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54
454화
하늘의 중심을 자미원(紫微垣)이라 부른다.
이 땅의 왕을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사는 궁성에 자미원의 앞 글자인 자(紫)와 더불어 허락받지 않은 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금(禁)을 붙였다.
해서 자금성이라 부른다.
자금성은 그 이름에 걸맞게 사방으로 해자(垓子)를 파고, 뒤로 높다란 성벽을 세워 적이 침범치 못하게 하였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오직 경(冂) 자를 본떠 만들어진 오문(午門)뿐이었다.
그 문을 통과하자면 오직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 했고, 누구도 무기를 지니거나 말을 탄 채 지날 수가 없었다.
그런 오문의 앞에 관복을 입은 이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황제의 부름을 받아 오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문무백관이었다.
목적은 하나, 황제가 주관한 대전 회의에 참석하는 것.
우도사의 직책을 받은 진무는 당연히 참석해야 했고, 그 휘하의 무인들 또한 대신들의 비리를 밝힌 공로를 인정받아 부름을 받았다.
영왕의 곁을 살피던 소동보가 모처럼 합류했고, 청상과 청우, 능서현과 괴충, 그리고 천우명과 은위단의 무인들까지.
당가에 가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 진무를 따라 순천부에 기거하는 이들이 모두 와 있었다.
진무를 제외하고는 급한 대로 관복 비슷한 옷을 걸친 그들에게 주위의 시선이 쏟아졌다.
“자네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군.”
“그렇군요.”
영왕의 말에 진무가 피식 웃는다.
농담 삼아 인기라고는 했지만 정작 그 시선에 담긴 것은 두려움, 시기, 질투, 비난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었다.
하지만 힐끗거릴 뿐 대놓고 노려보는 이는 없었다.
괜스레 눈이라도 마주쳤다가 도찰원의 먹잇감이 될까 두려워서이리라.
그것은 그간의 진무가 그만큼 악랄했다는 방증이었다.
“꽤 오래 걸리는군요.”
“허허, 황궁에는 법도와 절차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입시할 시각이 되어야 열릴 것이니, 지루하더라도 조금만 기다리게.”
“…….”
진무의 투덜거림에 영왕이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
쿠쿵.
이윽고 안에서 성문의 빗장을 걷어 내는 투박한 소음이 들려왔다.
그그그그긍.
흙바닥에 긴 자국을 내며 성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하자 자금성의 내부가 드러났다.
멀리 태화문이 보이고, 그 앞 공터에 황금빛 물결을 이룬 무장들이 좌우로 빼곡하게 열을 갖추어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진무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황성에서 유일하게 무장을 허락받은 황궁 수비대.
오직 황제를 지키기 위해 길러진 최강의 무장들이 만조백관의 입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을 준비한 것은 다름 아닌 귀비일 것이다.
명은 황제가 내렸을 것이나 부추긴 것은 필시 그녀겠지.
참 많이도 준비했구나. 수틀리면 모조리 죽여 볼 참이더냐?
진무가 잠시 그들을 응시하는 사이 문신들과 무신들이 줄지어 오문을 지났다.
“자, 우리도 들어가세.”
“그러시죠.”
진무가 드디어 황성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착, 차자작!
대신들의 입시에 맞추어 좌우의 황궁 수비대가 일제히 몸을 틀어 그들을 직시했다.
이럴 경우 진법이고 뭐고 없다.
길은 오직 하나이고, 그 길의 좌우에는 수많은 무장이 있다.
이곳이 전장이라면 그들은 적진의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공격이 시작되면 지나가는 이들 모두가 저 황금빛 창에 꼬치처럼 꿰일 테지.
또 보니 내부에는 두꺼운 돌로 바닥을 깔고 그 위로 석등 하나, 나무 한 그루조차 심어 놓지 않았다.
돌을 깔았으니 땅굴을 파고 침범하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고, 나무나 석등이 없으니 자객이 몸을 숨기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진무가 보기에는 그저 개지랄에 불과할 뿐이었다.
조경의 미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 같으니.
성을 짓는데 한두 푼 들었을 것도 아닌데 대관절 이 멋진 곳을 이따위로 꾸미다니 참으로 미친놈들이 아닌가?
정원과 정자 하나 없으니 앉아서 술 마시며 흥취를 느낄 수도 없고, 나무가 없으면 그늘 하나 생기지 않을 테니 여름에는 무지하게 더울 터였다.
어쨌든 황궁에 대한 감상평을 떠올리며 수비대가 만들어 낸 흉흉한 길을 지나자 드디어 대전 회의가 열리는 태화전이 보였다.
