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85
85. 뜻밖의 재회
저녁 예불을 준비하는 스님들이 법당 안으로 들어서자 창은 장호의 손을 잡아당겼다.
“저녁 예불은 안 드리오?”
“해인사의 스님들 전부 모이실 텐데, 혹여 알아보는 스님이 계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지금의 나를 보며 작고 빈약했던 동자승을 떠올리는 스님은 없을 게요.”
겨우 1년 남짓 머물렀다는 그의 말에도 법당을 나선 창은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출한 동자 스님이 임신한 아내까지 대동하고, 어찌 이리 당당하십니까.”
“가출이 아니라 출가였소.”
창은 그녀의 손에 입맞춤하려는 장호의 얼굴을 밀어내며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어머니께서 다니시던 절입니다. 낭군님이 아니어도 절 알아보는 이가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거승만 백여 명이 넘는 해인사라오. 한 해에 드나드는 손님이 쇠털처럼 많은데, 부인을 알아보는 이가…….”
“차아아아앙!”
우렁찬 외침에 장호의 옆으로 고개를 뺀 창은 그들을 향해 돌진하는 스님을 쳐다봤다.
‘창이란 이름 아는 이가 별로 없는데…….’
달려오던 스님은 뒤쫓는 스님에게 잡혀 널브러졌다.
『내가 잘못 본 걸 수도 있으니까. 조용히 좀 해.』
『그녀가 맞다니까. 우읍! 푸린! 비키지 못해?』
『진정하라고 친구, 들키면 첩자로 오해받을 거야.』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에 뒤엉킨 스님들이 쏟아 내는 만주어에 장호와 창은 약속이나 한 듯 눈을 맞췄다.
“토……이모?”
푸린을 밀쳐 낸 토이모가 창에게로 다가서고, 본능적으로 막아선 장호의 모습에 푸린이 토이모를 잡아당겼다.
『이러다가 둘 다 죽는다고.』
『알았으니까 좀 놔.』
또다시 실랑이하는 두 야인의 목덜미를 움켜쥔 장호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조용히. 따라오너라.”
책상과 자그마한 반닫이 하나만으로도 비좁은 선방에 장정 셋과 들어앉은 창은 가슴이 답답하다.
‘야인의 신분으로 어찌하여 사선을 넘은 것인가.’
연신 배를 쓸어내리는 그녀의 모습에 점점 침울해지는 토이모를 응시하던 장호 역시 수심이 가득하다.
“해인사는 합천 전투에서 고전하는 태조 왕건에게 승병을 파병했던 희랑 대사가 계시던 곳이다.”
“그리 어려운 말은 못 알아듣습니다.”
창의 조언에 토이모와 푸린을 응시하던 장호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진족 토벌에 항마군*을 운용했던 고려, 하물며 국찰이라 불리던 호국 도량에 야인이 웬 말인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찾아왔더냐.”
장호의 말에 토이모가 가슴에 품은 서신을 내밀었다.
[야인 벗이여, 무사 귀환을 바란다. 언젠가 해인사의 붉은 단풍을 볼 수 있다면 좋겠구나. – 창]단아한 글자를 읽어 내리던 장호가 창에게 서신을 건네자 그녀가 고이 접어 봉투에 넣었다.
“고운 작별 하고 오라는 낭군의 말을 어기고, 서신만 건네어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조선의 단풍을 보러 사선을 넘었다 생각하오?”
“살아서 돌아가란 뜻이었습니다.”
무사 귀한으로 끝냈어야 했는데, 너무 야박한가 싶어 한 문장 더한 것이 너무 멋을 부렸나 보다.
“토이모, 너 정말 단풍 보러 온 거야?”
“네가 잘 지내는지 보고 싶어서.”
어머니에게는 폐사군에 놀러 간다 말하고 푸린을 꼬여 가출한 토이모는 강을 건너며 변발도 밀어 버렸다.
산사에서 승복을 얻어 입고 탁발승 행세 하며 한성을 지나 남하했다. 범에게 쫓기고, 산적에게 털리고, 상거지가 되어 도착한 해인사에는 창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자주 다니던 곳이니까 오라고 했겠지. 기다리고 있으면 나타나지 않을까 했어.”
