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10
310화
“죽여야 합니다.”
“…….”
적생의 말에 원공후와 명세찬은 고개를 끄덕였고 소약벽은 얼굴을 굳혔으며 천우명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 생각이란 게 있는가 싶을 정도로 담담한 표정이다.
그들의 표정을 살핀 진무가 한쪽 손을 턱에 괴고 묻는다.
“이유는?”
“전쟁이 끝나고 폐주를 살려 두는 법은 없습니다. 더욱이 궁의 세작들에게 휘둘린 인물입니다. 모두의 앞에서 죽여 반드시 본을 보여야만 합니다.”
적생의 말에 진무가 고개를 끄덕인다.
사파에서 자리를 이어받는 방법은 두 가지다.
그 하나가 승계(承繼).
스승과 제자, 아비와 아들에게 이어지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계승 과정이다.
원공후, 소약벽, 명세찬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 세력의 주인이 된 인물이었다.
유월청이 천주가 된 것도 사황에게 후계로 지목되어 승계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진무의 상황은 달랐다.
전쟁을 통해 빼앗은 찬탈(簒奪).
강제로 빼앗았으니 당연히 이어지는 것은 숙청이어야 했다.
이전의 주인을 만인 앞에서 처형하고, 그에게 충성했던 이들을 모조리 죽여 본을 보이는 잔인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용서라는 것은 또 다른 용서를 기대하게 만든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랫동안 관습처럼 이어진 찬탈의 잔혹한 뒷모습이었다.
“꼭 그래야 해?”
“예. 지배자의 과감함을 보이셔야 하니까요.”
“음…….”
진무가 자신의 무덤을 힐끗거리고는 얼굴을 찌푸린다.
수많은 잘못을 한 망할 제자였으나 왠지 내키지 않았다.
“흠, 니들 생각은 어때?”
진무가 질문을 던지자 원공후가 단호하게 말했다.
“총사의 말에 동의합니다.”
“…….”
“그는 사패천을 세울 당시의 맹세를 잊었습니다.”
사패천의 맹세.
과거 진무와 사패오왕이 사패천을 세울 때 했던 맹세였다.
진무와 유월청은 다른 사패오왕과는 달리 불우한 삶을 살아왔다.
부모에게 버려진 천애 고아. 부랑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불법적인 일에 몸담을 수밖에 없었다.
진무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했다.
자신과 같은 운명을 가진 아이들을 만들지 않겠다고. 관이 보듬지 못하고 사람들이 보듬지 못하면 자신이 보듬겠다고.
그것을 위해서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못할 강성한 세력을 만들어 보겠노라고.
간악한 무뢰배, 협잡꾼 같은 이름으로 취급받던 사파인에게 무림인으로서의 긍지를 심어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사패천이었다.
“유월청은 우리의 맹세를 버린 것도 모자라 돈 몇 푼에 아이들을 납치해 팔아넘기기까지 했습니다.”
“…….”
“녹림, 수채, 야금당, 흑사방과 같은 이들로 본성을 채우고 사패천이 지켜 온 긍지를 더럽혔으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원공후는 그동안 저질러 왔던 유월청의 잘못을 조목조목 짚어 가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하긴, 저 고집쟁이 녀석은 처음부터 유월청을 싫어했지.
애초에 천웅방으로 돌아가 칩거한 것도 진무의 결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반대했음에도 유월청에게 승계를 하려 했었으니까.
“저도 원 방주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전쟁을 준비하면서 사패천과 산서상회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확실히 천주…… 아니 사황께서 돌아가신 이후 사패천은 각종 금지된 사업에 관여하였으며, 유월청은 이를 묵과하였습니다. 반드시 죄를 물어야 합니다.”
명세찬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원공후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흐음…….”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했던 진무가 소약벽에게 물었다.
“약벽,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글쎄요.”
소약벽이 긴 한숨을 내쉬며 원공후와 명세찬을 바라보았다.
“둘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총사의 의견도 옳고요. 하지만…….”
“살리고 싶어?”
“예.”
소약벽의 대답에 원공후와 명세찬이 동시에 그녀를 노려보며 외쳤다.
