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91
91화
중원 최남단에 위치한 광서성.
중심에서 멀어져 있으나 꽤 이권이 많은 곳이었다.
북으로 가는 경로가 아미, 청성, 당가가 자리한 사천으로 인해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거래는 안전한 사천으로 가지만 대부분의 밀거래는 광서성의 경로로 이루어진다.
주요 사업이 밀거래다 보니 광서성에는 사파의 세력들이 즐비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관부의 통제도 심하지 않으니 사업을 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하지만 광서성에서는 성도보다 더 유명한 곳이 북쪽 도시 계림이었다. 계수나무가 거대한 군락지를 이루어 펼쳐진 그곳은 모든 상인과 여행자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명소였다.
오가는 이들이 많다 보니 객점과 주루가 발달한 것은 물론이고 표국에 전장, 상단의 지점들이 즐비하다.
앞서 말했듯이 관의 통제가 적으니 사파가 득세를 한다.
도시 외곽은 밤만 되면 밀거래품이 오가는 암시장과 도박장, 홍등가가 불야성을 이루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꽃에는 반드시 가시가 있는 법.
바로 계림의 유일한 정파인 백가장이었다.
그들은 사파의 세력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하는 가시로서 누대를 이어 왔다.
초대 장주였던 백혁산의 유지에 따라 사방 백 리 안에 굶는 이가 없도록 은덕을 베푸니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 *
“이런 천인공노할 놈들이! 감히!”
백가장의 대전각이 시끄럽다.
탁자의 중앙에 앉은 장로들의 목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려 퍼진다.
대전각의 중앙.
서신을 들고 있는 여인은 화를 애써 참아 내는 것처럼 손을 떨어 대고 있었다.
“장주! 이것은 본가를 업신여기는 처사가 분명합니다!”
“맞습니다. 감히 이따위 서신을 보내다니요! 당장 놈들의 목을 잘라야 합니다!”
장로들이 당장이라도 저마다의 무기를 꺼내 들듯이 고성을 질렀다.
하지만 여인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인의 이름은 백여린. 당금 백가장의 주인이며, 여인이지만 광서성에서 풍령도(風鈴刀)라는 명호를 가진 이름 높은 무인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한 장의 서신.
붉은 비단으로 감싸고 청실과 홍실로 중앙을 봉한 그것은 혼첩이었고, 백가장의 세력권을 호시탐탐 노려 온 패력당주 노영찬이 보내온 것이다.
“모두 조용히 하라!”
대장로 사마소의 굵직한 목소리에 좌중이 진정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채 참아 내지 못한 분기로 인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백여린이 가까스로 가라앉힌 목소리로 사마소에게 물었다.
“도발이겠지요.”
“도발이라니요! 이는 무시입니다. 대장로님, 당장에 무인들을 소집해 패력당을 공격해야 합니다!”
“어허! 조용히 하라지 않는가!”
“…….”
사마소가 다시 한번 나무라자 외당 장로 이임생이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대장로, 그대의 생각을 말해 보시오.”
백여린의 말에 사마소가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이따위 혼첩을 보낸 놈들의 행태는 결코 좌시할 수 없으나, 그들과의 싸움에는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음.”
냉정한 판단이었다.
십 년 전 혈사 이후로 백가장의 세력은 전성기의 반에도 차지 못했다.
아니, 멸문에 가깝게 파괴당한 백가장이 지금까지 버티며 살아남은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모두가 백여린이 혼사도 포기하고 백가장을 위해 불철주야로 뛰어다녔기 때문이었다.
백가장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와중에 쉰이 넘은 패력당주가 혼첩을 보내 백여린을 희롱하고 있는 것이다. 처도 아닌 첩이 되라고.
가주가 희롱당한 것을 참을 만한 가신들은 없었다.
당장에 싸워야 마땅한 일이었으나, 쉽게 판단할 일은 아니었다.
백가장.
그들은 계림의 지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곳이 공격받는다면 재야의 인사들까지 한마음 한뜻으로 도우려 나설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사파의 세력이 훨씬 더 강함에도 그들 중 누구도 힘 빠진 백가장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영찬이 말도 안 되는 혼첩을 보내 백가장을 도발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싸움의 빌미.
누가 먼저 시작하였느냐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것은 곧 명분이 된다.
만약 백가장이 참지 못하고 나선다면 그들이 시작한 전쟁이 될 테니 주위의 도움을 바랄 수 없었다.
뛰어난 무인들이 즐비한 백가장이었으나 세가 약하니 먼저 공격을 시작하면 분명 큰 피해를 입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참아야 했다.
백여린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래, 참자. 아직은 때가 아니다.
좀 더 힘을 기른 후에 싸워도 늦지 않다. 이미 지난 십 년간 숱한 모멸감을 견뎌 오지 않았던가.
