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235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가, 자기들 잘하고 있는 거 맞냐고 물어보듯 그를 향해 돌아본다.
오디세우스는 그들을 향해 활짝 웃어보인다.
아주 잘하고들 있다.
아주 잘들, 메넬라오스에게 엿을 먹이고 있다.
상큼하게.
진군 (1)
텔레포스.
헤라클레스와 아르카디아 지역의 도시 테게아의 공주 아우게 사이에서 나온 아들.
테게아는 저 멀리 아카이아에 자리해 있고, 미시아는 이 소아시아에 자리해 있는데 뜬금없이 그가 이곳의 왕이 된 사연도 참 기구하다.
테게아의 왕 알레오스는 이런저런 신탁을 받아 여차저차한 이유로 (대강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비슷하다.) 딸이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아테나의 여사제로 만든다.
그러나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알레오스는 아카이아의 미친 개 헤라클레스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지나가던 헤라클레스는 아우게를 유혹해 임신시켜버린 것이다.
분노한 알레오스는 딸을 미시아의 왕 테우트라스에게 팔아넘기고 그 아들은 내다버린다.
그 다음에는? 여느 그리스 영웅들이 그렇듯 버려진 아이 텔레포스는 멀쩡히 자라나 자신의 출생을 궁금해하며 신탁을 받아 미시아로 향하는데, 거기서 테우트라스 왕의 신임을 받는다.
그 다음이 특히 위대한 영웅들의 시대다운 대목이다.
테우트라스 왕은 어머니 아우게를 아들 텔레포스와 결혼시키려 했다.
그때까지 헤라클레스를 잊지 못한 아우게는 텔레포스를 죽이려 하고, 그때 여차저차 신들의 도움으로 서로가 모자지간임을 겨우 알게 된 두 사람은 다행히 ‘오이디푸스’스러운 결말을 맞지는 않을 수 있었다.
아무튼 테우트라스 왕은 늙어 죽었고 자식이 없던 그의 양자로 들어간 텔레포스가 왕위를 계승한다.
즉, 헤라클레스의 아들 텔레포스는 미시아와의 연고가 전혀 없다.
기반 없는 이방인 왕은 자연스럽게 권위가 약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는 여러 부인과 결혼, 이혼을 반복했고 연인도 많이 가졌다. 이 역시 그가 바람둥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왕권을 위한 선택이었다. 비슷하게 프리아모스 역시 헤카베 이전에 수많은 부인들이 있었다.
개중에서 가장 도움이 된 연인은 특히 여인으로 구성된 전차부대를 거느린 히에라였는데, 그녀는 트로이 전쟁에서 미시아를 침공해온 아카이아 연합군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죽는다.
아무튼.
헤라클레스의 아들은 그렇게 영영 아랫도리를 놀려 겨우겨우 왕권을 유지해나가는, 나약한 왕이 될 줄 알았다.
트로이아가 부상하기 이전까지는.
처음에는 귀족들도 함께 트로이아의 부상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트로이아와 히타이트 사이의 절묘한 힘의 균형 속에서 끊임없는 세폐의 굴레를 벗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하투샤가 미시아에 정변을 일으켰다?
텔레포스가 트로이아의 도움을 받아 친 히타이트 귀족들을 죄다 축출해버렸다?
그때 모든 게 바뀌었다.
트로이아를 등에 업은 텔레포스는 비로소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장로들 역시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심지어 지금 텔레포스의 부인은 트로이아 왕실과 연결되어 있지 않던가.
그렇기에 장로들은 이리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트로이아가 이 전쟁에서 몰락하면 하투샤가 되돌아오겠지?”
“물론 아카이아인들도 꾸준히 지금처럼 약탈해올 테고.”
당연한 일이다. 트로이아라는 신흥 패권과 하투샤의 전통적 패권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도하던 서부 소아시아의 수많은 나라들을 하투샤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게다가 미시아는 친 히타이트 세력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감행하지 않았던가?
다른 이들은 몰라도 아마 텔레포스 왕은 죽거나, 굴욕적으로 많은 세폐를 바치거나, 적어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거나 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전부 다하던가.