‘강을 건너는 늑대를 보셨다더니…….’
꿈자리가 사납다던 할매의 말을 되새기던 장호는 육식 체질에 절밥 먹느라 피골이 상접한 야인들이 측은하다.
늑대라기에 이랑대를 떠올렸던 그는 단이의 영역인 지리산을 벗어나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웠는데.
“기다리는 줄 알았으면 서둘러 올 것을 그랬구나.”
“지금이라도 이리 만났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창이 영락없이 스님처럼 보이는 토이모와 푸린을 이리저리 살폈다.
“너 말투 엄청 이상한데, 어떻게 야인인 걸 안 들켰어? 푸린은 고려 말도 모르잖아.”
“푸린은 벙어리 행세하고, 나는 폐사군에서 온 고려인이라고 했어.”
부목 스님 밑에서 장작을 팬 지가 한 달이 되어 가는 토이모는 장호를 무시한 채 창만 쳐다보고 있다.
“너는…… 잘 지내는 거야?”
“으응.”
그가 죽을 고비를 넘기는 동안 잘 살았다 답할 수 없던 창을 대신하여 배 속에 든 쑥떡이가 발길질을 했다.
움찔 놀라 배를 쓰다듬는 그녀를 망연하게 바라보던 토이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얼굴 봤으니까 이제 됐어.”
애써 섭섭함을 감추는 그는 영락없이 열여섯 소년이다.
“여비가 모이는 대로 돌아갈 거야.”
“여비는 내가 내어 줄 테니 걱정 말거라.”
장호의 목소리에 발길질해 대던 쑥떡이가 잠잠해지자 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성에서 낭군을 수소문했다면 고생 덜했을 텐데.”
“운장 살던 옛집에 찾아갔었어.”
태화당 연회에서 운장 자랑을 많이 들었던 토이모는 어렵지 않게 장호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집은 엉망이고 아무도 없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화적패가 다녀갔나 보지. 문도 뜯어지고, 텅 비었어.”
“임금이 사는 왕도에 화적패가 어디 있어?”
창의 다그침에도 머물렀던 시간이 짧은 토이모에게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없었다.
달빛 아래 장호를 찾아 나선 창은 국사단 앞에 선 장호의 모습에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무엇을 그리 보고 계십니까.”
그가 바라보는 탱화의 주인은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였다. 여신들의 흔적을 지워 가는 조선에서 가야의 시조를 낳은 그녀는 여전히 해인사의 가람신으로 자리해 있었다.
“한성에 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곱단네 소식을 들은 후로 말이 없는 장호지만, 그 마음은 새하얀 월광처럼 창의 가슴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곱단이에게 우리의 행선지를 말했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됐소.”
“진정 그로 되었다 생각하십니까.”
조용한 그녀의 목소리에 장호가 숨을 들이켰다.
“벼슬아치가 아니니 역모에 휘말린 것은 아닐 테고, 왕도에 도적패가 들 리 또한 없으니 별일 아닐 게요.”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종사관에게 종종 들여다봐 달라 부탁하였으니, 큰일은 아닐 게요.”
‘한데 어찌 그리 근심하십니까.’
장호의 망설임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창은 돌아서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새끼 지키는 암범보다 사나운 범은 세상에 없습니다.”
‘해서 내가 부인 곁을 떠날 수 없는 거요.’
한성에 다녀오기를 바라는 그녀의 마음을 알지만, 장호는 애써 근심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든든한 수컷이 곁에 있다면 사나울 필요 없지.”
“단이 콧등의 상처도 못난이 가야 짓이랍니다. 어디 감히 낭군 얼굴에, 사람이었다면 왕비여도 폐출감입니다.”
울분을 토하는 창의 손을 토닥이던 그가 걸음을 뗐다.
“총총 찾으러 나왔다가 딴생각에 빠져 버렸군.”
“조금 아까 들어와 잡니다.”
