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82
“그건 당연한 일이지.”
“그렇소. 그래서 당연하게 행하였소. 그 다음엔 그대와 그대의 도시가 바라는 보상을 말할 차례지.”
내가 견제구처럼 날리는 말에도 디오메데스는 별말 없이 수긍한다. 전장에서 보았던 포악한 디오메데스와는 꽤나 딴판이었다.
“망자의 가족들을 위로할 보물을 원한다면 드리겠소. 또한 그대와 안탄드로스의 명예를 회복할 보상도 원한다면 모두 바치지. 물론 죄인에 대한 처결도 그에게 맡길 것이고.”
“그의 처결은 이미 결정되었소. 그는 히오스로 갈 것이오.”
그 말에 덜덜 떨던 선장이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심지어 디오메데스의 눈도 살짝 커졌다.
“꽤나··· 단호한 조치로군. 잔혹하기도 하고.”
아니, 어째서.
왜 죽인다는 것보다 심한 반응인가.
나는 기침을 뱉으며 디오메데스에게 선언했다.
“아무튼 그대가 보상을 말했으니, 나는 내가 바라는··· 아니, 이 바다를 지배할 권한을 가지신 나의 아버지 왕중왕 프리아모스께서 바라시는 바를 말하겠소.”
이 문제로 트로이아에 가서 프리아모스, 헥토르, 안키세스와 며칠 머리를 꽁꽁 싸맸다.
거기서 나온 결론이었다.
“해적질 금지.”
그리고.
거짓말 같이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우리를 지켜보던 아르고스의 장로들이 떠들던 소리, 아르고스의 시민들이 우리를 구경하기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서로 밀치던 소리, 심지어 숨쉬는 소리나 바다새가 우는 소리까지도.
모두 멈춘다.
완전한 침묵이 도래한다.
···나는, 그러자 이 제안을 처음 꺼냈을 때 프리아모스와 헥토르와 안키세스가 보였던 반응을 떠올린다. 그들의 경악과 헛웃음과 현실 부정에 대해서.
정신을 차리고 디오메데스의 눈을 다시 마주보니 그의 동공에 미칠 듯한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
“어, 그, 어··· 어어···.”
마치 자동으로 여닫히는 일본의 택시문을 마주친 칠레인처럼 그는 입을 쩍 벌리다가 겨우 말을 짜낸다.
“···그게, 그, 가능한 거요?”
그 말에는 어떠한 비아냥도 없었다.
지금 그는 순전히 그 일의 가능 여부에 대해 묻고 있었다.
무슨 물고기에게 수영을 금지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해적 조례 (2)
“해···적질 금지? 그러니까 여기서 해적질이라는 것은···”
“트로이아의 왕중왕께서는 단호하게, 명확하게 선언하셨소. 이제 에게 해에서 대가를 치르지 않는 약탈과 납치와 노예 사냥은 모두 금지요. 트로이아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충성을 맹세한 이들끼리 약탈은 없어야 할 것이오.”
그리 말하면서 나는 그 ‘트로이아의 왕중왕’이 내 말을 듣고 뭐라 했었는지 떠올린다.
-“하, 하하하··· 농담이 재미나구나. 파리스. 네 많은 재주 중 하나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지. 크흠··· 진심이더냐?”
내가 진심이라고 했을 때 그가 지었던 표정도 떠올려본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제정신이냐 묻는 듯한 얼굴이었으리라.
디오메데스는 아무튼 내 말을 듣고 머릿속으로 그 행간의 의미를 잘 곱씹어보더니···
“···그럼, 에게 해 바깥에서는 된다는 소리군.”
가볍게 손뼉을 치면서 말한다.
“그야 그렇겠지. 우리 모두 위대한 프리아모스 왕의 백성이 된 것이니 서로가 서로의 물건을 도둑질할 수야 없는 법이지.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아마 납득할 것이오.”
그제야 디오메데스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짓는다. 그때까지 숨을 참고 있던 장로들도 하나둘씩 표정이 펴진다.
‘그렇지. 아카이아인들에게 해적질을 금지하다니 말도 안 되지. 허허허.’라는 분위기가 이 자리에 퍼져나간다.
