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68
68. 혼례
붉디붉은 원령포에 대삼을 차려입은 창의 목에 띠 모양의 하피가 걸쳐지고, 구름처럼 올린 머리에 구슬로 만든 꿩과 은빛 꽃으로 장식된 푸른 봉관이 얹혔다.
“황가의 금지옥엽을 보는 듯합니다.”
흡족해하는 홍연과 달리 창은 무거운 봉관 위로 붉은 천이 덮여 시야를 가리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금지옥엽이 아니라 비단에 싸여 공물로 바쳐지는 고려삼 같습니다. 이거, 얼굴 가리는 천은 나중에 하지요.”
“개두 말입니까.”
“개두인지 소두인지 답답해서 안 되겠습니다.”
얼굴을 가린 붉은 천을 훅훅 불어 날리던 창이 손으로 잡아당기자 봉관에 걸려 머리까지 기울었다.
“조금만 참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명륜원의 술판이 언제 끝날 줄 알고요.”
불같은 성품을 아는 홍연은 서둘러 개두를 들어냈다.
“운공 오시기 전에는 반드시 쓰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창은 얌전히 두 손을 포개어 침상에 앉았다.
전야를 즐기는 명륜원의 풍악 소리가 청풍각까지 들려왔지만, 그녀의 마음은 전쟁을 앞둔 무사처럼 무겁다.
홍연과 시녀들을 내보낸 창이 문가에 선 총총에게 손짓하자 머뭇머뭇 침상으로 다가왔다.
장호의 말처럼 진실은 거대한 벽이 되어 그들 사이를 갈라 버렸지만, 창은 또다시 총총에게 손을 내민다.
“나와 조선으로 가자.”
“아씨…….”
바닥에 엎드린 총총이 창의 발에 이마를 대며 뜨거운 눈물이 버선발을 적셨다.
“믿지 않아도 좋으니 나와 가자.”
“믿어요. 아씨를 믿어요.”
“내가…… 널, 포기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데. 소당주님도 믿어요.”
혼란으로 가득한 총총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창의 귓가로 장호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천적인 착호군의 존재에도 창이 있는 영원사를 맴돌던 단이처럼, 총총은 청림이 있는 태화당을 떠날 수 없다.
“나는 숙명을 믿지 않는다. 대신 널 믿으마.”
늘 가까이 품고 살았던 단도를 총총에게 쥐여 주었다.
“반드시 살아남거라.”
명은 붉은색이 길조라. 황혼이 붉게 물들 때에 거행되어야 할 혼례가 밝아 오는 여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우렁찬 친위대의 노랫소리가 청풍각을 뒤흔든다.
「살어리랏다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노래 가사는 슬프기만 한데, 부르는 이들은 더없이 즐거우니 심란한 창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붉은 쌍희 자가 붙은 창밖으로 연회에 참석했던 친위대가 떠오르는 여명처럼 붉은 물결을 이루며 몰려왔다.
침상에 앉은 창의 머리로 붉은 개두가 씌워졌다.
왁자지껄 웃음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선 장호가 창에게 붉은 꽃신을 신겨 주었다.
“기다리게 하여 미안하다.”
“응.”
그의 품에 안겨 꽃가마에 오른 창은 청풍각을 나서 소용각으로 향했다. 꽃가마가 지나는 길목마다 새하얀 쌀이 뿌려지고 구경 나온 태화당 식솔들이 환호하며 축복했다.
태화당을 빙 돌아 온 듯 한참이나 걸려 소용각에 도착한 창은 말에서 내린 장호의 등에 업혀 대문을 넘었다.
“오라버니한테 업히는 거 오랜만이네.”
“앞으로 매일 이렇게 산책하자꾸나.”
그윽한 체향을 지울 만큼 진동을 하는 술 냄새에 창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소당주 보낼 만큼?”
소용각의 대문을 넘은 창은 붉은 비단길에 내려서 그의 손을 잡고 액운을 태우는 화로를 넘었다.
하늘과 땅에 절을 하고 얼굴을 가린 개두가 들리자 창은 온통 시뻘겋게 단장한 소용각을 올려다봤다.
“청풍각만 그런 줄 알았더니, 여기도 만만치 않네. 멀리서 보면 불난 줄 알겠어.”