해인사에 도착하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러 나간 총총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고기 구운 내가 폴폴 나는 것이 어디서 무얼 잡아먹고 왔는지. 토끼는 절대 잡지 말라 일렀는데…….”
“범이라면 질색인 아이가 어찌 야밤까지 산을 탈까.”
“영악한 아이이니, 힘의 흐름을 간파했겠지요.”
귀신 잡는 단이, 단이가 무서워하는 할매, 그 할매의 천적인 총은 지리산에서 창 외에는 천하무적이 되었다.
“이곳은 지리산과는 다르니 조심하라 이르오.”
“단이의 각시가 산군으로 있어 괜찮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제집처럼 드나드는 단이도 적응 안 되는 장호는 가야까지 새끼를 달고 나타날까 걱정이다.
“가야가 부인은 알아볼지 모르나, 시댁 식구까지 챙기기엔 무리가 좀 있지 않소. 사람도 아닌데.”
“단이 냄새가 잔뜩 묻은 우리를 가야가 해칠 리 없습니다.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겁니다.”
아무리 미워도 단이의 각시였기에 창은 못 미더워하는 장호의 손을 꼭 움켜쥔다.
“걱정 마셔요. 사람이었다면 애기들 데리고 인사 왔을 가야인데, 참으로 아쉽습니다.”
“범에게 시어머니 노릇까지 하려 하오?”
미소 짓는 장호를 올려다보던 창이 방긋 웃었다.
“그 못난이가 싸움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아십니까. 가야의 영역 안에서는 우릴 지켜 줄 겁니다.”
“싸움 잘하는 며느리 얻어 좋으시겠소.”
“정녕, 한성에는 아니 가 보시렵니까.”
질색을 하는 가야 자랑이 왜 이리 늘어지나 했더니, 이야기는 다시 한성으로 향했다.
“돌아오실 때까지 불공이나 드리며 기다리겠습니다. 절벽 위의 집보다야 해인사가 훠얼씬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리다.”
“천겁이 흘렀어도 옛일은 아니요, 만세의 앞날도 언제나 지금이라.”
“그만하면 알아들었소, 부인.”
“홍류의 계곡은 변함이 없고, 낙락장송의 기개 또한 옛날과 다르지 않아라~”
얌전히 기다리겠다는 말을 구구절절하게도 읊어 대니 장호는 결국 두 손 들고 말았다.
“날이 밝으면 다녀오리다.”
인시(새벽 3시)의 목탁 소리를 들으며 해인사를 떠난 장호는 이튿날 정오가 되어 한성에 들어섰다.
대문이 떨어져 나간 한성 집은 좌포청 포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장호를 알아보고 비켜서는 포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선 그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화적패가 지나간 것 같다더니…….’
문짝은 물론 마루와 기왓장까지, 성한 구석이 없는 집에서 행여나 핏자국이 있을까 꼼꼼하게 살폈다.
“보란 듯이 일부러 부숴 놓은 것 같지 않은가?”
좌포청 종사관이 부서진 장독대를 살피는 장호에게로 다가섰다. 흑립을 쓰고 철릭을 입은 최강직의 눈매가 범죄 현장을 살피는 듯 예리하다.
“소식 전할 길 없어 난감하던 차에 어찌 알고 왔는가.”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 하지 않던가.”
장독대 파편으로 손바닥을 두드리던 장호가 몸을 일으켜 최강직에게 돌아섰다.
“어찌 된 일인가.”
“자매문기* 업자들을 잡아들이며 일망타진했는데, 문서에 먹쇠의 처와 곱단이가 들어 있었네.”
자매문기 업자, 고리대금업자, 시전 상인까지 연루된 대형 사건이라는 말에 장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건에 먹쇠가 연루되었단 말인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 않는가. 고리대금업자들 투전판에서 잡혀 들어왔네.”
“투전?”
“무령군 댁에 있을 때부터 드나들었다던데, 몰랐는가?”
집 비우는 날이 많았던 장호는 생각지도 못한 먹쇠의 배신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항마군: 고려 시대에 승려로 편성 조직된 특수한 군대.
*자매문기: 자신 또는 처자를 노비로 팔기 위해 작성하는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