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65
35화
「누구?」
「나? 널 도울 존재.」
「날 도와?」
「그래.」
머릿속으로 의문을 떠올리자, 목소리가 답해 왔다.
힘차게 짓밟아 오는 육장의 발에 몸이 들썩이며 땅속으로 처박혔지만, 이상하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통각(痛覺)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무감했다.
「계속 고민할 건가? 이대론 죽을 텐데?」
「나는 너를 모른다.」
「아니, 알고 있을걸?」
「뭐?」
「난 언제나 너와 함께해 왔으니까.」
청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함께해 왔다니?
「쯧…… 어쩔 수 없네. 그럼 보여 줄게.」
「뭘?」
혀를 차는 소리에 청상이 의문을 가지는 순간, 눈앞이 흐릿해지며 세차게 흘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눈을 깜박이지도 않았음에도…….
그런데.
“이, 이건!”
청상은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놀라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붉은 화광. 그보다 붉은 선혈.
투박한 칼을 들고 누비는 자들과 쫓기듯 도망치는 사람들.
청상의 눈이 크게 뜨였다.
누군가 코와 입을 막은 것처럼 숨이 막힌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그 안에 누군가 기다란 못을 때려 박은 것처럼 아려 왔다.
눈에 보인 것은 기억이었다. 아주 오래전, 긴 세월이 흘러 잊었다 여겼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
무당에 이름을 올리기 이전에 보냈던 시간의 마지막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마을을 습격해 눈앞에서 모든 것들을 파멸로 몰아넣은 화적들…….
까마득한 옛 기억에 불과하건만, 마치 그곳에 있는 듯 선명했다.
청상의 눈동자에 물기가 하염없이 솟구쳐 흘렀다.
“아아…….”
그제야 숨이 터진 그의 입에서 한탄 어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린 시절, 눈조차 깜박일 수 없게 한 화적 놈의 손에 잡혀 죽어가는 어미를 똑똑히 지켜봐야만 했다.
인근의 화적 떼였다. 겨울을 버티기 위해 한 말의 식량을 숨겼다는 이유로 가해 온 보복이었다.
오직 혼자만이 살아남았다. 자신들을 기만한 대가가 어떠한 것인지 남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이유로 그 어린 청상에게 처절한 기억을 심은 채 살려 주었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들…….
「보여? 나는 저 때의 너다.」
하염없이 울며 꺽꺽대던 청상의 귓가에 요사스러운 목소리가 또다시 말을 걸었다.
「저 때의 나라고?」
「그래, 저 때의 너. 저 화적 놈들에게 품었던 악한 마음의 모습이 바로 나인 셈이지.」
「나는…….」
「잊었다고?」
「…….」
「말도 안 돼. 그냥 눌러 두었을 뿐이지.」
「눌러?」
「그래. 선도라는 이름의 수양으로, 도리라는 이름으로 네 마음속 깊은 곳에 봉인하고 잊은 것처럼 살아온 것뿐이야. 하지만 난 언제나 너와 함께 있었지. 네가 다시 불러 줄 때를 기다리면서.」
「다시 부를 때라고?」
「그래, 다른 것도 보여 줄까?」
목소리가 말을 마친 순간, 눈앞의 풍경이 변했다.
똑같은 색과 모양의 도포를 입은 아이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무복 차림의 아이.
그 역시 청상이었다. 무당에 들어와 마음속에 살심이 가득하다는 이유로 도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그때의 청상.
「저봐, 수군거리는 소리 들리지?」
「음…….」
그랬다. 그때의 청상은 외면받았다.
어느 사회든 출신 좋은 놈들은 있었고, 그들이 주류였다. 청상은 외따로 떨어져 배척받았다.
「저 때의 너도 나다.」
청상이 침묵하는 동안에도 목소리는 수많은 것을 보여 주었다.
악한 마음을 품었던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선명히 스쳐 지나갔다.
