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03
“그런데 그 사이에 훌쩍 다른 벼랑으로 뛰어넘어갔어.”
“…”
“그리고 이 협곡은 건너는 방법조차···”
그가 목이 타는 듯, 앞에 놓인 맥주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혜선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유리는 존경하는 선배가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아 시선을 내렸다.
의외로 그것에 쉽게 반박한 것은 수호였다.
“어? 그거 형 보고 우리가 하는 생각인데요?”
“…뭐?”
“세상 재능은 다 가진 사람이 심지어 얼굴도 잘생겼어. 그런데도 연습은 제일 열심히 하는 독종이질 않나. 양민학살하는 보스몹이 가까이 있어서 짜증은 나는데, 졸라 멋있어서 싫어할 수도 없구요.”
유리가 수호의 격 없는 말에 놀라 그의 팔을 잡아당겼고,
혜선은 눈이 동그래져서 수호의 말에 공감했다.
“어 그러네?”
“…”
“진짜 선배보면 딱 그 느낌인데요. 죽어도 나는 못이기겠다.”
“얘들이 뭐래는 거야…”
류신의 얼굴이 눈에 띄게 달아올랐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툭 까놓은 칭찬이라는 것은, 언제나 어색한 법이다.
“평생 살면서 양민학살해온 대가를 한 번에 치르는 거에요, 형.”
수호가 싱글싱글 웃었다.
“…너희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네.”
“오죽하면 오디우스 입단하고 나서도 관문이 하나 더 있다고 했겠어요. 서류신 보고 자괴감 느껴서 연기를 포기하지 않는 테스트.”
“…”
류신의 목덜미까지 벌게졌고, 그는 한참 후 조용히 한 마디를 했다.
“그만하자.”
“한마디만 더요. 근데 형은 제가 제일 멋있다고 생각하는 형이거든요. 유명이도 성격도 괜찮고 연기도 대단하지만 형만큼 멋있지는 않아요. 아, 걔는 동생이어서 그런가? 어쨌든,”
“…”
“더 잘하는 배우, 못하는 배우는 없다. 배우는 배우마다의 개성과 가치가 있다- 이런 허울좋은 위로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것도 어떤 의미에선 사실이긴 한데, 형은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더 나은 연기를 할 수 있겠다는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목숨걸고 달려들고,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는 누구의 칭찬에도 아첨당하지 않는 그런 배우로 남아주세요. 형한테 약한 소리는 정말 안어울려요.”
수호 특유의 가벼운 말투 속에 진심이 듬뿍 섞여 있다.
그 무거운 기대는 너무도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말이라, 바닥을 잃고 흔들거리던 그의 발을 지면에 단단히 눌러주었다.
시간.
더 좋은 연기를 향해 달려온 그의 아군은 언제나 시간이었다.
정직한 땀으로 가득 메워진 시간.
‘언제부터 내가 최고였다고.’
너무 오래, 네가 최고라는 인정과 칭찬에 익숙해져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7살 서류신의 오기가 기억이 난다.
저보다 두 배 이상 큰 성인배우들의 연기를 보고도, 저 연기를 이겨보리라 안간힘을 쓰던 치기어린 아이의 패기가,
끼얹어진 얼음물에 모래 속으로 몸을 사렸던 불씨가 다시 화르르 타오르는 것을
그는 제 일인듯 아닌듯 조용히 관조하였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다시, 시간과의 협공을 시작했다.
그 겨울,
발레리나하이는 예술영화로서 드물게,
100만의 관객 수를 기록했다.
*
신년 초, 젊은 배우들끼리의 식사 자리가 생겼다.
‘요즘 분위기도 좋은데 또래 배우들끼리 밥이라도 한 번 먹어요.’라는 정준희의 제안이었다.
분량이 줄어들고 있어 부글부글 끓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아무말 못 하고 있는 이규성은 바쁘다며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유명까지 넷이서 신사동의 어느 레스토랑의 내실에 모였다.
식사에 반주를 곁들인 자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한 명이 자리를 파할 틈을 주지 않고 파상공세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오빠는 다음작품 정해졌어요?”
“아니요…아직입니다.”
“저는 드라마랑 영화랑 고민중인데, 드라마는 멜로고 영화는 스릴러거든요. 오빠가 저 정도 연차라면 뭘로 하실 것 같아요?”
“음…글쎄요. 너무 정보가 적긴 하지만, 이번에 로맨스 드라마를 했으니까 커리어의 다양성을 생각한다면 저는 영화쪽을 좀 더 고려해볼 것 같은데요.”