그 안쪽 역시 황궁 수비대가 가득하다.
어휴, 이년이 아주 작정을 했구만, 작정을 했어.
대체 몇이나 준비를 한 걸까?
하지만 그래 봐야 상관없다.
여차하면 황제의 모가지를 위협해서라도…….
“서현.”
“예.”
“이곳에서 저들과 함께 기다려라. 때가 되면 부르겠다.”
“…….”
진무가 태화전 근처에 다다라 능서현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진무 휘하의 무인으로 변장시킨 위정필과 태자.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그들의 출신이 무림인임을 알기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같이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괜히 먼저 알아보기라도 하면 곤란하고…… 일단은 확인부터 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진무는 귀비 하나만을 잡을 생각이 아니었다.
아무리 조정 대신들의 비리를 모조리 파악했다고 하나, 그것만으로 귀비와의 연관성을 밝히기는 어렵다.
또한 태자를 처음부터 꺼내 놓으면 귀비야 당장에 잡을 수 있겠지만, 궁의 족속들이 대신들 틈에 섞여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이왕지사 시작한 거 대가리만 치고 끝내서야 되겠는가?
귀비를 시작으로 모조리 솎아 낸다.
“모두 대전에 들어가면 대신들을 철저하게 살펴라. 작은 변화도 놓쳐서는 안 된다. 필시 우리가 조사한 놈들 외에도 궁과 결탁한 놈들이 있을 것이다.”
“예.”
대전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명을 내리기는 했으나, 다시 한번 주의를 준 진무가 태화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멀기도 멀다.
달리는 것도 허락된 자에게나 가능한 탓에 진무는 백 장이 넘는 거리를 꼬박 걸어 겨우 태화전의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세 개의 단을 쌓아 올린 곳에 위치한 태화전을 바라보았다.
황성의 중심.
결국, 여기까지 왔다. 모든 것을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
진무는 답도(踏道)의 계단을 하나씩 짓밟으며 천천히 올랐다.
태화전을 오르는 계단의 중심에 조각된 포악한 용처럼 황궁을 집어삼키기 위해.
* * *
……또다시 기다려야 했다.
망할 황제 놈이 아직 안 왔다.
만조백관이 각자의 품계에 지정된 자리에 기다린 지 한참인데.
이 시국에 제 놈이 무슨 영웅이야, 뭐야.
아마 귀비도 아직인 것을 보면 황제랑 손잡고 올 모양인가 본데, 어떻게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여유가 생겼다는 건 준비할 시간을 벌었다는 뜻이니까.
태화전 내부도 황궁 수비대가 지키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태화전의 넓은 벽면을 휘돌아 채운 너머에서 진한 예기가 느껴지는 것이, 궁병들이 잔뜩 진을 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구혼탈백 한 방이면 모조리 허리를 잘라 버릴 수 있는데.
여하간에 진무는 내부를 채운 대신들을 찬찬히 살폈다.
궁과 연관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자들은 분명 반응이 있을 것이다.
청상과 청우를 진무의 곁에 두고 능서현과 천우명은 대전을 중심으로 좌우, 소동보는 영왕의 근처, 마지막으로 은위단은 대신들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자리에 나누어 배치했다.
“여긴 내 자리…….”
몇몇 대신들이 자신의 자리를 치고 들어온 진무 일행에 반발했지만, 살벌한 눈빛에 이내 다른 자리로 옮겨 갔다.
주요 직위자를 제외한 이들에게 자리는 정해져 있지 않았으니 누가 뭐라 할 것인가?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고도 한참, 진무의 지루함이 극에 달했을 즈음이었다.
드디어 밖에서 목청 좋은 환관의 외침이 들려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의 목소리가 신호가 된 듯이 문무백관이 일제히 목놓아 외치며 자신의 자리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만세, 만세, 만만세!”
“…….”
지랄하고 있다.
운공처럼 장수하는 노인네도 있긴 하다만, 사람이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도 고작 백 년인데 만세는 뭔 만세.
하지만 진무도 엎드렸다.
일단은 황제의 신하인 우도사 신분이니까.
고개를 조아린 진무의 귓가로 황제의 행차를 알리는 풍악이 울려 퍼지고, 거대한 가마가 답도를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간에 높은 놈 티 내는 것도 아니고 그냥 걸어오면 될 것을 꼭 저딴 짓을 하고 있다.
가마꾼들은 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경사도 심하던데.
