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62
262. 거짓말
“제가 타드릴게요.”
손을 걷어붙이고 서재 한쪽 벽으로 향했다.
호텔에 있는 미니 바 정도 크기의 선반을 여는데, 뒤쪽에서 흐뭇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먹여도 주셔야 합니다.”
“당연하죠. 호호 불어드릴게요.”
“그건 좀······.”
백한길 회장의 반응에 키득거리며 선반 안을 훑었다.
원래 그는 묽은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일페르소도 그랬지. 전생과 현생이니 당연한 얘기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원래 이 선반 안엔 한국의 나이 지긋하신 회장답게 유자차나 율무차, 그리고 홍차는 티백 정도가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홀리프(-홍차 최고 등급) 홍차들이 즐비해졌다.
그것도 며칠 사이 더 는 것 같다.
“커피 연하게 타 드릴까요?”
“아뇨, 가장 왼쪽에 있는 홍차로 부탁드립니다.”
“홍차 입에 안 맞는다고 하셨···어, 아삼(Assam)이네요?”
인도에서 생산되는 홍차의 한 종류. 아삼이 담긴 유리병을 들어 올리며 내가 말꼬릴 올렸다. 그러자 백한길 회장이 낮게 웃으며 답했다.
“마셔버릇하니 또 먹을 만하더군요.”
“의외네요. 전생엔 통 입에 안 맞아 하시더니.”
“확실히 전생과 달라진 점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희 둘 다 전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잖습니까. 백작님은 음악을 하시게 되었고, 저는 이렇게나 큰 기업을 이끌고 있으니 말이죠.”
“예전부터 일페르소가 셈이 참 뛰어났죠. 아버지가 항상 그러셨어요. 일페르소가 바덴바덴에 온 뒤로 도시가 더욱 풍요로워졌다고.”
멋쩍은 미소를 짓는 백한길 회장의 곁으로 차를 가지고 갔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또 먹여주기도 하면서 도란도란 추억을 풀어냈다.
이미 서로가 서로를 확인한 뒤로 이곳에서 수없이 이야기꽃을 피웠지만, 그럼에도 끝이 없다. 아마 옛 정원을 모두 뒤덮을 만큼 피울 수 있으리라.
“그나저나, 무슨 고민 있으셨어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음악을 들릴 듯 말듯 작게 듣고 계셨잖아요. 그거 고민 있을 때마다 그러시잖아요.”
그래도 나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백한길 회장을 보며 알게 된 습관 중 하나였다.
고민이나 생각할 거리가 있을 때마다 클래식을 작게 틀어놓는 것.
강렬한 클래식을 듣다 보면 어느새 음악을 음미하느라 생각을 깊게 할 수 없다며 이렇게 작게 틀어놓는다고 했었지.
이것 또한 전생엔 들을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긴 하다. 당시엔 볼륨을 오로지 연주자가 힘의 세기로 조정해야 했으니 한계가 있었잖나. 이렇게 들릴 듯 말듯 들려오는 클래식도 나름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살짝 묽게 탄 아삼을 홀짝이는데, 백한길 회장의 고민 섞인 얼굴이 보였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결심을 했는지 입을 열었다.
“······백작님 생각도 궁금하네요.”
말문을 뗀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자신이 친한 이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나름대로 상대를 배려한 처사였으나, 그것이 마음에 남는다고.
간단한 설명을 듣고서 나는 되물었다.
“선의의 거짓말도 거짓말이냐의 문제네요?”
“그렇게 볼 수 있겠죠.”
그렇다면······.
“거짓말이죠. 어쨌든.”
“역시. 그렇군요. 그러면 제대로 얘길 해야겠······.”
“하지만 때론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는 거잖아요.”
아프지만, 아프다 하지 않고.
슬프지만, 슬프다 하지 않는 게.
내게 늘 정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때론,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굳이 모두가 아플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가요.”
“제 생각은 그래요. 물론 회장님의 선택이 더욱 현명하겠지만요.”
“음악의 예언가만 할까요.”
“끙. 그것도 어디까지나 ‘음악의’ 예언가란 걸 아셔야 해요. 인생에 있어선 회장님이 전생에도, 그리고 지금도 선배잖아요.”
씁쓸하게 웃음 짓는 백한길 회장.
나는 그에게 그래서 누구에게 어떤 거짓말을 했는진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잠시 기다렸다. 그가 가라앉은 얼굴로 무언가를 곱씹기에.
“아 참.”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그가 나를 바라보며 다시 푸근하게 웃을 때쯤.
나는 분위기를 환기 시키려 말을 돌렸다.
“저 앨범에 들어갈 연주곡 제목 정했어요.”
“그 ‘하프’ 말이죠?”
“네.”
고민이 여전히 깊은 걸까?
백한길 회장이 오히려 아까보다 더 어두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무엇인가요?”
#
어느새 고요해진 서재.
백한길 회장은 말끔히 치워진 테이블 위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상념에 빠졌다.
떠난 이가 남긴 곡명(曲名)을 떠올린다.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하필 그런 이름이라니······.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기분이었다.
‘오늘만큼은 정말 술이 마시고 싶네.’
몹쓸 병이 찾아온 이후로 그리 어렵지 않게 끊어낸 술이었지만, 오늘만은 그립다.
해맑게 그런 곡명을 전하고 간 백작님의 얼굴이 떠올라 괴롭고.
전생의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괴롭혀 더욱 그렇다.
‘또 올게요.’
그럼에도 말할 수 없는 건.
‘이제 그만 오셔도 됩니다.’
‘아뇨, 전 괜찮으니까······.’
그녀의 추모가 백작님의 사후에도 수년간 이어졌기 때문이고.
‘이제 그만 오세요.’