“살막주!”
당치도 않다는 듯 동시에 외치는 둘을 향해 소약벽이 슬픔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죽여야지. 나도 한때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
“월청이 천웅방을 무너뜨리려 했었고, 하오문주의 말대로 많은 악행을 저지른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내키지 않는다. 천주님을 따라다니며 그 오랜 세월을 함께 공유한 우리 사패오왕이었다. 다 함께 수많은 사지(死地)를 넘어왔고, 서로에게 의지했었다.”
“그렇다고 해도!”
원공후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소약벽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제껏 적으로 만난 이들 중에 죽이지 않은 자는 없었다. 하지만 월청에겐 연민이 남는다. 만약, 우리가 계속 녀석의 곁에 남아 주었다면…….”
“……젠장, 남았다고 해도 변할 놈이었겠습니까?”
그들 또한 유월청을 버렸음을 지적하는 소약벽의 말에 허를 찔린 원공후가 힘이 쭉 빠져 버린 듯 투덜거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진무는 소약벽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사패오왕 중 가장 맏이인 그녀였다. 살수임에도 정이 많은 녀석. 자주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언제나 그들을 살뜰히 보듬던 누이 같은 존재.
진무는 피식 웃으며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천우명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넌 어때?”
“제 의견이 중요하십니까? 전 그냥 천주님이 명하시면 따를 뿐입니다.”
뭐, 천우명의 반응이야 당연하다. 맹목적인 충성심을 가진 그는 한 번도 진무의 의견에 반대하거나 의문을 품지 않았다.
죽인다 말하면 목부터 길게 빼서 내밀 녀석.
“그래도 말해 봐.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제일 오래 월청의 곁에 있었잖아.”
진무의 말에 적생을 포함한 모두가 천우명을 바라본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그는 무겁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저는…… 사실 살려야 하는지, 죽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머리가 나빠 원 방주나 하오문주처럼 잘못을 조목조목 짚을 말주변도 없고, 살막주처럼 세심하지 못해 정을 표현할 줄도 모르니까요.”
“…….”
“다만…… 그는 천주님의 유일한 제자입니다.”
천우명의 말에 적생을 제외한 모두의 표정이 침중해진다.
유일한 제자.
그들은 진무에게 있어 유월청의 존재가 어떠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사패오왕 중 자신과 가장 비슷한 삶을 살아왔기에 훨씬 더 애틋하게 생각했고,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쳤다.
“흠…….”
모두의 이야기를 들은 진무가 턱을 쓸며 고민에 잠겼다.
제자라는 이유로 잘못을 덮을 수는 없었다.
예전이라면?
아마 고민도 하지 않고 죽였겠지.
하지만…… 망할 무당 같으니. 도가에 물든 것인지 어째 없던 정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휴우, 일단은 그대로 둬.”
“천주님!”
진무의 말에 원공후와 명세찬이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깜짝이야. 망할 놈들이 어디서 눈깔을…….
“대신, 내공을 금제하고 사지에 각기 삼십 근의 철구를 달아 천중산의 제일 깊숙한 곳에 유폐해라. 시비 하나 딸려 보내지 마. 모든 걸 스스로 감당하게 해. 살리긴 하겠지만…… 죗값은 치러야 하니까.”
“…….”
“그럼 다들 그렇게 알고 더는 이 문제에 대해서 논하는 일 없도록.”
“하지만, 분명 불만을 가지는 이들이 생길 겁니다.”
“그럼 나한테 직접 찾아오라고 해.”
“…….”
“그래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던 녀석이다. 그 정도면 충분해.”
씁쓸히 웃으며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는 진무의 말에 더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유폐, 그렇게 유월청의 삶은 결정되었다.
천주가 그렇게 하겠다 했고, 불만 있으면 직접 찾아오라는데 누가 말을 덧붙이겠는가?
유월청은 천중산의 깊은 곳에서 힘겹게 살며 생을 마감할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지워져 가며…….
“적생. 최대한 빨리 사패천을 안정시키고 조직을 개편하도록.”
“알겠습니다.”
“세찬, 궁의 꼬리는 잡았나?”
