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04
204화
턱!
진무가 언제 울고 있었냐는 듯이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와 자소단을 낚아채는 태허의 손을 움켜쥐었다.
“장문인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아니 그…….”
양의심공을 얻은 진무의 모습에 자소단을 챙기려 했던 태허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이보게 무당지검. 내 아무리 생각해도 자소단은 좀 과했던 것 같으니. 다른 것을…….”
태허가 헛웃음으로 때워 보지만 진무는 옥갑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을 주었다.
“장문인, 일수불퇴입니다.”
도사니까 투전을 해 본 경험이 없겠지만 이건 만고의 진리다.
전문 용어로 낙장불입(落張不入)이라고.
“아니, 이보게 농이 좀…….”
“농담 같으십니까?”
“응? 이, 이보게 자네?”
태허는 물론 화산의 장로들과 명진까지 당황한 표정이다.
“양의심공이 불타 버렸구요.”
“…….”
“무당의 존경을 한몸에 받아 오신, 위대한 청무 조사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그것을 말입니다.”
그런 적 없다.
청무를 아는 자는 소수에 불과하니 존경 따위 받아 봤을 리가.
“아, 그, 그건…….”
“그래요. 남의 물건이니 소홀히 하실 수도 있지요.”
“이, 이보게.”
“참으로 아쉽습니다. 화산이 무당을 그리 생각하는지는 몰랐습니다.”
“…….”
“남의 진산기보를 불태워 먹으시고 겨우 수십 년 정도 되는 아주! 짧은 세월에 연성할 수 있는 자소단을 아까워하실 줄이야.”
씁쓸하게 웃는 진무의 말에 태허와 화산 장로들의 얼굴이 누렇게 뜨기 시작했다.
“아니, 그거랑은 좀. 무당이 맡아 달라 하여…….”
“예. 그랬지요. 맡아 달라는 것을 부주의하게 홀랑 태워 먹으셨지요. 무당의 역사와 함께해 온 그 귀한 진산기보를. 무당을 대표하는 양의심공을 말이지요. 하긴, 괜찮습니다. 원래 화산의 물건도 아닌데. 그럴 수도 있지요.”
진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고, 태허와 화산 장로들은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낯빛이 시커멓게 변해 갔다.
“지, 진무야?”
명진마저 당황하여 진무를 말리려 했지만.
이젠 늦었다.
도동의 기억에 구애받지 않는 이상 스승이 무슨 말을 해도 물러날 필요가 없다.
내가 혓바닥으로 제갈분가의 가주를 이긴 몸이란 말이지.
고작 화산의 도사 놈들 따위야.
진무의 집요한 거미줄에 걸린 태허와 화산 장로들은 외통수를 벗어날 방법을 고민하느라 우물쭈물 대답도 못 하고 있다.
“이봐. 운암.”
갑자기 진무가 운암을 쳐다본다.
“예?”
“혹시 말이야. 곤륜에서도 그러나?”
대답하기가 난감한 운암이 머뭇대자 진무가 웃으며 술을 건네며 말했다.
“남의 것을 맡아 두었다가 아무 곳에나 놔둔다든지? 막 태워 먹고, 태워 먹는다든지…… 태워 먹으려 한다든지……. 불쏘시개도 아니고 말이지.”
“아닙니다. 그런 일은…….”
“그래.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지. 어떤 파렴치한 놈들이 남의 물건을 함부로 관리한단 말이야. 아마 마교 같은 악질적인 놈들도 그러진 않을걸?”
“……그, 그게…….”
졸지에 대답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게 되어 버린 운암이 태허 등의 눈치를 살핀다.
어찌 그것이 화산을 빗대어 하는 말인지 모를까?
태허의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만 봐도 알 것 같았고, 진무는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고소하게 느껴졌다.
“그…….”
“예?”
“그게…….”
“뭐가요?”
이어 가지 못한 태허의 말에 진무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쳐다본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태허가 결국 옥갑을 슬쩍 밀었다.
“바, 받게. 내 주려고 했네. 암, 자네 앞으로 밀어 주려고 한 게지.”
스윽.
거짓말은.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리고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이면서.
“감사합니다. 장문인! 좋은 곳에 쓰겠습니다.”
“…….”
