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55
〈 55화 〉 풀 수 있죠?(2)
* * *
아플리아 아카데미는 신분을 따지지 않는다.
아카데미의 안에서는 그것이 누구던 간, 한 명의 마법사로서 평가받는다.
외부에서 어떤 위치에 앉아 있느냐에 따라, 존경과 경외를 받을 수는 있을 테지만··· 그것이 특권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복잡한 절차를 거친 거겠지.’
그것이 설령 마탑주라 한들, 예외는 없다.
백색 마탑주, 셀리 드벨라는 툴툴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번 방문하는데 뭔 놈의 규칙이 어찌나 많은지, 신청을 하고도 거의 한 달 만에 허가가 떨어졌다.
탁탁.
내딛는 발걸음은 급하다.
평소의 이미지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까닭이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이었으니까.
터벅, 터벅.
그 발걸음소리는 하나가 아니다.
백색은 눈살을 찌푸린 채 뒤를 돌아봤다.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 남자는 어깨를 으쓱인다.
“왜, 뭐 할 말이라도 있나? 백색.”
흑색 마탑주, 예투알.
자신과 함께 방문 신청을 한 마탑주를 노려보며 백색은 짧게 혀를 찼다.
“···뱀 같은 노인네.”
“나이 차이도 한두 살 밖에 안 난다, 여우 같은 노친네야.”
“저는 파릇파릇한 스무 살이거든요?”
“지랄이 짜다. 백색. 듣기로는 백색 마탑의 월간 연구비 중 1할은 네가 마시는 영약으로 나간다지?”
“닥치세요, 흑색.”
쯧, 하고 눈살을 찌푸린 채 백색은 고개를 돌렸다.
탁탁.
구두 굽에 바닥이 울린다.
터벅,터벅.
그 뒤를 이어 단화 소리가 울린다. 아무래도 끝까지 쫓아올 모양이었다.
“·····.”
백색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뒤를 곧장 따라붙는 그 소리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따라오지 마세요.”
“자의식 과잉이다. 내가 뭐가 좋아 널 따라가나? 백색.”
“···저는 라니아 교수를 만나러 갈 거예요.”
“우연이군. 나도다.”
“따라 하지 마세요, 흑색.”
“너나 따라 하지 마라. 백색.”
툴툴거리면서도 그들은 교수실로 향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학생들이 많다. 웅성거리는 학생들의 말소리에 그들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무시한 채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저런 어린아이들을 상대할 시간은 없다.
‘로셀 원로가 수업에 들어가는 시간대가 2시부터 4시까지였지?’
주어진 시간은 두 시간 뿐.
그 까탈스러운 원로의 시선을 피해, 그 소녀와 접촉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 이름을 곱씹으며 백색은 입맛을 다신다.
그날 보았던 진리의 편린을 그녀는 잊지 않았다.
‘흑색과 방문 시간이 겹친 건 짜증 나지만···.’
오히려 좋다.
그 소녀에게 백이 흑 보다 잘났음을 보여줄 기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마나의 거래학 연구실.
도착한 교수실 앞에 그들은 멈춰 섰다.
그 문이 닫혀있지 않고 열려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섣불리 문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
그것이 그들의 발길을 묶어놓았다.
“···흑색.”
백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게 뭐죠?”
“회로를···그리고 있는 것 같군.”
“저게?”
그들은 멍하니 교수실 안을 바라봤다.
수십 장의 종이가 허공을 날아다닌다.
그 종이들 사이를 수백 개의 글자가 지나간다.
허공에 맴도는 수백 개의 글자.
그 글자는 그들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룬(Rune)문자.’
그렇게 불리는, 가장 기초가 되는 언어.
그 언어를 이룬 문자들이 허공을 맴돈다. 그 글자를 하나씩 끌어다 쓰는 이가 있다.
교수실에 홀로 앉아있는 소녀.
잿빛 머리칼이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낀다.
푸른 눈동자는 허공을 맴도는 글자만을 바라본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 소녀가 손가락을 휘두른다.
손가락을 따라 문자가 움직인다.
문자가 단어가 된다.
단어가 문장이 된다.
문장이 된 단어는 회로다.
그렇게 완성된 회로가 종이에 담긴다.
회로가 기록된 종이는 테이블의 한편에 차곡차곡 쌓인다.
교수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종이가 한 장씩 줄어든다. 그렇게 모든 종이가 자리에 내려앉았을 때.
“음?”
그제서야 소녀가 문 쪽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세요?”
* * *
셀리와 예투알은 소녀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소녀가 직접 타준 커피를 홀짝이며, 셀리는 이곳에 왔던 목적을 떠올린다.
‘···분명 그 강연에서 보았던, 극점에 대해 물어보러 왔는데.’
지금은 그런 질문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의 시선은 눈앞의 소녀가 아닌, 테이블의 한구석에 쌓인 종잇더미로 향한다.
“·····.”
그리고, 그건 흑색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셀리는 입을 열었다.
“저기요.”