그렇게 안심하는 그들에게 나 역시 웃으며 덧붙인다.
“단, 트로이아의 왕중왕이 전쟁을 선포한 상대에게만 가능하오.”
그 말에 다시 사위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무슨 말 한 마디로 수십 명의 표정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부조리극이나 공포 스릴러 영화 같다.
오직 디오메데스만이 내 말을 듣고도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프리아모스 왕께서 대계를 꿈꾸고 계신 모양이구려.”
나는 잠시 그의 말을 이해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자 그 역시 내 반응을 이해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다가, 서로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차게 식었다.
저 새끼, 지금 프리아모스가 온 사방에 전쟁을 걸고 다닐 거라 생각하는 건가? 내 친아버지를 무슨 전쟁광으로 만드는···
“···전쟁이 아니면 약탈을 금지하겠다고? 그게 진심이오!!”
디오메데스 역시 나만큼 당황하고 경악했는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주위를 돌아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그가 느끼는 공황 상태가 주위에 퍼져나간다. 신음소리에 비명소리마저 들린다.
“지, 진정하시오, 디오메데스. 아르고스의 왕으로서 체통을 지키시오.”
“어, 어, 어떻게 진정을 하게 생겼소? 그대가 방금 아카이아 전역의 왕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전역은 아니지. 네스토르가 다스리는 메세니아 땅은 비옥하니까 살아남을 테지.
나머지는··· 어··· 가만히 둔다면 망하겠지?
“진정하시오.”
“그, 다, 다른 방법이 있으리라 믿겠습니다! 현명한 프리아모스께서 아무런 까닭 없이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은 아닐 테니!!”
“자비를! 안탄드로스의 왕이여, 부디 이 도시에만은 자비를!!”
“모두, 진정들 하라 하였소.”
“···.”
“···.”
다시 귀신같이 조용해진다.
모두가 내게 추가 해명을 요구하는 듯하다. 나는 그래서 그들에게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프리아모스와, 헥토르와, 안키세스에게 그리했듯이.
“강도질과 약탈이 필요 없는 삶을··· 좀 살라는 말이오.”
***
바야흐로 내가 아카이아인들의 해적질 소식에 놀라 당장 프리아모스에게 이르러 갔을 때였다.
원래는 “쟤네가 나 때렸어요. 나도 쟤네 때려도 돼요?” 하고 허락이나 받으러 갈 셈이었는데, 배를 타고 프리아모스가 있는 트로이아 방향으로 가다 보니 머리가 식고 생각이 핑핑 돌아갔다.
그래서 내린 결론.
“아카이아인들에게서 해적질을 빼앗겠다고?”
“예.”
“다음에는 숨쉬지 말라고 할 생각인가?”
“···예?”
안키세스의 반응에 나는 놀랐고, 나의 반응에 안키세스 역시 살짝 놀란 듯 나를 보며 눈을 꿈뻑거렸다.
“잘생긴 얼굴로 뚫어져라 본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없다. 내가 아무리 그분의 연인이라 할지라도 외면의 아름다움 하나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는 않겠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내가 반역죄 입을 뻔했을 때 최선을 다해 덮어준 것 같은데.
얼굴 하나만 보고.
“···하지만, 네 말에 상당한 설득력은 갖추게 되겠지. 한번 말해보거라.”
역시.
나는 한결 같은 안키세스의 강직함에 대해 감사를 표하며 말을 꺼냈다.
“아카이아인들을 정착시킬 생각입니다.”
약탈.
해적질.
현대인으로서의 선입견을 빼고 바라보자. 어떤 자원을 어딘가(니 지갑)에서 다른 어딘가(내 지갑)로 옮긴다는 점에서 이는 유통업과 다름 없다.
고로 아카이아인들은 일종의 유통업에 종사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겠다. 어차피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통제되지 않는 상인이나 약탈자나 불안 요소라는 점에서 그게 그거다.
아무튼 아카이아는 자신들이 점거한 토지의 생산력에 더해, 이렇게 타 지역에서 ‘유통해온’ 생산력으로 각지의 도시국가들을 지탱하고 유지한다.
그렇기에 아카이아는 자체적 생산성에 비해 수준 높고 강력한 문명과 국가를 건설할 수 있던 것이다.