진무가 날름 받아 챙겨 품속 깊숙이 집어넣었다.
진무의 웃음에 화산 장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 외의 내색은 하지 못했다.
아마도 남의 물건을 불태워 먹고 오리발이나 내미는 파렴치한이 될 순 없으리라.
더욱이 화산이 마교 같은 놈들이라고 돌려 까며 소문내라고 곤륜의 제자 운암까지 거론했으니 아니 줄 수가 없겠지.
진무가 공손하게 일어나 절을 올리자 태허가 못마땅한 표정임에도 어색하게 웃는다.
“어, 허허허. 그, 그래. 다 우리 중원 도문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 야, 약, 약, 약소한 화, 화산의…… 마음……일세.”
어찌나 아까워하는지.
어쨌거나 수십 년에 불과한 아주 짧은(?) 연성 기간을 거쳐 만들어진 자소단을 얻게 되었다.
“제가 한잔 드리겠습니다.”
일어나 절을 올렸던 진무가 얼굴 가득히 웃음을 머금고 술병을 들자 태허와 화산 장로들이 얼굴에 씰룩거림을 감추지 못하고 잔을 받았다.
벌컥거리며 단번에 비워 버리는 모습이…….
어째 화산 수뇌들이 오늘 과음을 심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 울 듯한 저 표정이란.
* * *
술자리가 파하고 얼근하게 취해 버린 명진을 부축한 진무가 금룡협으로 돌아왔다.
폭포 근처인지 밤바람이 무척이나 차게 느껴졌다.
“스승님. 들어가시죠. 한기 듭니다.”
“떽! 이놈.”
“…….”
“괜찮다, 괜찮아. 허허.”
크게 심호흡을 하며 웃는 명진이 진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한참이나 어린 놈이…….
하지만 오늘은 봐주마.
양의심공에 자소단에.
“진무야.”
“예?”
“이제 어디로 갈 참이냐?”
“……그게 무슨.”
“예끼, 이놈.”
“…….”
진무의 대답에 명진이 짓궂은 표정으로 나무랐다.
비틀.
잠시 팔에 힘이 빠져 버렸기 때문인지 과하게 취한 명진이 비틀거렸다.
“스승님!”
서둘러 부축하려는 진무의 손을 뿌리친 명진이 술기운을 떨치려는 듯이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잘 몸을 가누지 못했다.
“스승님.”
“허허, 무인이라는 자가 취기 하나 가누질 못하다니.”
“많이 드셨습니다.”
“그래, 안다. 많이 먹었지. 너무도 감격하고 기분이 좋아 내 과음을 하였지.”
“몸도 온전치 않은데 과하십니다. 이러다 또 쓰러지실까…….”
“쯧쯧. 독하지 못한 녀석. 어찌 이 못난 스승 걱정을 그리도 하는 게냐.”
“…….”
내가?
진무가 벙찐 표정으로 쳐다보자 명진이 환하게 웃는다.
“저리 가자. 좀 앉아야겠구나.”
“예.”
명진을 부축한 진무는 작은 바위로 데려가 그를 앉혔다.
진허와 운암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진무야.”
“예.”
“네가 표주를 나가려 했던 것이 양의심공 때문임을 안다.”
“그게…….”
“변명치 아니하여도 되느니.”
“죄송합니다.”
“죄송은. 이 스승이 부덕하여 네 마음을 알지 못하였던 게지.”
“스승님.”
“허허, 그래. 이제 양의심공을 얻었으니 어찌할 생각이더냐?”
“…….”
진무는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원래 떠나려 했다.
양의심공을 얻고 나면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무당을 떠날 생각이었다.
더욱이 도동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흐려진 것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스승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난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팔십 년의 세월을 살아온 그로서도 명진이 먼저 말을 꺼내 버리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쉬이 결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진무야.”
“……예.”
“무얼 고민하는 게냐?”
“예?”
“가고자 하는 길이 있으면 가면 되는 것이다.”
“…….”
“나는 네가 도사라는 굴레에, 무당이라는 틀에 갇혀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
명진의 말에 진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지금 무슨 소리를?
“무당은 그저 무당이고 너는 그저 너다.”
“……스승……님.”
“너는 이미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질 않더냐?”
