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26
326화
시간이 갈수록 진무의 얼굴은 점점 더 악귀가 되어 갔다.
이 자식이 아무리 지쳐도 그렇지, 환청을 들은 것을 고해?
황신이 물을 가지러 간 지 반 시진이 넘었다. 올 시간을 넘겨도 한참 넘긴 것이다.
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여인은 소동보가, 우등은 진무가 어깨에 둘러메었다.
짐을 든 각출은 탈진할 대로 탈진해 더위에 지친 한 마리 개처럼 네발로 기고 있었다.
모든 것이 황신 놈…… 어?
문득 진무의 귓가에 작은 소음 하나가 잡힌다.
말…… 달리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 심하게 욕하는…… 황신 목소린데?
걸음을 뚝 멈춘 진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멀지 않다.
“동보! 각출! 우등 가족을 지켜!”
“…….”
외마디 명령에 소동보와 각출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을 때, 진무는 이미 한쪽으로 쏘아져 나간 뒤였다.
엄청 빠르네.
대체 저 양반은 왜 안 지치는 거지? 원래 더위를 안 타는 체질인가?
뭐가 됐든 상관없다. 소동보와 각출은 드디어 쉴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 * *
“크으…….”
황신이 모래 위에 길게 미끄러지며 신음을 뱉는다.
“망할.”
황신은 지친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노려봤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둘둘 말아 검은 눈동자만 빼꼼하게 드러낸 자들.
물소리가 들렸던 방향으로 달리다 마주친 한 무리의 무인.
일부러 은은하게 뿌려 내는 마기를 보지 않아도 마교의 무인임을 단번에 알 것 같았다.
피했어야 했는데……. 너무 지친 상태기도 했고, 물에만 정신이 팔려서 놈들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심지어 처음엔 열 몇 명이 전부인 줄 알았건만, 이건 많아도 너무 많지 않은가.
“꼬마, 네놈은 뭐냐? 어째서 이곳에 있지?”
마상에서 황신을 깔아 보던 사내가 담담하게 물었다.
“이 잡놈의 새끼가 누굴 보고 꼬마래? 그리고 내가 뭐든 니가 알아서 뭐 할 건데? 얼굴 가린 마교 악당 새끼야.”
“…….”
황신은 포위당해 있으면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송곳 같은 비수를 들어 자세를 취했다.
눈앞의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살이 떨려 올 정도로 강한 기운.
은은히 뿜어지는 기운의 흔적은 적어도 의기를 한참이나 넘어서 있음을 깨닫게 한다.
더욱이 황신을 둘러싼 무인들의 수는 어림잡아 백여 명.
지친 것도 지친 거지만, 자신의 무공으로 저 무인들 전부를 상대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어찌하면 도망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마교 무인들의 포위망 때문이 아니었다.
물을 구하지 못했다.
매우 심각한 문제다. 이대로 도망쳤다가는 망할 개천주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분명 개처럼 패겠지.
뭐, 죽지 않을 정도로 맞는 거야 이제 이골이 났으니 상관없다. 구타가 수련에 꽤 도움이 되기도 했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서열 문제다.
열 받은 천주가 날 막내로 정해 버리기라도 하면, 그래서 그동안 내가 알차게 부려 먹은 각출이며 소동보가 형이 되면……?
제기랄,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좌우지간 지금의 상태라면 은신술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귀식대법이라면 모를까.
그렇다면 결론은? 남은 내공 전부를 쥐어짜서라도 싸울 수밖에…….
씨발, 어떻게든 물을 구해 간다. 안 되면 니들 피라도 받아서 간다.
싸르르륵.
황신이 눈에 살기를 가득 담으며 기운을 끌어 올리자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모래가 밀려났다.
“호오?”
그 모습에 황신에게 말을 걸었던 인물의 눈에 진한 호기심과 호승심이 자리한다.
“재미있군. 기세를 보아하니 간자(間者)의 무공을 익힌 듯한데, 나에게 필적할 정도의 힘이라.”
“…….”
“관문을 넘어왔으니 칭찬할 일이다만 너무 지쳤군.”
“니가 걱정할 일 아니거든? 이 목에 구멍 뚫려 뒈질 놈아.”
“입심 하나는 대단한 녀석이군.”
비수를 핥아 대며 잔인하게 웃는 황신의 기세에 사내가 손짓으로 포위망을 물리고 말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좋아, 직접 상대해 주지. 네놈의 이름은?”
“할 일 없냐? 뭘 자꾸 처묻고 지랄이야? 조상 중에 궁금해서 뒈진 놈이라도 있어? 닥치고 칼이나 처뽑아!”
“…….”
찰지게 뱉어 대는 욕설에 사내가 얼굴에 감은 천을 걷어 내자 수많은 전쟁을 거쳤음을 증명하듯 상흔 가득한 얼굴이 드러났다.