“노영찬에게 전갈을 보내세요.”
“장주!”
“싸움은 없습니다.”
“…….”
“만나자 하세요.”
힘 빠진 목소리에 장로들이 더 이상 반문을 하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백여린임을 알기에.
* * *
“오! 경치 좋은데?”
진무가 길가의 가로수를 보며 감탄했다.
곳곳이 계수나무였다.
중앙 관도뿐 아니라 길목마다 계수나무 꽃이 활짝 피어 절경을 이룬다.
계림의 중심으로 들어서기 전에 자리 잡은 영천현(靈川懸).
길 양쪽으로 넓게 펼쳐진 밭에서 열심히 땅을 일구는 촌로의 모습과 길 좌우로 나지막하게 솟구친 봉우리들이 줄은 이은 모습은 가히 인세의 도원이라 할 만했다.
“계림은 작은 도시가 아닙니다. 모두 열네 개의 현이 포함된 거대한 주부지요.”
백표가 지난날을 회상하듯이 아련한 눈빛으로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의 정취를 느끼고 있는 그 기분은 이해하지만.
진무도 안다.
방금은 그저 감탄사였다.
아주 오래전에 무림을 유랑할 때 몇 번이나 왔는데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백표와 함께 도착하니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음, 하지만 과거와 같지는 않군요.”
진무가 회상하는 사이 백표의 시선은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과거의 백가장은 계림의 모든 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열네 곳의 현 모두가 백가장의 세력권에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오래전의 평화로웠던 계림에는.
와장창!
“이런 시팔! 오늘까지 준비하라고 했지!”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상인에게 보호비를 내라며 괴롭히는 무뢰배도 없었고.
“오냐! 오늘 잘 걸렸다!”
“어? 해 보자고? 좋아, 칼 뽑아 이 새끼야!”
서로를 노려보며 칼을 뽑아 들고 으르렁거리는 사파 무인들도 없었다.
스르릉.
어째 잘 참는다 했다.
“어이, 정지. 적당히 해라. 돌아오자마자 피부터 볼 생각이냐?”
“…….”
진무의 말에 백표가 한숨을 내쉬며 칼을 집어넣었다.
성격하고는.
아니 무뢰배가 상인들 괴롭히고 술 처먹다가 끼리끼리 싸우는 게 뭐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필요하면 그들이 알아서 관에 신고를 해야지. 지가 무슨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나서길 왜 나서?
하여간 정파라는 이름만 달고 있으면 모두가 이런 식이다.
무림인은 무림인이. 범법자는 관에서. 이런 기본적인 사회 규율도 모른단 말인가?
어쨌든 이 망할 놈의 성격을 봤을 때 역시 얼른 떼 버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서둘러 백가장에 보내 놓고 양의심공이나 찾으러 가야겠다.
“야, 가자. 얼른 집에 가야지. 동생 보고 싶다며?”
“동생을 보고 싶다는 말은 한 적이…….”
“부끄러워하기는. 서둘러.”
진무가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자 백표가 사람들을 괴롭히고 거리의 분위기를 어지럽히는 사파 무인들을 몇 번이나 돌아보다 그 뒤를 따랐다.
영천의 경치를 감상할 시간도 없이 서둘러 빠져나온 진무는 한 시진도 되지 않아 계림의 중심에 도착했다.
백가장이 있는 곳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계수나무 숲 쪽이었다.
이제 곧 헤어질 시간이다.
사람 인연이라는 것이 맺고 끊음이 확실해야 하는 것인데 막상 헤어지려니 좀 섭섭하다.
그래도 함께해 온 정이 있으니 밥이라도 한 끼 먹고 보낼 생각에 싫다는 백표를 억지로 끌고 객점을 찾았다.
그래,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름난 요리를…….
“자리가 없습니다. 손님.”
“응?”
“예약이 꽉 차서.”
막 객점의 주렴을 걷어 내는데, 점소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거리며 막았다.
진무가 의아하게 안을 바라보았다. 자리 많은데?
아, 손님은 있구나. 자리에 앉지 않고 서 있어서 그런 거구나.
슬쩍 점소이 너머의 상황을 보니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살기에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었으니까.
객점의 일 층에는 칼 찬 놈들이 부리부리하게 눈을 뜨고 두 패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었다. 딱 봐도 사파와 정파.
둘이 만나면? 일단 째려보는 것부터 시작이다. 태초부터 정해진 사실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광경이 아니던가?
그리고 다행스럽게 사파 쪽이 좀 더 우세하다.
‘듬직한 녀석들.’
몸은 정파이되 마음만은 아직 사파가 아니던가? 대충 복장을 보니 예전에 본 적도 있는 놈들 같은데. 패…… 뭐시기라 했던가?