어쩌면 아카이아에만 이렇게 초인적인 영웅들이 가득한 이유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유통 산업’이 아카이아의 체제 유지에는 필수적이니까.
하지만.
“하투샤의 옛 땅들을 보십시오. 점점 추위에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나라까지 무너지니 이제는 안탄드로스로부터 곡식을 수입하지 않으면 도시들이 버티지 못합니다.
만일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아카이아인들의 밭이 점차 척박해지고, 약탈할 다른 땅조차 남지 않는다면 아카이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유통업은 생산하지 않는다.
토지에 붙박여 생산에 참여해야 할 인력들이, 빈약한 토지 때문에 각지를 떠돌면서 다른 곳의 생산물을 갈취하는 것으로 그 부족분을 메우고 있다.
하지만 그 ‘다른 곳’의 생산물 역시 고갈된다면?
만신창이가 된 하투샤의 옛 속국들에 아카이아 해적들이 찾아가던가? 결국 아카이아인들의 자유무역 경제는 가나안이나 아이깁토스 같은 다른 부유한 지역들이 받쳐주기에 유지되지 않는가?
만약 그런 지역들이 하나하나 황폐화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좀 더 작업이 쉽고 확실하게 잘 아는 동네로 향하겠지. 트로이아 빼고. 이미 두들겨 맞고 쫓겨나 본 경험이 있으니까.
아마 서로를 털기 시작할 테다.
“그러면 끝장입니다. 그 비극이 닥치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그렇다는 말은, 곧···”
“맞습니다, 아버지.”
나는 프리아모스를 보고 말했다.
“저는 저들의 땅을 개간할 겁니다.”
***
“칼을 녹여 쟁기로 만드시오. 그리하면 그대들은 더 굶주리지 않을 것이오.”
내 말에 “그럴 수 있다면 진작 그렇게 했겠지!” 같은 소리로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그야 그렇지. 누가 위험하게 나가서 해적질하고 싶겠나. 집 앞마당에서 밭갈고 말지.
아, 물론 이아손의 시끌벅적 모험단은 제외.
···생각해보니 아가멤논과 요절복통 친구들도 제외.
그리고··· 하, 시발.
답도 없는 아카이아 해적새끼들.
아무튼.
내가 무턱대고 가만 앉아서 죽으라고 하는 게 아니리라 생각하니, 저들 역시 가만히 있는 것 아니겠나.
오히려 나는 저들 사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대감을 발견했다.
에게 해에서의 해적질을 금지하면서 살길을 마련해준다면 무엇이 남았겠나? 바로···
“드디어 트로이아의 영도 아래 다 같이 모여 아이깁토스 대정복을···!”
아니라니까.
“그대들에게 새로운 농법을, 농기구를 주겠소.”
나는 헛소리를 꺼내는 장로의 말을 끊으며 빠르게 선언했다. 그러자 곧장 디오메데스로부터 질문이 날아오려 한다.
“그러면 혹시 농기구는···”
“당연히 철제 농기구는 주지 않을 것이오.”
내가 너네의 뭘 믿고. 2차대전 직후에 미국이 나치 독일에 핵무기 선물해주는 소리.
“···알겠소.”
디오메데스는 빠른 수긍과 함께 빠르게 실망했다. 그의 어깨가 축 늘어지자 나는 분위기가 죽지 않도록 다급히 말을 이었다.
“이제 아르고스에도 제분소가 들어설 것이고, 이는 스파르타나 아테네, 필로스, 프티아에서도 이루어질 것이오.
철제 농기구를 주지는 못하겠지만, 그 날만 돌로 이루어져 있을 뿐 형상과 구조는 모두 안탄드로스의 것과 같을 것이오.
먼저 청하는 이들에게는 가장 좋은 종자를 나눠주겠소. 크레타가 나의 지배 아래서 어떻게 풍요로워졌는지 모두가 알 것이오. 또한 폐허뿐이던 미시아가 벌써 곡물을 저 아시아에 내다팔고 있다는 것도 알 테고.”
모를 리가 없다. 이들은 어디를 털어야 하고 어디를 털면 안 될지 항상 분별하고 판단하는 이들이다.