“그렇지만 괜찮을 걸세.”
유력한 씨족의 장로들, 그리고 페르가몬으로 향한 각 도시의 군주들에게 ‘괜찮을 거다.’의 의미는 간결했다.
그들은 죽지 않는다.
아카이아 해적들이 덤벼와 수많은 이들이 학살당하고, 겁간당하며, 도적이 되어 사방을 떠돈다 하더라도 그들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단단한 성벽이 있고 여차 하면 몸을 지킬 사병도 있다.
하투샤가 세폐를 요구하면 기분이야 더럽겠지만 바치면 그만이다. 어차피 그들도 현지 세력과의 협력을 필요로 하고, 그 현지 세력이란 바로 그들을 일컫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트로이아가 승리하게 둘 수만은 없네.”
트로이아가 승리하면 왕권이 강화된다.
왕권이 강화되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들의 권력이 약해진다.
“트로이아는 대의를 위해서라도 패배해야 하네.”
여기서 대의란, 그들의 권력이었다.
“아카이아는 밀물처럼 들어와 썰물처럼 떠나는 일상일 뿐일세. 신경 쓸 필요 없네.”
여기서 일상이란, 무수한 사람들의 죽음이었다.
그들에게는 상관 없는 죽음들.
그들에게는 먼지보다도 가벼운 목숨들이 하데스의 품으로 안기는 일들.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서로를 다독이는 가운데···.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 페르가몬을 벗어났다.
야음을 틈타.
***
“헥토르 만세!!!! 파리스 만세!!!!”
“트로이아인들이 해적들을 물리쳐주었다!!”
“위대한 흑사자 만세!!!!”
타노스의 도움을 받아 근방의 도시들을 해방하고, 이런저런 적들을 죽인 뒤 우리는 다시 숙영지에서 회의에 들어갔다.
급한 일은 모두 해결했다. 눈앞에 난 불들은 껐고, 접경 지대의 혼란을 어느 정도 잠재웠다.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 서로를 치하했고, 병사들에게도 보상을 약속했다.
이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지난 전투에서부터 계속 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꺼내들었다.
“···그때, 그러니까 젤나··· 아니, 프로토스를 처음 만났을 때, 저와 아이네이아스의 이름을 들은 아카이아인 장수들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심상치 않았다?”
“예. 사실 단순히 약탈을 위해 왔다고 하면 적들은 충분히 저희의 이름을 듣고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프로토스가 그랬듯이 애초부터 저희의 발을 붙들어놓을 요량으로 움직였다면 그때 그들이 몰고 온 병력은 거의 다 살았을지도 모르죠. 저희를 죽이려고 하는 대신에 말입니다.”
그러나 적들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아는 그 파리스와 아이네이아스가 맞다면 우리가 네놈들을 죽이면 된다는 말이겠군.”
그들은 외려 우리의 이름을 듣고 더욱 호승심에 불타 움직였다. 어쩌면 우리의 이름을 좇아 여기까지 왔을 수도 있고.
왜 그랬을까?
단순히 전장에서의 명예 때문에? 적장을 앞에 두고 도망친다는 건 수치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저들은 일리아스에서 나오는 처절하고도 비장한 공성전이 아니라 넓은 지역에서의 약탈전을 벌이는 도중 아니었던가? 그것도 다수의 미숙련병들을 이끌고 말이다.
그런 와중에 적에게 덜미를 잡혀 병력을 잃을 가능성을 감수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그들은 잘 알 터였다. 실제로도 그들은 수백의 병력을 잃지 않았던가?
아카이아의 영웅들이 멍청했다고 넘기기에는, 그들의 움직임이 너무 노련하고 영민했다. 아이네이아스가 아니라 나 같은 게 서너 명 있었으면 모조리 참살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텐트레돈의 아들 프로토스.
아무리 지휘관급 인사라지만 일리아스에 활약 한 줄 안 나온 장수가 숙련도 하나로 자기 역량을 훨씬 상회하는 아이네이아스를 몰아세웠다.
그런 이들이 40명 정도 더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리라.
···아무튼.