그녀는 테이블의 구석에 쌓인 종이들을 가리켰다.
“저거 뭔가요?”
“예?”
“방금 룬문자를 기록한 거 있잖아요. 저거. 당신이 진행하는 연구인가요?”
소녀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거 말씀이십니까?”
“네.”
“중간고사 시험지인데요?”
“···뭐요?”
셀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룬문자까지 써가며 새긴 회로가, 고작 중간고사 시험지라고?
‘이게 뭔 개소리야?’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다.
이쯤 되면 저 시험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한다. 셀리는 종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휙.
소녀가 쥐고 있던 종이를 옆으로 옮겼다.
셀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녀를 흘겨봤다.
“···좀 보면 안 돼요?”
“시험지 유출은 하면 안 된다고 들어서.”
“지금, 제가 시험지 유출을 할 거 같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 나 참···.”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뻗지만, 소녀는 또다시 종이를 옮긴다. 셀리의 손은 허공을 낚아챌 뿐이었다.
“아, 진짜! 안 한다고요!”
“그걸 제가 어떻게 믿습니까?”
“뭣하면 금언(??) 주문이라도 쓸까요? 그렇게까지 해야 되겠어요?”
결국 그렇게까지 해야 했다.
“·····.”
셀리는 미묘한 눈동자로 자신의 앞에 놓인 계약서를 봤다. 조금 짜증이 나긴 하지만, 지금은 당장 저 시험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후우···.”
한숨을 내뱉으며 셀리는 펜을 쥐었다.
“뭐, 엄청난 실례이긴 하지만… 당신 정도 되는 마법사니 이 정도쯤은 눈감아줄···.”
“사인은 다 했네. 나도 한번 봐도 되겠나?”
“제 말 끊지 말아 주실래요?”
먼저 시험지를 받아가는 흑색을 보며, 셀리는 눈을 부라렸다. 그녀가 그러든지 말든지, 소녀는 흑색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시간은 얼마 정도면 되겠습니까?”
“나는 넉넉하게 십 분 정도면 좋겠···.”
“저는 5분이면 충분해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셀리가 말했다.
자신을 흘겨보는 흑색의 시선을 의식하며, 셀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흑색보다 백색 마탑이 더 우월함을 보여주도록 하죠.”
“···여기까지 와서 꼭 그래야겠나?”
“뭘요?”
흑색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여간, 나잇값···.”
“됐고, 시험지나 보죠? 십 분으로 되겠어요? 넉넉하게 삼십 분 잡지 그래요?”
시험지를 받아들며 백색은 미소지었다.
“시간 동안 풀고 돌려주시면 됩니다.”
소녀가 주문이 걸린 모래시계를 둘의 앞에 놓았다. 각각 5분, 10분으로 설정된 모래시계였다.
사락.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걸 보며, 셀리는 여유롭게 문제지를 바라봤다. 이유가 있는 여유였다.
‘룬문자로 새긴 회로가 궁금해서 보긴 하지만, 어찌 됐든 학생들이 풀 문제잖아?’
아플리아가 명문이긴 하지만, 마학을 배운지 십 년도 안된 학생들을 위한 아카데미임은 변하지 않는다.
‘그 수준이라 해봐야, 뭐.’
오 분도 아깝다. 삼 분 만에 풀어 버릴 생각으로, 셀리는 시험지를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첫 번째 문제를 푸는 데는 1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기초상식에 대한 문제다. 가볍게 답을 적으며 다음 문제로 향한다.
그리고.
“·····.”
그 시점부터, 셀리는 이상함을 느꼈다.
두 번째 문제를 푸는 데는 30초가 걸렸다. 한 번에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암산이 되지 않아, 결국 펜을 꺼내야만 했다.
삼 번 문제를 본다.
페이지의 절반을 채운 회로가 있다.
그 회로의 가닥이 한눈에 잡히지 않는다. 펜을 빠르게 움직인다. 하나씩 해체해간다.
1분이 흘렀다.
회로를 전부 해체했지만, 답이 보이지 않는다.
1분이 더 흐른다.
간신히 답을 찾아낸다. 그 답을 옮겨적으며 셀리는 모래시계를 바라봤다. 벌써 절반이 닳아 있었다.
‘···이게 아닌데?’
셀리는 눈을 가늘게 뜬다.
4번 문제를 본다. 삼 번 문제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문제다. 그러나, 그 회로가 조금 더 난잡하다.
사락.
모래는 계속해서 떨어진다.
셀리의 펜이 빠르게 종이 위를 움직인다. 페이지의 여백에 계산식으로 채워진다.
‘뭔가.’
계산에 계산을 쌓는다.
간단한 과정은 암산으로 때운다. 단축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단축한다.
‘뭔가, 이상한데.’
셀리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다.
그리고.
툭, 하고.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가 떨어졌다.
“끝. 주십시오.”
“어, 어어?”
종이의 끄트머리를 소녀가 붙잡는다.
셀리는 무심코 종이를 붙잡았다. 소녀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셀리를 바라봤다.