심지어 이번 해적질도 들키는 위험과 털었을 때의 이득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나을지 치열하게 저울질해보고 나온 결과일 테지. 그런 이들이라면 에게 해 곳곳의 작황을 꿰고 있으리라.
“···허면, 아르고스가 우선이오?”
역시.
디오메데스는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다른 장로들 역시 이견을 제기하는 이 없이 빠르게 디오메데스의 의견에 침묵으로 동조한다.
그래서 나는 답해주었다.
“그대가 바란다면.”
그리고 내가 트로이아로 돌아온 뒤 얼마 안되어, 아카이아 전역에서 사신들이 빗발쳤다.
그 혼란과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그들의 요청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었다.
1.아니 갑자기 생계수단을 끊고 국가 주도의 지원사업을 강행하다니 이건 자유경제의 파괴이자 집산주의로의 예속이다!
2.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급격하게 진행하면 당장 우리는 뭐 파먹고 살라는 말이냐! 말미를 달라!
이런 이야기들은 전부 곁가지였다. 이미 결단은 내려졌고, 되돌릴 수 없다.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진지하게 되돌리려 했다면 트리에레스 함대에 맞서싸울 역량부터 갖추려 했겠지.
그렇게 서론을 죽 늘어놓은 사절들은 결국 하나같이 똑같은 결론을 내놓았다.
3.그래서··· 지원은 언제부터 가능한가?
프리아모스는 말했다.
“당장 가능하네.”
미시아와 카리아 곳곳에서 뿜어나와 힘겹게 아시아로 밀어내던 밀과 보리 물량이, 일제히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안탄드로스의 공방들이 바쁘게 움직였고 수많은 노동력이 아카이아 곳곳으로 건너가 수차와 풍차를 지었다.
이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리고 프리아모스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에게 해에서 밀과 보리의 무역은 금지한다.
카라보스(κάραβος)···카라벨선에 밀과 보리를 싣고 움직이지 않는 한에는 모두 금지한다.
이를 어길 시 그자를 반드시 죽이리라.”
***
“···괴물.”
나는 아노이토스의 말에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본다.
절대로 찔려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놀라서.
아무튼 아노이토스는 나를 반짝이는 눈으로 올려다보며 찬탄을 금치 못한다.
“주군께서는 실로 괴물 같은 상인이십니다!
주군보다 영악한 이를 찾으려면 저 타르타로스에서 죄받는 시시포스를 데려와야 할 것이고,
주군보다 현명한 이를 찾으려면 그 옛날 크레타의 다이달로스와 비견해야 할 것이여,
주군보다 부유한 이를 찾으려 해도 미다스 왕 이외에는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만하지.”
괜히 지금 와서 아노이토스의 용비어천가가 부끄러워지고 그런 건 아니고.
···아니, 시발 왜 하필 드는 예시가 그 셋이야?
하나는 신들에게 야바위치다가 끝도 없는 노역형에 처해졌다. 그 새끼는 프랑스의 어느 실존주의 철학자한테 언급된 게 인생 업적이다.
하나는 발명가랍시고 나대면서 자기 조카 죽이고 도망다니다 크레타의 속좁은 사이코패스와 역사상 최초의 퍼리 마니아를 주인으로 섬기며 갖은 고생을 다하고.
하나는 지 딸래미까지 황금으로 만들지를 않나, ‘음악’의 신 아폴론 앞에서 “너보다 내 친구 판이 연주 잘하는 듯.” 같은 눈치 밥 말아먹은 소리하다가 당나귀 귀가 되지 않나···.
드는 예시들이 하나 같이 개차반이다. 고의성을 빼놓고 보면 존속살해범만 둘이고, 시시포스 그놈은 지금 타르타로스에서 아직도 바위나 밀고 있잖아.
게다가 이제 나는 이 시대 사람들이 ‘위대한 상인’이라고 추켜세울 때가 언젠지 잘 알았다.
보통 사기를 기깔나게 잘 치거나, 뒤통수를 맛깔나게 후리거나, 이리저리 거나하게 약탈하고 다니거나 할 때 ‘이야, 저놈 진국이네.’ 같은 칭찬을 날린다.