“나는 안 보이는 게냐.”
“어지간히 우람하셔야 안 보이지?”
종4품 부호군이었던 장호는 숭왕의 뜻에 따라 조선의 관직 그대로 명의 4품 관복을 입었다.
매의 날개처럼 뻗은 눈썹, 사나운 눈매와 달리 검다 못해 쪽빛을 띠는 눈동자는 서글서글했다. 우직한 콧날에 굳게 다문 입술과 굵은 턱선이 세상에 이렇게나 잘난 낭군이 있을까.
‘무관복에 환도 차고 운종가 걸을 때도 멋있었는데.’
붉은 원령삼에 기러기 보자 위로 복대를 두르고 검은 오사모를 쓴 그의 모습에 창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붉은 비단길을 걸어 소용각에 든 장호와 창은 부모님 대신 상석에 자리한 숭왕에게 절을 하고 차를 올렸다.
술 내음을 진득하게 풍기던 숭왕이 연거푸 차를 들이켜며 주섬주섬 종이를 펼쳐 들었다.
“운장은 용맹한 아내의 방패가 되어 주고, 창 부인은 낭군의 보검이 되기를 바라노라.”
어색한 조선말로 흘러나온 애정 어린 덕담은 극과 극을 달리는 창과 장호의 성품을 관통하고 있었다.
할매 생각에 울컥하던 창이 입술을 깨물자, 숭왕이 곁에 선 시종에게로 슬그머니 몸을 기울였다.
「부인의 표정이 좋지 않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인가?」
「올바로 읽으셨습니다.」
‘아무리 사나워도 칼이 되라는 건 좀 심했나?’
문관의 처라면 모를까, 무관의 배필로서는 더없는 기질을 칭찬하고 싶었던 숭왕이 시종에게 손짓했다.
「내 조선말이 서툴러 보패를 보검으로 잘못 읽었노라. 얼른 다시 전하라. 낭군의 보패가 되기 바란다아~ 하고.」
시종의 말을 전해 들은 창이 고개를 저으며 엎드렸다.
“담장 안의 꽃으로 머물지 않고, 낭군의 검이 되어 무덤까지 함께하겠습니다.”
「그녀의 방패가 되어 벗처럼 화이부동*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장호의 대답에 숭왕이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평범한 사내는 감당 못 할 여장부를 얻은 것 또한 그대의 홍복이라.’
「사왕야, 북경으로 출발할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호위장의 말에 몸을 일으킨 숭왕이 고개를 틀었다.
「소당주는?」
「아직 일어나지 못하셨다 합니다.」
「조만간 북경에서 볼 테니, 기별 말고 감잎차나 넉넉히 들이거라.」
호탕하게 웃으며 소용각을 나선 숭왕의 뒤로 붉게 단장한 청마에 오른 장호와 창이 탄 꽃가마가 줄을 잇는다.
숭왕의 손짓에 장호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자 주위를 에워쌌던 친위대가 물러서며 간격을 벌렸다.
「조선으로는 언제 떠날 생각인가.」
「…….」
「지금 명에서는 척을 져선 안 되는 이가 딱 둘이 있지. 만 귀비와 태화당.」
장호의 침묵에 예상했다는 듯 숭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한데, 이 둘이 명 황실 내에서 대립 중이란 말이지.」
「…….」
「늙은 구미호가 황손의 씨를 말리는 사이, 궁녀 기씨가 비밀리에 낳은 황자를 태감이 궁 밖으로 빼돌렸네.」
다섯 살이 된 황자가 입궁하여 황태자에 오르던 해, 태자를 보호하던 생모 기씨와 태감이 비명횡사했다.
「태감 장민은 태화당주 왕희의 사람이었네.」
「…….」
「북경 태화당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태화당주를 만나러 왔는데, 매수한 환관들의 명부를 내주더군.」
청림의 말을 되새기던 장호는 살생부가 될지 모를 명부를 받았다는 숭왕을 응시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적의 적은 동지란 말도 있지 않은가.」
「제가 소당주와 척을 지리라 생각하십니까.」
장호의 반문에 숭왕은 까맣게 말라붙은 왕희를 떠올렸다.
‘그와 반목하여 살아남은 자가 없네.’
