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ility from Parallel Dimensions RAW novel - Chapter 132
132. 디자이너
제임스 커튼은 서정우가 천억 원을 줘도 안 간다고 한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하하하. 천억이라니. 그런 농담을….”
그는 서정우가 웃지 않는 걸 보고 멈칫했다.
“진심이군요.”
그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윗분들에게 그렇게 보고하겠습니다. 하긴. 돈만 목적이면 경찰 그만두고 부자들만 상대하는 사설탐정을 하거나, 아니면 아예 격투기 선수가 됐겠지요. 격투기로 세계를 제패하면 경찰 월급은 껌값일 테니까요.”
이번엔 서정우가 질문했다.
“오늘 그놈들은 누구입니까?”
“돈만 주면 용병이 되기도 하고, 경호원이 되기도 하고, 이번처럼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하는 놈들입니다. 조직의 이름은 푸른 날개입니다.”
“거기까지 알면서 왜 안 잡았습니까?”
“미국인이 아닙니다. 동양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한국계도 있습니다. 그동안은 미국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건드렸는데 몰랐던 거겠지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지만, 변장을 꽤 잘하는 놈들이니까요.”
“그래서, 남은 놈이 있습니까?”
제임스 커튼은 멈칫했다. 그는 저번에 서정우에게 국제 산업스파이 조직의 잔당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그 후에 그놈들이 몰살당했다.
제임스 커튼이 살짝 긴장하며 말했다.
“우리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있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신념 없이 돈으로 움직이는 놈들입니다. 있다 해도 벌써 도망쳤지 다시 활동하진 않을 겁니다. 조직의 돈을 혼자 다 먹게 됐다고 좋아할지도 모르겠군요.”
“흐음.”
제임스 커튼이 침을 꼴깍 삼켰다.
“사실입니다.”
비공식적으로 방문한 제임스 커튼이 오늘 밤의 마지막 손님이었다.
서정우는 아침이 올 때까지 회의실 의자에서 눈을 감고 반수면 상태로 보냈다.
저쪽 세계에서 생존자 구출을 위해 몬스터 점령지에 들어가면, 빠져나올 때까지 편한 잠은 잘 수 없다. 그곳에서 깊은 잠을 자면 언제 당하는지도 모르고 죽을 수 있다.
그렇다고 아예 안 자면 전투력이 떨어진다.
반만 자는 기술은 그럴 때 쓰는 것이다. 제대로 자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눈뜨고 지샌 것보다는 낫다.
그가 지금 반수면이라도 하는 건, 아직 일이 다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테러리스트들을 잡고 급한 불은 껐지만, 저쪽은 활활 타는 중이다. 그리고 저쪽 상황이 이쪽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아침이 밝았다. 그는 형사들과 설렁탕을 먹었다. 이 경찰서 형사들은 지난번에 한 번 만났다고 아는 체를 많이 했다. 특히 강력팀장이 친하게 굴었다.
“여기 24시간 설렁탕이 참 맛이 좋아. 많이 먹어. 서 형사 건 곱빼기로 배달시켰어.”
“네. 맛있네요.”
“큰 사건이 자꾸 우리 관할에서 터지는데, 아예 우리 서로 오는 건 어때? 여기 맛집 많은데.”
서정우가 슬쩍 웃었다.
‘내가 맛있는 음식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었네.’
그는 저쪽 세계에서 그동안 몬스터 고기와 합성 밀가루 음식 따위나 먹으면서 살았다. 그래서 이쪽에서는 식도락을 실컷 즐겼다.
“우리 팀장님이 안 보내주실 텐데요.”
“그치? 그냥 말이나 해봤어.”
형사과장과 경찰서장도 서정우를 만나서 비슷하게 찔러봤지만, 그의 대답은 같았다.
서정우가 해줄 일은 다 끝났다. 밤새 찾아온 각 부처 관계자들에게 묻는 대로 대답도 다 해주고, 심지어 마이클 커튼까지 만났다.
이제는 돌아갈 때다.
이 경찰서 강력팀장이 물었다.
“서 형사가 저번에는 건물 옆쪽 창문으로 뛰어내려서 빠져나갔잖아. 그래서 오늘은 기자들이 옆쪽에서도 기다려. 오늘은 기자들을 만날 수밖에 없지?”
“아니요.”
“그럼?”
“출동 자주 하시죠? 그때 슬쩍 섞여나가고 싶은데요.”
“어? 어. 그래. 옷 빌려줄까? 순경처럼 보이게. 아. 순경 맞지.”
* * *
서정우는 출동하는 팀에 섞여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그는 경찰서 밖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그렇게 골목을 통과해 반대편으로 나가자마자 이선화가 차를 몰고 나타났다.
그녀는 평소에 타는 차가 아니라 서정우를 꼬셔보려고 얼마 전에 새로 산 국산 중형차를 몰고 왔다.
서정우가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선화가 방긋 웃었다.
“차 좀 태워달라고 연락해서 깜짝 놀랐어요.”
“내 동생은 운전면허가 없어서요.”