정준희의 애교섞인 질문에 백승효가 깍듯한 존대말로 응답한다. 백승효의 거리감이 여실히 느껴지는 대화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끊임없이 그에게 적극적인 리액션을 보내고 있다. 사심이 가득한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오빠, 우리 담배 한 대 피고 와요.”
“밖에 나갔다 찍히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에이, 여기 직원들이 흡연할 때 쓰는 테라스 있어요. 저 여기 단골이라 여러 번 가봤는데 안전해요.”
“음…그렇다면.”
그도 흡연 유혹은 거절하기 힘들었는지 정준희를 따라 자리를 떴고, 유명은 차하린과 둘이 남겨졌다.
다행이도 둘만 있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친한 그들이다.
“오빠.”
“응?”
술을 몇 잔 마신 그녀는 평소의 거북이 모드는 아니었지만, 조금 힘이 없어 보였다.
“보형아.”
“왜, 하나야.”
다시 한 번, 이름을 바꾸어서 그녀가 부른다.
그 부름이 왠지 처량해보여서 유명은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나는 하나가 부러워.”
“뭐가 부러워, 하린아?”
여전히 보형의 목소리로 이번에는 하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녀의 눈에 습기가 가득 찬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희망이 안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해, 보형아?”
질문 끝이, 바스스 떨렸다.
이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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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희망이 안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해, 보형아?”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배옥진에게서 하린의 사정을 듣고 느꼈던 안타까움에, 보형으로서 하나에게 느끼는 애틋함이 더해져, 유명은 마음이 순식간에 짠해졌다.
겨우 스물두살. 아직은 어른보다 소녀에 가까운 그녀의 작은 어깨를, 유명은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보형의 손길로.
그러자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자신의 속마음을 끄집어내어 펼쳐보였다. 하나의 솔직함을 빌려서.
“…저희 회사는 연예인이 네 명 뿐인데요… 배우는 저 하나고, 나머지 셋은 걸그룹으로 한 팀, 매니저는 사장님 내외 두 분이거든요.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컸는데 다 나가고 이렇게만 남았어요.”
유명은 호응도 하지 않고, 추임새도 넣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희 사장님이 정말 좋은 분이에요. 저 어릴때부터 뒷바라지 해주시고, 여자 연예인인데 이상한 데 절대 안 얽히게 단도리해주시고…그래서 어릴 때부터 제가 크면 사장님한테 꼭 은혜갚겠다고, 차하린 있는 소속사라고 하면 다들 우와하고 계약할 만큼 크겠다고, 멋도 모르고 큰소리치고 그랬어요.”
어린 시절, 무서운 게 없던 자신을 떠올리면서 그녀가 조그맣게 웃는다.
“정직하게만 운영하시다가 여기저기 밉보이고…어느 순간부터 기획사가 기울었어요. 키워놓은 연예인들은 재계약 안하고, 연습생이며 신인에게 투자하는 비용은 남아있고…그때부터 사장님은 일을 해도 빚만 늘었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도 어릴때부터 연습생으로 있었던 애들 데뷔는 시켜줘야 한다고 작년에 무리해서 데뷔시키고···”
정직함과 성실함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든 세계.
“저 재계약 안한 지 몇년 째에요. 사장님이 너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며 더 좋은 데로 가라고 하시는데 버티고 있는 거거든요. 근데 저까지 나가면 회사에 돈 벌어다줄 사람은 아무도 안 남아요. 사장님 사모님 뿐만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가수되는 거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던 애들까지 다섯의 삶이 일그러지는 거에요. 차라리 저도 빚 같이 갚겠다고 말씀드려도 죽어도 싫다고 말씀하시니까, 제가 최대한 많이 뛰어서 매출이라도 더 올려야 하는데···”
그래서 그렇게 무리하게 일을 하는 거였구나···
“저도 연기에 전념하고 싶어요. 연기는 정말 재밌거든요. 그런데 행사뛰고 광고찍고 그런게 돈은 몇 배 더 돼요. 어떻게든 같이 해내고는 있는데…이 짓을 얼마나 오랫동안 해야하는 걸까···끝은 나는걸까…가수팀 애들이 뜨면 좀 더 나아지겠죠, 그런데 뜨긴 뜰까요···?”
휴우-
스물두살이 마흔두살이라도 되는 양, 어깨가 짓눌려 시원하지조차 않은 한숨을 내쉰다.
처음 그녀의 연기를 보고 의아했었다.