혼례 오찬을 취소하고 청풍각으로 돌아온 장호는 침상에 앉은 창의 봉관부터 내려 주었다.
“돌아가면 할매 앞에서 족두리 한 번 더 쓰련?”
“그르까?”
얌전히 머리를 대고 있는 창에게서 금으로 된 꽃과 나비들을 떼어 낸 장호가 한껏 긴장된 손으로 옷고름…….
투둑.
맥없이 뜯어진 비단 조각을 쳐다보던 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손에 들린 옷고름을 낚아챘다.
“오라버니.”
“나는…… 내가…….”
“상방 침모들이 고생해서 만든 걸 뜯으면 어떡해.”
“여인네 옷고름이 익숙지가 않아서.”
곰 발바닥 같은 그의 손을 밀어낸 창이 몸을 돌렸다.
“내가 할게, 내가.”
붉은 원령포를 시작으로 겹겹이 입은 옷들을 훌훌 벗어 던지는 그녀의 모습에 장호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래서…… 황혼에 식을 치르는 거구나.’
창문에 붉은 쌍희 자를 투영한 봄볕에 방 안 전체가 시뻘겋고, 속적삼 차림으로 예복과 장신구를 정리하는 그녀에게선 새색시의 부끄러움 따윈 찾아볼 수 없다.
“다 했다!”
폴짝 침상 위로 뛰어오른 창이 벌겋게 달아오른 장호에게로 바짝 붙어 앉았다.
“백년낭군님 눈에서 술 백 년 치가 뚝뚝 떨어지는데?”
훤히 비치는 속적삼에 뽀얀 젖가슴이 눈앞에 아른아른, 붉게 달아오른 장호는 뒤늦게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했다.
“서방님보다 낭군 소리가 듣기 좋구나.”
“아우님 있으시다며. 그 도련님 장가들면 서방님이라 불러야 하는데, 혹시라도 헷갈릴까 봐.”
“얼굴을 본 적 없어 길에서 마주쳐도 모를 게다.”
웃음 짓는 그의 눈을 응시하던 창이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이렇게 술을 좋아했었나?”
그의 이마에 손을 얹은 창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장호가 그녀의 손을 잡아 가슴에 댔다.
“혼미해지는 것이 싫어 즐기지 않는다.”
“오라버니가 이 정도면 소당주는 죽은 거 아니야?”
“죽지는 않아도 죽을 만큼 아프겠지.”
독하게 새벽까지 버티며 백지장 같은 얼굴로 술을 들이켜던 청림은 순식간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상 위로 떨어지는 그의 얼굴을 손으로 받친 장호는 새까맣게 반짝이던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손바닥으로 떨어진 눈물 한 방울, 알 수 없는 애잔함에 장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게도 그녀는 시작과 끝이다.’
장호는 그녀를 위해 준비한 혼인 선물을 내밀었다.
“노리개를 좋아하지 않으니 마땅히 고를 것이 없었다.”
“노리개는 무슨! 던져도 잘 날아가지도 않는 거.”
손사래 치며 비단을 풀어 헤친 그녀의 담갈색 눈동자가 황금 별을 담은 듯 반짝였다. 손잡이에 나비가 새겨진 단도를 집어 든 창이 칼집을 빼서 손목을 틀었다.
“오~ 묵직해. 이전 거는 도신이 좀 짧다 싶었는데.”
한 치가량 긴 단도가 작은 손에서 깔끔하게 회전한다.
“마음에 드느냐?”
“흐읏, 낭군님~”
맛있는 꿩을 씹을 때처럼 신음을 토해 낸 창이 답삭 안겨 쪽 소리 나게 입맞춤했다. 그의 몸이 기우는 찰나 폴짝 뛰어내린 그녀가 문지방을 향해 단도를 던졌다.
퍽!
으쓱으쓱 단도를 뽑아 든 창이 날을 살피곤 침상 기둥을 향해 팔을 뻗었다. 선물이 마음에 쏙 드는 그녀는 자객처럼 화려한 동작으로 연신 비수를 날렸다.
퍽! 퍽! 퍽퍽퍽!
적당히 하고 침상으로 돌아와 주면 좋으련만…….
*화이부동: 화목하게 지내지만 자신의 중심과 원칙을 잃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