“…….”
“내 걱정은 말거라. 이리 화산까지 올 체력도 생겼느니라.”
“……하지만 스승님.”
“이놈!”
“…….”
“너는 이 스승을 제자의 앞길이나 막아서는 못난 사람으로 만들려는 것이더냐?”
“…….”
진무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말문이 막혀 버렸다.
속으로만 생각하던 투덜거림도 할 수가 없었다.
“진무야.”
“예.”
“네가 도사의 길에 어울리지 않음은 진즉에 알고 있었느니라.”
“…….”
“너의 자유로움은 계율 따위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됨을 안다. 또한, 앞으로 네가 이어 갈 뜻도 무당이 품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너는 이미 누구도 가 보지 못한 길에 있으며 누구도 행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음이라.”
“…….”
“하나만 명심하면 되느니.”
“…….”
“무엇을 하든, 어떤 곳에 있든…… 너는 나의 제자다. 무당이라는 곳은 너를 제약하는 곳이 아니라 가다 힘들면 돌아와 쉴 수 있는 곳이면 족하지 않겠느냐?”
“스승님!”
생각지 못한 말이다.
명현을 겁박(?)하고 다른 궁주들과 설전까지 벌여 양의심공을 얻어 왔다.
제자가 성장을 하면 응당 도문으로 돌아와 이름을 드높이라 할 줄 알았던 진무였다.
그런데 되레 떠나라 한다.
가서 너의 꿈을 펼치라 한다.
진무는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너무 속이 보일까 봐.
너무 좋아하면 안 될까 봐서.
참고 또 참았음에도 드러나는 것은 감출 수가 없었다.
“서둘러 가거라. 지금 내가 술에 취해 있을 때. 내 이리도 훌륭히 성장한 너의 뒷모습을 보고 싶구나.”
“…….”
“혹여 내 아끼는 마음에 너를 옆에 두려 잡으려 하기 전에 서둘러서 가거라.”
아…….
분명 가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빌어먹을 도동의 기운이 자신의 행동에 더 이상 제약을 하는 것도 아닌데 도저히 발걸음을 뗄 자신이 없었다.
진무는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천천히 절을 올린다.
스승을 향해.
팔십 년의 세월에 비하면 한참이나 어린 스승이었으나, 그가 자신에게 보여 준 마음에 존경을 담아 천천히 절을 올렸다.
“아!”
그런데 갑자기 명진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무릎을 친다.
“……?”
절을 올린 진무가 고개를 들자 명진이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연락은 좀 자주 보내거라. 이제 너 떠나고 나면 다른 도문에서 대신하여 소식을 전하지도 않을 것인데…….”
“예!”
진무가 마주 웃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양의심공을 찾아 중원의 절반을 돌아다닌 긴 여정이 끝났다.
석별하는 순간이 무척이나 아쉬웠으나 헤어짐의 시간이 길어지면 마음만 무거워질 뿐이었다.
몸을 돌린 진무가 발걸음을 내디디려 하자 운암이 뒤따르려 한다.
“운암.”
“예?”
“여기서 헤어지자.”
“저는 계속…….”
“아니. 이제부턴 혼자 다닐 생각이다. 너도 이제 너의 갈 길을 가. 나중에 다시 보자.”
한참이나 고민하던 운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미소를 보인 진무가 금룡협의 아래를 향해 지면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솟구치는 용권풍에 몸을 실어 허공을 차고 사라지는 진무의 백룡의가 펄럭인다.
그 모습이 마치 짙은 안개 속으로 숨어드는 천룡처럼 보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명진과 진허, 운암은 진무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
진무가 떠난 자리에 파란빛을 내는 돌 하나가 남아있었다.
“야명주가 아닙니까? 이 귀한 것이!”
진허가 재빨리 집어 들자 운암이 담담히 말했다.
“공동에서 얻은 것입니다. 진무 도장께서 받지 않으려 하셨는데 기어코 안겨 주셨지요.”
“허!”
운암의 말에 명진은 감탄사를 터트린다.
“녀석, 저리도 무욕해서야. 무당을 위해 놓고 간 것이겠지.”
명진은 진무가 사라진 금룡협 아래, 안개로 가득 차 끝조차 알 수 없는 그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