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 you the devil in the labyrinth? RAW novel - Chapter 54
···운이 좋았다.
붉은 빛이 눈앞을 불태우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송가연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폭음을 동반한 화구는 그대로 바리게이트를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화려하게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마저도.
열기에 이글거리는 대지와 타오르는 고기 냄새가 사방에 자욱하다. 마법 앞에서 귀환석 따위는 무의미 했다.
그 정도로 강력한 힘이 일순 갑자기 사람들을 강타한 것이다. 분명 위험을 알리는 소리가 있었지만 그걸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사람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송가연 그녀 스스로도 잘 몰랐다. 애초에 마법이라는 건 오늘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걸 생각하기도 전에 눈앞으로 뜨거운 열풍을 동반한 폭발이 터졌다. 마법을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 잘 훈련된 병사처럼 대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이렇게 된 거겠지.
치솟는 열기와 함께 튕겨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뇌리에 수없이 반복된다. 이미 끊겼을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울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살려줘, 도와줘, 반복되는 메아리. 송가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살았지만 아직도 그 공포가 온몸을 지배한다.
-피해!
그 순간 이유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송가연도 그대로 바리게이트와 함께 폭발에 휩쓸렸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 또한 지금 쯤 주위에 널려 있는, 너덜너덜한 시체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은 길유미처럼 민첩하지도 남궁민처럼 튼튼하지도 않다.
‘몸은 멀쩡해.’
어쨌든, 자신은 살아 있다. 그러니까 움직여야한다. 아직 사방에서 전투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마법이 주변을 휩쓸었어도 싸움은 계속된다. 송가연은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고블린들은 이미 바리케이드를 넘어 안에 들어왔다.
폭발의 충격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리자.
“윽···”
어깨 부근으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그녀는 신음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어깨 부근을 매만졌다. 천천히 살결을 더듬어 뻗어 올라가던 손길은 상처 바로 아래서 멈췄다.
누군가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뾰족한 고통이 그녀를 괴롭힌다.
역시 화상을 입은 걸까. 주위의 열기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참을 만한 아픔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녀는 연한 분홍 입술을 강하게 깨무는 걸로 신음을 틀어막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녀석들을 막아!
-씨발! 제발 좀 죽어라 괴물 새끼들아!
-아파.. 누가, 누가 좀 도와줘!
고성과 비명이 서로 섞여들며 주위를 울린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싸워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들의 상태도 궁금했다.
만약 이미 싸움이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면 그들을 설득해서 도망이라도 쳐야 한다. 그럴 경우 아이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뻔한 일이지만 그래야 한다. 분명 그건 비겁한 일이다.
하지만 이유현은 그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안위가 아닌 자신과 자신 주위의 사람부터 우선시 하라고. 어떻게 보면 이기적일지 모를 말이지만 송가연은 그런 이유현의 태도가 좋았다.
이 세계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호인 따위는 불필요한 것이다. 오히려 호인 따위는 싫었다. 여기는 인정 따위에 상냥하게 보답해주는 곳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이미 빠르게 눈치 채고 있었다. 돕는 건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만으로도 벅찬 일이다.
그 때였다.
그녀는 문득 이상한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건 무슨···?”
처음에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송가연은 빠르게 눈치 챘다.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말하기에는 이상한 광경이 주위로 보이고 있다. 왜 이런 걸 이제야 눈치챈 거지. 지옥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대지 위로 그녀 주위만 불꽃이 없었다.
그건 운 좋게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다고 해야 하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다. 그녀는 강한 부정을 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행운이 이렇게 타이밍 좋게 일어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돕고 있어..?”
지금도 불꽃은 몇 번이나 이쪽을 향해 흉악한 송곳니를 드러내려고 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걸 막고 있을 뿐이었다. 불꽃은 다가오다가 겁먹은 개 마냥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 모습은 누군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불꽃을 위협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하앗···?”
그녀는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볼에 차가운 무언가를 가져다 댔다고 느꼈다. 이미 평상시의 차분함을 잃은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다행히 적의는 없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 물병을 볼 살에 가져다 댄 듯한 느낌은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군가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모르겠다. 그러니까 확인을 해봐야겠어.
“···넌.”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자 거기에는 푸른색 생명체가 있었다. 사실 생명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했다. 물의 정령은 도대체 뭐라고 정의해야 하는 거지.
송가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불속에서 멀쩡한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아무래도 이 녀석이 도와준 게 분명했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에 오기 전까지 큰 기대는 안했다.