동료가 죽어가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눈앞의 적에 집중하던 이성적인 이들이, 그렇게 우리와의 정면 대결을 택하고 덤벼들었다? 분명 전략적인 의도가 있을 것이었다.
나는 눈을 꿈뻑이는 헥토르와 아이네이아스에게, 결론을 내렸다.
“제가 볼 때는 공적을 세우기 위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공적을 통해 지리멸렬한 아카이아군 세력 내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것일지도 모르죠.”
“···말이 되는군.”
“아, 아카이아에는 메넬라오스 말고는 뾰족한 지도자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메넬라오스가 다른 모두를 압도하는 지도자인 것도 아니고.”
한데 지금 이 전쟁은 앞으로의 패권을 결정하는 전쟁이다. 신들의 신탁이 그리 만들었다.
약탈을 위해 온 아카이아인들이라 해서 그를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앞으로의 패권이 이 전쟁의 승자에게 주어지리라는 건 무엇보다도 명백하니.
그렇다면 ‘누가’ 그 승자가 될 것인가?
트로이아의 경우 그 경쟁자는 셋 정도다. 트로이아, 다르다노스, 안탄드로스.
아카이아는···
“경쟁자가 셀 수도 없이 많죠. 분명 이 미시아나 다른 나라들을 침공하는 동안 주도권 다툼이 활발할 겁니다.”
만약 이 전장의 목적이 단순 약탈이 아니라, 다종다양한 이들이 모인 연합 내에서 경쟁자를 제치고 최대한 드높은 전공을 세워 주도권을 차지하는 데 있다면···
“저들이, 여기서 세울 수 있는 가장 큰 군공이 무엇이겠습니까?”
약탈을 한다면, 가장 크게 한 탕 벌이는 것이겠고.
도시를 함락시킨다면, 가장 중요한 도시를 무너뜨리는 것이겠고.
적을 죽이게 된다면, 가장 강력한 장수를···
“페르가몬, 그리고 그곳에 있는 헤라클레스의 아들 텔레포스 왕.”
그들이 노릴 목표가 무엇인지 답이 나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도 명확했다.
“서둘러 페르가몬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게 추측을 내린 뒤 이틀쯤 지나자···
-똑. 똑.
곧 그를 증명할 확증이 나왔다.
“헥토르 님, 파리스 님, 아이네이아스 님.”
사령부로 쓰던 건물의 문을 누군가 두드린다. 익숙한 목소리다. 문을 열자 이번 전장에서 내 부관 노릇을 하게 된 철쇄대원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라? 주위 씨족의 족장인가?”
“아닙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을 뵈오니, 프리아모스의 차남이시겠군요.”
부관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결혼식 이후로 다시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시아의 엔노모스입니다.”
부관이 급히 옆으로 비키자 그곳에는 어두운 빛깔의 망토를 뒤집어 쓴 누군가가 서 있었다. 차갑고도, 차분한 인상의 남성.
“미시아의 왕이신 텔레포스께서 여러분을 페르가몬으로 부르십니다.”
그는 왕의 인장이 찍힌 진흙판을 내게 내민다.
역시나. 적들이 페르가몬으로 향하는 게 분명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우리는 꾸준히 주둔지를 옮겨다녔는데.”
“소문이지요. 트로이아 족속의 위대한 전사들이 움직이는데 소문이 뒤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데 고무되어 한 가지 사실을 신경 쓰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과 함께 행군을 시작하니, 그는 왕의 사절이자 전사로서 우리의 곁에서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제야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오른다.
‘···소문만으로 우리를 찾았다고? 어떻게?’
왕의 사절이 홀몸이었다는 사실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미시아 내부의 정치적 알력다툼은 이미 타노스와 함께 경험했으니까.
그러나 수백 명 단위의 군대를 이끄는 아카이아인들과 다르게, 시종 한 명 정도를 데리고 소문을 수집해 여기까지 왔다?
나는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그는 내 시선을 무시하는 듯 아닌 듯 싱긋 웃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점쟁이 엔노모스.
예언의 능력을 가졌으되, 결국 아킬레우스에게 죽는 자.
그가 눈을 감는다.
***
눈을 감으니,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눈꺼풀 안쪽의 어둠뿐이다.