이딴 게 진짜 문명인들의 사회가 맞나? 이딴 게 문명의 시조니까 나중에 유럽놈들이 전세계에서 해적질이나 하고 다닌 건가?
“어찌 그만하라 하십니까? 주군께서 프리아모스 님을 설득해주신 덕에 우리 안탄드로스가 에게 해에서 밀과 보리의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위대합니다, 주군!”
어쨌건 내가 그만하라 해서 그만두면 아노이토스가 아니다. 내가 스클레오스에게 눈짓하자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스클레오스가 아노이토스의 뒷덜미를 붙들어 데리고 나간다.
-쿵.
이제야 고요, 안식, 평화가 찾아온···
“근데 진짜 왜 그런 거야? 막, 아카이아인들이 말 안 들으면 곡물 지원을 끊어버리려고?”
아니네.
나는 억울함을 가득 담아 이노를 바라본다. 아니, 나같이 선량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그런 나쁜 제국주의자 같은 누명을 씌우다니.
“억울해!!”
그건 곡물 무역 통제를 추진한 이유의 약 13%밖에 차지하지 않는단 말이다!
이노가 나를 불신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니 마음이 다 아팠다.
“이게 다 모두를 위해서야. 만약에 아카이아의 나쁜 지주들이 백성들 먹을 곡식까지 팔아넘겨버리려고 하면 어떻게 해? 우리가 막아야지!”
“···진짜? 그런 이유?”
87% 정도는.
“물론이지.”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노는 나를 안아주었다. 그래서 나도 이노를 끌어안으면서 한참 생각에 잠긴다.
단순히 곡물 무역을 안탄드로스에서 독점하는 게 아니다.
아테네에서는 작황이 좋지 않을 때 곡물 무역을 국가가 독점하고, 사사로이 곡물을 팔거나 하는 이가 있으면 사형에 처했다. 2차 대전 때 미국을 제외하고 배급제를 실시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그와 똑같다.
가장 어려운 순간이 왔을 때, 식량의 유통은 우리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나는 그 생각에 잠기며, 이노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를 못했다.
“···나, 피곤해.”
“안 돼. 일찍 자지 마.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으니까 오늘은 늦게까지 나랑 춤추고 놀아줘야 돼.”
“···좋아.”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서로의 손을 붙잡은 채, 피곤한 눈을 비비며.
한기(寒氣)
남자는 언덕배기 몇 개를 오르다가 잠시 지쳐 어느 나무둥치에 기댔다. 뺨에서 턱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물통의 뚜껑을 열어 입 안에 털어넣고는 그대로 흙바닥에 누웠다.
그럴 만했다. 라피스 족의 항구도시에 이르렀을 때부터 이미 문명인들의 땅 끝자락에 가까웠다.
저 멀리 이름만 들어봤던 올림포스 산이 저 북쪽에 서서 구름에 감싸여 있었고,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참배객들이 줄지어 움직였다.
그 덕에 라피스인들의 영역에서는 조금이나마 문명이라는 것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내륙으로, 험준한 구릉지 사이로 발을 내딛자 그때부터는 점차 인적이 드물어진다.
움직임을 느끼며 뒤돌아보면 사람일 때보다 산짐승이나 요정, 사티로스일 때가 더 많아졌고 심지어는 영역을 침범당한 켄타우로스가 분노에 차서 화살을 날리는 일도 있었다.
길을 따라 움직이고 싶었지만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이라 길이 끊겼다. 먹을 것을 구하려면 산과 수풀의 열매, 개울의 물고기, 여러 짐승들에 의존해야 했다.
인근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마을에서는 점차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말씨가 너무 달라 손짓과 발짓을 섞어가며 이야기하지 않으면 소통이 어려웠다. 마을별로, 씨족별로 말이 달라졌다.
“···맙소사, 이곳에 정기적으로 상인이 오가는 게 맞기는 합니까? 왠지 불길하게 으쓸으쓸한 게 심상치 않습니다.”
수해(樹海)를 해치는 일이 꽤나 고되게 느껴졌는지 수하 몇몇이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아니, 단순한 투정은 아니었다.
그 역시 느꼈으니까.
어떤 서늘함.
단순히 기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