‘그때도, 지금도 막으시네요. 백작님을 보지 말라고.’
그녀의 원망 어린 눈빛에서 행복은 커녕 늪과 같은 슬픔이 보여서였고.
‘그분이 원하셨으니까요. 그때도,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백작님은 연주자님이 행복하게 사시길 바라셨습니다.’
‘집사님은 모르세요. 그분이 진짜 뭘 원했는지. 그분은 사람들과 함께 하길 원했어요. 저 방에 갇혀 계시는 걸 원한 게 아니라고요.’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시기에,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들키고 싶어 하진 않으셨습니다.’
‘집사님은 숱하게 보셨잖아요. 괜찮았잖아요. 저도! ······저도 괜찮아질 수 있었어요.’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녀도 자신처럼 백작님 곁에서 끝까지 행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들어서였으며.
‘백작님이 안 괜찮으셨어요.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백작님께 아실리 당신은 저처럼 편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요. 한없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첫사랑이었으니까요.’
뒤늦은 고백과.
‘집사님, 저요······그때 놀랐어요. 그래서 뒷걸음질 쳤고, 입을 막았어요. 소리를 지를까 봐.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그분을 본 게.’
뒤늦은 후회.
‘전 그 순간을 끊임없이 되새겨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면 안 됐는데. 그때 놀라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냥 방 안에 있었더라면···!’
죄책감과.
‘그러니, 또 올게요.’
그렇게 말하고 떠났으나, 얼마 뒤 들려온 그녀의 소식까지.
그때의 기억과 감정들이 한데 엉켜 목구멍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그녀의 말은 반만 맞았다. 모르지 않았다.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그저 백작님이 하는 말만 들었다.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시기에 만나지 못하게 했다. 다 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하시기에 더는 이곳을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새로운 생으로 만나서도 말하지 않았다.
‘때론,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굳이 모두가 아플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막상 아실리에 대한 이야기라면 아닐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싶어 하시겠지. 진정 그것을 원하시겠지.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제는 슬퍼하시면 토닥여드릴 손조차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이니까.
“후우······.”
텁텁한 한숨이 길게 이어졌다.
죄책감이 고요마저 침묵시킨 밤이었다.
#
“으어어어어······.”
강의실에 좀비에게서나 날 법한 소리가 들끓었다.
다행히 전염성은 없는지 유채봄 한 명만 그러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최겨울이 익숙하면서도 늘 이상한 고교 동창을 향해 질색하는 눈빛으로 툭 던지듯 물었다.
“또 왜 그러는데?”
“한서호 교수님 수업 예습하다가 죽는 줄. 너 베토벤이 생전에 대략적으로 몇 곡을 작곡했는 줄 알아?”
“교향곡 9개, 현악 4중주 17개······.”
“얼씨구 곡 종류까지? 쩝, 난 몰랐는데. 아무튼 베토벤 전곡 다 공부하고 와야지 하고서 하다가 하다가 도저히 끝이 안보여서 알아봤더니 그렇더라구.”
“무식하면 용감하지.”
“야잇! 게다가 도서관에서 베토벤 관련 서적 다 빌리기까지 했는데. 것두 다 못 읽었구······.”
말을 이어가던 유채봄이 흠칫거리며 주변을 훑었다. 주변에 있던 학우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것도 어쩐지······.
“뭐지. 분위기가 다들 싸늘해.”
이에 최겨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이 과목에 아주 진심이잖아.”
“그게 왜?”
“며칠 전에 학교 도서관에서 일하는 선배가 그러더라. 베토벤 관련 책들 전부 누가 빌려 갔는데, 사람들이 계속 찾아온다고.”
“아···?”
사태의 정황을 깨달은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황급히 말머릴 돌렸다.
“그, 그나저나 특별손님! 대체 누가 오는 걸까?”
“글쎄. 한서호 교수님이면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 같은데.”
최겨울도 그것만큼은 흥미가 있는지 궁금한 얼굴로 복도 쪽을 훑었다. 그때 앞쪽 문이 열리며 노트북과 수업 자료를 한 아름 든 과대가 들어왔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교탁에 들고 있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은 뒤에도 여전히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사람처럼 표정이 부자연스럽다. 걷는 것도 마찬가지.
“로봇이야 뭐야.”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몸동작을 보며 유채봄이 갸우뚱했다.
“오빠. 왜 그래요?”
“어? 아냐 아무것도.”
“뭐야 그 뻔한 대사는. 너무 무슨 일 있는 거잖아요.”
그때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최겨울이 물었다.
“혹시 교수님께 갔다가 특별 손님이 누군지 본 거예요?”
“어······?”
“진짜? 진짜?”
당황한 과대가 멍하니 최겨울을 보았고, 옆에서 유채봄이 펄쩍 뛰며 흥미를 보였을 때였다.
드르륵—.
이번엔 뒷문이 열리며 외국인들이 들어왔다. 한국예대에 외국인 학생들이 부쩍 많아진 터라 그게 특별한 일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문제는 그 외국인들이 전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이었다는 것.
자연스레 강의실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저분들이 특별손님인가?”
“뭐야, 할아버지들이신데?”
해맑게 수근거리는 학생들과 뭔가를 눈치 챈 듯 경악하는 학생들.
유채봄은 그중에서도 전자였다.
“와 근데 뭔가 되게 얼굴이 익숙하다.”
“······.”
“무슨 오케스트라 실황 같은 데서 본 줄. 하하.”
유쾌하게 웃던 유채봄의 시선이 최겨울을 향했다. 이미 그녀는 눈치를 채고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하하하하······.”
그 모습에 웃음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유채봄.
홱—홱—.
그리고 그들 쪽으로 고개가 두어 번 정도 왕복하고 나서야.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