진무가 오만 트집을 잡아 툴툴거리는 사이, 이윽고 가마에서 내린 황제가 좌우로 자리한 문무백관의 중심을 걸었다.
사락, 사라락.
용포가 바닥에 끌리며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저벅, 저벅.
지상의 왕에 걸맞은, 가볍지만 힘이 느껴지는 걸음 소리가 묵직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내심 그 발소리에 감탄한 진무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들어 황제를 쳐다보았다.
살집이 투실투실하게 올랐으나 청우와는 달랐다.
후덕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와중에 허리를 꼿꼿이 세워 걷는 걸음에는 위엄이 가득하고 자연스러운 눈빛은 만인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진무의 시선은 황제를 지나 그 옆을 향했다.
황제를 부축하며 옆에서 걷는 귀비…….
짙은 화장을 한 것은 물론, 길게 끌리는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화려한 봉관(鳳管)을 쓰고 있었다.
거기에 갖가지 생화(生花)로 머리를 치장하니 그 자태가 눈이 부실 지경이었고, 가식적인 표정에는 자애로움마저 넘쳐흘렀다.
망할 년, 연기력이 아주 수준급이다.
그래, 예전이라면 그 이상하게 매력적인 얼굴과 표정에 현혹되었겠지.
하나 지금은 그저 머리에 꽃 꽂은 미친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구나.
어서 오너라, 화양아.
내 너를 위해서 아주 많은 것들을 준비해 놓았다.
진무는 자신의 앞을 지나는 황제와 귀비의 발걸음에 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평소라면 감추고도 남았으나 지금만큼은 이 음흉한 미소와 눈빛이 도무지 주체가 안 되는 탓이었다.
“모두 고개를 들라.”
이윽고 높다란 자리 위에 앉은 황제가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대신들이 한마음이 된 듯 용상을 우러러보았다.
“영왕께서도 오시었는가?”
“예, 폐하. 모처럼 용안을 뵈오니 기쁘기 한량없사옵니다.”
“내 귀비가 하도 새로운 것으로 즐겁게 하여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게지. 너무 책하진 말게.”
“송구합니다, 폐하. 소신은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하하, 송구가 무언가? 자네와 나 사이에 그만한 질타가 무슨 허물이라고.”
“폐하.”
황제의 너털웃음에 영왕이 겸연쩍다는 듯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온화한 미소와 함께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황제의 입이 다시 열렸다.
“듣자 하니 근래에 황성이 시끌시끌하였다고 들었다.”
“…….”
하, 이것 봐라?
진무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허허거리더니 목소리에 힘을 담자 대전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변해 버렸다.
이것이 천하를 지배한다는 황제의 힘인 것인가?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되 천하를 호령하는 기상을 머금었기에 한 마리의 용이 된 것이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 하더니 역시 옛말이 틀리지 않는구나.
진무는 태자에게서 받았던 느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태자는 제법 강단이 있으나 아직 여물지 않은 어린 용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주는 느낌은 달랐다.
후덕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으나 그 눈빛이, 목소리가 자아낸 분위기가 타인을 압도한다.
참으로 희한하다.
분명 소문에는 여인의 치맛자락에 휘둘려 정사를 돌보지 않는 무능한 황제라 하지 않았던가?
진무가 놀라워하는 와중에도 황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조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신들이 그토록 많은 비리를 저질렀다는 말에 짐은 통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잔잔한 질책에 영왕을 시작으로 허리를 세웠던 대신들이 일제히 엎드려 죄를 청했다.
“폐하, 소신들을 벌하여 주십시오.”
마치 연습한 듯 똑같이 외쳐 대는 목소리가 대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니다. 어찌 그것이 너희의 죄라 할 것인가? 이는 나라를 돌보지 않은 나의 죄가 크다.”
“폐하,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어찌 그것이 폐하의 죄란 말입니까? 모두가 소신들이 부족하여…….”
“그만하라. 나의 부덕함을 어찌 모를까?”
“폐하…….”
영왕이 고개를 저으며 충성 어린 목소리를 토해 냈지만, 황제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내 이번 일로 느낀 것이 많아 다시금 직접 정사를 돌보려 한다. 하나 그 전에…… 이번 조정 비리 사건을 조사하고 처결한 이가 있다고 들었다.”
“이번에 폐하께오서 우도사로 임명하신 진무라는 자이옵니다.”
영왕의 답변에 대전에 모인 이들이 진무를 힐끔거렸다.
“우도사 진무는 앞으로 나서거라.”
“예.”
공손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진무가 황제의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시작이다.
지금부터 네년이 저지른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쳐 나락으로 밀어 넣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