「난, 모든 때에 너와 함께 있었다. 네가 사숙의 제자가 된 운연을 잠시나마 질투했던 그때도. 하지만 난 기다렸어, 언제까지나.」
「언제까지…….」
「이젠 잡아도 되지 않을까?」
「잡으라고? 한때나마 악했던 나의 모습을?」
「뭔 상관이야? 이미 등선했잖아? 그리고 여긴 악인들이 판치는 지계야.」
「그렇군.」
「도움이 되고 싶지 않아?」
「도움?」
「그래, 니가 존경하는 사숙에게 말이야. 훨씬 강해져서 그에게 인정받고 싶잖아? 종내에는 그를 뛰어넘고자 하는 마음도 있고.」
「나는…….」
「잡아. 이루게 해 줄게.」
「나는…….」
「뭘 고민해? 네가 존경하는 사숙도 선악이 공존하는 사람이야. 혁련무강이었던 걸 알잖아? 그 때문에 양의심공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고, 결국 태극을 이룰 수 있었지. 너 또한 마찬가지야. 선만으로는 강해질 수 없어. 악한 마음 편에 있는 나를 선택하는 순간, 너도 네 사숙과 동등해지는 거야. 그와 더욱 가까워지는 거야. 그가 걸었던 길을 함께 걷는 거야.」
「…….」
번뇌에 휩싸인 채 있다가, 청상은 문득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제야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의 손에 잡혀 있는 검, 자충.
「너구나.」
「아니, 자충을 통해 증폭되었을 뿐, 나는 너야.」
「…….」
「선택하지 않아도 돼. 난 언제나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 또 언제나처럼 기다릴 거다. 너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물론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잡지 않으면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할 것처럼…….
덥석!
더 이상의 고민은 없었다. 결정을 내린 청상이 자충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멀어진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잘…… 결정했어.」
콰지지직!
그 순간, 눈앞의 세상이 유리처럼 깨지며 산산이 붕괴되었다.
“끄아아악!”
청상을 짓밟던 거인 육장이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칙칙한 어둠으로 가득했던 세상이 찢어지며 맑은 빛이 쏟아져 들어와 청상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청상!”
진무였다.
여의를 통해 수십 배나 강해진 천교열이 육장의 자옹을 통째로 물어뜯듯 찢었고, 동시에 술법이 깨져 갇혔던 청상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털썩 쓰러지는 청상에게 다가간 진무가 다급히 맥을 짚곤, 분노에 찬 눈동자로 고통스러워하는 육장을 노려봤다.
“너 이 개새끼……!”
“끄으……. 빌어먹을…… 거의 다 끝났는데……. 자옹에 가둔 놈의 마력만 흡수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비척거리는 육장의 말에 진무의 미간이 잔뜩 찡그려졌다.
“뭐? 너, 설마 청상이를 흡수할 생각이었냐? 저 빌어먹을 옹기로?”
“…….”
“아, 그랬네. 그랬던 거네.”
우두둑.
이를 악문 채 여의를 역소환한 진무가 깍지 낀 손가락을 위협적으로 꺾었다.
“그랬단 말이지? 니가 내 새끼를 잡아먹으려고 했다, 이 말이지?”
“…….”
“그래, 너 같은 놈에겐 매도 필요 없지. 암, 그렇고말고…….”
우두둑, 우두두둑!
분노한 진무의 걸음이 육장을 향했다.
천둥소리처럼 들려오는 관절 꺾이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육장의 마음을 옥좼다.
두려움,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잊었던 감정이 그의 마음을 채우는 순간.
“으아아악!”
육장이 냅다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
텁.
했지만 의미 없는 몸부림일 뿐이었다.
어느새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진무가 육장의 뒤편에 서서 내리깐 눈으로 생긋 웃었다.
“일단…… 좀 맞자, 이 육장 새끼야.”
“끄으…….”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 가죽이 뜯겨 나가는 듯한 충격보다 진무의 입가에 스민 미소가 훨씬 무서웠다. 육장은 겁에 질려 그를 바라보다, 맹렬히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슈아아악! 콰직!
곧바로 떨어져 내린 주먹이 육장의 안면에 쑤셔 박혔다.
“끄아아악!”
귀, 아니 괴가 되기 전 하계의 죄업에 대한 형벌로 껍질이 벗겨지던 그때보다.
퍼억! 퍽퍽퍽퍽!
상처를 파고들던 해형장 소금물의 쓰라림보다.