“아직…….”
“팔려 간 아이들이 너무 많다. 반드시 찾아야 해. 필요하면 개방과 다리를 놔 줄 테니까 그쪽에서 파악한 정보도 확보해. 아무래도 궁을 가장 먼저 쫓아다닌 건 거지새끼들이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다들 가 봐. 벌초를 마저 해야 하니까.”
“……예.”
진무의 축객령에 사패오왕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난다.
“아, 약벽!”
“예?”
“……들러 줘, 가끔.”
대상을 생략한 진무의 나지막한 말에 소약벽이 빙긋이 웃었다.
“……예, 그럴게요.”
* * *
사패천은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적생은 군사부를 세우고, 조직을 개편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고, 명세찬은 궁의 뒤를 쫓기 위해 조림정에 기거하던 야묘들을 모조리 사패천 본성으로 불러들였으며, 천우명과 원공후는 무인대를 맡아 이전보다 더욱 강도 높은 훈련에 돌입했다.
수하들의 시간이 정신없이 흐르는 가운데 천중전의 가장 높은 곳으로 거처를 옮긴 진무는 활기를 찾은 사패천을 내려다보았다.
이제야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자신이 죽은 이후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사패오왕이 한자리에 모였고 능력 좋은 총사를 뽑았으니 점차 해결되어 갈 것이다.
남궁무휴를 때려눕힘으로써 자신이 정무칠성보다 윗자리에 있다는 것도 증명했으니, 이제 자신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정사 무림의 최고의 위치에 오른 것이다.
뭐, 아직 정무맹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남은 것은 궁이라는 그 망할 자식들과 마교.
궁은 아직 어디에 짱박혀 있는지 모르니 어찌해 볼 수가 없다.
그럼 이제 마교로 가야 하나?
진무는 문득 북리도천을 떠올렸다.
오래전 서로가 더 강하다며 으르렁거리기 바빴던 숙적.
더 젊어졌고, 과거의 힘을 완전히 되찾았으니 충분히 싸워 볼 만하다.
무당의 선기에 묵룡혼원공까지 익혔으니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이길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된다. 북리도천을 완전히 짓밟아야 최강임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양의심공…….”
‘태극이무극’으로 시작하는 합일의 구결.
선기와 사기를 합한다면?
하지만 아직은 위험하다. 선기의 양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흠…….”
그래, 일단 마교로 가 보지 뭐.
천천히 가면서 선기를 수련해 태극을 이루고, 그 이후엔…….
북리도천 이 새끼, 크크크. 기대해도 좋다.
기분 좋은 상상에 한껏 흐뭇해진 진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했으니 더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비고에 쌓인 내 돈 좀 보고 가자. 영약도 제법 있을 테니 좀 챙겨 먹고.
“…….”
그러다 문득 잊고 있었던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마지막 순간, 이루지 못했던…….
“화양이는 어디 갔지?”
젠장, 잊고 있었다.
“황신!”
“예?”
진무의 부름에 화양, 아니 황신이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사람 하나만 수배해 봐.”
“……?”
“이름은 화양, 나이는 서른……일 거야.”
“…….”
거기까지 들은 황신은 황당하다는 듯 진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왜?”
“예?”
“안 가?”
“……가긴 가겠지만…… 그게 단가요?”
“뭐가?”
“……그, 다른 정보는 없는 건가요?”
“……여자다.”
진무의 말에 황신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여자겠지요, 망할 개천주님아. 그건 이름만 들어도 알겠어요.
근데 여자, 나이 서른. 그게 뭐란 말입니까?
최소한 어디에 산다든지, 얼굴 생김새는 어떻다든지 하는 것 정도는 알려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가!”
“……예.”
절대로 이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겠다는 듯 야멸차게 내치는 데야 도리가 없었다. 황신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터덜터덜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래. 더 물으면 뭘 하나, 맞기나 하겠지…….
황신이 나간 뒤 진무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화양이? 사실 뭐 찾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약간의 그리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가난으로 인해 팔려 올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이제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뭐, 사패천의 어딘가 있을 테니 금세 찾겠…… 아! 근데 그걸 황신이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