최소한의 에너지로만 일상생활을 하고, 나머지 모든 기운을 연기에 쏟아붓는 듯 전력하는 연기였다. 그녀의 나이를 감안하면 10년 후쯤엔 탑 여배우의 반열에 올라있을 법한 반짝이는 재능과 집중력.
이런 배우가 왜 원생에서 뜨지 않았나 했더니···
“나도 보형이 갖고싶다···”
응어리를 토해내듯 말을 뱉은 그녀는, 술이 약한지 과로에 절어서인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직 아기같이 보얀 빰에 눈물자국이 말라붙어 있다
김하나같다. 욕심이 가득하지만, 지켜야 할 것을 외면할 수 없는 김하나.
그리고 타인의 기운에 짓눌려 마음껏 연기해본 적이 없었던 원생의 자신과도 조금…
‘그럼에도 혼자 벗어나겠다는 선택은 조금도 고려하고 있지 않다니.’
바르고 강한 아이다.
유명은 티슈를 물에 적셔, 동생같은 아이의 눈물자국을 지워주었다.
잠이 깬 그녀가 다시 웃음지을 때, 슬픔을 들키지 않도록.
*
1월 첫째 주 9화 방영.
도준과 규민의 촬영장 씬.
이 날, 도준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선회했다.
나룻터에서 월공을 바라보는 은성군의 마지막 만류.
시조를 읊듯이 나즉하게, 하지만 절절하게 나열되는 단어들.
“월공. 자국을 망칠 이름이여. 그 명석한 머리로 제국의 개가 될 생각을 하는 것은 자국의 액흉인가 제국의 홍복인가. 안타까운 것은 그대는 그것이 정말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수한 자가 뜻을 잘못 세우니 국가가 무너지는구나. 이 강을 넘어가면 돌이킬 수가 없다네. 한 번만 더 재고해 볼 수 없는가 월공이여.”
월공은 그런 은성군을 조용히 바라본다.
국경까지 호위를 나와 준 한 때의 친우.
하지만 어제 밤에도 자신의 목숨을 노린 자객을 보낸 그의 호적수를 원망없이, 그러나 미련도 없이 쳐다본다.
“다녀 오겠습니다. 좋은 성과를 가지고 뵙지요.”
“…월아…”
뚝 떨어질 듯한 음성.
그가 마지막으로 부르는 소꿉친구의 아명.
다정한 호칭을 그득하게 둘러싼 절망.
검집을 바닥에 눌러짚은 그의 오른손이 파르르 떤다.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절절한 충정이, 깊은 목소리에 심어져 온 나라에 뿌리를 뻗고 있었다.
“컷- 오케이- 도준씨 와…왜 이렇게 잘해요? 미쳤다 진짜.”
의 감독이 호들갑을 떠는 칭찬이, 곧 하나의 마음이었다.
이제는 로드매니저가 아닌 단역 배우로 대기 중인 현장에서, 하나는 도준에게 정말로 감탄한다.
그것은 보는 시청자들의 마음이기도 했다.
중간중간 멋진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고는 하지만, 1화의 여파로 여전히 비호감으로 여기던 시청자군까지 단박에 끌어들인 데에는, 도준이 연기하는 모습이 멋졌던 것 외에도 한 가지 요소가 더 있었다.
더 이상 장난같지 않은, 하나를 향한 마음.
그는 하나의 연기에서 고칠 부분을 알려주었고,
탁월한 연기 선배의 지도를 허겁지겁 붙잡은 하나에게 개인 레슨을 제의한다.
그것은 처음에는 순수한 호의였다. 자신도 좋은 알맹이가 되어보고자 하는 의도였으리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도 ‘자신’이 아닌 ‘연기’에만 눈을 빛내는 하나의 모습을 보고 도준의 호의는 뒤틀리고 만다.
뒤틀려 벗겨진 사이에서, 인정할 수 없었던 마음이 튀어나왔다.
“내가 너 좋아한다고.”
“그런 걸로 장난치지 마시라고 했잖아요. 감정으로 장난치는 거 엄청 악취미에요. 특히 선배님같은 외모로 그런 짓 하면 범죄입니다.”
웃으며 실드를 치는 하나에게, 그는 밀어붙인다.
“김하나.”
똑바로 직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명료하게 발음하는 그녀의 이름.
“나 장난 아니야. 진심이라고.”
그 때 권도준이 김하나를 부르는 음성은, 월공을 부르짖는 은성군 이상으로 절절함이 흠뻑 배어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