“소라도 빨리 운전면허 따야겠다. 잘 가르치는 사람 있는데 붙여줄까요?”
“걔도 이제 돈 버는데 자기 돈으로 해야죠. 근처 운전학원이라도 가라고 해야겠네요.”
“아니에요. 소라는 이제 연예인이라서 개인 강사가 필요해요. 제가 투자한 ES 엔터 연예인이니까, 사람 붙일게요.”
서정우는 지금 순경 옷을 빌려 입은 상태다. 그가 종이가방을 열었다.
“이 옷. 아껴 입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습니다.”
서정우는 이선화가 선물한 옷을 입고 어젯밤 파티에 참석했다.
그 옷은 재질이 부드럽고 옷맵시도 잘 살았지만, 튼튼하지는 않았다. 테러리스트들과 싸우면서 여기저기가 조금씩 찢어졌고, 무릎과 팔꿈치에는 적의 피도 묻었다.
이선화가 말했다.
“그 옷은 주세요. 새 옷 사러 같이 가요.”
“같이 가면 소문납니다.”
“제 옷 만들어주는 입 무거운 분 있어요. 그 옷 만들어주신 분이요.”
“저도 집에 옷 많습니다. 그 옷 입으면 됩니다.”
“쳇.”
“경찰서에서 충분히 멀어졌으니까 근처 택시 정류장에 내려주시죠?”
“집에 데려다줘도 되는데요?”
“그러다 기자와 마주칩니다.”
그녀가 속으로 불평했다.
‘어차피 열애설 기사도 났는데 소문 좀 더 난다고 뭐 어떻다고.’
“이선화 씨?”
“소라한테 들었는데, 평소에는 집에까지 기자가 찾아오진 않는다면서요.”
“집 근처에 카메라 숨겨놓고 몰래 찍는 기자들을 전부 다 찾아서 박대했더니 이젠 안 오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누가 올지도 모릅니다.”
이선화는 결국 서정우를 택시 정류장에 내려주었다. 그녀는 그 후에 바로 의상 디자이너를 찾아갔다.
차연숙이 그녀를 크게 환영했다.
“어서 와. 뉴스 봤어. 어제 고생 많이 했지? 그런데 내가 만든 옷 입고 싸웠더라?”
“잘 어울리죠?”
“최고지. 그런 느낌으로 옷 만들어달라는 연락도 많이 와.”
“어머. 여기서 산 거 어떻게 알았대요? 말 안 했는데.”
“내가 자랑했지.”
“쳇. 아!”
그녀가 의상 디자이너 차연숙에게 찢어진 양복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이 옷 좀 보세요.”
차연숙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내가 며칠 전에 만들어준 옷이잖아. 그런데 상태가 왜 이래? 옷 입은 사람이 설마 깡패는 아니지?”
“이거 정우 씨가 입었어요.”
“정우 씨? 서정우 형사? 아아. 그래. 형사가 입어서 이렇게 옷이….”
차연숙은 깜짝 놀랐다.
“서정우 형사가 어젯밤에 테러리스트들을 때려잡을 때 입은 옷이, 내가 만든 옷이었어?”
“어머. 모르셨나 보다.”
“네가 테러리스트를 잡는 모습만 고화질 동영상으로 떴잖아. 서정우가 싸우는 영상은 나온 게 없으니까 당연히 모르지!”
“이게 그 옷 맞아요. 어제 선물했는데 바로 이렇게 됐네요.”
“내가 만든 옷 입고 서정우가 싸운 영상도 떴어야 하는데! 너무 아깝다.”
“파티 장소에는 CCTV도 없다니까 어쩔 수 없죠.”
디자이너 차연숙이 입맛을 다시며 손을 내밀었다.
“그건 이리 줘. 내가 새 옷으로 바꿔줄게.”
이선화가 웃었다.
“어머. 차 선생님. 어디서 수작질이세요?”
“표 많이 나?”
“얼굴에 쓰여 있거든요? 이 옷이 무지무지 갖고 싶다고.”
“저기다가 진열장 만들어서 이 옷 딱 걸어놓을 거야. 내 작품을 입고 서정우가 테러리스트들을 쓸어버렸다고 자랑해야지. 옆에 스토리가 적힌 명판도 하나 세울까?”
“지금 말씀하신 그거 그대로 제가 우리 집에서 할 거거든요? 꿈 깨시죠.”
“얼마야? 얼마면 넘길 거야?”
“절대로 안 파니까, 그냥 새 옷이나 한 벌 더 만들어주세요.”
차연숙의 눈이 반짝거렸다.
“서 형사가 입을 거야?”
“네. 사이즈는 아시죠? 이 옷이 아주 딱 맞게 어울리더라고요.”
“알았어. 그런데 한 벌만 필요해? 양복 말고도 필요한 옷 있지 않아? 예를 들면 악당 잡으러 다닐 때 입는 옷이라든지. 내가 만든 옷을 입고 악당을 잡으면 진짜 짜릿할 거야. 망토… 는 무리겠지?”