“···뭡니까?”
“어, 그, 그게 처음에 여유를 부렸잖아요? 한 십 초만 더···.”
“됐습니다. 주십시오.”
소녀가 딱 잘라 말하며 종이를 낚아채 갔다.
셀리는 허망히 그 종이를 바라봤다.
‘이게, 이게 아닌데?’
이런 장면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셀리는 휙, 고개를 돌렸다. 옆에 앉은 흑색은 아직 문제를 풀고 있다.
드르륵.
의자를 끌어다 흑색의 옆에 놓았다.
그리곤 시험지를 보려 했으나, 흑색이 팔을 들어 시험지의 옆에 내려놓았다. 문제가 전부 가려진다.
“당신···!”
셀리는 그 소매를 잡아당겼다.
흑색은 한심하단 듯한 눈초리로 셀리를 바라봤다.
“방해 말고 저리 가 있어라 백색.”
“쪼잔하게 굴지 말고, 좀 같이 보자고요!”
“백색이 흑색보다 우월함을 증명하겠다면서?”
“익, 이이익···!”
그래도 물러서지 않자, 결국 흑색이 손을 들었다.
“감독관, 이 여자가 시험을 방해하는군.”
“예. 조치하겠습니다.”
“뭐, 뭐? 아니, 잠깐만. 이거 놔봐요. 아니!”
셀리의 의자가 빙글, 돌아간다.
드르륵, 마나로 움직인 의자는 벽을 향한다.
“하, 나참. 어이가 없어서. 좀만 보겠다니까요? 아니, 이거 놔보라니까!”
의자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결국 셀리는 시험이 끝날 때 까지 벽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2.
흑색 마탑주 예투알은 모래시계를 바라봤다.
어느새 10분이 다 돼간다. 남은 시간은 일 분 남짓이나, 문제는 세 문제가 남아있다.
6번, 7번, 8번.
남은 세 문제를 보며 예투알은 쓰게 웃었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이 소녀가 비범한 마법사임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방금 막 풀어낸 5번 문제의 완성도에 예투알은 혀를 내둘렀다. 흑색 마탑으로 가져가고 싶을 정도로 깔끔하고, 담백한 문제였다.
‘계산식이 복잡하지도 않다. 고도의 계산식을 필요로 하지도 않아. 어디까지나 기본에 충실하다.’
문제는 어렵고, 복잡해진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회로 풀이법만 숙지하고 있다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이 세 개의 문제는··· 조금 다른 것 같군.’
예투알은 펜 끝을 툭툭 두들겼다.
이 세 개의 문제만큼은,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꼭 마학회에서 내는 난제를 마주한듯한 기분이다.
결국 예투알은 시험지에서 손을 뗐다.
“여기까지 하겠네. 더는 못 풀겠군.”
“예, 알겠습니다.”
이윽고 소녀가 시험지를 가져간다.
시험지를 쓱 훑어보더니 짧게 답했다.
“푼 문제는 전부 맞히셨네요.”
“그거 다행이로군.”
예투알은 한숨을 내쉬며 펜을 내려놓았다.
십 분간 너무 과하게 머리를 굴린 탓일까, 일종의 허탈감마저 들었다.
‘그래도, 백색보다는 많이 풀었으니 되었군.’
그 사실에 소소한 만족감을 느끼며 예투알은 소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라니아 교수?”
“예?”
“이 문제가 중간고사라는 거, 사실 거짓말이지 않은가?”
예투알은 쓰게 웃었다.
그리곤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백색 마탑주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속을 긁으려 한 의도였다면 성공이네. 지금도 벽을 보고 씩씩대고 있으니 말일세.”
“예?”
“학생들도 풀 수 있는 수준이라며 백색을 속인 것 아닌가. 좋은 생각이었어.”
그것을 미리 눈치챈 흑색은 여유롭게 십 분을 불렀다. 룬문자까지 써가며 만든 문제가, 겨우 학생들을 위한 시험지일 리가 없을 테니까.
‘보나 마나, 마학회에 제출하려는 문제겠지.’
아무리 봐도 학생들이 풀만 한 수준이 아니다. 이 정도면 마학회의 월간 난제지에 제출할만한 문제들이다.
‘그 회로에 미친 마법사들이 환장할 문제들이야.’
비싼 값에 팔릴 게 분명했다.
그렇게 음, 하고 예투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예?”
소녀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중간고사 문젠데요?”
“···뭣?”
그녀가 종잇더미 맨 위에 놓아두었던 종이를 들어 예투알에게 건넸다.
마나의 거래학 기초 (중간고사).
출제 교수 :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런 제목이 붙은 종이다.
예투알은 그 밑에 적힌 것들을 확인했다.
“·····.”
방금까지 그가 열을 올리며 풀었던 문제들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그, 라니아 교수?”
“네?”
“내 진지하게 조언하네만···.”
잠깐의 침묵 이후, 예투알이 입을 열었다.
“조금 난이도를 내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