그러나 엔노모스는 참을성있게 기다린다. 어둠이란 본래 빛이 있기 이전 세상만물의 집이었고 안식처가 아니었던가. 결코 두려워하거나 꺼려야 할 것이 아니니.
곧,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시야 위로 서서히 반짝이는 빛들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이를 현대의 생물학자들은 망막에서 자연생성된 빛인 생물광량자(Biophoton)라고 하지만 엔노모스는 그런 것 따위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빛들이 기묘하게 뭉치며 만들어내는 형상에 집중하고는···
마치 부대에 구멍을 뚫어 물이 콸콸 새어 나오게 하듯, 그 자신의 존재에 구멍을 뚫어 영혼이 새어나가게 한다.
엔노모스의 영혼은 이제 반쯤 육신으로부터 자유롭다. 지상과 물질의 모든 번잡에서 벗어난 그의 영혼은 곳 순수한 광채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다.
[아르시노스의 아들 엔노모스야.]부드럽고도 거룩한 목소리가 들려오니 그는 그쪽으로 영혼의 시선을 돌린다. 곧 번개로 이루어진 사람의 형상이 그보다 수억 배는 커다란 형상으로 다가온다.
그는 감히 눈을 마주치지 아니하고 무릎꿇는다.
배알한 엔노모스의 귀에, 천둥의 속삭임처럼, 스치는 구름처럼 깊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잘하였다. 내가 인도하는 바대로 트로이아의 왕자에게 닿았구나.내가 멧비둘기와 비명올빼미로 인도하였나니, 네 지혜가 나의 뜻을 읽어 이리도 빠르게 목적지에 닿았다.]
“크로노스의 아들이시여, 모두 당신의 인도하심 덕택이나이다. 저는 당신의 거룩한 의지를 지상에 펼치는 몸종이오니···.”
[아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너희 필멸자들은 너희의 의지로 말미암아 행하지 나의 인형이 아니다.]“저는 당신께옵서 트로이아를 승리로 인도하시는 줄로만 알았나이다. 감히 당신의 뜻을 미루어 짐작하는 교만을 용서하소서.”
위대한 하늘의 지배자는 그에게 속삭임을 이어간다.
[그럴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둘 모두일 수도 있겠지.]“···.”
[‘이해’하려 하지 말거라, 새점을 잘 치는 필멸자야. 다만 뜻에 따라 행하거라.]“뜻이란 무엇입니까.”
[곧 알게 될 것이다.]“···.”
[다만 모든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거라.]엔노모스는 제우스의 위대한 왕홀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 신성한 왕권의 상징이 엔노모스의 정수리에 살짝 닿았다 떨어진다.
[수많은 필멸자들의 목숨이 네게 달렸나니.]그리고 엔노모스는 눈을 뜬다.
옆을 돌아보니 파리스가 미심쩍은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는 잘생긴 왕자에게, 그저 조용히 웃어보일 뿐이다.
진군 (2)
군사 작전에서 ‘보급(補給)’이란 행위는 한 가지 전제를 필요로 한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
본래 있어서는 안 되는 대규모 인원이 부자연스럽게, 불가피하게 한 지역에 몰려 있다. 그것도 식량 생산 과정에 간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타 지역에서의 물자 이동이 필요하다.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면 지금 1,000여 명··· 아니지, 이제 900여 명쯤 되는 우리 병사들을 생각해보자.
900명 정도가 트로이아와 안탄드로스의 지배가 뻗치는 곳에서 징집되어 완전히 다른 땅으로 심어졌다. 이들이 이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열매를 따며 고기를 잡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별 수 있겠는가? 해적 놈들에게 약탈당하지 않도록 트리에레스가 호위하는 함대가 꾸준히 해안의 거점지를 통해 물자를 옮겨다 주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헌데, 발상을 바꿔보자.
만일 식량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 로마식 둔전제와 같이 현지에 주둔하는 병사들이 자기가 알아서 농사를 지어 식량을 생산한다면? 자기가 소비할 군량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면?
그렇다면 적어도 식량에 한해서는 보급의 필요가 사라진다.
