이놈의 자식? 방금 그거 진짜 내 목 노린 거지? 그렇지?”
확실히 야도는 달랐다.
여양종도 함께 묶어서 천하십강으로 불린다는 소릴 들었지만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장담하건데 둘의 실력을 놓고 비교하자면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보다 그 간극이 클 것이다.
첫째로는 녀석의 재주가 뛰어남이고 둘째로는 역시나 파천십이도결이 아닐까 싶었다.
근 백 년 만에 다시 보게 된 도마의 절기였지만 확실히 기억 속의 무서운 도법임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가볍게 허세만 부리려던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몸의 모든 혈도를 개방했다.
이제껏 탈태환골한 이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혈도의 태반을 봉한 상태에서도 부족한 적이 없었고, 여양종을 때려 죽였을 당시가 내공을 가장 많이 끌어올리긴 했지만 그때도 혈도를 개방하진 않았었다.
그런데 혈도를 다 열고 제대로 된 내공을 뽑아 올리자 몸에 이상한 반응이 왔다.
오래전 환골탈태 당시 강제로 거부했던 반로환동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 이런! 그만! 그만해! 이놈아! 지금 다른 게 급해! 그만하라니까!”
모든 기운을 개방하자 수 십 년 동안 억눌려 있던 반로환동의 기운이 노도처럼 일어났다.
일이 급해지자 야도의 공격을 무시하고 그대로 녀석의 멱살을 잡아 천공으로 솟구쳤다.
“이제, 그만 사라지자!”
순간,
펄- 럭!
“……!”
야도가 까마득히 아래 지상을 내려다봤다.
너울너울 떨어져 내리는 매화문양의 새하얀 득라의.
다시 고개를 들어 속곳만으로 중요한 부위를 가린 해괴 흉측한 몰골을 쳐다봤다.
“옷이 남아야 완벽한 죽음이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린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독심술을 쓰는지 바로 의문을 해결해줬다.
“내가 도사 아니냐? 우화등선 알지?”
그게 갑자기 옷을 홀라당 벗는 짓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원래 도사들이 죽을 때 옷만 남기고 가는 거야. 나 정도 되면 우화등선은 해야지.”
“……!”
야도는 처음으로 그가 정말 신화적 존재인 그 검신이 맞는 지 의심스러워졌다.
***
여양종과 그 무리에 의해 무너져 내린 화산파 산문.
두 달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산문은 당시 처참히 부서진 상태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화산파로 향하는 산문 앞에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먼지가 잔뜩 묻은 검은 도포에 허리에는 삼베 천을 질끈 동여맨 행렬.
‘화산이 왜 화산인가’라는 커다란 깨우침과 화산의 무혼을 일깨우며 하산한 일대제자, 매화검수들이었다.
산문 앞에 도달한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진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득한 눈으로 무너진 산문을 쳐다봤다.
선두에서 첫째인 송자건을 내내 보좌해 온 반운산이 말했다.
“산문은 아이들을 시키지 말고 우리가 직접 다시 세웁시다.”
그 말에 사형제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흔들림 없는 버팀목이었던 맏이 송자건이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왔습니다, 태사조님.”
“…….”
모두의 시선이 송자건의 가슴 높이로 올린 두 팔을 응시했다.
공손히 모은 양손에 들려 있는 새하얀 득라의.
야도와 벌인 공전절후의 대혈투.
대별산 백마첨봉이 사라지는 무서운 대접전이 끝나고 나서 그들이 달려갔을 때, 발견한 것은 검신 태사조가 입고 있던 득라의뿐이었다.
“태사조께선 마지막 가시는 길도 전설을 보여주시며 가셨구나.”
“그분께선 마지막까지 저희에게 가르침을 주신 것이지요. 도를 놓지 않으면 우화등선하여 선계에 갈 수 있음을.”
송자건과 반운산의 대화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신 태사조의 마지막은 영원히 잊지 못할 장엄하고도 숙연했다.
그 숭고한 희생과 장렬한 산화 앞에서 서로 얼싸안고 대성통곡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태사조께선 영원히 우리들 가슴에 살아 계신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슬픈 기색을 지워내지는 못했을지언정 한결 강하고 성숙해진 눈빛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았다.
그리고 힘찬 발걸음으로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