“망토를 쓸 리가 있어요? 유명해지는 거 별로 안 반가워하는 사람인데.”
“그럼 그냥 평상복처럼 보이지만 다시 보면 멋있는 그런 옷으로 하자.”
“그런 옷을 만들어주시게요?”
“당연하지. 내가 만든 옷을 서정우가….”
디자이너 차연숙이 멈칫했다.
“이 옷을 내가 만들었다는 거, 서정우도 알지?”
“그냥 샀다고 했죠. 부담가질까 봐. 백화점에서 산 줄 알 걸요?”
“꼭 내가 만들었다고 해. 그럼 그냥 선물로 줄게.”
“네? 선물이요?”
“서정우잖아. 연예인 협찬이라고 생각해.”
“정우 씨는 연예인이 아닌데요?”
“인기는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높잖아.”
“물론 그렇죠.”
“형사한테 협찬을 다 해보네.”
서정우는 택시에서 강력2팀장 권병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기서 나왔습니다. 지금 택시입니다. 갈까요?”
– 오긴 어딜 와? 위에서 당분간 입단속 지시 내려왔다. 기자들은 서장님이 직접 상대하고 있어.
당연히 그렇게 나올 줄 알고 택시는 경찰서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는 중이다.
“좋아하시죠?”
– 말이라고 하냐? 일은 우리가 하나도 안 하고 우리 관할 사건도 아닌데, 기자 인터뷰는 우리 서장님이 해. 날로 먹으니까 너무 좋다고 하시더라. 그리고 너 오면 회식하란다. 소고기로.
“소고기 좋죠. 한우?”
– 그럴 리가 있냐? 여하튼 오늘 하루 휴가로 처리할 테니까 내일 출근해.
“예.”
택시는 옷가게 앞에서 멈췄다. 서정우는 그곳에서 간단한 옷과 모자를 사서 갈아입은 후에, 다른 택시를 타고 용산 전자상가로 갔다. 그는 거기서 몇 가지 장비를 산 후에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얼굴은 마스크로 적당히 가려서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서정우의 집 근처에는 기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대놓고 박대한 보람이 있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집 대문 근처를 지나가며 3차원 공간 분석 스킬을 썼다.
멀리 떨어진 건물 옥상에서 카메라가 하나 감지됐다.
“대구경 카메라겠지. 지금은 집에는 못 들어가겠다.”
그는 그대로 집 앞을 지나 걸어갔다. 멀리서 보면 지나가는 동네 사람처럼 보였다.
이쪽에서 원하는 정보는 이미 얻어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저쪽 세계의 견습 성녀, 이쪽 세계의 생화학자 윤지민도 그 파티에 참석했다.
‘제임스 커튼의 반응을 보면, 윤지민이 말한 미국 쪽 어딘가와 연구한 것이 정기훈 박사님 사건 때 나온 아틀라스 프로젝트와 관계가 있을 수도 있어.’
그 프로젝트가 뭔지는 모른다. 정기훈에게 물어보면 힌트 정도는 얻을 수 있지만, 그러면 제임스 커튼의 의심을 사게 된다. 뭔지도 모르는 이쪽 세계의 프로젝트를 알아내려고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다.
“이제 저쪽 일을 해야지.”
그는 사람이 없는 골목에 들어가 평행차원 텔레포트 스킬을 사용했다.
* * *
이선화는 당분간 안전한 집안에서 지내려 했지만, 습격 따위에 기죽지 말고 더 당당하게 다니라는 서정우의 말을 듣고 오디션을 보러 가기로 했다.
경호팀에 편성된 고등학생 정현수가 그녀의 전화를 받고 찾아왔다.
그는 서정우가 빌려준 방탄조끼를 입고 특수부대 사양의 길이가 짧은 자동소총으로 무장했다.
남수정은 이 집에서 며칠 지내기로 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선화와 같이 집 밖으로 나왔다.
정현수는 남수정을 처음 보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남수정이 정현수에게 물었다.
“네가 여기 아저씨가 말한 그 고딩이야? 나하고 같이 선화 언니 경호하는?”
“어? 어! 우리 같은 고딩이야!”
“너랑 나랑 안 같거든?”
“그럼! 안 같지! 같으면 안 되지!”
“너 이상해. 그게 무슨 소리야?”
“아, 아니야!”
경호팀 팀장은 서소라가 맡았다. 남수정은 이선화의 근접 경호 담당이다. 세 사람이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정현수가 조금 뒤에서 따라가며 서정우에게 물었다.
“형. 같이 일하는 애가 저런 애일 줄 몰랐어요.”
“뭐가?”
“너무 예쁘잖아요.”
서정우가 피식 웃었다.
‘이 녀석은 저기나 여기나 수정이에게 반하는 건 똑같네.’
“총도 잘 쏘고 성격도 좋아. 믿을만한 애야.”
“그런 애가 저렇게 예쁘기까지 하네요. 와. 사람이 저렇게 완벽할 수가.”
“현수야.”
“네?”
“너 상황 벌어지면 선화가 아니라 수정이를 지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