여기서 아카이아인들은 한발짝 더 나아갔다.
‘보급? 그냥 뺏으면 되잖아?’
나라는 근대인은 안탄드로스라는 보급 중심으로부터 이곳 미시아까지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는 보급로를 생각했지만. 탈근대적인 사유를 실천하는 아카이아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본거지로부터의 보급이라는 중심적이고 위계적인 체계를 거부하였다. 그 대신 현지 조달을 위해 넓게 퍼졌다. 그때 아카이아인들에게는 모든 곳이 식량과 자원 조달의 중심이자 변방이 되었다.
그 얼마나 자유로운가! 탈-위계적이고, 탈-중심적이며, 탈-영토적이다. 이것이 바로 질 들뢰즈가 이야기한 유목적이고(Nomade), 리좀적인(Rhizomatique) 사유인 것이다.
···좆이나 까라지. 헛소리를 집어치우고 말하자면, 보급이고 뭐고 없이 산적처럼 넓게 퍼져 약탈하고 다닌다는 뜻이다. 그러니 산적떼가 그렇듯 본거지도 없고, 보급로도 없다.
당연히 한 곳에 대량의 군대를 집중시키기는 어려운 방식이다. 그냥 구름처럼 넓게 퍼져 현지인들에 대한 약탈로 군세를 유지한다는 건데···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각개격파당하기 딱 좋은 미친 짓이라 딱 잘라 말했을 거다.
그런데 영웅이 실재하는 세계에서는 무엇보다도 위협적인 전략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오합지졸만 모인 작은 무리일지라도 영웅이 1명만 붙으면 아주 위협적이니.
그 덕에 아주 피곤하게 됐다.
해안가에 자리한 타노스의 도시에서, 내륙의 페르가몬까지 향하려면 900명을 먹일 식량을 실어나를 보급로를 뚫어야 한다. 그래야 안탄드로스발 군량이 꾸준히 우리 입으로 들어올 테니.
근데 우리가 보급로를 뚫기 위해서는 저 구름처럼 퍼져 있는 아카이아인들을 때려잡아 길을 내고, 중간중간의 거점들을 제대로 안정시켜야 한다. 타노스의 도시에 그러했듯이.
“그러니 내륙으로 나아갈 때마다 전투가 벌어질 거다. 우리 입장에서는 아주 힘들 거야.”
헥토르의 말이 옳았다.
길을 뚫을 때 싸운다. 길을 뚫고 보급품을 옮길 때 다시 약탈꾼들과 싸운다. 거점을 장악할 때는 몰라도 거점에 보급품을 실어놓으면 또 다시 약탈꾼들과 싸운다.
싸움, 약탈, 싸움, 약탈, 싸움··· 맨손으로 모기떼와 싸우는 짓거리나 다름이 없다.
엔노모스가 도착한 뒤, 우리는 그 끔찍한 행군을 시작했고.
“멈춰라.”
곧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멈추셔야 합니다.”
“···뭐라 하셨소?”
“적들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좁은 길목, 귀가 밝은 헥토르나 아이네이아스도 느끼지 못한 기척을 엔노모스가 느꼈다고 주장하니 다들 미심쩍어 하면서도 멈춰선다.
그리고 곧.
-우르르르르르···.
더 이상 그의 말에 의심을 품는 이는 없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병력의 수는 많지 않다. 약 300명쯤.
그렇지만 더 눈에 들어오는 숫자는 일반 병사들을 놔두고 앞으로 걸어오는 장수들의 머릿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제기랄, 지휘관이 둘이나 된다.
지난 전투에서 적 영웅이 한 사람일 때 입었던 피해가 70명.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적 지휘관 중 체구가 큰 쪽이 걸어나와 자신의 이름을 외친다.
“나는 헤라클레스의 아들 틀레폴레모스다. 그대들은··· 묻지 않아도 되겠군.
말을 길들이는 파리스, 흑사자 헥토르, 창 던지는 아이네이아스.”
자신을 틀레폴레모스라 소개한 자는 화려한 자주빛 망토를 걸친 채 나와, 헥토르, 그리고 아이네이아스를 차례로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