“저런, 기세를 보아 이름이라도 알고 죽여 주려 했더니 어쩔 수가 없겠군. 나는 마교 육동천에서 마령대주를 맡은 일환이라고 한다.”
“좋겠다, 새끼야. 이름 길어서.”
“…….”
황신의 도발에도 사내, 일환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에 먹음직한 먹잇감이 나타나 즐거운 듯한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칠동천 놈들이 허접해서 심심하던 차였는데 잘되었군. 잠시 유흥거리는 되겠어.”
일환이 허리춤에 비스듬히 걸린 완만한 곡도(曲刀)를 뽑아 들어 가볍게 바닥으로 내렸다.
후우욱!
“…….”
은은했던 마기가 증폭되어 싸늘하게 발출되자 황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젠장, 엿 됐다.
생각보다 배는 더 강하다.
이 정도면 의기 정도가 아니라 강기에 거의 근접한 정도의 기운이다.
지치지 않았다 해도 승부를 예상하기 어려운 상대인 것이다.
차라리 말에서 내려서 준비하기 전에 공격할 것을……. 잡생각이 너무 많아 실수를 범했다.
빌어먹을, 묘비에 물 구하려다 죽었다는 허접스러운 기록이 적히길 원하진 않았는데.
모든 것이 늦었음을 직감했으나 어쨌든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울 때 최선의 공격법은 선수필승(先手必勝). 황신은 주저하지 않고 모래를 짓밟았다.
차륵!
“……!”
내디딘 바닥이 모래라는 것을 간과했다. 단단하지 못한 바닥은 제대로 된 지지대가 되지 못했고, 자연히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원래의 속도에서 반 박자가 늦어졌다.
하지만 쏘아진 화살을 되돌리기는 불가능하듯 이미 공격이 시작되었으니 멈출 수는 없다.
황신은 바닥을 쓸 듯이 낮게 스치다 솟구치며 일환의 목덜미를 향해 송곳을 곧게 찔러 넣었다.
따아앙!
역시나 닿지 못했다.
곧바로 쳐 올린 일환의 칼이 송곳을 때려 비껴 버렸다.
송곳의 잔떨림이 손에 선명히 느껴졌지만, 멈출 수는 없다.
공중에서 선회한 황신이 곧장 발을 차 냈다.
퍼억!
이 또한 손쉽게 막아 버린 일환의 칼이 종횡을 교차하며 예리한 공격을 쉼 없이 쏟아 낸다.
막고 쳐 내는 와중에도 황신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기세의 흐름이 달라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슈슈슛!
갑자기 세 갈래로 나누어진 검기가 황신의 목, 허리, 다리를 동시에 노려 왔다.
휘릭!
공중에 뜬 황신이 재빨리 팽이처럼 몸을 돌렸으나,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스걱!
“크윽!”
옷이 잘리고 피가 튀었다.
이를 악물며 전신으로 퍼지는 아릿함을 견뎌 낸 황신이 연거푸 송곳을 찔러 넣었다.
퓨퓨퓩!
“……!”
들어갔다. 분명 손에 느낌이 있었……!
쩌억!
“크윽!”
분명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일환이 휘돌려 찬 발에 턱을 얻어맞은 황신이 거칠게 바닥에 처박혀 굴렀다.
“……제법이군. 내 몸에 상처를 남기다니 말이야.”
우뚝 선 채 황신을 내려다보는 일환의 팔뚝에 생긴 세 개의 구멍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쌍, 하필 팔이고 지랄이야.
“재미있다, 아주 재미있어. 그래, 이쯤은 돼야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일까?
일환의 눈동자에 포악함이 떠오르는 순간, 살 떨리는 마기가 더욱 증폭되었다.
일환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강렬한 마기의 아지랑이에 황신의 입가에 쓴웃음이 감돌았다.
개자식, 아까 그게 전부가 아니었던 거야?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거니?
“죽여 주마! 꼬마!”
차륵!
모래를 짓밟은 일환의 모습이 일순 황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슈슛!
귓가에 들려오는 공기의 마찰음에 황신이 급히 고개를 꺾는다.
취릿!
칼날이 황신의 볼을 차갑게 스치며 핏물을 튀어 올렸다.
“이놈 보게?”
어느새 황신을 스쳐 뒤쪽에 선 일환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나의 쾌섬살(快閃殺)을 피해? 고작 간자 꼬마 따위가?”
“…….”
일환의 말에 황신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다.
이름까지 붙여 놓은 것을 보면 그의 독문무공 정도는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피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몸을 꺾었음에도 상처를 입었는데.
“정말 제법이구나. 내게 이런 흥분을 주다니……. 실로 죽일 맛이 난다, 죽일 맛이 나.”
“지랄하네. 내가 멀쩡한 상태였다면 넌 벌써 뒈졌어.”