콰직, 콰지직, 콰직콰직!
죽을 때까지 살점을 뜯어 먹는 식어들이 주는 고통보다.
“아직 멀었어!”
“꿰에에엑!”
진무의 주먹이 더욱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그런데도 혼절하기는커녕 정신이 더욱 또렷해졌다. 잊었던 오감이 되살아나고 고통의 순간이 뼛속, 머릿속, 느껴지는 모든 곳에 아로새겨졌다.
“이런 씨발 놈이 어딜 도망가! 넌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고 백골이 진토가 돼도 못 죽어!”
“꽤액! 꽤애애엑!”
진무는 머리카락이 온통 뽑힌 채 도망치던 육장을 잡아, 온갖 수단을 동원해 짓이겼다.
그의 우렁찬(?) 비명이 사방을 쩌렁쩌렁 울릴 때마다 근처에 있던 해형장의 모든 요, 귀, 괴들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누구도 움직이지 못한 채, 육장이 죽지도 못하고 얻어맞는 현장을 함께한 지 한참.
“끝났네.”
“으응…….”
백표와 황신은 고개를 주억거렸고, 이생은 이제부터 진무가 시키는 일이라면 절대로 불만을 토로하지 말아야겠다 다짐했다.
“끄으으…… 그냥 죽여…… 줘…….”
진무는 제발 죽여 달라며 애원하는 육장을 향해 차게 웃었다.
“죽여? 누가? 아직 멀었어!”
“끄으…….”
내 새끼 처먹으려 한 죄가 이 정도로 사해질 것 같아?
얼마 남지도 않은 육장의 머리채를 다시금 고쳐 쥐고 주먹을 높이 쳐든 그가,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홱 돌려 근처에 있던 괴를 쳐다봤다.
“너!”
“예? 옙!”
“이 새끼 저기 담가라.”
“예?”
“죽을 듯, 말 듯하게 넣었다가 빼.”
“…….”
“만약에 혹시라도 이 새끼가 뒈지거나 하면…… 그땐 니가 죽는다.”
“예!”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는 진무의 말에 괴가 부동자세까지 취하며 대답했다.
“신! 백표!”
“예!”
“니들은 가서 육장 저놈이 딴짓 못 하게 잘 감시해!”
“알겠습니다!”
이미 진무의 성정을 매우 잘 아는 황신과 백표가 재빠르게 대답하고 육장을 둘러멘 괴를 질질 끌며 해형장으로 뛰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청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젠장, 진작 도울걸. 괜히 애만 고생하게…… 어?
백육십 먹고 죽은 청상을 애틋하게 여기며 고개를 돌리던 그가 일순 엉거주춤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청상이 일어나 있었다.
조금 전까지 혼절해 있던 그가 스스로 몸을 세우고…….
“청상아?”
“크으으.”
그런데 상태가 어째 이상했다.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고개 들어 진무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흑요석처럼 반들거리고…….
“크르르르…….”
“!?”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진무를 바라보던 그가 웃었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배고픈 짐승처럼…….
아, 빌어먹을.
저건 물구나무서서 봐도 주화입마다.
등선까지 한 놈이…….
육장의 술법 속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났던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귀모의 검 때문인지도 몰랐다.
망할, 기우였으면 좋았을 것을. 불쌍한 우리 청상이.
“크르르르.”
“…….”
그런데…… 청상아?
너 어째 눈깔이 좀 그렇다?
아무리 주화입마에 빠졌어도 똥오줌은 가려야지? 내가 니 사숙인데 말이야.
하지만 말로 타일러도 들을 것 같지 않은 모양새였다.
“하아, 어쩔 수가 없네. 사질이 길을 잘못 들면 가르쳐 바로잡는 것이 사숙의 도리지.”
스윽.
자신을 적으로 여기며 당장에 달려들 것 같은 청상을 바라보며, 진무는 천천히 소매를 걷어 굳건한 계도의 팔뚝을 드러냈다.
자고로 미친놈에겐 매가 약이라고 했고, 진무는 원래…… 폭력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 아끼는 사질이라 해도.
그러니까 청상아, 어디서 희번덕이냐? 눈 깔어! 이 사질 쉐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