“어?”
순간 백표의 눈이 찡그려진다.
“왜?”
“…….”
진무가 물었지만, 백표의 시선은 정파의 무인들에게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뭐? 왜?”
“…….”
이 새끼가 갈수록 싸가지가 없어진다. 은인께서 물어보면 공손하게 대답할 생각을 해야지.
하지만 한 번만 더 참아 주자. 어차피 헤어질 마당에.
“야, 가자. 자리가 없다니 딴 데 가서 먹지 뭐. 식당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만큼은 괜한 시비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진무가 몸을 돌리는데.
“어? 야!”
백표가 점소이를 밀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저게 진짜.”
말 한번 거지 같이 안 듣는다.
* * *
계림 중심지에서 제법 유명한 객점, 소담(笑談).
그곳의 객점주는 운이 좋으면서도 더러운 하루를 맞이했다.
손님이 많아도 너무 많다.
미리 예약을 했던 손님들이 일 층과 이 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계림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패력당과 백가장.
하물며 각 세력의 무인들이 아니라 주인들이 직접 찾아오는 바람에 객점 주인은 좌불안석이었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듯한 분위기.
아니 왜! 이놈의 자식들은 어째서 만나는 무대가 객점 아니면 주루란 말인가?
길거리도 있고, 들판도 있고, 하다못해 제 놈들 집도 있는데! 써먹을 장소가 그렇게도 없냐?
그리고 하필이면 어째서 많고 많은 객점 중에 소담이란 말인가?
객점주는 중원의 모든 주루와 객점을 대표해 울분을 쏟아 내고 있었지만, 힘이 없는 게 곧 죄가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객점주는 이 층에서 시중을 들며 혹시나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까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패력당주님의 말씀은 고마우나 본 장주가 모자라 정중히 사양하는 바요.”
백여린의 거절에 노영찬이 음흉하게 웃는다.
“모자라다니요. 무공이면 무공, 미색이면 미색. 어디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분이 아직 혼자시니 걱정이 되어서 그렇지요.”
“높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다시 한번 거절을 해 보지만, 노영찬은 조금도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허허, 걱정이랄 게 뭐 있겠소? 자고로 운우지정(雲雨之情)이니, 음양합일(陰陽合一)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소? 서른이 넘도록 그 즐거움을 모르시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런 게지요.”
“…….”
노골적인 희롱의 언사에 백여린의 고운 아미가 분노로 움츠러들었고 장로들이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듯 싸늘한 기세를 피워 올렸다.
“호오? 말이나 나누자더니 칼을 뽑으시려고?”
노영찬은 마치 그런 분위기를 즐기듯이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오해하셨군요. 이만한 일로 칼부림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오히려 백여린이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들어 장로들을 진정시켰다.
“우리 백가장은 괜한 오해로 싸움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혼첩은 감사하나 거절임을 아실 터이니 그만 물러가 주시지요.”
“위명 쟁쟁하신 풍령도 장주께서 개새끼처럼 꼬리를 마시니 어쩔 수 없지. 혼첩은 한번 생각해 보시구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소?”
끝까지 뱀처럼 음흉한 눈으로 백여린의 몸을 훑은 노영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면 이만 가리다. 좋은 만남이었소. 자주 이런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군. 주루도 좋고, 침소도 좋고.”
“…….”
노영찬은 끊임없이 백여린을 도발했다.
여인으로서 느끼는 수치심을 감안하면 당장 싸움이 일어나도 어색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아, 차라리 지금 침소로 가는 것은 어떻소? 혼례가 뭐 대수겠소? 오가다 만나서도 인연을 맺는 게 이 무림인데.”
조금 더 노골적인 도발. 하지만 백여린은 주먹을 움켜쥐었을 뿐 참고 또 참으며 억지스럽게 미소를 유지했다.
놈은 일부러 자신이 칼을 뽑게끔 만들려 유도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버텨 내야 한다.
수치는 참으면 된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어렵게 지켜 온 백가장이 다시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몰랐다.
“가자니까? 내가 잘해 준다니까?”
뻐억!
노영찬이 백여린을 향해 음흉한 눈빛으로 다가서는데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타격음.
콰직! 퍼억!
소란스러움이 객점을 가득 채운다.
설마 아래층에서 싸움이 일어난 것인가? 그토록 주의를 주었건만.
미간에 골이 깊게 파인 백여린이 벌떡 일어나자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이 층에 있던 패력당과 백가장의 무인들이 일거에 칼을 뽑아 들었다.
“니들은 뭐냐?”
그 순간 낮게 깔려 나오는 스산한 살기와 함께 이 층으로 올라서는 무인.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이건 또 뭐야?”
노영찬이 그의 손에 잡힌 패력당의 무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오, 오라……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