“……큭큭, 끝까지 허세도 부릴 줄 알고. 참으로 제법이야.”
허세? 진심이다.
일환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황신 또한 진무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로 더욱 강해져 있었다.
이제는 간간이 그 괴물 같은 진무의 주먹도 서너 번은 피할 정도인데 강에 근접한 일환의 칼 따위야.
지쳐 있지만 않았으면 목에 구멍을 내고 피를 받았어도 한 동이는 되었을 것인데…….
하지만, 사막을 건너온 탓에 물은 구경도 못 한 지 오래거니와, 내내 우등 가족의 짐을 들고 온 탓에 몸은 무겁고 내력은 바닥이었다.
분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일환을 이길 수가 없었다.
제길……. 개천주님.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그래도 이 새끼만큼은 반드시 죽이고 먼저 저승 가서 기다릴게요. 나중에 죽으면 꼭 찾아오세요.
어느 순간 황신의 눈동자에 짙푸른 독기가 어리더니, 흐트러졌던 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무인들이 언제나 마지막을 위해 남겨 두는 한 수.
자신의 생명력인 진원지기를 끌어 올려 적을 공격하는 동귀어진.
황신은 제 목숨과 바꿔 일환의 목을 취할 생각이었다.
모든 공력을 한순간에 담는다. 놈이 쫓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에, 그리고 이 송곳에.
“호오? 기세가 대단한데?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 볼 참이냐? 좋다, 받아 주마!”
황신의 몸에 스산한 기운이 어리자 일환이 단번에 그를 베어 버릴 생각으로 자신의 완만한 곡도를 양손으로 움켜쥔다.
“그래. 막으면 니가 이기는 거야, 이 싸우면서 흥분이나 느끼는 변태 새끼야!”
씹어뱉듯 중얼거린 황신이 다시금 자세를 낮춘다.
모래에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든든히 지지하고, 한 번에 차 내 속도를…… 어?
일환을 노려보던 황신이 불현듯 바람에 실려 날아온 소음에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개……?”
순식간에 소음의 정체를 파악한 황신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오른다.
엎드리다시피 낮췄던 자세가 곧게 서고, 온몸에 가득하게 끌어 올렸던 기세가 일순 흩어졌다.
“……뭘 하는 거지? 그냥 죽을 생각인가?”
죽어?
뒤나 봐라, 병신아. 괴물 납시었다.
황신이 이빨은 물론 잇몸까지 드러내며 환하게 웃자 어딘지 섬뜩한 기분이 든 일환이 고개를 돌렸다.
“모래바람?”
아직 때가 아닌데? 게다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일 리…… 잠깐, 저건 모래바람이 아니라…….
“사, 사람?! 피해라!”
쿠아아아!
일환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거친 돌풍과 함께 나타난 인물이 포위망에 거칠게 충돌했다.
투아아앙!
거친 폭음과 함께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마교인들이 말과 함께 세차게 튕겨 나갔다.
투웅, 쾅, 털썩.
허공에 높이 떠올랐던 말과 사람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순식간에 허물어져 버린 포위망에 잔뜩 화가 난 진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절망의 순간 기적처럼 나타난 진무와 황신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둥켜안듯이 어우러진다.
천주님, 천주님. 왜 이제 오셨어요?
얘들 좀 혼내 주세요. 하마터면 물도 못 구하고 뒈질 뻔했어요.
단체로 저를 막, 이렇게, 그랬다니까요?
포위망의 안쪽으로 늠름하게 걸어 들어오는 진무의 모습에 그제야 살았다는 안도감이 든 황신이 저도 모르게 울컥 눈시울을 적셨다.
“네, 네놈은 뭐냐?”
갑자기 나타났으니 일환이 놀란 것도 당연하다.
더욱이 진무의 몸에서 느껴지는 살벌한 기세가 사방의 대기를 짓이겨 놓듯이 누르고 있었다.
“네, 네놈…….”
일환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걸어오기만 하는데도 숨이 턱턱 막힐 듯 압박감이 느껴졌다.
육동천주? 아니, 그 이상이다. 이건 흡사 교주가 나타난 듯한…….
그러나 막상 진무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황신에게 향했다.
아! 천주님, 제가 걱정되셨던 거군요.
제가 상처를 입어서 피를 흘리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분노하신 표정인 거군요!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천주의 애틋한 마음을 절절히 느낀 황신의 가슴에 감사와 존경심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
걸음을 멈춘 진무가 무릎을 꿇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황신을 뚫어져라 마주 바라본다.
“천주님…….”
빠아악!
“이런 멍청이가! 물 구해 오랬더니 여기서 마교 새끼들이랑 처놀고 있으면 어쩌라는 거야!”
“…….”
벼락같이 분노를 토하는 모습에 정적이 흐르고, 모두가 모래에 대가리를 처박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황신을 멍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 씨발……. 물 때문이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