그 정도로 정령은 연약했고, 힘이 없어 보였으니까. 정령이 그녀에게 보여주었던 힘은 단순히 신기한 마술 따위를 내보이는 마술사들의 것과 비슷했다. 그러니까 기대를 안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인 듯하다. 모르고 있던 건 자기 자신이었다. 적어도 정령은 계약자를 지킬 힘 정도는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걸 다루지 못한 건 멍청하게도 자신이었고.
송가연은 쓴 웃음 지으며 정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꺄르르, 소리 없는 웃음이 정령에게서 보인다.
고맙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일단 이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강렬한 금속음이 불꽃 소리를 꿰뚫고 전장을 울렸다.
*
콰카카카캉!
“크으윽!”
단순히 철덩어리들끼리 부딪치고 있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소리가 전장을 난무한다. 잭 오블리언은 유현의 공격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신음하며 뒤로 물러났다.
잭의 입가에 피가 흐른다. 무기를 부딪칠 때마다, 창을 타고 들어오는 강렬한 충격이 온몸을 흔든다. 양 팔의 관절에서, 마디마디까지 바늘처럼 파고드는 통증. 당장이라도 창을 손에서 놓아버릴 것 같지만 잭은 이를 악 물며 참아냈다.
시야가 검게 점멸한다.
지금 보고 있는 건 진짜인가. 녀석은 정말로 검기를 사용하고 있다. 창을 부딪칠 때마다 느껴지는 흉포함은 단순히 힘을 준다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유현은 잭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달려들었다. 잭은 창대를 들이 내밀며 유현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카아앙!
마치 검이 아닌 망치로 때리는 것처럼 몸이 튕겨져 날아간다. 붕 떠오른 몸을 어떻게든 재주 좋게 균형을 잡아 바닥에 착지한다. 하지만 충격은 온몸에 남아 잭을 괴롭혔다.
“···마, 말도 안되는.”
한걸음, 두걸음, 이윽고 세걸음까지 밀려나는 자신의 상황을 깨달으며 잭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까지 도대체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을까.
말도 안 된다. 그래, 이건 말도 안 돼.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건 뭐지.
‘나를 속이고 있던 건가!?’
검에 어려 있는 검기는 잭의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맑고 깨끗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쁜 무언가가 피부를 꿰뚫고 몸안을 헤집고 다닌다.
보고 있자니 아름답게 느껴지기 까지 하는 검기의 빛은 잭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잭은 눈앞에 있는 광경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싸움을 하면서 각성을 하는 순간은 가끔씩 찾아오고는 한다.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게 그런 것이었다. 죽음의 순간에 미처 알지 못했던 걸 인지하게 됨으로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뭔가 이상했다.
성장에도 정도라는 게 있다. 아무리 종족이 다른, 녀석이 인간이라 하지만 결국 똑같은 생명체였다. 이제 겨우 마력을 각성하고는 갑자기 검기부터 뿜어내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참고 있던 숨을 토해낸다. 잭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자, 장난하지 말란 말이다! 도대체 네 녀석은 뭐냐! 키릭!”
처음으로 잭은 목숨의 위험을 느꼈다. 마력을 발현할 때도 설마 싶었지만, 이쯤되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녀석은 자신을 압도하고 있다.
처음 녀석과 무기를 부딪치며 느꼈던 기분 나쁨이란 그런 것이었다. 녀석은 단순히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이전, 순수한 실력 자체는-.
“키, 키릭! 모두 뭐하고 있어? 다 같이 싸워!”
“아, 알겠다!”
잭이 고성을 지르자 주변에 있던 고블린들도 무언가 변화를 눈치 채고는 달려들기 시작했다. 대결에 가깝던 싸움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유현은 떼를 지어 달려들고 있는 고블린들을 보며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재미있는 걸 보여주지.”
그 말에 달려들려고 하던 고블린들이 움찔했다. 고요했던 유현의 분위기가 날카롭게 팽배하더니, 이윽고 모두를 압도하는 살기가 되어 주위를 휩쓸었다.
바닥에 닿을 것만 같이 검을 늘어뜨리고 있던 유현이 검끝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그러더니 첨예하게 응축되어 있는 검기의 형태가 이상하게 변형되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은 검기의 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응축되어 있던 것이 실타래 풀리는 것처럼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점점 몸집을 불려 대검의 형태가 되었다. 단순히 검신을 타고 흐르는 검기와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그걸 보던 잭은 입가를 씰룩이며 중얼거렸다.
“···미친 자식.”
예전에 헤이라가 아닌 다른 미궁 도시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이었다. 하급 모험가로써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던 그 날,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술집에서 우스갯소리로 들었던 이야기.
극에 이른 검사의 검기는 마법과 다를 게 없다고.
아무래도 그건 농담 삼아 했던 이야기가 아니었던 듯하다.
잭의 나직한 한탄이 끝났을 때, 푸른 파도가 주위를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